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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7/09 16:35:34
Name 알고보면괜찮은
Subject [일반]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입니다.  정확하게 몇 년도인지, 무슨 계절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모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 역 플랫폼에 막 발을 디디던 순간이었습니다.
교복을 입은 어느 한 여학생이 제게 와서 (정확하지 않지만)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오래 전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그 여학생의 얼굴을 봤을 때 다운 증후군 환자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같은 교복을 입은 다른 여학생 둘이 와서  '아니에요.  우리 얘 친구에요.'(역시 정학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여학생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곧 지하철이 들어왔습니다.

  이 모든 일이이 '어 어 어' 의 첫마디 '어'를 내뱉는 순간 순식간에 휙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그 일을 잊고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그 일이 떠오른 겁니다.   그리고 저는 괴로웠습니다.

  '어쩔 수 없었잖아.  갑자기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일인걸.  애들은 가 버렸고 지하철은 왔고.'
  '걔네들이 진짜 친구일 수 있잖아.'
  '설령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도와줬을 수도 있잖아.'
  이런 생각들을 떠올렸지만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때 제가 했어야 할 가장 나은 행동이 뭔지.
애들이 가든 말든 지하철이 오든 말든 그 뒤를 따라가봤어야 했습니다.  정말 친구들인지 아니면 괴롭히려는 애들인지.  정말 친구들이었으면 그냥 맘 놓고 제 갈길 가면 되는 거였고, 혹시 괴롭히는 애들이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를 도와주길 기다리기 보다는 내가 직접 나서든지 도움을 요청하는 게 더 확실하게 그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었겠죠.  
  그러지 않고서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는 건 그저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애는 어떻게 됐을까요.  자기는 배운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을 뿐인데 하필 상대가 멍청하고 비겁한 나라서 도움 받지 못하고 상처 받았을까요.  마음만 싱숭생숭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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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thrace
17/07/09 16:43
수정 아이콘
저도 제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철이 들었더라면 했던 순간들도 있었구요. 저도 많이 부끄러워지네요.
17/07/09 16:48
수정 아이콘
너무 안타까운 글이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침묵하는 다수도 모두 공범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정말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충달
17/07/09 16:54
수정 아이콘
그러므로 깨어있어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 13:35

이 구절이 생각나네요.
후마니무스
17/07/09 21:39
수정 아이콘
노예가 아니기에 조금은 다르지 않나 합니다. 노예는 깨어 있는게 맞지요.
마스터충달
17/07/09 21:53
수정 아이콘
항상 긴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급작스러운 일(집주인이 처들어 오는 것)이 벌어졌을 때 대처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쓴 말입니다;;;
노예라는 것에 집중하시면 곤란합니다;;
후마니무스
17/07/09 21:59
수정 아이콘
알겠습니다.

노예에 집중하지 않을게요.
미나가 최고다!
17/07/09 17:56
수정 아이콘
뭐든지 연습이 필요한것 같아요..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그 순간에 용기를 내는것도 일상에 매몰된 평범한 사람에겐 너무 어렵죠ㅠ
김성수
17/07/09 18:10
수정 아이콘
용기를 내지 못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던 순간과 반대로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매 맞은 순간은 평생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용기는 내지 못하지만 쉬이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들곤 하죠. 그래도 방향성만이라도 있다면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결국은 많은 부분 성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서는 것에 핑곗거리가 많은 세상에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글 감사드립니다.
윌로우
17/07/09 19:38
수정 아이콘
깨닫는 바가 있어요. 고맙습니다.
도로시-Mk2
17/07/09 18:28
수정 아이콘
반성 후의 행동이 중요하죠.

정말 달라진 행동으로 실천을 할지, 아니면 생각만으로만 열심히 반성하고 그땐 그랬지... 하고 끝날지

물론 그런 반성조차 안하는 쓰레기들이 태반이라는게 함정
제랄드
17/07/09 19:04
수정 아이콘
그래도 이런 글을 쓰셨다는 점에서 속된 말로 '쌩까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겁니다. 이 말로 위로가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정의감을 발휘하실 다음 기회가 있을 줄로 압니다. 잘 읽었습니다.
윌로우
17/07/09 19:37
수정 아이콘
그래요. 반성을 해야 동시에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는 거죠. 준비 안된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비슷했을거에요. 어 어 어
달콤한삼류인생
17/07/09 19:40
수정 아이콘
보통의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는 판단이나 대응이 느릴수 밖에 없죠. 너무 자책할 일은 아닌것 같고...
다만 이 글은 본 사람들은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길때 님이 말한것처럼 본능적으로 따라가볼것 같네요.
이런 생각들 하나 하나가 모여서 사회가 조금씩 개선되는 것이니 좋은 글이라고 봅니다.
17/07/09 20:05
수정 아이콘
알고보면괜찮은님은 알고 보면 괜찮은 분 같아요. 사실 그런 경우 망각이라는 도구로 잊고 사는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괴로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죄책감을 버리라고 말하진 못하지만, 이제 놓아 주실 때가 된것 같아요. 그리고 비슷한 일이 있을땐 그 전 보다 조금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 사실 어릴 때 부정적인 의미로 배웠던 속담이죠.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모습이 인간 세상을 발전 시킨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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