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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약주의]
"독일군은 기계와 같아. 그러나 기계는 고장날 수 있지."
-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Previously on Barbarossa...
비록 구데리안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지만, 키예프에 있던 소련군의 수는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 없이는 섬멸이 불가능한 양이었고, 더구나 이들은 충분히 모스크바로 진격할 기갑 부대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었기에 히틀러의 판단은 그 당위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스탈린의 무의미한 수준을 넘어 무책임할 정도의 후퇴불가 현지사수 명령이 떨어지면서 키예프와 그 인근에 집결하고 있던 무려 70만 대군은 8할이 그야말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버리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이는 역사상 기록된 최대의 포위 섬멸전이었으며, 독일군의 사상자 수도 12만 명으로 만만치 않았지만 소련군이 받은 피해는 사망자만 60만 명에, 아예 전선에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 뚫려버리는 수준의 대참사였습니다.
하리코프
사실 키예프 대혈투 이후의 남부 집단군의 움직임은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지도 한 장으로 때워버리는 식이죠. 실제로 키예프 전투 후 일 주일 후에 중부 집단군 관할 구역에서 첫 눈이 내렸고, 곧이어 눈이 녹으면서 그 유명한 라스푸티차(Rasputitsa, распу́тица)가 독일군의 길을 모조리 망쳐버리면서, 독일군은 당초 예상했던 것의 3배나 되는 연료를 소모해야 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116). 까놓고 이야기하면 이것도 독일군이 설렁설렁 전쟁을 준비했다는 증거 중 하나죠. 적의 지리를 조사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 중 기본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소련군의 방어선에 엄청난 구멍이 뚫린 건 사실이었고, 이 피해를 메꾸는 데에는 당연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독일군은, 비록 라스푸티차 때문에 진군이 엉망진창이기는 했어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을 최대한 밀어붙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하리코프(現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 Kharkiv, Харків)로의 진군이었던 것입니다.
전후에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과학과 공업 도시로 꼽혔던 하리코프는, 이미 전쟁 당시에도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의 요지였으며, 항공 물류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서쪽으로는 키예프, 동쪽으로는 돈바스 공업지대, 남쪽으로는 세바스토폴 항만, 북쪽으로는 쿠르스크와 모스크바로 이르는 각종 철도 교통이 Ж자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이 도시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 없었죠. 물론 소련도 되도록이면 필사적으로 공업장비를 다 뜯어서 우랄 산맥 너머의 마그니토고르스크(Magnitogorsk, Магнитогорск)로 옮기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더구나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은 키예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진군할 채비를 마쳤는데, 하리코프 방면에 있는 소련군들을 "적당히 정리해야"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제2기갑집단군의 후방이 덜 위험할 터였던지라, 남쪽의 전선을 적당히 밀어놓는 것도 필요했죠.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하리코프는 충분히 독일군이 눈독을 들일 만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남부 집단군 소속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제6군과 카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의 제17군이 소련군을 밀이붙이기 시작합니다. 같은 시기에 독일군의 주먹이라 할 만했던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군은 남쪽으로 재배치 중이었죠.
전투 자체는 (독소전쟁에서 회자되는 여러 전투들에 비하면) 별 거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서 전선군이 입은 대피해를 복구하려면 타 군에서 병력을 끌어와야 하는데, 문제는 나머지 군의 상황도 영 아니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죠. 특히나 스몰렌스크가 날아가면서 모스크바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려버린 상황에서 이런 곳에 예비대를 투입할 수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니 죽죽 뒤로 밀릴 수밖에요. 아무리 시가전이 까다롭다고는 해도, 아예 전선 자체가 간당간당한 상황인 소련군이 여기에 투입할 예비대 자체가 없었으니, 결국 하리코프고 뭐고 버텨낼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하리코프가 이토록 어이없게 독일군 손에 손쉽게 떨어집니다.
물론 히틀러 입장에서 좀 손을 봐 준 게 있긴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로스토프(Rostov, Росто́в, 러시아 북부에도 로스토프가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로스토프나도누 -
Росто́в-на-Дону́, 돈 강의 로스토프 - 라 부르기도 합니다)를 칠 계획이었던 제1기갑집단군의 측면을 제17군이 보호하는 역할이었는데, 이 병력의 일부를 빼돌려 가면서까지 하리코프를 점령하는 데 공을 좀 들였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요약한 게 이 한 장의 지도입니다.
출처
https://pamyat-naroda.ru/ops/oboronitelnaya-operatsiya-na-kharkovskom-i-sumskom-napravleniyakh/
아, 북쪽의 남부 집단군 소속 독일군 제2군은 보로네시(Voronesh, Воро́неж)로 진격하고자 했으나, 돌출부 같은 것 없이 적당히 쿠르스크까지 진격하고 북쪽 측면의 전선을 안정시키는 정도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로스토프
제6군과 제17군이 하리코프의 진군에 착수하던 바로 그 때, 언급했듯이 제1기갑집단군은 최남단에서 진군을 시작합니다.
