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9/22 22:39:01
Name Broccoli
Subject [일반] [1][우왕] 친구잖아요.
하나. 이야기는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한 친구로부터 시작합니다.
보통 키에, 옷 때문인지는 몰라도 더 밝게 빛나 보이는 미소를 갖고 있는 친구죠.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각자 2학년 4반, 5학년 1반, 또는 6학년 3반으로 들어갈 때, 이 친구는 다른 교실로 들어갑니다.
흔히들 말하는 '모자란' 친구거든요.

둘. 물론 이 친구도 자기 학년, 자기 반이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놀려는 친구들은 한 손에 꼽을까 합니다.
뻔한 이유 때문이지요. 같이 놀기 힘들고, 꾀죄죄해 보이고, 기타 등등.
그러다 보니까 교실에 있다가도 어느새 보면 사라져 있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셋. 그 날은 반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마니또' 발표의 날이었습니다.
(혹시 해서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정해진 기간 동안 익명으로 편지도 써주고, 선물도 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밀천사'라고도 했었는데, 그게 그 뜻을 정확히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반 학생들, 그리고 담임선생님까지 모두가 빙 둘러앉아 자기가 마니또로써 한 일을 얘기하고, 선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 옆에 앉아있던 이 친구가 갑자기 자기 의자를 맞은편 학생에게 집어 던졌습니다.
모두가 놀란 상황에서, 이유를 묻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끝까지 외면한 이 친구에게, 선생님은 강경한 방법을 쓰고 마셨습니다.

넷. 선생님은 학년이 시작할 때, 학생들과 한 가지 약속을 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대화로 상황을 해결하겠다고요.
그런 약속을 어긴 것을 사과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은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시 한 번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 친구가 입을 떼는 순간, 교실의 모든 사람들은 오랫동안 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 자기를 대하던 친구들의 태도, 그것을 통해 느꼈던 서운함을, 마치 녹화했던 비디오를 다시 돌리듯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거든요.
그 장면 중에는, 맞은편을 보자 되살아났던, 학년 초에 자신에게 좋지 않은 말을 했던 그 기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섯. 그 긴 기억의 되풀이 끝에, 한 마디가 덧붙여졌습니다.
"그런데 쟤는 나랑 같이 놀아줘요."
지목을 받은 이 새로운 친구는, 반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친구였습니다.
특징이라면 키가 작다는 것뿐, 어쩌면 이번이 반에서 처음으로 화제에 오른 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하고 싶어하지 않는 친구와 어떻게 같이 놀게 되었는지, 선생님은 물어보았고, 갑작스럽게 수많은 시선을 받은 새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그냥요. 친구잖아요."

여섯. 그 날 이후, 많이는 아니지만 약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은 조금 더 세심하게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반 친구들 모두에게는 '우리 반 친구'라는 마음이 조금 더 들었으며,
그 날 모임의 두 주인공은 선생님께 작은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두 친구는 왜 받는지 모르는 채로요.


그리고 남은 이야기.
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로 진학한 동창들이 전해주던 소식도 뜸해지게 되면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듣는 것은 어려워졌습니다.
집에 찾아가 보니 사람이 안 산지 꽤 된 것 같다는, 어디론가 이사를 간듯하다는 내용이 전해지는 마지막 소식이었습니다.

'친구'라는 말에 대해 나름의 개념을 지니고 있던 다른 친구는, 그 때의 담임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고, 운좋게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나름의 기준이, 분류가 생기고, 그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누가 더 이익이 될지, 누가 날 도와줄지 하면서요.
길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면, 서로는 서로를 그때처럼 대할 수 있을까요.

====================================================================================
여태껏 쓴 글이라고는 기사 전달 정도였는데, 막상 이렇게 써보니 좋은 글들을 꾸준히 써주신 그동안의 수많은 분들이 더욱 더 존경스럽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추천] 댓글을 달아주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09/22 22:48
수정 아이콘
저도 어렸을 때 약간 모자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당시에는 저도 나름 순수했는지 짝을 자원해서 한동안 같이 놀아준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날 집에 가는데 그 아이 어머니께서 길에서 잠깐 서보라고 하시더니 작은 선물 꾸러미를 주시더군요.

