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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05 12:58:42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6 (수정됨)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금의위는 뒤집어졌다. 금의위 전체가 동창의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 개처럼 뛰어다녔다. 닷새 뒤, 원동현은 정우신을 찾아갔다.

ㅡ 도독, 동창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정우신은 말이 없었다.
ㅡ 동창은 황상께 우리를 참소讒訴하려 역모를 날조...
ㅡ 우리가 아니야.
ㅡ 예?
ㅡ 동창이 노리는 건 우리가 아니라 군이라고.
ㅡ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ㅡ 말 그대로야.
ㅡ 우리 금의위는 금군에 속했...
ㅡ 동창이 노리는건 술 처먹다 불경스러운 소릴 한 병부상서와 도독 둘, 그리고 그 밑의 장수들이지, 자네와 내가 아니라고.
ㅡ !!!
ㅡ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ㅡ 도독!
ㅡ 됐어. 자네 뜻은 알겠지만, 이제 그만 나가봐.

나이들고 능력없는 상사가 젊고 뛰어난 부하를 고깝게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아끼는 경우도 있다. 원동현에게는 다행히도 정우신은 후자였다. 원동현도 외척에 총신인 상관의 비위를 긁을 바보는 아니었기에, 속으로는 무시했지만 어쨌든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고 둘의 관계는 좋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ㅡ 도독, 동창의 뜻대로 되면 군은 끝장입니다.
ㅡ 이미 황상의 뜻이 정해졌다고!
ㅡ 간신 전달이 황상의 성총을 흐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황상을 뵙고 주청드리셔야지요!
ㅡ 니가 뭘 안다고 떠들어! 황상께서 전달 손에 놀아나는 거 같아? 그리고 니가 군인이야? 너 습진 조련 몇번이나 해봤어? 군막에서 자본 적은 있냐? 흉배에 범 들어 있으면 다 무관인줄 알아? 무장들이 너를 같은 전우로 생각하는 지 알아?

지금 네 앞에 길은 딱 두가지야. 너를 동료로 보지도 않는 놈들과 함께 처형되거나, 나와 같이 살아남거나.
아, 네 그 잘난 기개 꺾지 않고 살 길을 알려줘? 장성으로 가. 장성을 지키는 장수는 무사할 거다. 가서 말 마시던 물 마시고, 말 옆에서 자면서 지내. 자다가 뭐가 뜨끈해서 눈 떠보면 말똥이라는 곳에서 십년만 굴러봐.

원동현은 북경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지방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북경을 뜬다는 것은 웬지 알고 지내던 모든 것을 떠나버리는 것 같아 두렵기만 했다. 하물며 퇴청할 때마다 아빠를 부르며 오는 아이들을 두고, 밥 한술 뜰 때마다 흙바람도 한입 들어간다는 장성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마누라와 떨어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자주 보던 기생들을 못 보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날 원동현은 밤새 술을 마시며, '그래, 내가 남아야 군을 재건하지. 동창이 새로운 군의 판을 짜는 건 막아야지. 동창을 견제할 건 우리밖에 없지'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며칠 전부터 백호절당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이 병부를 감시하는 것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가? 성질 급한 장수들은 당장 저놈들을 잡아들여 문초해야 한다고 끓어올랐지만, 중론衆論은 달랐다.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모르는 척하고 살펴보자.

그런데 갑자기 지방에서 각종 보고가 올라오지 않고 북경 안의 금의위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서, 백호절당은 얼어붙었다. 이제 감시자들은 몸을 감출 생각도 않는다. 병부상서는 다급하게 지시했다.

ㅡ 금의위 도독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해.

만남은 고사하고 지시를 받고 간 병부낭중도 돌아오지 않는다. 끝이 다가오는 걸 직감한 중군 도독 안병한은 그날 밤 열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아들을 업고 발을 구르자 3장의 담이 소리없이 물러났고, 다음 순간 스윽하더니 7장 밖 옆집 지붕이 품을 열었다. 당연히 그의 집도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모두 쓸만한 고수였지만, 그의 잠행술을 잡아챌 눈과 귀는 없었다.
아들을 업고 한참 경공을 펼친 안병한은 버려진 관제묘 옆에 섰다.

