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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7/09 00:33:35
Name 공룡
Subject [일반] 팬질과 덕후
  사람들은 팬질을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라고 대답한다.
  나에게는 덕후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다.
  팬질은 덕후와의 접점도 있다.
  덕후는 오타쿠(otaku, 御宅)에서 나온 말로,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언어로 사용이 되었고, 대중들이 칭하는 덕후의 이미지는 ‘안경 쓴 여드름 돼지’였다. 보통은 일본 애니를 보거나 피규어를 모으는 사람 정도로 한정 되었던 말이었지만, 최근에는 마니아, 그리고 그 마니아의 수준을 넘어 해당 분야의 전문가 수준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어가고 있다.

  나 역시 팬질이니 덕후니 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바뀌어가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나도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고 있었지만, 여전히 먼 나라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팬질이란 것을 하는 곳에 드나들며 이들을 몰래 엿보고 있다.
  식스틴, 그리고 프로듀스101을 보면서 피지알의 게시물을 접했고 그곳에 걸린 링크를 통해 아이오아이 멤버들의 갤러리 구경을 하게 되었다. 디시 초창기에 동물 관련 갤러리에 가끔 들렸을 정도였던 곳을 10여 년 만에 다시 가게 된 것이다.

  놀라웠다.
  가자마자 날 반긴 것은 디시콘이라고 하는 다양한 이모티콘이었다. 그들은 갤러리의 일원이었고, 해당하는 스타를 갤주라 부르며, 다양한 갤주의 사진과 영상을 이모티콘화하여 게시글에 올렸다. 쓰는 표현들, 이모티콘, 그리고 갤주 관련한 어마어마한 자료는 마치 나이트클럽에 처음 가봤을 때처럼 충격적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곳은, 피지알만 드나들던 나에게 신세계였다.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아 잠깐 보고 나왔지만, 점차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그곳에선 지금 이 시간에도 찍덕과 연예인덕과 음악덕 등이 어우러져 갤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또 재생산한다. 갤주를 위해 다른 스타들에게 ‘총공’이라는 것을 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그들도 보은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갤러리가 연합의 형태를 보이며 거대한 친목을 만들어나간다.

  젊었다. 나이가 많은 이들도 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생각이 젊었고 열정이 넘쳤다. 가끔 낯뜨거운 표현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열정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저런 식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또한 나의 젊은 시절에 저런 열정이 없었다는 것이 후회스러웠다.

  1. 그들은 갤주의 스케쥴을 공유하고 갤주가 참여하는 프로그램, CF 등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영상과 사진을 공유하며 즉석에서 이모티콘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2. 솜댕, 도댕, 술, 댕청 등,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를 단어들이 난무했다. 그들이 갤주와 그 동료들에게 붙인 애칭이었다. ‘빻았다’ 등의 좋지 않은 단어도 쓰였지만, 대부분의 애칭이 갤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들이었다.

  3. 갤주의 프로필은 물론이고 프로듀스에 나왔던 인물들에 대한 소식까지 달달 외우는 굇수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통계자료 역시 머리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듯하다.
  
  4. 갤주가 어떤 프로에서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도 이들의 관심사다. 희미한 사진만으로 해당 메이커와 가격을 알아내 게시한다. 마치 여덕들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입던 옷을 찾아내 완판을 시키는 것처럼, 갤주가 광고한 음식을 먹고, 갤주가 입는 메이커를 입으려는 이들도 있다.

  5. 그림을 그리거나 팬픽을 쓰거나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연재하면 사람들은 함께 공감하고 ‘개념글’이란 곳으로 보낸다.

  6. 갤주 관련 굿즈를 만들고, 그것을 대량 제작하여 공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굿즈를 여행 가면서 가지고 나가 기념촬영을 해서 올리기도 한다. 심지어 해외여행에도 가져가는 이들이 있다. 창피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7. 갤주와 관련한 관계자가 직접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들과의 돈독한 관계 유지가 다시 갤주에게 돌아가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8. 갤주에 대한 사랑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진다. 팬사인회를 비롯하여 갈 수 있는 행사는 참여하고 갈 때마다 사인을 받아 보관하고 사진을 찍어 공유한다. 서포트라는 이름으로 스탭들에게 간식이나 식사를 사주기도 한다. 또한 갤주에 대한 선물도 다양하게 준비하여 선물한다.


  대단하게 느껴졌고 부러웠다. 그리고 그 열정을 가지지 못했던 내 자신이 안타까워 젊은 날을 반추하며 후회하려 했다. 피지알에 처음 발을 디뎠던 2002년 초창기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물론 그 때도 30대 초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내가 그 때 뭘 했었지?

  1. 스타에 빠져 피지알에 가입했다. 프로게이머 전적과 랭킹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에 흠뻑 빠져들었다. 프로게이머의 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사진이나 리플레이를 공유하기도 했다.

