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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08/15 03:29:50
Name 몽땅패하는랜
Subject (허접연작) 희생(The Sacrifice) 제2부-PROTOSS
상당한 스크롤의 압박입니다. 허접한 내용에 길기까지 하다니.....또 한번 저의 능력부족을 실감합니다.(그럼 왜 쓰냐?ㅠ.ㅠ) 그러나 먼저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의 글을 달아주신 분들에게 새털민큼이나마 보답을 드리는 것이 인간된 도리인 것 같기에(어이 어이;;;) 이렇게 후속편을 올립니다.

2-1 그의 이야기

영미의 뒷모습에는 다소의 당혹함과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형준은 전철역 입구에서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조금은 힘이 빠진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서는 영미의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뒤를 돌아봐주기를 바라는듯이. 만일 그렇다면 방금전 자신이 지껄인 헛소리를 그는 다시 거둬들이겠다는 듯이.
하지만 영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항의나 고집이라기보다는 언제나 그래왔듯 자신에 대한 순응의 형식이라는 것을 형준 역시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
형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쓰디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무 강렬했음인가 그의 곁을 지나쳐가면 여고생들이 흠칫하더니 가만 그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스스로 결정짓고 마음 속에서 굳혀놓은 이야기였다. 오늘 만나면서 딴에는 거친 행동과 언사를 지껄인 것도 사전 포석에 가까운 계산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제법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은 모든 일을 끝내버린 지금에 와서도(형준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지독한 쓰라림이었다.

피시방에서 형준의 후배들에게 3연패를 당하는 동안 그는 계속 영미에게 독설에 가까운 말들을 내뱉었다. "야, 이거 장난이 아니라구 내 아이디를 걸고 정식으로 베넷에서 하는 거란 말야, 너 때문에 점수 내려가잖아"부터 시작해서"너 어디 가서 나 안다고 하지마라. 게이머의 여자친구가 일꾼 가르기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를 거쳐, 그리고 심지어는"나 참, 속풀이 게임으로 하려고 했던 게 파트너가 도움이 안 되어서 더 속 끓이네" 까지 형준은 내심 자신마저 뜨끔할 정도의 쓴 소리를 계속 내질렀다. 주위에서 게임에 열중하던 사람들까지도 슬몃 눈치를 살필 정도로.
영미 역시 처음에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꼬리로 형준을 노려보기도 하고 뭐라고 입 속으로만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준의 독설이 쏟아질수록 발개진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며 게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에이 성질 버리겠다. 그만 하자."
세 번째 패배를 당하자 그는 GG도 치지 않고 자리를 박차듯 일어나 그대로 피시방을 뛰쳐나가듯 나섰다. 계단을 내려서면서 얼핏 바라본 피시방의 통유리문을 통해 분명하게 눈시울이 붉어진 영미가 가볍게 고개를 수그리며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듯한 모습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서 형준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두 모금도 채 빨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치듯 담배꽁초를 내던졌다. 뒤에서 또각 또각, 영미의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형준씨."
도대체 왜 그래? 라고 따져 묻는 날선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한 옥타브는 내려앉은 듯한, 물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형준의 입에서 튀어나올 뻔한 순간이었다.
형준은 몸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네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데....내가 감히 너에게 포악을 떨겠니. 하지만 형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의 내면과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그만 가라. 그리고....."
형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는 내면의 유혹과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이 강렬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당분간은 서로 만나지 말자. 이유는 묻지 말아줬음 해. 지금은 그게 서로에게 가장 좋을 것 같아."
영미의 눈이 한참이고 커지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겹게 올려있던 핸드백 끈이 너무도 힘없이 폴려졌고 이내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 순간 현기증이 인 형준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영미를 노려보았다. 마치, 모든 잘못이 그녀에게 있다는 듯이.