잠시 뒤 관제묘 안에서 늙은 거지가 호통을 쳤다.
ㅡ 아, 이놈들아. 내가 황구 하나 끌고 오라고 어제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까지 안 가져와!
그러자 거지들이 타구봉을 집어들고 우루루 몰려나왔다.

아들을 데리고 거지들 앞에 나선 안병한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을 건넸다.
ㅡ 안녕하시오. 중군 도독 안병한이라 하외다. 실례인 것은 잘 알고 있으나, 개방의 방주님을 뵙고자 염치불구하고 찾아왔소이다.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 뛰어나왔더니, 배첩도 없이 찾아와서는 대뜸 방주를 만나자고 한다? 좋게 말로 할 무림인은 없다. 타구봉들이 춤을 춰야 마땅한데, 어째 가만히 있다. 맨손도 아닌 거의 십여명의 개방도가 맨손으로 아이를 데리고 서있는 사나이의 기에 눌려 버린 것이다. 인상을 쓴 것도 아니고 칼을 뽑은 것도 아니다. 그저 정중하면서도 당당하게 서있을 뿐인데.
그러자 늙은 거지가 민망한 표정으로 나섰다. 개방의 좌호법 취영개로 개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하지만 방금 전 취영개가 먼저 기척을 느끼고 좌순단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안병한이 기세를 일으켜 취영개를 불러냈기에 체면이 깎였다. 그런데 나와보니 아이까지 데리고!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다. 방주를 지키는 좌순단이 아이까지 딸린 사람에게 그대로 뚫려버렸고, 싸울 엄두도 못낼 정도로 무공의 격차가 컸다. 취영개는 어찌되었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고, 그 수단은 힘이 아닌 대화가 될 수 밖에 없었다.

ㅡ 어인 일로 이 밤에 방주를 찾으시오, 선통先通도 없이?
안병한이 전음으로 한참을 설명하자, 취영개는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ㅡ 기다리시오.

조금 뒤, 개방의 방주 만월개는 안병한과 마주 앉았다. 안병한을 보고 있으니 기산심해氣山心海란 말이 떠올랐다. 산악과 같은 기세, 바다와 같이 깊어 흔들리지 않는 심기 - 무인이 가져야할 자세는 이런 것이겠지. 전 병부상서가 안병한을 '대명의 장검'이라 일컬었다더니, 과연 그럴만한 장부丈夫 아닌가. 처음 좌호법과 좌순단이 아이까지 딸린 사내에게 뚫린 것도 모자라 싸워볼 생각도 못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격분했지만,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방에 이 사람과 맞설 수 있는 고수가 있는가....개방은 고사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통털어도 이런 고수는 없었다.

ㅡ 말씀은 대강 들었소. 해서, 아드님을 본방에 맡기고 싶으신 것이오?
ㅡ 예, 그렇습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게 되었습니다.
ㅡ 허기사 역적의 아이를 숨기려면 개방만한 곳은 없겠지요.
만월개는 슬쩍 찔러보았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도독이지만 곧 역적이 될 사람 아닌가. 아무리 관이 무림을 건드리는 건 삼가한다고 해도, 역적의 아들을 맡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청탁을 하려다 약점을 찔리면, 발끈하거나 중언부언하거나 어색하게 웃으며 비굴해지기 마련. 그러나 안병한은 달랐다. 씁쓸하게 웃으며 솔직히 이해를 구하는데, 아쉬운 소리하면서도 궁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글서글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구걸로 먹고사는 만월개도 처음 겪는 일.

ㅡ 예, 어려운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소장이야 군문에 들어설 때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렸습니다만, 뜻밖에 집안의 대가 끊기게 된지라....

