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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8/10 10:01:54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log.naver.com/lwk1988/223965312917
Subject [일반] [서평]성숙의 보류, 해리·회피 애착으로 보는 《새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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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은희경, 문학동네, 2022.

《새의 선물》(1995)은 38세의 주인공이자 화자 강진희가 12세(1969년)의 자신을 회고하는 형식의 액자식 장편 소설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진희는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독백으로 유년기를 감쌉니다. 보통 진희는 지적 통찰력과 정서적 독립으로 '조숙한' 인물로 읽히지만, 이 글에서는 심리학의 용어를 비유적으로 빌려 오히려 성장을 보류하는 인물로 봅니다. 곧 해리적 방어와 회피 애착을 신념으로 삼아 인간 관계를 통한 성장의 가능성을 기피하는 태도에 주목합니다.
진희는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12살, 1969년 당시 주변 인물들의 삶을 전달하는 관찰자이기도 합니다. 진희네 집이 여러 집에 세를 주고 있는 설정은 사건마다 관찰→평가→종결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도록 하며, 지속적인 관계보다는 일회성 접촉에 그치게 합니다. 셋집 여성 주민인 '광진테라 아줌마'와 '장군이 엄마'의 호칭은 주로 이름을 잃어버린 여성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들을 진희의 관찰 대상에 머물게 하고 독자가 다른 인물들보다 진희 한 사람의 감정과 인식에 이입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찰자적 면모를 더욱 극대화하는 것은 액자식 구성, 그 중에서도 38세의 진희가 12세의 진희를 회고하는 면모입니다. 따라서 소설 내의 묘사는 진희 한 사람의 관점이며, 자신의 생각에 맞게 구성되고 정당화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진희는 '세상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람을 속인다'라는 인생관을 투영한 세계 속의 관찰자로 남아 있습니다.

진희는 열두 살 또래의 어린이를 넘어서는 성숙한 사고를 보여줍니다. 영옥이 이모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되었다는 분석, 또래 어린이들은 어른 되기를 꿈꾸지만 어른들에게 이익을 얻으려면 그들의 기대에 맞게 어린이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실천 등이 이를 보여줍니다.

정서적으로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신을 분리하며 보여지는 나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하든 바라보는 나의 자리에 서서 지키고 감쌉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해리에 해당합니다.

 - 나는 내가 엄마에게나 나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를 원치 않았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고 싶진 않았다.
《새의 선물·희망 없이도 떠나야 한다》, 은희경, [Epub], 68문단.

진희는 잠깐 내려온 외삼촌의 친구 허석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허석이 자신을 떠날 때 자신의 감정도 차갑게 정리합니다. 이처럼 친밀한 관계가 생겨도 곧 끊어내는 면모가 회피 애착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감정을 해리하는 태도는 어리숙한 또래 장군이를 인격이 아니라 도구로만 대우하고, 해를 끼쳤을 때에도 자신을 간교하고 위선적이라 평할 뿐 죄책감에서는 해리시키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양장점 직원 미스 리가 곗돈을 들고 쌀집 일꾼과 함께 도주한 사건은 이러한 소설의 구조와 진희의 지적·정서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진희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견해를 체념을 투사한 것으로, 장군이 엄마의 견해를 험담하는 습성을 따른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진희의 견해로 독자의 관점을 수렴하게 합니다. 해당 화의 제목이 진희의 견해와 동일한 '누구도 인생의 동반자와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입니다. 이는 진희의 지적 능력과 정서적 회피 경향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개정판 표지에서 “성장소설의 새로운 클래식”으로 일컬어질 만큼 성장소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성장은 오히려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영옥이 이모(사랑·이별·재시작을 통한 성숙), 광진테라 아줌마(폭력적 결혼에서 도망쳤으나 아들 재성이를 놓지 않음)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진희는 해리적 방어 기제와 회피 애착으로 견고히 무장하고 상처받지 않기 때문에, 성장할 기회도 없습니다.

이는 진희의 탓이 아닙니다. 진희는 부모와 일찍 떨어져 자라면서 부모 없는 아이라는 냉대를 받았고, 군사정권과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억압이 더해지면서 애착에 반응할 양육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회피 애착은 살아남기 위한 적응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태도가 성인기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진희는 1969년의 아폴로 11호 발사와 1995년의 무궁화호 위성 발사를 겹쳐 보며,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진희 본인도 자신의 삶이 회피로 일관하면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점은 인식합니다.

 -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새의 선물·에필로그·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은희경, [Epub], 23문단.

그러나 진희는 프롤로그에 등장한 쥐를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닫습니다. 데이트 중 불쑥 나타난 쥐를, 진희는 행운과 불운은 반드시 교차한다는 자신의 오래된 믿음과 겹쳐 해석합니다. 에필로그에서 다시 소환된 쥐는,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징표입니다. 이 쥐는 혐오스런 생물을 넘어서, 진희의 회피와 냉소를 더 굳어지게 하는 장치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반복되는 이 장치는, 항상 안전한 거리를 두고 세상을 관찰하기만 하려는 진희의 태도를 압축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진희는 의붓여동생의 첫사랑이자 자신을 첫사랑으로 고백한 동료 교수와 사랑을 연기합니다. 두 사람에게 세상은 사람들을 속일 뿐이라고 증언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속지 않기 위해 해리와 회피로 담을 쌓은 진희는 세상에 순응했고, 자신이 믿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이 소설 특유의 화법은 12세 진희에게서 38세 진희에 어울리는 어른의 문장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다운 행동과 어른다운 말이 공존하는 진희는 작품 내의 어른들의 신뢰만 얻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읽는 독자들도 신뢰할 수 있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으로 비춰집니다. 어린이의 시각으로 보는 어른의 정련된 사고라는 아이러니는 어린이의 장점과 어른의 장점을 모두 지닌 매력적인 관찰자를 만들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모든 것이 38세가 된 자라지 않은 어른 진희의 회고라는 액자 구조는 12살 진희의 마음과 눈으로 본 세계가 과연 정답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액자 안팎의 긴장을 빚어냅니다. 《새의 선물》이 지닌 힘은 이 긴장에서 비롯합니다.

이 소설은 성숙했다고 믿는, 그러나 그 성숙했다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회피하는 삶을 읽게 하는 글입니다. 진희는 평생 속지 않고, 상처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자라지도 않습니다. 영옥이 이모처럼 남을 잘 믿는 사람은 속으면서 무엇을 믿고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하는지 경험으로 배웁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 진희는 단 두 가지를 믿게 됩니다. 나 자신.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을 만들어 낸 세상도. 그래서 남을 잘 믿는 사람이 한두 번 속는다면, 냉소주의자는 평생 속는 법입니다. 이것이 진희가 보여주는 냉소의 역설입니다.

이 소설은 성장과 성숙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게 합니다. 냉소와 해리, 회피는 성숙과 비슷해 보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은 만들 수 있어도 장기적인 인간 관계를 맺는 데에는 장애가 됩니다. 성숙하기 위해서 일부러 상처를 받는 환경을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공격을 회피하는 데에 머무르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은연중에 완성된 존재로 대우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1995년 진희의 냉소적인 삶은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상처받지 않는 삶과 성숙한 삶은 같을까요? 다르다면, 상처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과 미성숙한 자신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조화되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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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10 14:00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소설 안 본지 좀됐는데 담 주말은 이걸 봐야겠군요 크크크
에이치블루
25/08/10 16:17
수정 아이콘
당시에는 정말 센세이셔널 했어요. 책을 안 읽는 시대가 닥치기 직전의 수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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