영화 <아메리카 언더독>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NFL의 전설적인 쿼터백 커트 워너의 성공담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실화라는 점이다. 커트 워너의 삶은 왜 현실이 픽션보다 흥미진진한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커트 워너는 듣보잡 대학교의 듣보잡 선수였고, NFL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했다. 결국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처지가 되었고, 여전히 NFL을 꿈꾸던 그에게 주어진 기회는 약식 실내 리그가 전부였다. 그랬던 커트 워너는 훗날 슈퍼볼 챔피언에 오르고, 정규리그 MVP와 포스트시즌 MVP를 동시에 거머쥐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슬램덩크>는 개연성과 현실감을 위해 북산을 16강에서 탈락시켰지만, <아메리칸 언더독>은 주인공 커트 워너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게 실제였으니까.
영화는 전체적으로 무난무난한 연출을 보여준다. 딱히 극적인 순간도 없고, <애니 기븐 선데이> 같은 명대사도 없다. 심지어 커트 워너가 대오각성하는 모습도 없다. 그의 가정사를 보건데 원체 선한 사람이고, 주변과 허물없이 지내는 성격으로 보인다. 성실하게 미래를 꿈꾸며 가정을 돌보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다.
물론 그런 커트 워너가 결정적인 실패를 겪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그 실패가 캐릭터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니까 커트 워너가 형편없는 쓰레기라 겪은 실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겪을 만한 실패로 보인다. 영화는 그 순간을 특별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그 순간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그때 느꼈던 감정을 과하지 않게 묘사하고는, 다음 시퀀스로 넘어간다.
이런 연출은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는 순간에도 이어진다. 슬슬 감정을 고조시키는 밑밥을 깔긴 하지만, 뛰어난 연출 기교를 보여주었던 흥행 작품들에 비하면 심심할 정도에 그친다. 예를 들면, 커트 워너가 주전 쿼터백이 되는 전개가 그렇다. 이유는 딱 하나, 기존 쿼터백이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악역과의 갈등이라든가, 인생의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라든가, 그런 거 없다.
나는 이 덤덤함이 좋다. 커트 워너를 평범하게 그린 연출을 극찬하고 싶다. 픽션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캐릭터는 몰입감과 흥미를 선사하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현실에서는 대부분 자신을 선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쩌다 보니 실패를 겪고, 주변을 실망시키고, 악행을 저질러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을 부르는 근간일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언더독>의 덤덤한 연출은 이러한 생각이 가진 위험성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또한 가장 위험한 실패를 돌아보는 기회도 제공한다. 실패에도 유형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실패는 '실패인 줄 모르는 실패'다.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실패를 겪지만, 그 실패를 차분히 복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는 때가 많다. 하지만 그 평범한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다음에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평범함이라는 위장막을 걷어내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아메리칸 언더독>은 평범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아메리칸 언더독>과 비슷한 느낌을 선사한 영화가 <8 마일>이었다. 버니 래빗이 힙합 경연에서 승리한 뒤, "다시 야근하러 가야 해."라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장면에서 느꼈던 뭉클함을 <아메리칸 언더독>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기회를 거머쥔다는 것은 극적인 순간에 화려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평범함 속에서 태도와 실력이 준비된 상태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화려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 그 느낌을 <8 마일>과 <아메리칸 언더독>이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이 '꿈보다 해몽'일 수도 있다. 솔직히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영화 특유의 가족애와 종교관까지 어필하면서 촌스러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럼에도 '기회의 평범함'을 제대로 포착했기에,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심심한 연출은 이 영화의 약점이 아니라, 커트 워너의 성공담에 담긴 핵심을 제대로 짚어낸 화룡점정이었다.
이탈리아 시라쿠사에는 특이한 조각이 하나 있다고 한다. 뒷머리는 대머리이고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는 이상한 모습이다.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기회는 '기회의 얼굴'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래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설령 기회를 놓치더라도 그게 실패였음을 깨닫고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MC가 커트 워너에게 질문을 던지는 실제 장면이 나온다.
"커트 워너 씨, 중요한 질문부터 드리죠. 5년 전에는 아이오와에서 슈퍼마켓 선반을 채우다가, 이제는 슈퍼볼 챔피언이자 NFL과 슈퍼볼의 MVP가 되셨는데요. 그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이 성공할까? 능력있는 사람? 빽 있는 사람? 운 좋은 사람? 성공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저 의미를 알고 체득한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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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좌절했던 주인공이 가족의 도움과 굴하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에 나서고 결국 기회를 얻어 정상에 우뚝 서는, 참으로 뻔하고 뻔한 스토리이지만 역시나 이 영화가 가진 힘은 그 뻔한 스토리가 실화라는 점일 겁니다. 후반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경기 장면에서 영화화면과 당시 실제 중계화면을 교차로 보여주는 걸 보자니 감독이 "너무 정석적인 성공 스토리라 와닿지 않는다고? 근데 이게 진짜 현실인 걸 어쩌겠어. 난 일어났던 일 그대로 찍어서 보여줄 뿐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군요. 영화 자체는 특출난 점 없는 드라마지만 워낙 커트 워너의 선수인생이 극적이었던만큼 그 자체만으로 감동을 주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우승을 차지하며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를 완성한 커트 워너도 커트 워너지만 상대편이었던 테네시 타이탄스의 스토리도 영화로 만들어도 될만큼 극적이었던 슈퍼볼이었죠. 와일드 카드전 뮤직시티 미라클에 슈퍼볼 롱기스트 야드까지 NFL역사에 남은 명장면을 두 개나 만들어냈으니...
+ 커트 워너와 램스는 2년 후 다시 한 번 슈퍼볼에 진출하는데 그 때 그가 상대했던 쿼터백이 6라운드 199번에야 뽑혔다가 주전 선수의 부상으로 선발자리를 차지한,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언더독이었다는 점도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