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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1/06 00:23:41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148
Subject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4)
-1995-1997 : 세계의 문 / 아가에게 / Hope / 해에게서 소년에게 / The Hero



N.EX.T의 세 번째 앨범을 통해 신해철은 또다시 도약을 시도한다. 그간 그의 노랫말이 자아를 형성하고 찾아가는 내적 과정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시야를 넓혀 세계와 자신간의 외적 관계성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이는 소년의 성장과정과도 결을 같이한다.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 소년은 마침내 세상으로 나와 타인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사회비판적 메시지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회 비판이란 곧 잘못된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반기를 드는 행위다. 그리고 소년은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를 구현하기를 원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사회비판은 본질적으로 소년다운 행위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빠른 변화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천태만상을 노래한 [Komerican Blues], 돈이면 뭐든지 가능한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Money], 동성동본 혼인 금지를 정면에서 비판한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등은 모두 이러한 부류의 노래들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를 다룬 [세계의 문]이다.



구멍가게 옆 복개천 공사장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뿌연 매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했었다
이제 타협과 길들여짐에 대한 약속을 통행세로 내고
나는 세계의 문을 지나왔다
그리고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의 저 편
내 유년의 끝 저 편에 남아 있다

-신해철, [세계의 문]



발전과 진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이 노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박한 감성에서 시작된다. 어렸던 시절 바라본 세상은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유년이 끝난 후, 직접 발을 디디고 선 어른의 세계는 그 옛날 소년시절에 막연히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었다. 이 세상은 느닷없이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는 끔찍하고 병든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른은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발전이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이 모든 것들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발전이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

-신해철, [세계의 문]



물론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어른의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한 발전이며 진보이다. 그곳에서 소년은 배제되어 있다. 세계의 문은 소년의 세상과 어른의 세상을 갈라놓았고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 어른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격려가 아닌 좌절과 체념이다.



네가 흘릴 눈물들은 지금의 눈물과는 다르겠지
세상의 어두운 그늘을 알게 된 후엔

-신해철, [아가에게]



하지만 그게 세상이야 누구도 원망하지 마
그래 그렇게 절망의 끝까지 아프도록 떨어져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큰소리로 외치면

-신해철, [Hope]



그러나 이것이 진정 신해철이 토로하고자 하는 진심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현실에 굴하는 대신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만화 속의 소년이기에 그는 노래한다. 세상의 어두운 그늘이 슬프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아프도록 절망하는 그 순간에조차, 언젠가 희망이 나타나리라고.

유치한 이야기다.
하지만 유치하니까 소년이다.



하지만 기억해 두렴
슬프고 두려워도 피할 수 없어
넌 싸워 이겨야만 해

-신해철, [아가에게]



흐릿하게 눈물 너머
이제서야 잡힐 듯 다가오는 희망을 느끼지
그 언젠가 먼 훗날에 반드시 넌 웃으며 말할 거야
지나간 일이라고

-신해철, [Hope]



이렇게 신해철이 제시하는 치기 어린 해답은 다음 앨범을 통해 극대화된다. <영혼기병 라젠카>, 소년의 로망을 모조리 끌어모은 집결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년 주인공이 거대 로봇을 타고 악당을 때려 부수면서 정의를 구현하는’ 애니메이션의 OST 역할을 겸한 N.EX.T의 네 번째 앨범에서 신해철은 자신의 의지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인다. 특히나 최남선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야말로 소년에게, 그리고 소년의 마음을 가진 어른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남들이 뭐래도 네가 믿는 것들을
포기하려 하거나 움츠러들지 마
힘이 들 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 해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
(...)
마음이 이끄는 곳
높은 곳으로 날아가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지금까지의 모든 노래들을 통해 신해철은 일관되게 소년의 마음을 버리지 말자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을 가진 어른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 끝에 도달한 도착점이 어디인지는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 N.EX.T의 해체를 알리는 동시에 지금까지 신해철의 노래들을 집대성하는 이 앨범을 통해, 그중에서도 의도적으로 마지막 트랙에 배치한 이 노래를 통해,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신해철의 노래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는 이 노래를 통해, 그는 마침내 자신의 도달점을 제시한다. 그 도달점은 너무나 소년다운 것이었다.

영웅.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을 마음에 갖고 있어
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어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내게 가르쳐준 모든 것을 가끔씩은 기억하려고 해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은 너 자신을 믿는 데서 시작하는 거야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완전히 바보 같은 일일 뿐이야
그대 현실 앞에 한없이 작아질 때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영웅을 만나요
무릎을 꿇느니 죽음을 택하던 그들
언제나 당신 마음 깊은 곳에 그 영웅들이 잠들어 있어요.

-신해철, [The H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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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1/11/06 00:32
수정 아이콘
음악성도 뛰어나지만 역시 가사로 말하는 가수였죠. 신해철은.

사실 부끄럽게도 넥스트 3집 이후의 음악은 저와는 멀어졌는데 그래도 솔로부터 3집까지 가사를 전부 외울정도였습니다.

진짜 다 외우고 있더군요. 얼마나 들었으면.
人在江湖身不由己
21/11/06 00:33
수정 아이콘
약속에 이은 헌신, 좋은 글 감사합니다. (꾸벅)
21/11/06 00:35
수정 아이콘
저 세계의 문 노래 자체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데 저 오프닝 나레이션은 정말 좋아합니다.
특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에서 읊조리다가 정말 세상이 바뀌는듯한 느낌으로 전주가 시작되죠.
21/11/06 01:06
수정 아이콘
자려다가 이 글 보고 hero를 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중인격자, 50년 후의 내 모습, 아주 가끔은, the ocean, 별의 시, 재즈카페, growing up, 도시인, 나에게 쓰는 편지까지 가버렸습니다.

잠은 다 잤습니다.
세인트루이스
21/11/06 05:56
수정 아이콘
글곰님 글 덕분에 신해철씨가 돌아가신후 나왔던 빨간 박스에 담겨있는 컴필레이션 씨디를 간만에 다시 꺼내네요.
헤비메탈은 영 취향이 아니여서 옥색씨디에 담긴 발라드 음악만 계속 듣게됩니다. 다시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좋네요.
21/11/06 06:4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부모님집에 있는 넥스트 4집을 찾아봐야겟네요
진짜 질리도록 들엇는데
21/11/06 08:57
수정 아이콘
이 시기의 신해철 음악 중에는 그의 개인 작업물이나 마찬가지인 '정글스토리' OST를 가장 좋아합니다.
스펙트럼도 다양하고 한곡 한곡의 완성도도 뛰어난, 비평과 대중 모두를 사로잡은 앨범.
비유없이 툭툭 던지는 가사들도 쉽고 또렷합니다.
닉언급금지
21/11/06 09:31
수정 아이콘
거짓말쟁이 신해철
'50년 후의 내 모습'을 부르는 70세의 신해철을 기대했는데...
21/11/07 11:45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넥스트 앨범중에 음악적으로 가장 완성도 있는 앨범은 4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해철 본인도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했고요
열혈둥이
21/11/07 14:25
수정 아이콘
4집이 해에게서소년에게 라젠카세이브어스로 유명하지만
이앨범의 최고 가치는 the hero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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