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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09 19:29:30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데킬라, 숙취의 추억.

데킬라에 질색하는 동년배 친구들, 그러니까 삼십 대 중반의 친구들이 주변에 꽤 있다. 데킬라? 그 싸구려 술? 좋은 술 많은데 그걸 왜 마셔. 숙취도 지독하고. 다음 날 머리 아파 죽는다고.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이 칵테일에는 데킬라가 들어가는데요, 하면 질색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거 먹으면 머리아파요. 그래, 체감상 데킬라의 ‘객관적인’ 숙취는 제법 강한 편이다 하다. 하지만 ‘데킬라만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는 문제가 오롯이 데킬라만의 잘못인가?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눈을 감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양주라는 걸 배우기 시작한 어린 시절 말이다. 먼저 위스키를 처음 마셔 본 날을 떠올려보자. 당신의 기억은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 위스키는 복학생 선배와 연결된다. 대학 시절, 복학생 선배들이 위스키를 많이 사줬다. 한끼에 사천원쯤 하는 대학가의 싸구려 밥집에서 밥을 먹고, 어두컴컴한 술집에 간다. 선배가 한 병에 오륙 만원 하는 위스키를 시킨다. 과일안주라거나 육포 같은 게 나오고, 콜라나 우유 같은 게 나온다. 선배와 하하호호 떠들며 술을 마시다가 술자리는 적당히 끝이 난다. 칵테일? 좋아하던 애와 싸구려 칵테일 바에 가서 맛없는 칵테일을 시키고,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잔을 달그락거리던 어설픔이 아련하게 기억나는군.

그리고 데킬라를 떠올려보자. 돈은 없는데 소주를 마시기는 싫고, 그래도 취하기는 해야겠어. 폼은 잡고 싶고. 소주 한 병에 이천오백 원 하던 그 시절, 싸구려 데킬라는 한 잔에 천 몇 백 원쯤 했다. 저녁 한 끼를 굶으면 데킬라가 세잔이니 저녁 제끼고 술이나 먹자. 그렇게 샷을 때려먹거나 이삼만원짜리 데킬라 보틀을 시킨다. 안주로는 나초인지 하는 과자뿌시레기가 나오고 소금과 레몬과 커피가 좀 나오고. 자, 오늘은 일단 마시고 내일 생각하자. 자, 마셨으니까 10년 후면 우리 삶에서 아무 의미도 없게 될 꿈이라거나, 정의라거나, 예술이라거나 하는 것에 대하여 떠들어보도록 하자. 더 마시자고. 술 떨어졌냐? 더 시켜. 나는 그렇게 친구와 둘이서 데킬라 세 병을 마신 적이 있다. 그 날 안경도 지갑도 모자도 우정도 신발 한 짝도 잃어버렸으나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아마 다들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술을 주제로 하는 매거진의 기사를 인터넷으로 보고 있는 너도 그랬을 것이다. 안 그랬다고 뻥치지 마라.

문제는 데킬라가 아니다. 무슨 술이건 스트레이트로 쭉쭉 마시면 빨리 취하고 많이 취하고 다음날도 취한다. 문제는 데킬라가 아니다. 무슨 술이건 과자뿌시레기를 주워 먹으며 병째로 마시면 지독하게 취한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다. 데킬라는 무죄다. 우리가 유죄지. 우리가 유죄인가. 청춘이 유죄지.

요즘도 아주 가끔은 친구들과 데킬라를 마신다.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킬라를 한 병 시키고 나면, 추억의 장이 열린다. 아, 내가 스물 몇 살 때 데킬라 마시다가 자빠져서 깁스를 했다니까. 아직도 비 오면 다리가 시큰거려. 아, 내가 스물 몇 살 때 데킬라를 마시다가 저 놈이랑 사귀었다니까. 정신 차리고 헤어졌으니 망정이지. 대체로 이런 불쾌한 추억들이다. 추억은 그 시절 중요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헤어진 첫사랑이라거나 그 시절 꾸었던 꿈들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하여 우울해진 우리는 또다시 스무 살처럼 안주도 없이 데킬라를 쑤셔 넣고는 다음 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역시 데킬라는 숙취가 심해. 다시 한 번 데킬라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우리가 유죄다.