하리코프야 지도로도 볼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따로 지도를 놓을 필요가 별로 없었지만, 여기는 좀 다르군요. 막 제1기갑집단군이 진군을 시작했을 무렵의 전황 지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 現 드니프로, Дніпро - 올해 5월에 아예 드니프로라고 공식적으로 도시의 이름을 줄여버렸더군요)에 주둔하고 있던 제1기갑집단군이 동쪽으로 치고 나가면서 돈바스 공업지대를 석권하고자 했죠. 물론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적을 포위 섬멸한 후에 밀어붙일 심산으로 지금까지 아주 잘 써먹어 왔던 기갑부대 찌르기 전술을 써먹어가면서 말입니다. 이 제1기갑집단군이 흑해 해안의 항만 공업 도시인 베르댠스크(Berdiansk, Бердя́нськ)를 접수하면서, 멜리토폴(Melitopol, Мелітополь)에 있던 소련군은 또다시 포위 섬멸이라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내친김에 베르댠스크 인근의 마리우폴(Mariupol, Маріу́поль)까지 점령해버리면서 진격 개시 보름 후에는 돈바스의 공업지대의 중심지인 도네츠크(Donetsk, Донецьк - 당시 이름은 스탈리노, Stalino, Сталино)와 문제의 로스토프를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왜 하필 로스토프였냐면 말이죠... 여기가 넘어가면 코카서스, 즉 캅카스 산맥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 캅카스 산맥이 때로는 해발고도 5천 m를 넘는 정신나간 고도로 유명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단 로스토프 자체가 이 일대 - 그러니까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및 조지아 - 와 철도로 연결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유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독일군의 노력에 로스토프는 꼭 필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예컨대 로스토프 남쪽으로 350 km 되는 지점에 마이코프(Maykov, Майкоп)의 유전지대가 있었고, 바쿠 유전까지는 거리가 심각하게 많이 멀지만(약 1,300 km) 이 아래쪽은 일단 접수하면 남쪽이 죄다 캅카스 산맥이었으니 자연 방어선을 치기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물론 심각한 망상이긴 합니다. 일단 당장 거리도 엄청나게 먼데 밑으로 내려간 병력을 보존해 가면서 유전을 별 피해 없이 접수해야 하고 그러면서 북쪽에서 들어올 수 있는 측면 공격도 받아내야 합니다(그래서 그런 위협을 박살내기 위해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벌어진 겁니다). 그러나 늘 이야기했습니다만 히틀러와 독일군의 장성들은 소련군을 "깔보고" 있었고,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거라 본 거죠.
하여간 이러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로스토프는 일단 점령하고 봐야 할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로스토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공업의 요충지이자 어떤 면에서는 하리코프보다 더 복잡한 - 도네츠크의 철도망은 하리코프 일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절머리날 정도로 복잡합니다 - 도네츠크를 접수해야 했던 것이죠. 전형적인 쐐기 돌파 후 진격이라는 방식으로 도네츠크도 약 20일 만에 독일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아래는 이 모든 전황을 한 번에 설명해 주는 전황 지도입니다. 그야말로 죽죽 밀렸음을 손쉽게 알 수 있죠.
출처
https://pamyat-naroda.ru/ops/donbasskaya-oboronitelnaya-operatsiya/
그런데 생각해 보면, 키예프에서 그렇게 박살을 내 놓고 의외로 남쪽 지역에서의 전과확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공세가 개시된 것은 10월의 일입니다). 키예프가 독일군 손에 떨어진 9월 19일부터 9월 29일까지 열흘의 시간이 있었는데, 아무리 세바스토폴에 일부 잔존병력이 있었다고 해도(그걸 처리하러 크림 반도로 진격한 게 독일군 제11군이었습니다) 주력군이 죄다 북쪽으로 몰려간 상황에서 힘 빠진 남쪽의 적을 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은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쪽의 측방을 맡았던 것이 루마니아군이었고, 앞선 글에서 지적했듯이 루마니아군은 약체였기 때문에 대치전만으로도 소모가 심각했던 것이었죠. 그래서 루마니아군의 재충전을 위해 공격이 약간 늦춰진 겁니다.
아무튼 돈바스 및 로스토프로 가는 항만 도시인 타간로그(Taganrog, Таганрог)가 독일군 수중에 떨어지면서 로스토프는 독일군의 공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아 그런데... 로스토프까지 점령하기에는 보급선 및 전선이 지나칠 정도로 늘어서 있었고, 결정적으로 하필 이 때 라스푸티차 크리티컬을 먹는 바람에 제1기갑집단군의 전투력이 급속하게 떨어졌다는 게 문제였죠. 보통 이걸 가리켜서, 공세한계점에 도달했다고 씁니다. 장기로 치면 장군만 부르다가 진이 빠져버린 케이스요, 권투로 치자면 계속되는 펀치를 날리다가 제풀에 지친 격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히틀러가 그런 것을 고려했을 리는 만무했고... 용케도 제1기갑집단군이 그런 악조건 속에서 소련군을 밀어붙이기는 하고 있었습니다만, 늘어지는 전선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는 그럴 때 쓰라고 제17군이 백업으로 있었던 건데 이걸 이미 하리코프에서 써먹어버리는 바람에...
