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7/03 01:34:53
Name 포르티
Subject [잡담] 지식도 먹거리처럼 꼭꼭 씹어먹자
블로그에 포스팅한 내용을 살짝만 손보고 올리는 글이라 경어가 생략되었습니다. 미리 양해구합니다^^

===========================================
모르는 일본어 단어가 나왔을 때, 흉기라고 해도 믿을만한 엄청난 무게의 사전을 촥 펼쳐서 더듬더듬 단어를 찾았던 고등학교 때가 지금처럼 IME로 대충 검색 때려박으면 알아서 뜻을 찾아주는 웹 사전보다 훨씬 더 습득효율이 좋았다. 물론 그때와 지금과는 지식수준의 차이도 다르고, 학습능률 자체도 다르고, 무엇보다 내 그릇도 다르기 때문에 막연히 그리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지식습득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시되는 프로세스다. 나는 초중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독학하면서 화면에 뿌려진 문장을 얼추 마구잡이로 해석한 뒤에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부분만 사전을 더듬어서 메꾸는 방식을 즐겨했는데, 체계가 덜 잡혀서 지금은 고생하고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나 효율적인 면에서나 이보다 더 좋은 학습법은 없었단걸 이제서야 실감한다. 지금은 다시 하라고 해도 그방법대로는 못한다. 아니 안된다.

요즘같이 네*버 지식KIN한번만 검색 때리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정말로 알고 있는 지식은 그리 많지 않다. 검색 결과만 보고 '아하 그렇구나' 하고 끝나니까 그 지식은 인터넷에서만 고이 잠든 지식이 된다. 즉, 인터넷이 없는 곳에서는 두뇌라는 하드 디스크를 아무리 뒤져봐야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핑계를 댄다. "아, 인터넷에서 찾으면 있는데..."

아까는 번역하다가 腰の切り替え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바꿀 방법을 찾지 못해서 일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까지 했다. 한참 생각하시다가 '고의춤'이라는 정답을 들려주셨다. 그래. 전화까지 하니까 확실하게 머리에 남더라. 이런 것은 지식 이전에 일종의 '경험'으로써 내게 흡수된 것이 아닐까.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는 음식을 먹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 무슨 이어령식의 정의냐마는; ) 원하는 데이터에 대한 결과를 습득하는 것에 그쳐서는 망각이란 소화불량에 걸리고 만다. 음식은 내 몸. 내가 먹은, 내가 습득한 지식은 앞으로도 나와 한몸이 되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새로이 재평가 된다. 그 과정을 인터넷에 빼앗겨버린 지금, 나는 그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조금 엉뚱한 얘기지만 몇 마디 더. 내가 그동안 디지털에서 느껴온 아쉬움의 정체를 이제서야 알았다. 사진이건 음악이건 글이건 원하면 언제든지 지울 수 있고, 원하지 않아도 하드디스크가 번개 한 번 맞으면 원본 자체가 깡그리 날아가버리는 매체의 특성이 문화를 접하는 자세에서 진중함을 거두어가기 때문이었다. 즉문즉답의 반응성과 편의성이라는 매체의 장점. 그 장점마저도 사람들은 '찌질함' 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가능한 '질적 하향평준화'로 전용하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는 남이 떠먹여주는 지식만 꿀꺽할게 아니라, 이제는 젓가락질도 좀 배워야지.
역시 지식은 음식처럼, 꼭꼭 씹어 잘 삼켜야 해.

