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아래 피지알에 어울리지 않는 글 하나를 보고 생각난 김에 올리는 글입니다.
얼마전까진 여친님이 계셨기에 자제하고 있던 글이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겠네요.
예전에 썼던 도서관 헌팅글 (
https://pgr21.co.kr/?b=8&n=43034) 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역시, 아니 훨씬 더 훈훈한 이야기 입니다.
역시나 때는 바야흐로 2011년 봄학기.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저는 갓 전역한 군필자 대부분이 그러하듯, 묘한 근자감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복학생이었습니다.
이불킥의 기억을 남긴 도서관 헌팅 흑역사를 뒤로하고 저는 몇몇 친구 및 후배들과 함께 학교 축제 무대에 서기 위한 밴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거창한 인디 밴드같은 건 아니고 학교에서 축제 기간동안 학교 곳곳에 무대를 여러개 설치하고 신청을 받아 한팀 당 30분 정도씩 공연 시간을 배정해 줍니다. 저는 보컬이랑 리듬기타를..)
중간고사 직후인지라 합주할 시간이 부족했던 차에, 다른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여성친구 N양이 자기들 공연에 오프닝으로 3~4곡 정도만 맡아주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고, 저희는 본 공연 리허설 삼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흔쾌히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오프닝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왔을 때, N양과 그 친구로 보이는 한 명이 다가와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공연 잘 봤다며 인사를 건냈습니다. 저는 그 날 저녁 다른 스케쥴이 있었던 터라 정작 N양과 친구들의 본공연은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고, 그 친구와도 그저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인 줄만 알았습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2학기가 시작되었고, 저는 여전히 근자감에 휩쌓여 그때껏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주변 사람들을 닥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N양이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하더군요. 예전에 오프닝 공연을 함께 봤던 그 친구가 사실은 자기보다 한 살이 많지만 친구처럼 지내는 S대 법대 다니는 언니인데, 그 날 공연에서 절 보고 귀엽다고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다면서요.
허허 밴드 하기 참 잘했구나. 다만 약속 같은걸 잡은 게 아니라 당장 그날 저녁! 신촌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더군요. 딱히 꾸미고 나오지도 못했고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라 백팩은 배불뚝이인 상태였지만 도서관 헌팅 이후 절대 설레발 치지 않기로 마음도 먹었고,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기에 별 부담 없이 셋이서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처음엔 그 누나도 수줍수줍하는 것 같더니 첫 만남부터 자신과 N양은 말을 놓고 있으니 저한테도 말을 놓으라고 하더군요. 피자헛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개해준 N양을 공통 소재로 이런 저런 재밌는 대화를 나누고, 까페로 옮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아쉽지만 중간고사 기간이었기 때문에 일찍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을 갖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의 중간고사 시간표는 월, 화에 4과목이 몰리고 토요일에 한 과목만 떨어져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화요일 두번 째 시험을 마치고 도서관 사물함에 책을 떨구고, '오늘은 쉬어야지'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N양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그 누나가 지금 우리 학교에 놀러와서 학관 까페에 있는데, 너 지금 학관 앞 지나가지 않았냐고, 잠깐 얼굴이나 보러 오라고 말입니다. N양은 자기는 못봤는데 이 누나가 창 밖으로 지나가는 너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펌프질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오늘은 어차피 공부 안 하기로 했으니 노래방이나 가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나름 밴드 보컬도 하고 있고, 노래에 자부심도 있는 편이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방에 가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누나도 예전에 밴드에서 보컬을 했었고 노래를 꽤나 매력적으로 부르더군요.
예기치 않은 우연한 만남과 의외의 매력. 썸이 시작되기에 딱 적당한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설필패를 되뇌이며 이번 만큼은 신중하게 신중하게를 외치고 있었지만 이미 이 때부터 저의 호구 역사는 정해진 길로 접어들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베레기였지만 누나는 피쳐폰이었고, 처음에는 문자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짧은 문자 안에 내용을 채우고, '크크'를 비집어 넣어가며 나누는 대화가 오랜만에 풋풋한 감정을 키우는 데에 일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S대 구경을 시켜달라는 구실로 토요일 시험 끝나고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고, 난생 처음 방문한, 가을 오후 한창 단풍이 물든 캠퍼스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 다음 주 수요일 오후 쯤 되었을 때, 누나에게서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식아! 나 이따 신촌 가면 같이 저녁 먹어줄거야?]
그렇게 또 둘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이 좀 요상한 형태이기는 했으나 소개팅으로 만난 사이. 일주일 남짓한 동안 만남만 벌써 세 번째, 그 중 두 번은 둘이서.
그맘때 쯤 누나도 스마트폰을 장만하게 되었고, 문자 때문에 분량에 제한이 있던 대화량은 물만난 고기, 공명을 만난 유비처럼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나:
[하트 쓰지마!크크]
누나:
[왜?]
나:
[나 애결이라 괜히 설렘설렘 한단말이야 크크]
누나:
[으익크크 설렘설렘이래♡ 너 짱귀엽다♡]
누나:
[으씨 나도 쓸거야 하트♡]
나:
[누나 말 놓으라더니 날 너무 동생처럼 대하는거 아니야?크크]
누나:
[왜? 싫어?]
나:
[동생은 남자는 아니잖아..]
누나:
[나는 우락부락한 오빠보다는 귀여운 동생이 좋은데?♡]
불면증이 있다는 누나 때문에(덕분에?) 매일 새벽 세시 넘게까지 카톡 대화를 하다 잠들곤 했고, 저희의 카톡방에는 하트가 난무했습니다.
첫 만남 이후 한 달 반 남짓한 기간 동안 저희는 7번을 따로 만났고 밥, 커피, 영화들을 함께 했습니다. 누나가 술을 안 마신다고 해서 술을 마신적은 없는 것 같네요. 술을 마시지 않아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람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기에, 저도 딱히 술을 마시지 않아도 상관 없었습니다.
아무리 '설레발은 필패다, 이번 만큼은 신중하게'를 다짐했지만, 이 정도면 나만의 설레발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1월 11일 빼빼로 데이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날 저녁 홍대에서 만나기로 약속도 잡았습니다. 저는 손수 포장한 빼빼로를 주며 고백을 하고 해피엔드! 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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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길어지는 군요... 상하편 나누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