출처
https://pamyat-naroda.ru/ops/rostovskoe-srazhenie-05-11-10-12-1941-a-oboronitelnye-boi-9a-severo-zapadnee-rostova/
남쪽의 회색 지역이 로스토프 시내입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시내로 진격할 사단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북쪽 방향으로 어느 정도는 소련군을 밀어내야 했죠. 그러면서 보름이 지난 11월 17일이 되자 자연스럽게 전선이 한계까지 늘어집니다. 이렇게요.
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의 지금까지의 지도는 죄다 독일군의 공세(파란색 화살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이번에는 외려 소련군의 반격이 개시된 겁니다. 로스토프에 일부 병력(SSLAH)이 공격을 개시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죠. 일 주일간의 격전 끝에 로스토프 시내로 제1기갑집단군의 일부가 진입하는 데 성공합니다만, 문제는 그 동안에 북쪽의 측방이 완전히 노출이 되어버린데다가 지나친 진격으로 지쳐 있던 제1기갑집단군이 이걸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11월 23일의 지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의 11월 17일자의 지도와 비교해 보시면, 독일군의 북쪽 전선이 엄청나게 주저앉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로스토프를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곧 허리가 끊어져서 섬멸당할 운명에 처해질 뿐이었고, 소련군도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나흘 후인 11월 27일에 로스토프 탈환을 위한 전면적인 반격에 돌입하면서, 결국 독일군은 기껏 점령했던 로스토프를 내주고 튀어나온 돌출부를 안으로 집어넣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12월 10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의 지도를 순차적으로 보여드리죠.
11월 27일.
11월 30일.
12월 10일.
이 결과로, 비록 소련군의 피해(3만 3천 명)가 독일군의 피해(약 2만 명 추산)보다 크기는 했지만 로스토프와 캅카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바르바로사 작전 내내 소련군은 털리기만 했다고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지난 우만 전투 이전의 로코소프스키의 제9기계화군단의 성공적인 반격에서 보듯이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게다가 이 로스토프 전투가 동 시기에 벌어진 모스크바 전투에 묻혀버려서 그렇지, 이 곳은 처음으로 소련군이 적이 지친 틈을 타 성공적인 반격을 가해서 적에게 일시 점령되었던 도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전투였습니다. 물론 히틀러가 길길이 날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죠. 원래는 현지사수 후퇴불가를 이미 이 때부터 외치고 있었는데, 방어가 용이한 강 쪽으로 물러야 한다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 자기 자리를 걸고 후퇴를 하는 바람에 히틀러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얄짤없이 폰 룬트슈테트는 12월 1일자로 해임됩니다. 해임 직후 히틀러가 후퇴 허가를 내리기는 했습니다만.
크림 반도 전역은 딱히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제11군이 세바스토폴만 남겨두고 슥슥 밀어붙인 정도에서 바르바로사 작전이 끝나버렸기 때문이죠. 독일군 제11군의 사령관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이 전선 시찰 비행기가 하필이면 적의 지뢰밭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폭사하면서 이 곳의 사령관으로 누군가가 와야 했는데, 그게 바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입니다. 부임하자마자 그는 과감한 백병전을 냅다 걸어버리면서 소련군 제51군을 밀어붙였고, 11월 1일에 크림 반도의 수도인 심페로폴(Simferopol, Симферополь)을 점령합니다. 보름 후에는 크림 반도의 동쪽 끝인 케르치(Kerch, Керчь)를 접수하면서 크림 반도의 소련군은 오직 세바스토폴만이 남은 상태였죠.
그런데 이 남은 세바스토폴 인근이 그야말로 천혜의 구릉지 요새라서, 독일군이 바로 공격하기는 어려운 상태였고, 그래서 1942년 청색 작전 당시에 구스타프 열차포니 도라니 뭐니 줄줄이 다 끌려나와서 냅다 포격을 갈겨댄 겁니다. 이건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의 일이라서 상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나중에 청색 작전을 연재할 일이 생기면 그 때나...
그리고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게, 아무리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의 제4항공단의 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호수가 널린데다가 목이 좁아터진 크림 반도로 군대를 밀어넣는다는 건 웬만큼 공격적인 발상이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런 상태에서는 보통의 경우는 병사들 목숨만 허공에 뿌리기 십상입니다. 그런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폰 만슈타인의 능력을 높이 살 만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은 6만 5천 명. 야전군 대 야전군 단위의 싸움이었던지라 스케일은 키예프보다는 덜하지만 포로가 이렇게 많이 잡힌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남부 집단군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이제 중부 집단군만 남았군요.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https://pamyat-naroda.ru/ops/ - 이 글에 쓰인 각종 전황 지도의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Battle_of_Kharkov - 제1차 하리코프 전투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Rostov_(1941) - 로스토프 공방전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Sevastopol_(1941–42) - 크림 전역 개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