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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07/07 03:20:37
Name 네로울프
Subject 미녀와 야수
이 단편은 제가 예전 천리안 추리동에서 활동할 때 딱 한편 썼던
단편 추리소설입니다.  
거의 습작수준의 작품이고 이틀만인가에 써낸 거라서 어디
내놓기가 그렇습니다만 .....
옛날 글들을 정리하다 문득 올려볼까 하는 생각에...
역시 덥고 잠 안오는 여름 밤엔 추리 소설이...^^;;


*** 미녀와 야수 ***

“오늘 아침 새벽 경춘 가도 옆의 숲길에서 또 다시 이십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새벽 등산을 나섰던 등산객에
의해 발견된 피해자의 신원은 현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시체는 유기 된지 이미 일주일 이상이 지났
으며 몸 여기 저기에 감금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원인모를 이십대 여인 납치 살인 사건은 벌써
네번째 희생자를 ……”
방문이 열리며 저녁 어둠이 스며들어온 방안에 거실의 불빛이
밀려들어왔다. 강식은 문을 닫고 텔레비전의 전원 스위치를
눌러 껐다. 가볍게 어깨와 목을 풀던 강식은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가 가득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아가야. 옷을 갈아입어야지."
"아빠가 아주 예쁜 봄 옷을 사왔단다."
상인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보라색 상자에서
옷을 꺼냈다. 하얀 레이스가 달린 노란 색의 원피스는 바
비 시리즈에나 나올 법한 옷이었다. 두 손위에 가지런히
옷을 얹어 보여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표
정을 일그러뜨렸다.
"마음에 들지 않나 보지? "
그의 눈이 섬뜩할 만치 차갑게 식어져 갔다.
"이 옷은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이었어."
"어떤 여자라도 이 옷을 입고 봄 거리를 자랑스럽게 걸
어 다니고 싶어 할거야."
"그런데 넌 고맙다는 말조차도 없군. 마음에 안 들더라도
미소 정도는 지어주어야 하지 않아?. 입든지 말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
상인은 옷을 팽개치듯이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밖에서 신경질 적으로 세개의 경첩에 자물통을
채우고는 거칠게 잡아 당겨 제대로 채워졌는지를 확인했다.
나빠진 기분을 주체할 수 없는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던
그는 옷장을 열어 젖히고 죽 늘어선 옷걸이에서 얼룩무늬
군복을 꺼내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 옷은 그가 석달 전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원래 그는 미 육군의
전투복을 가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모델로 전투복이
교체되었다는 말을 듣고 두어달여를 수소문한 끝에 새로운
모델로 바꾼 것이었다.
전투화의 끈을 피가 안 통할만큼 바짝 조은 그는 마지막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거울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시선 마
저도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을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는 제식 형태의 뒤로돌아를 해서 거울 앞을
떠났다.
상인은 거실 한 귀퉁이에 있는 책상에서 군복을 입은 체로
최신 미국 육군의 탱크 프라모델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깨 한번 뒤척이지 않고 똑 같은 자세로 손만 움직
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낡은 철제 동상에 비둘기가 내려
않듯 저녁의 어둠이 그의 어깨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대로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몸이 꿈틀했다.
상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튼튼한 경첩과 두꺼운 세개의
자물쇠로 채워진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문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가볍게 문이 조금 열렸다. 방안에도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져
음산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태고의 그것 같은 침묵이
방안 가득히 고여 있었다.
열린 틈으로 상인이 쓴 미군 모자의 챙이 삐죽 돋아났다.
"아니. 자기야 아직 그대로 있는 거야?"
"화났구나.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자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자기가 너무 그러니까 울컥
마음이 상했던 거야. 미안해."
"그래. 이 옷 한번 입어볼래?. 아주 이쁠거야. 자 내가 입혀
줄께."
상인은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천천히 벗기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잠시 매만져 주었다. 그리고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조심스럽게 노란 색 원피스를 머리 위에서 부터 끌어내렸다.
