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09/08/23 02:00:32
Name 유유히
Subject [일반] [일상] 외로움이 괴로움이 되는 과정
열두시 오십오분. 오분 후면 새벽 한시.

이유없이 잠이 오질 않는 예수가 다시 태어나도 좋을 만큼 고요한 밤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이유로 외로워지곤 합니다.
그럴 때면 주된 기능인 시계 기능에 더불어 최첨단 정시 알람 기능과 광고 수신 기능이 포함된, 핸드폰이라는 기기를 멍하니 쳐다보게 됩니다. 하도 울리는 일이 없다 보니 저 기계에 전화수발신 기능과 문자수발신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군요. 주변의 지인들에 연락을 할 수 있는 편리한 기계를 놓고서도 이렇게 외로워하고 있었다니, 이런 바보가 있나 자조하며 핸드폰을 엽니다.

전화번호를 검색해 봅니다. 친숙한 이름들 사이 이건 누군가 싶은 이름들이 지나갑니다. 몇 명의 번호를 지우고 나서 고민을 합니다. 누구에게 연락하지. 선뜻 누를 수 있는 번호가 없습니다. 분명히 알고 지내는 사이들이지만, 왠지 번호에 손이 가질 않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이렇게 많은 번호 중에, 어느 하나 선뜻 손이 가는 번호가 없다는 것은.
번호를 좌르륵 넘기다가 결국 손이 멈춘 곳은 옛 여자친구입니다. 친구로 남자는 인사치레 이후로 처음 문자를 보냅니다. "좋은 친구로 남자고 했었지. 음. 좋은 친구는 외로울 때에 연락하는 법이지." 자기정당화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문자를 적는 화면으로 넘어간 뒤에도 좀처럼 진전이 없습니다.

"뭐해?"

라고 적어놓고 보니 왠지 성의없어 보입니다. 고민을 합니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그녀의 고향을 고려한 사투리를 추가하고, 뒤의 웃음 자음문자를 추가합니다.

"뭐하노? 키읔"

써놓고 보니 이게 뭔가 싶습니다. 나 같으면 여기 뭐라고 답을 할까 싶기도 하고.. 괜히 막막하기에 써놓고 다시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 싶어 확인버튼을 누릅니다. 전송중입니다. 아차,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전송중입니다" 이 여섯 글자를 보고서야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문자는 회수가 되질 않습니다. 한시바삐 문자를 주워 담고 싶건만... 개인적으로 문자 회수기능을 개발한다면 그 통신사는 대박이 터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대의 문자 수신 여부를 확인해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기능. 도입이 시급합니다. 그리고 중력의 법칙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전송완료되었습니다' 다른 때는 전송도 실패하고 그러더만 이럴 때는 꼭 3초만에 성공하곤 하더군요.

그리고 침묵. 일분. 이분. 삼분. 사분. 오분. 묵묵히 담배만 태우며 핸드폰을 앞에 놓고 멍하니 바라봅니다.


디리디리디리디리딩 딩 딩~~
왔구나. 과연 뭐라고 왔을까. 핸드폰을 열어봅니다.

"? 코 자요ㅠ"

그녀의 귀여운 말투 그대로입니다. 잔다고? 자면서 문자를 한 건가. 참 대단합니다. 뭐 자려고 누웠단 뜻이겠지요. 앞의 물음표는 뜬금없어 당황했다는 뜻일 테구요. 뒤의 우는 표시는 졸려서 힘들다는 뜻인가 싶습니다. 별로 반기지 않는 듯한 어조. 지금이라도 그만해야 하는데. 하지만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하는 법이라고 정당화하며, 다시 문자를 적습니다.

"잠이 안와서 문자해봤다...^^ 일은 할만하나?"

다시 담배. 줄담배는 몸에 해로운데... 한대를 다 태울때쯤 다시 문자가 옵니다.

"머 그럭저럭ㅜㅠ"

문자질 하기가 어지간히 싫은가 봅니다. 예전 같았으면 수다스럽게 오늘은 이랬네 저랬네 하며 귀찮게 했을 테지만, 그랬저 저랬저 하며 받아주느라 한시간은 족했을 테지만.... 이런 급변하는 국제정세... 아니, 그녀의 급변한 태도는 나를 당황시킵니다. 이제 물러날 때입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후 문자를 적습니다.

"자는데 미안~ 잘자구~ 또 연락할께 ^^"

그리고 약 15초 뒤.

"오빠두 굿나잇 ^^"






무한도전에서 멤버들이 무한이기주의를 보여줄 때나, 평균이하의 모습들이 부각될 때 유재석씨가 그러더군요.

"이게 뭡니까아~"

저그 병력이 테란 본진에 보무도 당당히 입성하고 벌처와 탱크를 저글링과 고릴라(울트라)가 유린할 때, 우승기씨는 그러더군요.

