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속물적이라는 단어는 너무 물질주의적이거나 허영심이 강한 것, 외견에만 치중하는 모양새등의 뉘앙스를 가집니다.
헌데 「철인왕은 없다」「삶은 왜 의미있는가」등을 쓴 이한 변호사는 이에 더해 속물적인 이들은 위계나 서열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고 이것이 개념의 핵심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대학서열, 연봉, 키, 나이, 명품 브랜드 순위, 부동산 가격, 결정사 등급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속물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건 그리 이상해보이지 않습니다.
이한 변호사는 여기에 도덕속물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언뜻 들으면 도덕적 영역에서 속물적이라는 게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그가 말하는 속물의 핵심 요소가 체제 내에서의 서열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도덕속물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도덕속물들은 도덕적 가치체계 내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와, 모두가 도덕적 행동을 두고 경쟁하다니 공맹이 감동해서 쾅쾅 울겠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도덕적 행위를 실천하거나 도덕적 사회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도덕이라는 영역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도덕은 다른 물질적 위계서열과는 달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누가 더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물음에는 온갖 답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Philpaper Survey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주류설은 도덕은 실재를 가지고 있으며(62%vs26%), 도덕진술에 대한 참과 거짓의 진리값은 알 수 있다는(51%vs31%) 것이기에 어쩌면 도덕적 문제 역시 수학처럼 전문가들의 영역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학과는 달리 도덕문제에서는 아주 쉽게 논쟁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어떤 이들은 "그건 아주 간단한 문제에요"라면서 자신의 주장이 당연한 참이라고 단언합니다. 일반인인 우리는 도덕과 윤리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고 도덕적 확신에 찬 말들을 내뱉습니다.
속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우위에 서는 것입니다. 도덕속물에게도 마찬가지죠. 그들에겐 다행스럽게도 도덕적 영역에는소득이나 키, 학벌처럼 내림차순으로 정렬할 기준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분야에서 소외되었지만 속물적 가치를 내면화한 이들에게 도덕영역은 자신이 타인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마지막 영역입니다. 도덕속물들은 스스로가 도덕적 개인이 되거나 도덕적 사회를 구성하거나, 도덕적 추론을 명징하게 하는 것보다는 지금 그대로의 자신에게 도덕적이라는 명예가 주어지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한 변호사의 도덕속물 개념을 습득하고 이해 안되던 많은 현상들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모순적인 도덕주장을 동시에 주장할까? 왜 선행을 하던 이가 저지른 한 번의 악행을 악당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이보다 비난할까? 왜 진영논리와 에코챔버에 갖혀 다른 집단을 악마화하고 내집단을 강박적으로 옹호할까? 왜 자기가 가장 핍박박는 소수자 집단이라며 피해자되기(victimhood)에 급급할까?
내면에는 도덕적 인간이 되기보다 도덕적으로 높은 위계를 차지하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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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우월감 포지션은 어디 죄지은놈 하나 까는식 수준만되도 느낄수 있고 우루루 혐오메타에 탑승하기만해도 되는 수준의 최하 난이도니 너도나도 하려고해서 그러지 사실 금전적 우월감을 누구보다 느끼고 싶어하는게 속물의 본성이긴 하죠... 하지만 이건 단순 집착만으론 안되니 어떻게보면 우월감을 채울만한 꺼리중에 젤 쉬워서 도덕속물(?)이 등장한다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도덕속물조차도 금전, 권력, 능력에서 따라오는 우월감을 가지고 싶겠지만요.
생명은 어떤 방향에서든 생존의 우위를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추상적 가치라는걸 만들어낸 존재이다보니 도덕이란 것에도 얽매이는 것이고요.
왜 모순적인 도덕주장이 존재하는가. 도덕이라는 포장지를 쓴 생존의지의 감정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인간이 되는 길은 수용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며, 잘못의 인정이 무리로부터 버림받아 생존의 실패로 이어지리라는 공포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는 자성할 필요없는 다른 방식이 훨씬 선호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