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 그린 그림들의 경계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조만간 수정하겠습니다.
바로 안산군 반월면이었다가 부군면 통폐합 때 시흥군에 들어가지 않고 수원군으로 들어간 반월면 일대를 시흥군에 포함시키는 오류가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들도 그림 4를 제외하면 수정 전 버전이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2024. 03. 26. 그림을 모두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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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서문. 작은 세 고을에서 시흥이 시작되다
1. 시흥의 맏딸, 영등포
2.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3. 시흥의 둘째 딸, 안양
4. 시흥의 셋재 딸, 관악
5. 시흥의 넷째 딸, 구로
6.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7.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
1914년 당시 시흥군은 북쪽으로 한강, 서쪽으로는 목감천을 경계로 두고 시내 영등포읍, 그 남쪽 동면(지금의 시흥동)을 중심지로 삼고 있었다. 동면에서 서쪽으로 가면 안양천이 있고, 안양천과 목감천이 만나는 곳으로 넘어가면 안양천과 목감천 사이의 땅, 시흥군 서면으로 넘어간다. 서면에서 남쪽으로 도덕산 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등잔을 얹어 놓는 기구인 광명두와 비슷하다 해서 괭매마을이라 하는 자연마을이 있다. 이 괭매마을이 있는 동네를 괭매마을에서 따서 광명리라 했는데, 이 광명리가 지금의 광명시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그래서 이 괭매마을을 광명의 기원이라 해서 원광명이라고도 한다.
또는, 광명은 중세 언어로 “검밝다”라는 뜻으로 “밝은 임금”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림 1 1910년 당시의 광명시 일대. 광명시의 이름이 비롯한 원광명이 도덕산 왼쪽에 보인다. 도덕산-구름산 산맥이 시 중앙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옥길동을 제외한 시 서쪽 경계가 목감천, 동쪽 경계가 직강화 전의 안양천이다. 위키미디어 File:Gwangmyeong-1910s revised.jpg.
지금에야 광명시 한가운데에 산을 남으로 끼고 서울시와는 강으로 경계를 지은 북쪽의 광명동과 철산동 일대가 광명시의 중심지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편, 한국 개신교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면에 선교를 왔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 쪽이 아닌 광명리에 광명교회를 1903년에, 하안리에 하안교회를 1905년에 개척했다. 당시 광명교회 교인들의 대다수는 충청도, 황해도, 말죽거리 등의 이주민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광명리의 광명교회는 마치 이후 이주민들로 새로이 발전하는 광명동의 역사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두 교회는 지금까지도 광명에 그대로 있다.
옛날에는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양, 산의 북쪽, 강의 남쪽을 음이라고 했다. 양, 곧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은 햇볕이 잘 들고 찬 북풍을 산이 막아 주므로 살기 좋은 땅이었다. 반면, 음, 곧 산의 북쪽과 강의 남쪽은 겨울에 북풍과 강바람이 겹치고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살기 나쁜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안양천과 목감천은 상습 범람으로 골치를 썩이는데, 하천 정비조차 잘 되어 있지 않은 당시에는 두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괭매마을도 도덕산을 동쪽으로 파고든 분지에 있고, 서면 면사무소도 구름산 남쪽 평지의 소하리에 있었고, 경찰 주재소도 괭매마을보다 더 남쪽의 노온사리에 있었던 것 같다. 소하리는 안산, 시흥 사람들이 서울을 왕래할 때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발달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서면 자체가 큰 고을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1932년 서면에는 5985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일본인은 4명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도 주목하지 않는 곳이 서면이었다. 이런 서면도 수도권이 발전하면서 조금씩 개발되기 시작하는데, 그때에도 처음 사람들이 주목한 곳은 소하2리, 지금의 소하1동에 있는 새말, 한자로 신촌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1968년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여의도에서 강제 이주한 주민들 일부가 이 새말까지 흘러 들어와 여의도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고, 이후 신촌은 안양천 제방 주변부로 확장되었다.
이대로 흘러갔으면 소하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도시로 발전했을 광명의 역사는, 이웃한 옛 시흥군 동면 일대의 1963년 서울 편입을 계기로 격변하기 시작한다. 안양천과 목감천 너머까지 서울이 확장되지는 않았으나, 1963년 9월에는 광명리와 철산리가 서울 도시계획에 편입되었다. 1965년에 구로공단이 건설되면서 공단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필요해지자, 당국이 주목한 곳이 바로 개봉동, 그리고 서울 너머 광명리와 철산리였다.