"망했어요, 망했어요"

유재석씨와 우승기씨가 양 옆에서 귀에 대고 스테레오로 소리치는 것만 같은 환청을 들으며 생각을 해보니,
신기합니다. 분명 외로웠던 밤이었는데, 어느 새 괴로운 밤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외로운 밤엔 괜한 문자를 보내시나요?
저처럼 괴로운 밤이 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09/08/23 02:30
수정 아이콘
공감 100%ㅠㅠ
오크히어로
09/08/23 02:33
수정 아이콘
쿨하다는 것 그만큼 인간미가 없다는 말도 없겠죠.
린러브
09/08/23 02:42
수정 아이콘
공감 200%ㅠㅠ 오늘도 미련한줄 알면서 쓸데없이 폰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는 제모습이란...ㅜ
09/08/23 02:53
수정 아이콘
연애 관련글에는 리플을 달고 싶지 않았지만.. (개인적 이유로) 저도 그랬던 시절이 있어서 공감되어 리플 달아봅니다.
다른거 다 떠나서 '유유히'님께서 그래도 그 이상 시도하지 않으시고 적절한 시점에 문자를 마무리 했단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도 물론이고 사람은 다 감정의 동물이라 이성적으로만 행동하진 않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결론부터 말하면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득'이 있을 가능성이 대충 한 1%미만에 육박하는 행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대상이 전 여자친구
였던것도 아쉽고, 또 상대가 잠자리에 들만한 오밤중인것도 아쉽고 말이지요. 내가 외로움을 느끼듯 상대도 외로움을
느낍니다만 그 외로움을 느끼는 타이밍엔 개인차이가 당연히 존재하는 법입니다.

글의 첫 시작에서 '연애관련글' 이라고 유유히님의 글을 제 마음대로 정의했습니다만, 사실 '연애상담글'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자면 이 글이 '연애관련글'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겠지요.. 그런면에서 제 댓글이 괜한 짓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 더 길게 쓰진 않겠습니다.

외로운 시간들 잘 이겨내시고 유유히님의 마음이 따뜻하게 머무르실 수 있을 곳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Valueinvester
09/08/23 02:53
수정 아이콘
그래서 밤에는 일찍 자야된다고 생각합니다 후후후ㅠㅠ
방랑시인
09/08/23 03:02
수정 아이콘
위험한 시간이죠 밤은, 조용하고 은은하고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만드는 시간.

자는 게 상책입니다.
MoreThanAir
09/08/23 03:15
수정 아이콘
외로움이 괴로움으로 되는 이유는 외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결하려 발버둥치기 때문이죠.
09/08/23 04:45
수정 아이콘
MoreThanAir님// ...! 좋은 깨달음이군요.

문득 웹툰 하나가 생각나네요.
골방환상곡 - 외롭다 느끼면

외롭다 느끼면
그냥 느끼고 있는다.
어쩌라고

* 저는 항상 5명의 귀여운 여신님들과 함께해서 그런지 안 생기네요. 하핫.
최종병기캐리
09/08/23 05:03
수정 아이콘
깊은 밤... 잠은 안오고 외롭고해서 예전 여자친구에게 보낸 문자가 화근이 되어,

그녀와 만날 약속을 잡고, 나간 커피숍에서 그녀에게 청첩장을 받았죠....

후우.................................
09/08/23 05:08
수정 아이콘
최종병기캐리어님// 후우................................. (2)

그러고보니 이런 일도 있었네요. 한 이틀 전 일이네요.
중학교 때 만났던 여자친구..(라고 해봐야 뭐 대충 두달 사귀고 헤어지긴 했지만 지금도 친구로 잘 지내고 있는) 한테서 쪽지가 왔습니다.

"야, 니 내 왜 보고도 생까는데?"
"뭐? 니가 내 볼일이 어딨다고.."
"동아리방에서 나오는거 봤는데 니가 아는척 안해줬잖아"
"맞나.. 어휴 내가 기억력이.."
저는 정말 못봤는데.. 얘는 끝까지 절 봤다고.. =_=..