옷안에 갇힌 그녀의 팔을 억지로 빼내느라 그가 힘을 쓰자
그녀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알몸이 된 그녀의 여리고
가벼운 신체를 한 참 동안이나 내려다보던 그는 조심스럽
게 옷을 갈아 입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마디의 말도 건네
지 않았고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으며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묵묵히 그녀의 옷을 갈아 입히는 상인의
약간 거친 듯한 숨소리만이 그 시간을 채워갔다.
옷을 다 입힌 후 상인은 미소가 깃든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미소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딱딱한 그의 얼굴 근
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왠지 어긋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표정엔 만족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거봐. 근사하잖아."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널 버린 놈이 이 모습을 본다면
뼈저리게 후회할 걸."
"그렇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누가 그 으슥하고 외진
곳에 나왔겠어. 우리 메리의 무덤이 떠내려갈까봐 나서긴
했지만 비와 어둠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나도
처음엔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 메리의 무덤 옆
에 쓰러져 있는 너를 본 순간 난 신이 메리 대신에 내게
널 보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밤새도록 꼭 껴안고 나의
체온으로 널 살려냈을 땐 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났단
말야. 아무도 가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가지 않았다면 넌
거기서 그대로 죽어갔을거야. 그렇지?"
상인이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껴안자 다시 고통스런 소리가
그녀의 몸에서 새어나왔다.
"당신 너무 누어만 있었던 거 같아. 바깥의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자 내가 창문을 열어줄테니까 햇빛을 좀 쬐도
록 해."
그는 커튼을 젖히고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방에 들도록
창문을 가득 열어 젖혔다. 하지만 해는 이미 기울어져 버려서
방안으로 넘어 들어온 것은 어둠과 스산한 바람뿐이었다.
그는 쿠션을 벽에 붙이고 그녀를 일으켜 거기에 기대게 했다.
"난 잠시 나갔다 와야해. 심심하더라도 혼자 있어야 돼.
알았지?"
등을 돌려 나가던 그는 멈칫 돌아서서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매만져 주었다. 그가 매일 감겨주고 갖은 신경을 쏟은 터라
그녀의 머리는 아주 부드럽게 찰랑거리고 매끄러운 빛이 났다.
그가 나가고 다시 자물통을 채우는 소리가 지나간 후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스르르 기울어졌다. 귀 뒤쪽
으로 잡아 매두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려버렸다.

강식이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무려 오일 만이었다. 그 동안
그는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창가에만 매달려 있었다. 안구가
매말라 따가워 오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지만 그는 눈도
제대로 깜박이지 않고 렌즈만 뚫어지게 쳐다보았었다. 언제 창
문이 열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밤에도 그녀의 방은 불이 켜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고 창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강식이 그녀를 처음 보게 된 것은 한달 여 전 쯤이었다. 길 건너
편에 사는 여고생의 방을 망원경으로 몰래 훔쳐보는 게 그의 유
일한 낙이었었다. 제법 대담한 그 여고생은 창문을 활짝 열어넣
고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때로 더운 날엔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씨름하다가 저녁이
되어 그 여학생이 귀가할 때쯤이면 방에 불을 끈 채 창가에
자리를 잡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망원경으로 감상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그는 아직 귀가하지 않
은 여고생의 방을 살피다 지루해져 다른 집의 창문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법 떨어져 있어 망원경으로도 겨우 창문
전체 정도만 보이는 방에 시선이 닿았다. 거기엔 한 여자가
있었다.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아주 창백한 얼
굴을 한 여자였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그녀의 고개가
반대로 젖혀져 있어서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하얀 그녀의 얼굴과 긴 머리카락은 그의 가슴에 박혀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가늘고 길어 보이는 그녀의 유백색의
팔은 그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몇 십분 동안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했다. 그러다 그녀의 몸이 벽에 기댄 채 바닥
쪽으로 미끄러지듯 무너졌다. 아주 힘없이 어떠한 저항이나
놀라움도 없이 천천히 규칙적인 속도로 무너져갔다. 그것은
도대체 사람의 몸짓 같지 않았다. 놀란 강식은 몸을 치켜들고
그녀를 더 자세히 보려 했지만 망원경의 성능으로는 약간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리고 잠시 후 웬 남자의
손이 창문을 닫아버리고 커튼을 쳐버렸다. 그 후 부터 강식은
가슴앓이에 빠졌다. 도대체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부드러운
머릿단, 희디 흰 팔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밀가루로
빚은 듯이 하얀 그녀가 그의 꿈속에 나타났을 때도 그가 그녀를
바로 쳐다보려 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깊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허둥거리며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만 움켜지고 말았다. 그는 매일 밤 비슷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를 잡으려고 만 하면 허공이나 바닥으로
그녀가 사라지는 꿈이었다. 어느새 그의 눈엔 핏발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그는 그녀의 창을
살피는 게 일이 되었다. 프로그래밍 중이던 게임도 젖혀두었다.