잠시 멍해있던 영미는 가만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백을 주워 올렸다. 하지만 형준에겐 그것이 영미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위태한 움직임이었다.
"알았어. 네가……"
이젠 고개를 숙여버린 영미는 그렇게 끝이 맺어지지 않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그대로 형준의 곁을 지나쳐 어둠이 완연하게 덮힌 거리로 나섰다. 형준은 영미를 노려보던 자세 그대로 한참이고 굳어있을 듯 싶다가 갑작스레 몸을 돌려 이미 상당히 멀어진 영미의 뒷모습을 쫒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앞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외치고 싶었다. 아니야, 그래 이건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순간적으로 무엇에 씌었나보다. 어떻게 너를....... 네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끝을 내자고 하다니. 영미야, 내가 미쳤다. 정말 잘못했어.
그의 마음 속에서 온갖 부르짖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영미를 따라잡지도,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그녀의 이름을 외치지도 못했다. 고개를 있는대로 숙여버린 그녀의 뒷모습이 지하철 지하 역사 계단을 내려가 사라질 때까지 형준은 그저 망연히 자리에 붙박힌 듯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쨍. 다시금 그의 뇌리에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형준은 거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날 정도까지 앙다물며 그 고통을 견뎠다. 아니, 이미 그것은 고통을 즐긴다고 해야 할 단계였다.    

형준이 팀 연습실 겸 숙소에 도착했을 때. M방송사의 팀 리그전 대진추첨 관계로 출전선수들을 인솔했던 장철훈 감독과 선수들이 돌아와 있었다. 하나같이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침울했다. 앞서 팀플 상대를 했었던 성인과 장수도 감독과 선수들의 어두운 표정에 자신들의 처신에 애를 먹는 눈치였다.
"오셨습니까?"
가볍게 목례를 하며 묻는 형준을 장 감독은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반 넘어 타들어간 담뱃재가 위태하게 붙어있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느닷없는 형준의 선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형준과 함께 팀의 리더 격인 훈석이 장 감독보다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도 짙은 당혹감이 느껴졌다.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잖아 한달 조금 후면 듀얼이 시작되잖아. 거기서 멋지게 이기면 되는거야. 역전패의 달인? 그런 건 개에게나 줘 버려. 역전패가 그리 두려우면 압승해버리면 되잖아. 아예 농락을 하란 말야!!"
한물간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는 창단 초기의 비웃음을 인내하며 지금까지 함께 해온 훈석이었기에 돌연한 형준의 선언이 그에게는 배신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미 훈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좀처럼 형준의 입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형준은 그저 쓴 웃음만 지으며 훈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듯한 다른 선수들의 얼굴이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형준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면. 아무리 우리가 말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냐. 하지만.....정말 이유나 제대로 알자. 훈석이 말마따나..."
"죄송하지만"
형준이 장 감독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잠시 둔중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형준은 장 감독 이하 훈석과 자신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쨍, 다시금 그의 귓전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그 고통을 질끈 눈을 감으며 견뎌낸 그는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감독님 이하 여러분들이 납득할 이유를 대지 못하는 저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저.....더 이상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훈석이 말마따나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듀얼이 시작되고……"
정말 죄송합니다. 감독님. 이미 프로게이머로서 수명이 끝났다고 평가받는 저를 팀의 주축멤버로 불러주시고. 오늘에 있기까지 만들어주신 은혜는 짐승이 아니라면 반드시 갚아야 할 터이지요. 그리고 훈석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나 나나 군대를 다녀오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찬밥 신세면서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피시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견뎌낸 시절을. 진정, 네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는 것을 나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너희들. 팀의 대표멤버랍시고 전성기가 지났다는 우리들 때문에 이렇다 할 스폰서도 못 구하고 감독님과 사모님의 뒷바라지로 고생하면서 오늘날까지 함께했는데.....미안하다. 이럴 수밖에 없구나.
"설령 듀얼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예선부터 다시 도전하면 될 것입니다. 지난 날 해온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더 이상 견뎌낼 힘이 없습니다. 이 김형준이라는 이름은, 이 몸뚱아리는 더 이상 프로게이머로서 생명력을 상실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형!"
"이 바보 자식아!"
성인과 장수의 짧은 부르짖음과 동시에 형준의 눈앞에 불꽃이 타올랐다. 훈석이 내지른 주먹이 형준의 안면을 강타했던 것이다.
"우리의 약속이 그렇게 쉽게 구겨지는 종이쪽이었냐? 서른이 넘어도 마흔이 넘어도 마우스와 키보드를 놓지 말자던 우리 약속이……이 멍청한 자식아!"
격렬한 고함소리와는 달리 훈석의 눈에서는 이미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술에서 흘러드는 찝찔한 피를 느끼면서도 형준은 바닥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천정의 형광등을 올려보고 있었다. 선명했던 형광등의 불빛이 서서히 어지럽게 난반사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내겐 없어.
눈가를 적셔드는 눈물기를 어쩌지 못하는 형준의 몸이 땀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는 손길에 의해 서서히 일으켜 세워졌다. 흐려진 형준의 눈가에 강인한 인상의, 하지만 눈가에는 어쩔 수 없는 물기가 맺혀진 장 감독의 얼굴이 들어섰다.
"그래……알았다. 잘 알았다."
장 감독의 목소리에도 짙은 쇳소리가 갈려들고 있었다. 아직도 분을 참지 못해 식식거리는 훈석을 제지하는 성인과 장수의 눈에도, 그리고 인태, 경환, 동훈의 눈가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자. 기사단 일동!"
가득 잠겨버린 목소리였지만 기운이 담겨있는 장 감독의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전직 기사단 주장이었던 김형준의 은퇴식을 시작한다. 장소는 저팔계 고기집. 열외인원은 없다. 불참자는 기사단에서 퇴단조치한다. 지금 즉시 실시!"
"……"
"왜 대답이 없나? 패배한 기사보다는 패기 없는 기사가 더욱 불명예스럽다는 것을 모르나!"
"옛썰(Yes, SIR)!"
이십 평 남짓한 실내가 한순간 터져나온 표호로 들썩였다.