당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저런 술을 싫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와인의 숙취가 너무 심하다고 자주 말하는 친구를 안다. 언젠가 그 친구와 와인을 마셨는데, 주량이 소주 반병인 그 친구는 혼자 와인을 한 병 넘게 마셔댔다. 와인 한 병에 들어있는 알코올 양이 소주 한 병이랑 비슷한데 당연히 다음날 좋을 수가 있나. 막걸리는 배부른데 숙취까지 심하다는 다른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는 막걸리집에 가면 젓가락도 들지 않은 채 막걸리만 벌컥벌컥 마셔댄다. 야, 배부른 데 뭐 하러 안주를 먹어. 그래, 분명히 와인과 막걸리는 제대로 잘 마신다고 해도 숙취가 심한 대표적인 술이다. 그리고 와인은 향에 비해 도수가 매우 강한 술이고, 막걸리는 배가 부른 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 마셔서 배를 채운 후에, 와인과 막걸리는 숙취가 심하네 어쩌네 하면서 술에게 잘못을 모두 전가하는 것은 아주 부당한 일이다. 술꾼의 자격이 없다.

개인적으로 화요41을 매우 좋아하는데, 마시는 것을 좀 주저하는 편이다. 화요를 마시면 항상 끝이 안 좋았다. 화요를 먹고 만취한 채 휘청대다가 가만히 서 있는 전봇대를 고정하는 와이어에 들이박아 안경을 깨먹고 얼굴에 채찍 자국이 난 적도 있다. 화요 잘못인가? 아주 약간 있다고 생각한다. 화요는 알코올 도수에 비해 맛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혀가 느끼는 취기와 실제의 취기가 많이 다르다. 술에 뇌가 맛이 가고 있는 동안 혀는 ‘아직 알코올 맛을 충분히 못 느꼈다고. 더 마셔도 안전해’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내 멍청한 뇌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혀를 믿는 편이다. 그렇게 마구 마시고, 취한다. 화요 잘못인가? 아니, 내 잘못이다. 술에게 잘못을 전가하지 말고, 제대로 마시도록 하자.



---

마시자매거진, 이라는 주류 매거진에 쓴 글입니다.

http://mashija.com/%EB%8D%B0%ED%82%AC%EB%9D%BC-%EC%88%99%EC%B7%A8%EC%9D%98-%EC%B6%94%EC%9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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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터모건
16/06/09 19:43
수정 아이콘
제 평소생각도 그렇습니다. 술은 죄가 없습니다. 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은 술꾼의 자격이없어요. 오늘새벽 두시까지 먹고 세시간 자고일어나서 390키로떨어진 곳에 출장와서 일보고 삼겹살에 소주를 마실 준비하고 있어서 이런 뻘 댓글남기는거 아닙니다. 오늘도 (자칭) 소맥리에 실력을 뽐내다보면 "자네가 타준 '소맥'때문에 머리가 아프다"소리를 또 듣게 되겠죠... 하지만 소맥은 죄가 없습니다. 소맥 제조 실력이 뛰어난 제게 약간, 잘 넘어간다고 막 들이키는 고객이 유죄지요...그나저나..우리 고객님 왜 안오시나...
WAAAGH!!
16/06/09 19:58
수정 아이콘
모건님 소맥의 유혹에 넘어가실 고객의 대뇌피질에 애도를 표합니다.
16/06/09 23:03
수정 아이콘
EEEEE!! 술은 죄가 없어요. 쭉쭉 들어간다고 마구 마셔대는 너네가 잘못한거라구!!!
켈로그김
16/06/09 20:02
수정 아이콘
가끔, 아니 자주 숙취애 시달리는 것을 기꺼이 감내하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지금도 물론 숙취따위 겁나지 않지만,
호랑이같은 아내와 렙터같은 아이의 감시체계를 뚫기가 넘나 힘든것..
GreeNSmufF
16/06/09 20:22
수정 아이콘
이 글 보니 제 대학교때 생각 많이나네요. 저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거기서 가장많이 마신술이 짐빔이라는 싸구려 버번이었습니다. 넘길때 불꾸덩이 넘기는 느낌이 나는 지금 생각하면 진짜 후진 술이었지만 소주가 워낙 비싸서 한병에 15불하는 그 술하고 안주라고는 도리토스 칩으로 밤새 선배집에서 이성이야기 ,학교이야기, 군대이야기, 동물이야기등등 했던 기억나네요. 어쩌다가 여자사람을 누군가가 데려와도 그 술한잔마시고 질려가지고 집으로 다 가버리고 결국 끝까지 남는건 항상 같은 얼굴들뿐 크크크. 그러다 엄청취해서 싸우기도하고 울기도하고 변기잡고 토하다가 잠들기도 하고 그담날은 여지없이 머리 아파서 하루종일 숙취에 쩔어있고..지금생각해보면 왜그랬나 싶네요. 지금은 그술 쳐다도 안보지만 마트갔을때 우연히라도 보면 종종 그때 생각떠올립니다.
16/06/09 21:52
수정 아이콘
짐빔 화이트라벨은 미국에서도 걸인의 술이라고 무시 당하는 경향이 있다죠 크크
최종병기캐리어
16/06/09 20:27
수정 아이콘
비슷한 예로 매화수가 그렇네요. 달달하다보니 많이마시게되고 다음날 더 괴롭죠...