  2. 황제, 귀족, 천재테란 등등 다른 이들이 보면 무슨 말인지도 모를 단어로 그들을 칭하며 즐거워했다. 가끔 나도벙, 디디알과 같은 단어도 쓰였지만, 대부분의 애칭이 프로게이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들이었다.

  3. 백 명이 넘는 프로게이머의 프로필은 물론이고 전적과 플레이한 게임들을 스샷 한 장만으로 유추하는 굇수들이 가득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 역시 그 많은 게이머들의 이름과, 애칭과, 대회 32강 16강 경기들을 모두 꿰고 있었다.

  4. 프로게이머가 어떤 마우스와 키보드를 쓰는지, 헤드폰은 뭐고 심지어 마우스패드는 뭘 쓰는지가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그 프로게이머들의 장비를 그대로 따라 하고 마우스 감도까지 똑같이 맞추는 이들도 많았다.

  5. 팬픽이나 시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괜찮게 연재하면 사람들은 추천 게시판으로 보냈다. 그리고 난 스무 개가 넘는 팬픽과 열 개가 넘는 창작유머를 피지알에 올렸었다.

  6. 선수들을 합성하여 멋진 배경화면을 만드는 분도 있었고 플래카드를 만들어 스튜디오에 찾아가 열심히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방송사에서 만든 마우스패드는 정말 인기였다. 그리고 난 직접 주문한 프린팅 티셔츠를 입고…….
https://pgr21.co.kr/pb/pb.php?id=free2&no=19573&divpage=11&sn=on&keyword=%EA%B3%B5%EB%A3%A1

  7. 선수들의 감독님, 그리고 방송사 스탭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선수들과의 오프 모임도 가졌다. 밤이면 채널을 만들어 감독님들이나 선수들과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다. 스탭들과 친해진 덕에 옵저버석에서 관전을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8. 게이머에 대한 애정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회사가 끝나자마자 양복 입은 그대로 스튜디오로 달려가 중계를 보고 그날 나온 선수들의 사인을 받았다. 중계진에게 음료수를 조공하기도 했고, 같이 간 김정민 선수 팬클럽들에게 음료수를 돌리기도 했다. 사인을 받기도 좋았다. 임요환 선수의 관리를 철저히 했던 주훈 감독님은 학생들의 사인요청을 거절하곤 했지만, 내가 요청한 것은 냉큼 받아주셨다. 양복을 입은 비슷한 연배 남자의 부탁…… 나중에 들은 말로는 온게임넷 스탭이나 감독님들 중에 양복과 다이어리(사인북)와 카메라를 든 내가 기자인 줄 안 분이 많았다고 한다.(어째 사인 요청을 잘 받아 주시더라니) 그렇게 모은 사인의 개수가 백 개를 넘어갔다.
선수에게 개인적인 선물을 하기도 했다. 구하기 힘든 마소구형, 트래커, 서페이스 패드 등 몇몇 선수에게 선물을 할 때마다 보람을 느꼈다.

  깨달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그 때 팬질을 했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게임 덕후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팬질을 했고 열정이 넘쳤다고 생각한다. 지금 단순히 당시 기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시 생각하니 내 젊은 날은 후회스럽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팬질을 하고 있는 이들도 그런 마음이겠지? 뭔가에 꽂혀 사랑하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홈페이지를 제작하기도 하고, 적금을 깨서 비싼 카메라로 무장하기도 하며, 평생 보지 않았을 무명 남돌의 뮤직비디오를 몇 번이나 시청하기도 한다.

  축구를 좋아했던 어느 축덕은 남들이 열 장 넘게 준비하는 자료보다 많은 정보를 몽땅 머리 속에 넣고 해설을 한다.
  식도락가였던 어느 음식덕은 직접 만들어보는 것을 넘어서 장사수완을 발휘, 프렌차이즈 대마왕이 되었다.
  그들을 보면 자신의 일을 할 때 행복해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던 팬질이 이어져 덕후가 되고 다시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정답이 따로 존재할 리는 없다.
  그런데 정답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분명히 덕후인 것 같다.