"가자, 김형준. 기사단 감독으로서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네가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온다는 것도 불가능이었다. 이렇게 초라하게 너를 보낼 수 밖에 없는 내가 참 밉구나"
감독님. 형준은 장 감독의 어깨에 무너지듯 얼굴을 기댔다. 미미하지만 장 감독의 어깨도 흔들리고 있었다. 훈석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팀 연습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형준과 장 감 독은 서로를 의지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2-2 언제나 이별은 눈물로……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면서 모두의 머리 위로 매캐한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소주병이 무서운 속도로 비워지고 잔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테이블 한 가운데로 쨍, 부딪혔다.
앞서의 격분은 이제 사라진 듯 훈석은 아예 몸을 형준에게 기대고 있었다. 취기는 아니리라. 아직도 훈석의 눈가에는 짙은 물기가 어려 있었다.    
"자, 이젠 송별사를 해야지. 우선 막내 성인이와 장수부터 시작해라."
철인 장 감독도 목소리에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져 있었다. 이제는 취기가 배어드는 듯 다소 몸을 흐느적거리며 성인과 장수가 일어섰다.
"주장, 아니 형준이 형. 비록 형은 이제 마우스를 놓겠지만…… 언제나 우리 뒤에서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마치 루크에게 오비완과 요다의 혼이 함께 해준 것처럼 말입니다. 형은영원한 우리 기사단의 초대 주장임을 감히 선언합니다."
영화 매니아 성인의 말이 끝나자 뒷머리를 긁적이며 장수가 뒤를 이었다.
"지는 저너마처럼 달변가는 못 됨니더. 하지만....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셨음 함다. 지가 기사단에 가입한 것은......형의 프로토스에 반해서였심다. 지는 비록 전패를 하더라도 형처럼 프로토스 유저로서 지속 달겨들검다. 저글링을 뭉개불고 마린을 뽀샤부리겠슴다."
  고맙다.
  형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처음으로 평온한 웃음을 보였다. 하루 종일 그를 지배하던 독기가 걷혀지고 프로토스의 구도자라는 별명에 걸맞는 차분함을 그는 되찾고 있었다.