그리고 도수높은 칵테일도...?!
16/06/09 20:50
수정 아이콘
주류갤러리에서 보고 또 봐도 부러운 필력입니다...
저도 화요 사랑해요. 처음, 그리고 자주 같이 마시던 바람핀 전 여친이 생각나서 씁쓸하긴 한데, 좋은 안주거리더라구요. 친구들과 화요를 같이 마시면 곧 그걸 안주삼아 병수가 늘어나고 전 만취합니다. 이 경우엔 술 잘못도 조금은 있는 것 같아요. 담솔로 갈아탈까봐요.
ZolaChobo
16/06/09 20:59
수정 아이콘
데킬라는 싸고, 주로 맥주와 함께 하다보니 더욱 취할 수밖에요. 5천원에 데킬라 한 샷 + 500 한 잔이라면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죠. 술이나 마시러 나가야겠습니다.
쇼미더머니
16/06/09 21:04
수정 아이콘
아마도 다들 비슷한.. 추억이 있을 겁니다. 데킬라. 개 만드는 술이죠. 예거밤 유행하기 전에 사이다 섞어서 달렸던 기억도 나네요. 데킬라는 안 먹는 술로 정했다가 패트론 먹고는 놀라긴 했습니다. 더럽게 맛있던데. 화요는 25만 먹어봤는데 쌉싸름한게 괜찮더군요. 전 막걸리도 송명섭 좋아하거든요.
대복아빠
16/06/09 21:29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글을 읽으면 좋아했던 고 장승욱선생님글이 떠올라요. 술을 좋아하시는것과 필력까지 .. 매번 좋은글 잘 읽고 있습니다.
16/06/09 23:04
수정 아이콘
패트론 짱짱낄라
종이사진
16/06/10 08:13
수정 아이콘
패트론 짱짱!
땅과자유
16/06/10 00:46
수정 아이콘
그리 마시던 데킬라가 돈 홀리오 한잔 하게되면 생각이 달라지죠. 가끔 마시면 좋습니다.
그것보다 데깔라를 마실때 연인의 손등에 레몬과 소금을 뿌려 마시는 이야기가 왜 생겨났는지를 들으면 데낄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 같기도 해요.
종이사진
16/06/10 08:15
수정 아이콘
화요41이나 일품안동소주, 오크젠같은 술들은 도수에 비해 부드럽고 숙취도 덜하더군요.
단, 섞어먹지 말아야....;

신입생(새내기?) 때는 소주 한잔이 주량이었고,
20대에는 데킬라를 몰랐으며,
담배를 끊고 나서는 니코틴 대신 알콜을 섭취하고 살았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글 잘봤습니다.
bemanner
16/06/14 15:58
수정 아이콘
酒不醉人, 人自醉. 色不迷人, 人自迷.
명심보감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공부하다 떠올라서 들렀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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