Ps : 늦은 저녁, 느닷없이 아재감성 폭발하여 글을 썼네요.
      편의상 반말체를 사용한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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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09 00:50
수정 아이콘
한 때 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그 시절은 여전히 기억속에 가득합니다.
덕후라고는 하지만 단지 그 분야가 각자 다 다를 뿐이었을 뿐이죠..
루카와
16/07/09 00:52
수정 아이콘
굉장히 공감가는 글이네요. 잘봤습니다. 저역시 가끔 그런생각할때가 있었드랬죠. 내 학창시절에도 스마트폰을 쓸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어렸다면 여아이돌에 좀더 쉽게 빠져들기도 했을테고 페북과 각종 sns를 마음껏 쓰는 풍족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 마이클 조던의 우승을(nhk에서), 박찬호의 경기를 볼수있었고(물론 한만두를 생중계로 ㅜ.ㅜ)
내인생의 전성기시절에 02년 월드컵 4강신화를 밤새즐겼고, 박지성의 맨유입단과 챔스우승을(물론 벤치행이었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인생 최고의, 다시없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게임인 스타로 몇년간 밤을 세보았으며
임요환이라는 황제의 매력에빠져 수도없는 날을 행복하게 지냈고, 4대본좌들 그리고 택뱅리쌍을 보며 끝없는 쾌락을 즐겼더랬죠
이거 너무 아재인증이려나요? 헐헐... 가끔 어리고 젊은친구들이 부럽긴하지만 되돌아보면
저역시도 가열찬 젊은날을 보낸거같아 후회스럽진 않습니다. 다들 힘내십시요~
현금이 왕이다
16/07/09 01:04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저는 하얀거탑 갤러리 활동이 처음이자 마지막 덕질이었죠. 본방사수는 기본이고 명인대학 노트와 수첩등을 구매하고 (명인대학 스탬프... 돈만 받고 튄 놈 찾습니다.). 불멸의 이순신 104부작을 다시 보고, 마지막회에선 폭풍 눈물을 흘리고 그랬더랬죠.그러다 불멸갤에서 달력을 또 구입하고 크.

저도 프듀 때문에 생전 처음 아이돌에 입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돌도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렇게 또 러블리너스가 됐죠.
러블리너스가 되니 데뷔 쇼케이스의 어굿나 무대가 그리 짠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심지어 캔디젤리러브도 아련하게 들릴지경입니다.

아이돌 팬질의 바탕엔 유사연애 감정이 들어간다던데, 이미 그럴 나이가 지나서 인지 그런 건 모르겠더라구요. 슬퍼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어쨌거나 덕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그게 어느 선까지 가야 하는 지, 머리가 자꾸 분석을 하려 들지만 그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피지알 회원이면 기본적으로 스덕 아닌가요? 흐흐
토다기
16/07/09 02:05
수정 아이콘
저는 제대로된 덕질을 겨울왕국 (이하 프로즌)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1년에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볼까 말까였는데 대관 포함해 프로즌만 30번 가까이 봤죠. 지금은 또 아이오아이이 빠져 얼른 월간유정 7월호를 받기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덕질을 하면서 느낀건 호감이 생겼을 때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느냐 (관련 커뮤니티에 가거나 관련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접하느냐)가 덕질에 빠져든 요소였습니다. 제가 겨울왕국을 보고 프갤에 가지 않았다면, 아는 형이 얘가 최유정이야 했을 때 윾갤에 가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죠.
앙토니 마샬
16/07/09 02:53
수정 아이콘
여기야 말로 PC방 폐인이라 지탄받던 사람들을 스포츠스타로 가슴에 품은 덕후의 공간이죠. 덕후들에 대해 가장 편견이 적어야하는 곳.
탐이푸르다
16/07/09 03:28
수정 아이콘
저도 지금 덕질하면서 영상 편집하는 취미도 생기고 SNS 운영 노하우도 어떻게 알게되고 참 열정하나로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 이네요 언급한 총공도 해보고요 크크 덕질 참 기묘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도 덕후처럼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학창시절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아무 고민없이 전공을 고르고 그쪽 길만 파는 중이니까요. 어느 순간 타협할지도 모르겠지만 될때까지 덕후처럼 살고싶네요.
Samothrace
16/07/09 03:38
수정 아이콘
로스트 6년 덕질과 함께 제 중고딩 시절을 바쳤더랬죠. 그래봤자 한 화 한 화 나오면 보고 커뮤니티에서 그걸로 떠들어대는 수준이었지만요
16/07/09 03:40
수정 아이콘
이야~공감 많이가서 추천했습니다.하하
박하선
16/07/09 04:51
수정 아이콘
많이 공감되네요..^^
저그의모든것
16/07/09 07:25
수정 아이콘
돌아보게 되네요.그시절 저도 행복했었네요.
러브레터
16/07/09 09:36
수정 아이콘
공감이 많이 되네요. 추천했습니다.
아마 행동으노 보인 제 최초의 덕질이 스타였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 빠진터라 지방의 압박에도 결승전 관람하러 처음 가보는 도시들도 다니고 했었죠.
서울의 코엑스도 이때 처음 갔었죠.
지금은 김연아 선수에 완전히 빠져서 처음으로 해외에도 가보고, 그것도 무려 유럽, 피켓팅이란 것도 해보고 하네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열정은 시들지 않았건만 현실이 따라주질 못해 예전과 같은 덕질은 힘드네요ㅠㅠ
하지만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또 불을 지필 무언가가 나타난다면 이 시들지않는 열정을 보일 순간이 있겠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카루스
16/07/09 14:09
수정 아이콘
98년 출시하자마자 원조 스타팬으로 덕질을 시작해서 다양한 게임을 전전하다가 현재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로 그 아이돌 멤버의 열렬한 아재팬입니다! 스타직관 이후로 오랜만에 JTN 회원제 콘서트를 가려고 할 정도니까요. 너무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읽으면서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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