"다음은 인태와 경환이, 그리고 동훈이."
장 감독이 말하자 세 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기어이 인태는 다시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남자답지 않게 곱상한 외모와 가느다란 팔다리로 여성저그라는 별명을 얻은 인태. 눈물도 많고 정도 많은 그였기에 유독 따랐던 형준이 떠난다는 것이 그의 수도꼭지 눈물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울음을 터뜨리는 인태를 보며 난감해하던 경환이 한번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차라리 형이 이번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전패로 16강 탈락을 했다면, 그래서 실력부족임을 누구나 인정한다면 형의 결정을 이해할겁니다. 누구도 패배를 밥먹듯이 하는 프로게이머를 동료로 두고 싶어하는 게이머는 없을테니까요. 정말 그랬다면 어쩌면 제가 먼저 형에게 그만두시라고 경우 없는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경환도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각진 날카로운 눈가로 실금같은 눈물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누가 형에게 프로게이머로써 실력이 없다고 지껄일 수 있을까요. 8강에 진출한 유일한 토스 유저가 누구였습니까. 또 8강에서도 2승 1패 동률이 나와 재대결끝에 탈락을...그것도 다잡은 경기를 놓친 것을 보면서 누가 김형준이 저 녀석, 프로게이머로써 자격상실이야, 라고 씨부릴 놈이 누가 있겠습니까. 억울합니다. 솔직히 형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그만두겠다니요. 저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을 겁니다. 정말 저 개인적으로는 형의 은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경환은 열변을 토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잔을 그대로 비워냈다. 동훈은 분을 삭이지 못해 들썩거리는 경환의 어깨를 한 번 만져주고는 입을 열었다.
"앞사람들이 좋은 말은 다 해버려서 무식한 저로써는 별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 질문을 하나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동훈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형준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왜 프로토스를 택하셨습니까. 프로들 세계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프로토스를 고집해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테란으로 배신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쇠고집을 부려온 형의 속내를 알고 싶습니다."
"그건……"
형준은 동훈의 얼굴을 정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너희에게 줄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구나.
"사람들은 프로토스의 매력을 대부분 강력한 힘과 마법. 그리고 소수정예적인 측면을 가진 전략전술이라고 하지 왜 유명한 말이 있잖아 <프로토스의 낭만>이라는. 하지만 내가 본 프로토스는 영웅이되 낭만보다는 비극적인 영웅이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해. 솔직히 내가 프로토스를 택했던 것은 오리지널 싱글플레이 미션에서 볼 수 있었던 페닉스와 태서더 때문이야."
형준에게 기대어 술잔을 비우던 훈석이 얼굴을 들어 형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식...또 그 연설을 하려는 모양이군, 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피시방에서 폐인 생활을 하다가 어쩌다 영미가 돼지갈비와 소주를 사주는 날이면 내가 술김에 떠들던 게 이 이야기였지.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미의 기억에 잠시 흐려지는 마음을 애써 수습하며 형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페닉스와 태서더는 프로토스의 영웅이지. 하지만 페닉스는 결국 암살당하고 태서더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오버마인드를 제거하지만 영구한 승리를 얻어내진 못했어. 그저 일시적인 휴전상황을 불러왔을 뿐이야. 시대를 바꾸지 못하는 영웅. 너무 비극적인 인상이었어. 그러나 페닉스는 망가진 자신의 몸을 드라군에게 맡기면서까지 자신의 종족을 위해 헌신하지. 그리고 태서더는 자신의 죽음으로 승리를 얻어내진 못하지만 오랜 반목으로 등을 돌리고 있던 다크템플러들을 전장으로 불러왔어. 자신들을 희생함으로써 종족을 지킨다 그리고 난국에 처한 종족을 부활시킨다. 그 지독한 이타주의. 헌신적인 모습. 나 역시 인간이라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그런 프로토스 종족의 희생정신이 나를 감동시켰던 거야. 그 감동이 나에게 프로토스를 선택하게 했고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이지."
어떻게 부족하나마 답변이 되었을까? 라는 형준의 말에 동훈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장 감독은 묵묵히 자신의 술잔을 손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장 감독의 술잔이 비었음을 확인한 장수가 놀란 토끼 눈으로 잔을 채웠다.
"훈석이는 할 말이 있나?"
장 감독이 기다렸다는 듯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훈석은 장 감독과 형준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감독님 제가 그랬잖습니까. 형준이 이 녀석은 프로게이머보다는 대학 강사가 어울린다구요. 이리저리 말빨 팔러다니는 보따리 장사. 여대생들을 살살 구슬리는 젊은 총각 강사가 어울린다구요. 괜히 감독님이 끌여들여서 오늘 이 사단을 내버린 게 아닙니까?"
그것은 야유라기보다 하소연이라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죽마고우는 아니었지만 노매너의 훈석과 굿매너의 형준은 서로가 너무 다르기에 오히려 더욱 친해질 수 밖에 없었던 찰떡궁합 친구였다. 그것을, 훈석의 지금 들리는 말 속에 숨어있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훈석의 말에 끼어들려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내 차례인가."
장 감독이 자신의 입술을 두툼한 손등으로 훔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뭐 딱히 할 말은 없고……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한곡 뽑고자 한다. 불만있나."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모두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다른 자리의 손님들과 종업원들이 놀라면서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전에 보았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나온 노래인데 집사람이 너무 좋아해서 점수 좀 딸려고 배웠던 노래다."
철인답지 않게 살짝 머쓱한 웃음을 짓던 장 감독은 이내 자세를 가다듬고는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고 두 손으로 감싸쥐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릅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람이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정호승 시/ 김광석 노래『부치지 않은 편지』

