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4/03 03:25:59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새벽 두 시 반에 당신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안녕하세요. 새벽 두시 반입니다. 정확히는 새벽 두 시 사십 팔분입니다. 새벽 두 시 오십 일분에 나는 커피를 내릴 겁니다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봄비가 쏟아졌습니다. 덕분에 하늘이 꽤 맑을 것 같습니다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겠습니다. 하늘이 꽤 맑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제법 상쾌해지는 느낌입니다.

오늘 해야 할 잡다한 업무들을 막 끝낸 참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상쾌한 기분일 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어마어마한 일을 끝낸 건 아닙니다. 그냥 오늘까지 했어야 할 짜잘한 일들을 몇 개 끝냈을 뿐입니다. 지난 주 이 시간에도 비슷했겠지요. 지지난 주에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 아니구나. 지지난 주에는 컨디션이 영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일을 한 것 같지 않군요. 지난 달 이맘때에는 어땠을까.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어른의 삶이란 그렇잖아요. 물론 평일 새벽 세시쯤 깨어 있는 사람이 어른의 삶을 운운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저는 밤에 출근하고 아침에 자는 삶을 살다 보니.

한 오년 전 혹은 십년 전의 오늘같은 날이라면 왠지 친구에게 전화를 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야. 나와라. 봄인데. 술먹자. 그래. 어디서 볼까. 그리고 술을 마셨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십년 전 같았으면 해야 할 일들을 마친 시간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을 미뤄둔 채 한창 꽃나무 아래서 술을 마시고 있을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샘 콜? 이라고 패기롭게 선언하고 밤새 스타나 디아나 와우를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에게 '자니?' 하는 찌질한 문자를 보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지난 시즌의 야구를 복기하다가 혼자 감동받아 같은 팀 팬 친구에게 '야 그때 그 경기 진짜 굉장하지 않았냐'고 말을 보냈을 지도 모르겠구요. 혹은 저걸 다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 몇살은 그럴 수 있는 나이잖아요. 아니 정확히는, 내가 친구들이 스물 몇살일 때는 그럴 수 있는 시대였는지도 모르겠지만.

허나 어이쿠 이런 이제 그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네요. 올바른 종류의 감정도 어른스러운 감정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무턱대고 전화를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어요. 새벽에 전화질은 커녕, 평일 저녁에 친구 얼굴보는 것도 며칠 전에 연락을 해둬야 하네요. 뭐, 내가 남들 노는 시간에 일하고 남들 일하는 시간에 노는 바텐더 따위의 직업을 골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남들 일할 때 일하고 남들 놀 때 노는 친구들을 봐도 별 다를 것 같지는 않네요. 다들 바쁘니까 이제는.

언젠가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연예인이냐?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라는 말을 서로에게 더 이상 안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언젠가의 이전에는 어떤 녀석들만 연예인처럼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그 언젠가부터는 모두가 연예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랄까. 봄인데. 밤바람이 이리도 시원한데. 기분이 이리도 명랑한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책장의 책들을 만지작거리거나 술장의 위스키를 만지작거리는 게 전부네요. 물론 스물 몇살의 이런 시간에 만나는 친구놈의 허튼 소리보다는 책에 쓰인 말들이 더 위대하고, 스물 몇살의 이런 시간에 만나서 마실만한 소주보다는 술장 안의 위스키가 더 훌륭한 술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 그렇잖아요?

그래서 그냥 당신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안녕하세요. 이제는 새벽 세시 반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몇시에 내 말을 들어줄 지는 모르겠습니다. 새벽 출근길일지도 모르고, 점심을 먹고 남는 시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일 지도 모르겠구요. 아니면 이 글을 올리자 마자일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누군지 모를 당신이 잘 지내시길. 어차피 당신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니 뭐 어떻습니까. 선선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면서, 춥기도 하고 후덥지근하기도 한 봄입니다. 황사인지 미세먼지 때문에 대체로 하늘은 텁텁하지만, 오늘 우리 동네에는 비가 엄청나게 내린 덕에 상쾌합니다. 전국적 비였다니 당신이 사는 동네도 그렇기를 바랄께요. 아니면 뭐 할 수 없는 일이고. 어제 좋은 일이 있었기를. 나쁜 일이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힘들고 거칠고 팍팍하지만. 잠깐은 상쾌할 수 있기를. 그렇게 당신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봄이니까요.


-
술 한잔 따라두고, 봄이면 항상 듣는 노래 하나 붙이고 갈께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리듬파워근성
15/04/03 03:31
수정 아이콘
화창한 봄하늘을 기대했지만 이런 밤비도 나는 나쁘지 않아요.
잠이 안와서 음악틀고 잔업이나 하는데 누가 말을 걸길래 누구도 아닌 것처럼 응답해 봅니다.
내일 나는 틀림없이 하루종일 졸려 죽겠지만 지금은 그냥 지금이 좋네요.
15/04/03 03:33
수정 아이콘
여긴 낮입니다만 마찬가지로 어제까진 바람이 세차고 춥더니 오늘은 온도도 많이 올라가고 따뜻해졌네요.
내일은 금요일, Good Friday라서 쉬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일하다가 잠시 글을 읽고 갑니다.
재문의
15/04/03 04:13
수정 아이콘
저대신 목요일을 알차게 보내주세요

떠난보낸 목요일 밤이 아쉬운 새벽입니다
천마도사
15/04/03 03:35
수정 아이콘
감기로 며칠 째 고생중이라 코가 막혀 새벽에 자주 깹니다. 이 아름다운 글에 콧물을 묻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굳이 언급을 안하려 했지만 환절기 감기라는건 또 봄에 오는 것들 중 하나라서요. 헥스밤님이 봄을 선언하셨기에 이제 또 몇달 후면 모히또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하나 추가 된 것 같아 행복하네요 ^^

따뜻하게 말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문의
15/04/03 04:11
수정 아이콘
앵 모히또는 봄에만 먹나요?
천마도사
15/04/03 07:45
수정 아이콘
재문의님/ 봄에서 몇달 후면 여름이 오고, 바틸트에 라임과 등등등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비로소 대한민국 최고의 모히또를 먹을 수가 있거든요^^ 올해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재문의
15/04/03 03:45
수정 아이콘
이 분 퇴근하시면서 글쓰신가요?