...뭔가 이야기를 거창하게 시작하긴 했는데 마무리를 잘 못하겠네요.
보통 PGR 여러분들은 헤어진 연인분[?] 만나면 아는척, 하시나요?
나해피
09/08/23 05:11
수정 아이콘
Shura님이 전해주신 골방환상곡의 글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글쓰신 분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도 저런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저는 문자 보내놓고 답장이 안 와서
아~ 그러지 말 걸... 하고 후회만 해본 적이 참 많습니다.
최종병기캐리
09/08/23 05:17
수정 아이콘
Shura님//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안좋게 헤어진적이 없다보니, 아는 척 하고 지내지요...
엷은바람
09/08/23 06:44
수정 아이콘
몇년전 너무나 외로운 마음이 사무쳐서 가슴이 다 아플때가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육체적으로 말이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며 외롭다.. 정말 외롭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심장쪽이 갑자기 미어지며 아프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각곳의 친구들 & 여자친구로부터 너무 연락이 많이 와 과부하가 걸려서
연락이 오면 답문을 항상 대충대충 보내게 됩니다. 늘 고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죠

인간지사.. 새옹지마 랄까요..
Forever.h
09/08/23 07:34
수정 아이콘
그렇죠..
정말 어쩔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문자 오는 통에 짜증도 날 정도지만..
지금은 핸드폰이 제 기능을 못하니까 이게 더 짜증....ㅠㅠ

휴...Shura님의 댓글이 참 공감가네요...
어쩌라고
너무너무멋져
09/08/23 14:38
수정 아이콘
헐 유유히님 여성분 아니셨어요?
아레스
09/08/23 19:10
수정 아이콘
굉장히 디테일한 글이군요..
2탄없나요
유유히
09/08/23 21:35
수정 아이콘
너무너무멋져님// 괜히 죄송하군요. 남성입니다. (...)
유유히
09/08/23 22:00
수정 아이콘
아레스님// 2탄의 기약은 없습니다. 다만 쓰고 싶어지면 씁니다.
09/08/24 15:30
수정 아이콘
인연이란 역시 생겨도 문제 안생겨도 문제이군요..인류의 영원한 숙제인듯.. ㅠㅠ
외로운 밤에 전 게임을 하거나 그래도 사람이 고프(?)면 채팅방을 기웃거립니다..
인생이 별거 있나요 심심풀이 정도면 충분- (먼산)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8733 [일반] 열흘만에 두살먹기 그리고 조제, 호랑이.... [5] Siestar3711 10/01/05 3711 0
18020 [일반] 말 줄이기 [65] 늘푸른솔5785 09/12/04 5785 0
17017 [일반] [카라] 두근두근 투모로우 승연양편 뮤직드라마가 나왔군요(+가인양 영상) [17] KIESBEST5330 09/10/27 5330 1
16906 [일반] [야구]포효하라 타이거즈 [16] 그림자군3790 09/10/24 3790 0
16343 [일반] [인증해피] 슬램덩크 캐릭터 신발 정리 5편. 전국대회.(The End)/수정 [21] 해피9320 09/09/30 9320 8
15751 [일반] [영화] 천만 영화를 뒤늦게 갸우뚱하게 보기 - '해운대(2009)' [41] DEICIDE5490 09/09/05 5490 0
15416 [일반] [일상] 외로움이 괴로움이 되는 과정 [19] 유유히3647 09/08/23 3647 0
14391 [일반] [단관후기]090710. 히어로즈 vs. 롯데 [22] 달덩이4467 09/07/12 4467 0
14274 [일반] 이 사람이 사는 법 [27] happyend5946 09/07/07 5946 20
13434 [일반] 간절해요... 응원이 필요합니다. [37] 스킨로션3752 09/06/05 3752 0
13251 [일반] 삐딱하게 본다는, 보면 슬퍼진다는 사람들은 보지 마세요 [24] 동트는 새벽4375 09/05/30 4375 0
13004 [일반] 봉하마을에서 조문에 쓰이는 물품이 많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추가, 수정) [7] 로즈마리3773 09/05/26 3773 0
11911 [일반] 한번 환기가 필요 할 것 같습니다. [13] 식초~!4305 09/04/10 4305 0
11452 [일반] [세상읽기]2009_0316 [16] [NC]...TesTER5079 09/03/16 5079 0
11388 [일반] [세상읽기]2009_0312 [17] [NC]...TesTER5336 09/03/12 5336 0
9815 [일반] [세상읽기]2008_1216 [10] [NC]...TesTER4682 08/12/16 4682 0
9727 [일반] 잡담 입니다... [16] chcomilk3641 08/12/10 3641 0
8744 [일반] 야구 쉬는 날 보는 롯데 야구 이야기 #1. 손으로 하는 발야구. [10] 윤여광4415 08/10/10 4415 1
7540 [일반] '님은 먼곳에' 를 봤습니다. (스포일러 포함) [20] growinow6360 08/07/25 6360 0
7307 [일반] 제주 여행의 별미들 소개 [24] happyend5984 08/07/13 5984 1
5063 [일반] 어쩌면 호의 베풀었다 봉변당했을지도 모르겠네요. [55] 양산형젤나가5903 08/03/31 5903 0
4404 [일반] 삶의 한 페이지를 접다. [8] 오름 엠바르3853 08/02/12 3853 0
4242 [일반] [탱구영상]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7] 메카닉저그 혼4072 08/01/29 407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