다소 불안한 음정과 아슬아슬한 목청이 곳곳에서 피식 피식 웃음이 터져나오게 했지만 노래를 끝낸 장 감독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땀방울이 배어있었다.
부라보!  감독님 원츄입니다! 모두들 환한 웃음과 함께 힘찬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때 훈석이 장 감독의 손에 들린 숟가락 꽃은 소주병을 거의 빼앗듯 가져오더니 형준에게 들이밀었다.
"쨔샤. 감독님이 멋진 송가를 불러주셨는데 너도 화답을 해야 할거 아냐"
그런가. 형준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박수와 함께 노래를 종용하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감독님의 노래는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좀 청승맞지만 나름대로 불러보겠습니다."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흠흠, 잔기침을 한 형준은 한손으로 마이크 대용인 소주병을 쥐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노래를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대와 헤어지게 될 거요.
슬프겠지만 그립겠지만 부디 노여워 마오.

가난한 마음이야 위안을 바라지만.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어찌할 수 없나 보오.

못 된 못 된 나를 잊어 주기를..
모두 모두 남김없이 모두

제발 제발 눈물로 앓지 말기를
어서 어서 나아지길 비오
                            - 이승환『당부』

노래를 부르는 형준의 손을 가만 훈석이 잡았다. 힘이 가득 느껴지는 훈석의 손. 참으려 했지만 또 다시 배어나오는 눈물에 형준은 가만 눈을 감았다. 한번 더!를 외치는 장 감독의 목소리에 형준은 또 한번 노래를 시작했고 그것은 서로 손을 잡은 모두의 합창으로 번져나갔다.
고맙다. 훈석아. 그리고 너희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렇게 떠나는 저에게 욕을 퍼붓는 것이 차라리 속이 시원할텐데. 이렇게 마지막까지 은혜만 입고 떠나는군요. 그리고 기사단.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존재중의 하나였던 너. 그래, 마지막 날까지 절대 잊지 않으마. 자랑스럽게 너의 이름을 가슴에 묻겠다.
합창은 계속되고 있었다.
                              
                                         *****

여기가 어딘가. 형준은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어둠만이 존재했지만 차차 시야가 걷히면서 자신이 택시에 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뒤덮는 지독한 취기 속에서도 다시금 선명한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계속된 합창. 주위 손님과의 가벼운 실랑이. 우리가 누군지 알아! 세계최고의 프로게임단 기사단이란 말야! 난 세계최고의 감독이고. 장 감독의 고함. 그리고 택시에 올라타려는 자신에게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던 훈석. 눈을 부릅뜨고 어깨를 부셔져라 두들기며 "너 임마 보란 듯이 잘 살아야 된다. 연락 꼭하고"만 되풀이하던 장 감독의 얼굴. 기사단 주장에게 경례!를  외치던 인태, 경환, 동훈, 성인, 장수. 그리고 현기증을 동반하는 영미의 얼굴.
그제서야 자신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형준은 느꼈다. 언제나 자신에겐 가장 소중한 것이라 생각해왔던 것들이기에. 그것들을 포기하고 상실하는 순간. 더욱 그 소중함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쨍, 다시금 파고드는 현기증에 그는 머리를 짚고 눈을 감았다. 그때 바지 주머니의 핸드폰이 우우웅 떨기 시작했다.
형준은 핸드폰을 꺼내들고 액정창에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선을 집중시켰다.