하지만 그녀의 창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며칠만에 어쩌다 창이 열리는 날에도 때로는 그녀가 덮은 이불
한 귀퉁이만 보이기도 했다. 어쩌다 그녀의 팔이라도
조금 드러나 보이는 날이면 그는 너무 기뻐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지기 까지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새 남자의 손이
창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는 그의 머리를 점령한 그녀에
대한 애착이 깊어짐에 따라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그 남
자에 대한 적개심도 커져갔다. 그녀는 이제 강식에게 높은
성에 갇힌 공주가 되어 있었고 그 남자는 그녀를 가두고
고통을 주는 파렴치하고 사악한 괴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아주 파리했다. 약간의 움직임도 없었다.
허리 아래까지 드러난 그녀의 몸에는 노란 색 옷이 입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은 여전히 유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처럼 스르르 쿵하고 그녀의 몸이 쓰러졌다. 강식의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어딘가 깊이 아픈 게 틀림 없어.'
'저렇게 나무토막처럼 어떤 저항도 없이 쓰러지다니...'
갑자기 어떤 결심이 강식의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어때? 기분 좋지?"
상인은 물을 끼얹어 그녀의 가슴팍에 묻어 있는 비누 거품을
씻어 내렸다.
"당신 몸은 너무 매끄럽군. 아! 이 하얀 살결 하며."
그는 샤워기로 그녀의 몸을 구석 구석 씻어 내리고는 커다란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두팔로 그녀의 몸을
껴안아 들어 올렸다. 그녀에게서 다시 힘겨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 잠시만 ...내가 편안하게 뉘어줄께"
이불 위에 그녀를 눕힌 강식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자그마하고 동그란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에게선 아무런 말도 어떠한 반응도 없이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상인을 외면하고 있었다.
상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져 갔다.
"이봐. 왜 당신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지?"
"당신은 이제 살아났어. 죽어가던 당신을 데려와 내가 살려
냈단 말이야."
"이 매끄러운 살결, 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봐. 다 내 덕분이야."
"알아? 그런데도 나한테 대한 보답이 고작 이거야?"
"왜 한마디도 하지 않지? 날 보란 말이야. 날 보고 웃어보란
말야."
상인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자 그녀의 몸은 고통에 찬
소리를 내며 그에게 끌려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흠칫하며
상인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을 메워갔다.
한참을 숨을 고르던 상인은 그녀의 몸을 이불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리고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후..미안해. 또 내가 잠시 흥분했나 봐."
"내가 흥분을 잘하는 걸 알잖아 당신도."
"당신이 나한테 너무 냉정하게 구니까 가끔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메리도 그랬어. 내가 그렇게 예뻐해 주었는 데도 날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지. 그날도 난 화를 안 내려고 했어.