어찌쓴겁니까? 영업안하세요?
헥스밤
15/04/03 03:46
수정 아이콘
히히, 오늘은 직원이 가게를 봐주고 저는 쉬는 날입니다.
재문의
15/04/03 04:10
수정 아이콘
야간 아니 심야 알바시급도 이젠 너끈하신거 보니 성황리에 잘 되고있는같네요 허허

바이럴 마케팅의 승리 입니까ㅜㅜ 아무쪼록 더많은 사람들을 주님곁으로 인도해서 이쁜(※)여자알바들이 가게 대신 돌바줄 수준때까지 번창하시길. 그날이 오면은 거리가 멀지만 자주 가겠습니다.
후따크
15/04/03 04:08
수정 아이콘
노래 좋네요. 잘 듣고 갑니다.
15/04/03 05:03
수정 아이콘
교대근무라 밤새 설비들이랑 놀고 있네요. 동년배 급여보다 많이 번다지만 오래 못살꺼같아요 ㅠ.ㅠ
회전목마
15/04/03 06:44
수정 아이콘
아침 출근길에 보네요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은 피곤하지만
내일 쉰다는 생각에 온 힘을 쏟아 일하고 올렵니다
지니쏠
15/04/03 07:45
수정 아이콘
오랜만의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Mrs.Krabappel
15/04/03 08:05
수정 아이콘
최근에 약간의 소동이 있으셨던데 여러모로 잘 추스리시리라 믿습니다
평화왕
15/04/03 08:22
수정 아이콘
안녕하세요. 노래감사합니다. 아침부터 기분좋아지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꼭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바다로
15/04/03 10:04
수정 아이콘
저는 요즘 이런 기분일때 씨네타운나인틴같은 팟케스트를 들으며 술한잔 한곤 하네요.
꼭 친구놈들이랑 술한잔 하면서 떠드는 분위기라서요 ^^
15/04/03 23:58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전언제쯤 이런 글을 쓸수있으려나
세이슌
15/04/04 21:39
수정 아이콘
말걸어줘서 고마워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7358 [일반] 주원장이 이성계에게 욕배틀을 신청하다 [31] 신불해34008 15/04/03 34008 21
57357 [일반] 피밍아웃. [14] 참새6695 15/04/03 6695 10
57356 [일반] [독후감] 한강, 『소년이 온다』: 내게 온 소년을 체감하며, 다시 문학을 생각해 보다. [4] 두괴즐13365 15/04/03 13365 2
57355 [일반] 탈 퀄컴을 달성해낸 갤럭시 S6 구성 및, 중국 명칭 공개 [19] Leeka10450 15/04/03 10450 1
57353 [일반] [바둑] 한국바둑의 원탑과 2인자의 계보 [52] 잊혀진꿈8137 15/04/03 8137 10
57352 [일반] [도전! 피춘문예] 벚꽃 아래 철길 너머 [36] 리듬파워근성7222 15/04/03 7222 43
57351 [일반] 임진왜란 당시 서양인이 기록한 부산성 전투 내용 [46] swordfish-72만세11072 15/04/03 11072 1
57350 [일반] 초콜렛 [24] 로각좁6230 15/04/03 6230 4
57349 [일반] 세월호 보상금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분노케 하는가) [55] 폭풍허세18944 15/04/03 18944 25
57348 [일반] 새벽 두 시 반에 당신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18] 헥스밤6895 15/04/03 6895 18
57347 [일반] 일본 거품 경제 붕괴 [50] Neo15453 15/04/03 15453 9
57345 [일반] 궂은 하루 [3] 이상 그 막연함2824 15/04/03 2824 9
57344 [일반]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네요. 전국의 기상 특파원들 나와주세요!! [34] 홈런볼5574 15/04/02 5574 3
57342 [일반] 사라지는 직업 : 병아리 감별사 [25] Dj KOZE28288 15/04/02 28288 1
57341 [일반] [농구] 기울어진경기장 모비스는강했고 동부는죄가없다. [23] 향냄새4551 15/04/02 4551 1
57340 [일반] 옛날 사람들이 힘이 더 세지않았을까? [187] 靑龍17292 15/04/02 17292 2
57339 [일반] 친일파 청산이 가능했을지 논의하고 싶습니다. [78] whoknows8021 15/04/02 8021 1
57338 [일반] 광화문에서 만난 당혹스러움. (세월호 관련) [65] 아무로나미에7193 15/04/02 7193 3
57337 [일반] 사실확인없이 방송하고 미안~ 하면 끝? [38] sierrabees12251 15/04/02 12251 2
57336 [일반] 짝사랑이 끝났습니다. [43] 서태지와 아이유7330 15/04/02 7330 4
57335 [일반] 그들의 승리는 새로운 시대는 부를까? [4] minyuhee3614 15/04/02 3614 1
57334 [일반] JTBC가 '이영돈PD가 간다'와 '에브리바디' 프로그램을 폐지하기로 하였습니다. [35] The xian7827 15/04/02 7827 5
57333 [일반] LG트윈스 개인적인 예상 ver.2015 [43] 미생5889 15/04/02 5889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