부재중 문자 메시지 2통이 도착했습니다.

무의식중에 형준은 문자메세지를 확인했다.

그래. 형준씨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형준씨에게 도움이 된 것이 무엇이었을까. 가면서 곰곰 생각해봤어 답이 안 나오지 뭐야. 프로게이머란 것이 얼마나 형극의 길인지 빤히 형준씨를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알았을텐데. 끝내 도움이 못 되는 내가 너무 한심해. 어쩔 수 없지. 서운하지만 그렇게 형준씨가 원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바보야 그게 아니란 말야. 형준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것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어 있었다. 운전하던 기사가 난처한 눈으로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지켜보는 듯 했지만 형준은 더 이상 자신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하지만……. 기다릴게. 형준씨가 다시 나를 부를때까지. 그래도 형준씨의 곁에 내가 깃들 자리가 남아있다면. 기다릴게……바보같은 기집애라고 너무 화내지는 말아줘 ㅜ_ㅜ

아니란 말야.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너는 내가 마음속에서 물 주어가며 소중하게 키운 화분 속의 꽃같은 여자인데. 이 사나운 놈이 파렴치한 패악을 부린건데. 네가 왜 고스란히 상처를 다 받으려 하니. 이 바보야.
형준은 이제 마음 놓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에게는 이미 기사가 낭패한 표정으로"손님 무슨 일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토록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리고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오늘 완벽한 패배자였다.
                                       (3부 REBIRTH/THE SACRIFICE로 이어집니다)

꼬리말- 안산에 있는 친구집에서 모임을 갖고 어제 저녁에 돌아와 새벽 1시부터 시작한 글이 이제서야 완성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허접한 스타초보가 쓴 글이기에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쓸 가능성이 매우(ㅜ.ㅜ) 높습니다.
따끔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3부 제목이 에반겔리온과 비슷한데(사실 표절입니다ㅜ.ㅜ) 능력부족임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 _)(^//^)
참!!!8월 13일에 올라온 글 가운데 태극기 관련글에 제가 좀 장난스러운 댓글을 달았었는데(친구들 모임 나가기 직전) 어제 돌아와 확인해보니 글이 지워진 듯 싶습니다. 혹 제 댓글 때문에 쓰신 분이(쓰신 분 닉이 기억이 안 나다니ㅜ.ㅜ)기분이 상하셔셔 지우셨거나 제 댓글로 인해 불상사가 생겨 지워졌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혹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제 경솔한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과 단체는 실제 인물과 단체와는 하등 관계가 없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온게임넷 부커진이 그랬습니다(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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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15 04:03
수정 아이콘
=_= 은퇴라 .... 후후 다시돌아오겠죠? 아닌가 -_-;;
허브메드
03/08/15 10:13
수정 아이콘
..어..
몽-패-랜님이 부커진 아니셨나요?
마요네즈
03/08/15 10:58
수정 아이콘
제다이의 힘으로 다시 복귀를 하길ㅡㅡa
3부 기대하겠습니다~^^
몽땅패하는랜
03/08/15 14:32
수정 아이콘
부실한(신소설류의 연애담ㅜ.ㅜ)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허브메드님// 저같은 사람이 부커진이 될 턱이 없습니다^^
마요네즈님// 써놓고 생각해보니까 점점 스타워즈틱 해진다는 사실에 망연합니다(실력의 한계입니다).
킬번님//스포일러 성 글을 올릴 수 없는 제 처지를 이해해 주십시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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