여기서 만월개는 이 사람을 시험해보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 때 안병한은 품안에서 비단으로 된 책 한권을 꺼냈다.
ㅡ 방주께서는 폐주시절 구파일방을 돌며 비무를 청하던 흑의복면인을 기억하십니까? 한밤중에만 나타났던.
ㅡ 그걸 도독께서 어찌 아시오?
ㅡ 그는 당시 금군 제일고수 후만 도독이었습니다. 성이 함락되기 전, 폐주와 함께 사라졌지요. 그 때 따르던 부하에게 이 비급을 남기고 갔습니다.

선황과 금상께서 군을 믿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지요. 후만과 같은 절대고수가 사라져 찾을 수 없는 것도 두려운데, 그의 사손이나 다름없는 소장과 같은 무리가 병부를 채우고 있으니....

아무튼 그를 기억하신다면 도영刀影이 달을 삼키는 무공을 아실 겁니다. 이게 그 일도탄월一刀呑月입니다. 초식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일도탄월의 묘리는 권장지각 창봉도검에 모두 쓰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장탄월도 되고 일봉탄월도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무공이나 화후가 깊어지면 다른 무기로도 펼칠 수 있긴 합니다만, 일도탄월은 그게 훨씬 쉽습니다. 군에서는 여러 병장기가 쓰일 수 밖에 없다는 걸 감안하고 만들었으니까요.
이게 동창 손에 들어가는 꼴은 볼 수 없고, 없애버릴 수도 없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팔불출입니다만, 제 아들은 무재가 뛰어납니다. 소장보다도 낫습니다. 소장도 나름 고수들을 많이 겪었습니다만, 이 놈만한 무재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고비만 넘기시면, 일도탄월과 이 녀석은 개방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만월개는 그제서야 안병한의 아들을 보았다. 안병한을 쏙 빼닮은. 순간 만월개의 뒷머리가 찌르르 하면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이건 범의 새끼다!
더도말고 십년이면 천하제일인을 넘볼 재목.
자다말고 아버지에게 이끌려 거지소굴로 온 아이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거나 겁에 질리기 마련. 부모와 하인들에 둘러싸여 가다가 길에서 거지 하나를 보고 놀라서 우는 아이가 숱하다. 그래서 죄 없이 얻어터진 거지가 한둘이던가?
하지만 이 아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뭐가 뭔지 몰라서 가만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거지굴에 데리고 오더니 버리고 간다는데도 낯빛이 그대로. 그 얘기를 하도 들어서 체념한 것도 아니다. 안병한도 오늘 아침에서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구파일방의 고수들을 모두 꺾은 후만의 무공과 천하제일인이라 봐도 좋을 안병한보다 뛰어날 기재 - 개방의 한을 씻어줄 아이가 왔구먼. 하늘이 내리는 것을 받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던가? 이 기회를 놓치면 죽어서 무슨 낯으로 사부와 사조님을 뵐 것인가. 오냐, 동창이든 천자든 날 죽이기 밖에 더 하겠나. 해보자. 거지떼가 어떤 독종인지 보여주마.


* 후만의 일도탄월은 휴머니어 대협의 일도탄월을 받아온 것입니다. 휴머니어 대협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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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15:3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오... 무협 뻘글 3에 이은 글인가요?

(추가)
아... 연작이군요?
6에서 1로 거꾸로 읽다보니 -_-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3/03/05 18:38
수정 아이콘
주인공이 셋이고 사건이 또 있다보니 좀 정신없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초식 이름 하나만...
휴머니어
23/03/05 16:11
수정 아이콘
헛 크크크크. 감사합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네요.
23/03/05 18:40
수정 아이콘
제가 고맙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달아오른 김에 후만은 천하 제일의 꽃미남에 강호 미녀 이십명이 들러붙는 걸로 하겠습니다.
23/03/05 17:30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23/03/05 18:41
수정 아이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초식 이름 하나만...
마신_이천상
23/03/05 20:13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리고 갑니다! 저도 예전에 여기에다 창작 글을 써본 적이 있는데 ... 필력이 참 대단하시네요! 저도 오늘 한번 새로운 글을 써봐야겠어요 ...
23/03/06 17:43
수정 아이콘
대단하다고 하시니 민망합니다.

마신님의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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