1968년 5월 14일, 개봉 60만 단지라 불리던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광명리와 철산리 일부를 대한주택공사가 일괄 개발하였다. 광명 최초의 아파트인 광명사거리의 광명아파트와 철산동 일대의 광복회와 미망인회 등 원호 대상자를 위한 광복아파트도 이때 들어섰으며, 개봉동 일대와 함께 인구밀도가 낮은 단독주택지구도 조성했다. 총 3만 5천 명이 사는 미니 신도시 규모였다. 1960년대 시흥군 서면의 인구가 약 1만 2천명에 불과했으니 서면 전체 인구를 넘어서는 엄청난 인파가 몰아닥친 것이다. 광명아파트와 광복아파트는 모두 재개발되어 지금의 광명한진아파트와 광복현대아파트가 되었다. 한편 철산리 일대에는 싼 방값을 찾아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이 노동자들이 쉽게 통근할 수 있게 1977년에는 서울시에서 철산대교를 지었다.
반면에 원래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를 포함해, 광명리·철산리의 일부와 나머지 서면 거의 대부분은 1971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광명시 면적의 64%가 개발제한구역이다. 이 때문에 소하리는 쇠퇴하고 광명의 중심지는 택지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된 광명리 지역이었다. 이에 지금의 광명5동 자리에 1970년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를 열었고, 1974년에는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으며, 1979년 4월에는 서면 전체가 소하읍으로 승격되기까지 했다.
그림 2 서울시와 경기도 사이의 힘겨루기에 지친 기아자동차에서 직접 지은 안양천 기아대교. 기아자동차는 소하리공장을 통해 광명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위키미디어 230813 안양천 기아대교.jpg
대부분이 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로 개발된 광명이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해 소하리 일대에는 1973년 기아자동차 소하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소하공장은 기아산업의 네 번째 공장이나, 본격적인 기아산업의 자동차 생산은 바로 이 소하리공장 준공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소하리공장과 함께 기아산업은 최초의 국산 엔진을 제작하고, 1974년 10월에는 마침내 기아 최초의 승용차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소하리공장 주변에는 기아로·기아대교·기아천 등 기아에서 따온 지명들이 있을 만큼, 기아와 광명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개발제한구역에 공장이 세워진 탓에 불법 증축 문제로 여러 차려 골치를 앓다가 2008년에 들어서야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합법 증축이 가능해졌다. 기아대교는 원래는 행정 당국에서 기아산업에 지어주기로 약속한 다리였지만, 안양천을 사이에 놓고 서울시와 경기도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지체돠자 기아산업이 자체적으로 2억 원을 부담해서 지은 다리다. 하안동 일대에 영세 기업이 있기도 했으나 광명시 탄생 이후 하안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철거되었고 1992년 광명시범공단이 조성되어서야 미약하게나마 광명에도 공단이라 할 만한 것이 들어서게 된다.
1976년에 서울에서 광명리를 서울에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고, 1979년 영등포구와 관악구를 분할해 구로구와 동작구를 설치할 때, 광명리와 철산리를 서울에 편입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던 사이 광명리와 철산리의 인구는 빠르게 급증해 광명리에는 총 36리, 철산리에는 총 17리 합쳐서 무려 53리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행정리가 설치되었으며, 시 승격 직전 1981년 시흥군 소하읍의 인구는 15만 3997명에 달했다. 현대 농어촌 혜택을 노리고 분동을 꺼리는 수많은 과밀 읍들도 감히 당해낼 수 없는 역대 최대 인구를 자랑한다.
위의 기아대교 건설 뒷이야기에도 보듯이, 서울시는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광명시 일대를 개발해 놓고도 광명 주민들, 대다수가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인 이들의 필요에 대해서는 자기 관할 구역이 아니라고 뒷짐 지는 행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광명리와 철산리의 서울시 편입 문제도 이처럼 시간만 끌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광명시의 서울 의존은 적지 않아, 전기도 한전 영등포지점에서, 수도도 구로구청에서, 전화도 개봉전화국에서 처리하고 있었으며, 전철도 개봉역에서 타고 있었다. 광명에 직접 전철이 다니기 전 개봉역은 한때 무려 10만 명이나 타고 내린 적도 있었는데, 그만큼 광명 시민들은 서울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광명의 서울 편입이 질질 늘어진 이유는 서울시의 인구가 서울시의 예상 밖으로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 당시 서울시 인구는 약 850만 명을 바라보고 있었고, 2000년대에 가면 1400만을 돌파할 것이라는 UN 조사보고서가 나올 지경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막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1980년 11월 서울의 인구를 억제하기 위해 서울 주변에 15-30만 명 인구의 위성도시들을 두는 정책을 폈고, 이에 따라 1981년 7월 1일에는 시흥군 소하읍 광명출장소 전체가 광명시로 승격했다.
마지막 조선 시흥군의 잔재인 시흥군 서면 지역은, 이렇게 시흥의 여섯째 딸 광명시로 다시 태어났다. 시로 독립하고 1년 만에 광명시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서 해제되어, 원치 않았던 독립을 이뤄냈다.
1983년, 시흥군 옥길리 일대를 부천시와 함께 나눠가지면서, 광명시의 경계가 완성되었다. 이와 함께, 시흥군은 의왕읍과 맞닿은 화성군 반월면의 일부를 또 받아왔다.