우리 입장에서는 별 대단치도 않은 호의가 상대방쪽에서는 굉장히 고마울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되고 나서는 제 코가 석 자라서 이젠 그런 여유를 못 내지만요.
티란데
15/09/22 22:52
수정 아이콘
[추천] 그냥요. 피지알러잖아요.
와이어트
15/09/22 23:42
수정 아이콘
[추천] 그냥 좋네요. 마음 한켠이 훈훈해졌어요
동중산
15/09/23 01:24
수정 아이콘
[추천] 합니다. 그 때의 그 선생님처럼 요즘의 아이들에게도 조금씩의 변화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5/09/23 03:47
수정 아이콘
[추천] 지금 이유 갓지 않은 이유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친구할레옹~?
15/09/23 07:46
수정 아이콘
[추천]그냥 친구... 가 많이 그리운 요즘이네요
15/09/23 08:23
수정 아이콘
[추천] 훈훈한 글에는 추천이 제 맛이죠
뱃사공
15/09/23 13:24
수정 아이콘
[추천]그냥요. 외로워서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61118 [일반] 여자친구는 이제 생각조차 나질 않아!! [16] 실론티매니아5251 15/09/23 5251 10
61115 [일반] [TIP] 카카오톡 추석이벤트 베스킨라빈스 1+1 무료쿠폰 (종료) [25] 여자친구9382 15/09/23 9382 2
61114 [일반] [1][우왕] 아내의 건강 [25] 글곰5915 15/09/23 5915 41
61112 [일반]  규정작업 위원 추가 모집 [32] 항즐이3384 15/09/22 3384 0
61111 [일반] 임창정 컴백 기념으로 쓰는 알려지지 않은 곡들 [30] 교리교리4493 15/09/23 4493 0
61110 [일반] 혐오해봅시다. [15] 프뤼륑뤼륑6175 15/09/23 6175 5
61109 [일반] 미래전쟁의 양상을 바꿀 하이테크 무기 Top10 [7] 김치찌개6162 15/09/23 6162 0
61108 [일반] 노명절러가 멀리서 대강 보는 명절 문화 [59] 만트리안5856 15/09/23 5856 2
61107 [일반] [야구] 로저스 2군행 `그날`, 한화 덕아웃의 전말 [220] 톰가죽침대13415 15/09/23 13415 1
61106 [일반] 헬조선의 축복받은 아이들 [40] 秀峨7150 15/09/23 7150 3
61105 [일반] 임창정/이승환/소유x권정열/박진영x버나드박x박지민의 MV와 러블리즈의 티저가 공개되었습니다. [16] 효연광팬세우실4039 15/09/23 4039 0
61102 [일반] [1][우왕] 危路 [4] 시라노2933 15/09/23 2933 3
61101 [일반] 전 세계에서 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 Top10 [3] 김치찌개4156 15/09/23 4156 0
61100 [일반] 전 세계에서 사무실 임대료가 가장 비싼 지역 Top10 [5] 김치찌개4744 15/09/23 4744 0
61099 [일반] [1][우왕] 친구잖아요. [8] Broccoli3578 15/09/22 3578 6
61096 [일반] [1][우왕] 옛 추억 [5] 근린공원2349 15/09/22 2349 3
61095 [일반] [해축] 안토니 마샬 - 이친구 진퉁이네요. [62] KARA8595 15/09/22 8595 1
61094 [일반] [축구] 허정무 감독 논평 보니... 감독 칭찬은 일절 안하는군요-_-;; [52] 잘가라장동건8513 15/09/22 8513 0
61093 [일반] 마르크스의 통찰력: '공산당선언' [10] seoulstar5265 15/09/22 5265 7
61092 [일반] 힘들다고 우편물 700통 버린 집배원, 법원 "파면 적법" [68] 군디츠마라12398 15/09/22 12398 1
61091 [일반] [야구] 기아 5위싸움 빨간불 최영필 선수 시즌아웃 外 [49] 이홍기6948 15/09/22 6948 0
61090 [일반] I'm Wanted- Dead or Alive ... 본조비가 왔습니다. [17] V.serum3073 15/09/22 3073 0
61088 [일반] [취미] 피규어/건프라 쇼핑몰 '건담마트'의 위기 상황 관련 [11] The xian7556 15/09/22 755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