오늘의 깨달음을 꼭 기억하고 싶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06/07/03 01:43
수정 아이콘
이어령식의 정리가 대박이네요 하하;
빵과장미
06/07/03 02:37
수정 아이콘
이오공감에 오를 만한 글인데요. 이글루스의 입맛에 맞는 글 같네요;;
06/07/03 06:5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봤네요.
가츠좋아^^
06/07/03 07:05
수정 아이콘
good!
06/07/03 07: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저도 그깨달음을 기억하고싶네요.
깐따삐야
06/07/03 08:32
수정 아이콘
이어령식 하다는게 무슨 의미에요?
이뿌니사과
06/07/03 08:50
수정 아이콘
동의 백만표;;
이뿌니사과
06/07/03 08:50
수정 아이콘
마치.. 핸폰의 전화번호 저장기능때문에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몇개 안되는 것처럼.. (핸폰 고장나서 날아가면;; OTL)
밑에분
06/07/03 09:33
수정 아이콘
동감합니다.
06/07/03 11:38
수정 아이콘
아-진짜 그래요.기능이 잘되있는 전자사전보다 두꺼운 책으로 된 사전이 오히려 공부는 더 잘되는거 같습니다.지식습득에는 편리함을 추구해서는 안되는거 같습니다.
아케미
06/07/03 12:41
수정 아이콘
최첨단의 기계를 발명해낼 만큼 머리가 좋아진 사람들이지만, 그 덕택에 어떤 면에서는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덜덜덜.
non-frics
06/07/03 16:53
수정 아이콘
역시 손수 고생하면서 하는게 머리에도 잘남더군요. 공감 백만배! ^^
정말 좋은 글 봤습니다..
06/07/03 17:3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뭐 흔히- 삽질한다 뭐 이런 표현 많이 쓰지만,
삽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06/07/03 17:52
수정 아이콘
삽질 좋죠. 더욱이 꼭 필요한 삽질 많이 해야죠. 공감되는 좋은 글이네요.
직접 찾아보는 것만큼 기억에 잘 남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야 와이프에게 새(닭XXXX 의 순화)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들을 정도로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력이 별로긴 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건 꼭꼭 씹은 음식만큼은 잊지 않게 되더라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4117 [잡담]전역3개월...안녕들 하시죠? [29] 언뜻 유재석3899 06/07/03 3899 0
24116 씁쓸합니다 [45] 플토는 나의 힘5267 06/07/03 5267 0
24115 [잡담] 지식도 먹거리처럼 꼭꼭 씹어먹자 [14] 포르티3868 06/07/03 3868 0
24113 스카이 프로리그 2006 포스트시즌 티켓의 향방... [22] lotte_giants5186 06/07/02 5186 0
24112 그냥 만화이야기 [11] 올빼미4790 06/07/02 4790 0
24111 누가 광안리로 직행할까요? [107] 초보랜덤7260 06/07/02 7260 0
24110 이거이거...누가 mvp가 될런지! [39] My name is J4553 06/07/02 4553 0
24108 이번 몰수패, 과연 규정고지가 정확이 되었을까요? [109] kai8274 06/07/02 8274 0
24105 [ESWC 2006]워3와 카스 남은 경기들입니다. [27] BluSkai4191 06/07/02 4191 0
24104 HANBIT VS MBC LINE UP (저그 vs 테란 스폐셜) [177] 초보랜덤5781 06/07/02 5781 0
24103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표절/도용 아니라고 판결이 났군요. [28] The xian5234 06/07/02 5234 0
24102 잊혀지지 않기 위하여 - 히어로 팀 응원글 [18] Observer3859 06/07/02 3859 0
24101 전기리그 막판 시청률 올리기? [23] 웃기는사람6261 06/07/01 6261 0
24099 포스트시즌을 거는 마지막 일전....... T1 VS 팬택 EX...... [55] SKY925624 06/07/01 5624 0
24098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 2회전 매치 결과(제 6경기 추가) [15] The xian4211 06/07/01 4211 0
24097 블리자드 주최, 전세계 스타크래프트 대회 개최 [16] 벨로시렙터4411 06/07/01 4411 0
24095 엠겜과 온겜 색감 비교 - 엠겜 주관 경기 [14] 이희락3941 06/07/01 3941 0
24094 온게임넷 vs STX 엔트리 나왔네요(스포) [66] 성대모사달인4101 06/07/01 4101 0
24093 비가 주루룩 주루룩 문득 경기를 지켜보다가.. [4] Inc4192 06/07/01 4192 0
24091 아무도 안올렸길래..^^; SKT T1 VS eNature Top 엔트립니다 [127] pioren5432 06/07/01 5432 0
24090 Blizzard 버그관련 담당 부서에 이메일(우편)을 직접 보냈습니다. (답변옴) [31] Zealot5931 06/07/01 5931 0
24089 mvp에 대한 혼자만의 생각... [5] 골든마우스!!3800 06/07/01 3800 0
24088 초거성들... [60] 온리진5575 06/07/01 557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