그림 3 : 1983년 시흥군과 영등포, 안양, 관악, 구로, 동작, 광명 여섯 딸들.
8. 그때 그랬다면? - 시흥 있는 시흥
지금의 시흥은 “시흥 없는 시흥”이다. 시흥군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지금의 시흥시지만, 시흥군의 이름이 비롯한 시흥동은 금천구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흥시에는 시흥동이 없다. 엉뚱하게도 시흥시에 “안산동”이 있던 시절까지 있다. 시흥IC도 시흥동과 시흥시에 각각 존재하고, 서울 서남부에서 시흥으로 향하는 표지판이나 택시는 시흥시가 아니라 시흥동으로 향한다.
시흥군에 시흥이 없어진 것은 1963년 지금의 시흥동이 있는 동면 일대를 모두 서울시로 편입하면서다. 역사를 되돌려보면, 시흥 없는 시흥이 아니라 시흥 있는 시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때다.
다시 말하지만, 시흥군은 조선 시대의 시흥군과 과천군과 안산군을 합해서 만들어진 군이다. 그래서 시흥 중의 시흥은 조선 시대의 시흥군에서 나온 시흥군 동면, 서면, 북면 일대고, 그 중에서도 조선 시대 시흥향교 자리가 있던 시흥동이 있는 동면이야말로 진정한 시흥 중의 시흥이 되겠다. 이 중 이미 1936년에 서울에 편입되어 영등포가 된 북면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동면, 서면만은 그대로 남았으면 시흥동은 시흥에 남았을 것이다.
1963년 서울 대확장 때에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하지만, 결국은 서울의 인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기 때문에 결국 서울의 확장은 계획한 것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시흥 중의 시흥인 동, 서, 북면은 지금까지도 한 생활권으로 연계되어 있지만, 이 중에 서면만이 광명시로 떨어져 나간 것은 이 때문이다.
영등포와 나머지 시흥 권역의 연계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1963년에 시흥군 동면을 편입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떨까? 그 상태에서 구로공단이 개발되었다면, 구로공단이 있는 구로동이야 북면에서 비롯했으니 서울에 공단이 있기는 하겠지만 구로공단이 결국 너무 인기를 끌어서 2·3단지로 확장되었으니 시흥군에도 공단이 확장되었고 오히려 서울보다 시흥에 더 큰 공단이 생겼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볼 것은 군청이다. 동면 전체가 서울시로 편입되고 안양읍이 안양시로 독립한 이후 시흥군은 동서로 양분되어 군청을 양편 중 한 곳에도 두지 못하고 안양시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시흥군은 뒤집어진 U자 모양이 되어서 동면이 전체 시흥군의 중심이 되고, 군청은 옛 시흥군의 중심이었던 시흥동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안양시가 독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정책이 군 내의 도시 지역은 시로 독립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고, 시흥군 동면이 서울시로 편입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는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청이 있어 행정 기능을 갖추고, 구로공단이 있어 산업 기반을 갖춘 동면은 결국 도시화되었을 것이고, 안양시의 뒤를 이어 시흥군에서 독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은 무엇이 되었을까? 시흥군의 중심지이니 읍이 될 때 마땅히 시흥읍이 되었을 것이고, 독립할 때에도 시흥시란 이름을 가져가거나 적어도 시흥의 옛 이름에서 가져온 금천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구로공단의 배후 주거지로 개발된 광명시는 따로 떨어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 시흥시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행정, 산업, 주거기능이 함께 갖춰진 자족도시, 시흥이 있는 시흥시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시이니 중구·동구·서구 또는 금천구·관악구·광명구 3구를 갖추지 않았을까. 한편, 원 역사에서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가 안양시의 일부가 된 석수동도 시흥시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옛 안양천을 따라 형성된 구불구불한 광명시와 서울시의 경계는, 깔끔하게 정리된 안양천을 따라 형성된 금천구와 광명구의 경계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림 4: 시흥군 동면이 서울시에 편입되지 않아서 만들어진 가상의 시흥시와 안양시. 옅은 직선은 현재의 서울시 경계다. 그런데 석수동을 포함한 금천구 모양새가, 으음... 영 좋지 못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나머지 지역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천, 군포, 의왕, 안산은 거의 역사를 그대로 밟아나갔을 것이지만, 지금의 시흥시 지역인 남은 시흥군에 신 시흥시의 영향력이 얼마나 뻗칠지 미지수다. 안양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군포와 의왕도 안양에 흡수되지 않았으니 시흥시가 남은 시흥군을 흡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엄연히 시흥의 정통성이 있는 시흥시가 있는 마당에 시흥군이 시흥시를 자처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유력한 새 시 이름은, 시흥군에서 가장 큰 지역인 소래읍에서 따온 소래시다.
따라서 현대의 시흥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흥시와, 현대의 신천-연성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소래시가 생겨났을 것이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