그런데 껴안아 주려는 날 할퀴어 버리는 거야. 난 너무 자존심이
상했고 배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메리는 응당히 벌을 받
아야 했던거야. 하지만 메리를 묻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울었
는지 알아?"
"정말 사랑했으니까."
상인은 그녀의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
를 그 위에 고였다.
"오늘은 당신이랑 같이 자고 싶어. 당신도 그러고 싶지?"
" 자 내가 편안히 자게 해줄게."
"난 당신을 정말 사랑해."
상인이 가볍게 끌어안고 귀 옆에 얼굴을 묻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한참을 둘러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 방의 창문은 길에선
너무 높아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지 않는 한 닿을 수 없었다.
한참동안 주변을 서성거리며 고민하던 강식은 집 대문이 있는 쪽
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창문이 나있는 쪽과 대문이 있는 곳은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골목을 제법 돌아가야 했다. 비슷
비슷한 집들에 비슷한 대문들이었지만 강식은 대번에 그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대문 앞까지 걸어가서 틈 사이로 집을
엿보곤 다시 돌아 나와 이십여미터 쯤 떨어진 어떤 집 앞 대문의
입구에 몸을 숨겼다.
강식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남자의 이름은 이상인 이었다.
그는 이십여년 넘어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지만 5년전에 그의 어머니가 죽은 이후론 혼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혼한 사실도 없었으며 이웃들
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바에 의하면 동거하는 여자나 또는
출입하는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두블럭 쯤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인형 가게를 하고 있는 그는 낮 동안 아주 짧은
시간만 가게를 열고 있었다. 이웃들에 의하면 아무도 그의 집에
가본 적은 없으며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다만
1년쯤 전까지 개가 한 마리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가끔 마당으로 나온 개가 대문을 발톱으로 긁으며 짓는 소리를
내서 알게 된 것이라 한다. 마당에 개가 나오면 그가 서둘러
나와서 꾸짖고는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고 한다.
강식의 의문은 점점 커져갔다.
'그럼 그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웃도 아무도 모르는 그녀는 그와 어떤 관계일까?'
그녀는 언제나 그 방안에만 있는 듯했다. 그녀가 가끔이라도
출입을 한다면 이웃 중 누군가가 분명 보았을 터이다.
문득 강식의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갇혀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남자에 의해 그 방에
가두어져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여린 팔 그리고 힘없이 쓰러져버리는 것들의 이유가 명확해져
왔다. 어쩌면 그는 어디선가 그녀를 납치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연히 그의 집에 찾아온 그녀를 그가 가두어버린 것인
지도 모르는 것이다. 강식의 심장이 요란하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하기도 싫은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먼 외국 어떤 나라
에서 한 남자가 십여 명의 여자를 납치해 죽이고는 그 시체들을
방부처리해 집에 숨겨두었다는 이야기 였다. 똑 같은 일이 우리
나라에 아니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강식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방부 처리를 잘했다 하더라도 시체가 그렇게 온전한
모습일리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녀는 아주 쇠약한 상태일 것이
다. 아마도 어떤 약물 같은 걸로 그녀의 기력을 약하게 해 놓아
빠져나올 수 없게 해놓은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이 쓰러지는 것들도 모두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녀에 대한 연민과 그를 가둔 그에 대한 적개심이 점점 커져
가던 어느 날 강식은 그녀를 구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일이 번거로워지고 미리 눈치를
챈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 지도 모르는 것이다. 몇일간을 그녀의
아니 그의 집을 꼼꼼히 탐문한 강식은 그가 인형 가게를 열기
위해 집을 비운 동안에 그녀를 구출해 내기로 했다.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아주 규칙적이었다. 아침 열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네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간 사이에 그가 집으로 돌아
오는 경우는 없었다.
오늘도 그는 정확히 열시에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잠그고 세심
하게 잠금 장치를 확인한 후 그는 집 앞을 떠났다. 머리를 조금
내밀어 살피던 강식은 그가 집을 나서자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만 급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던 강식은 잠시 흠칫했다.
골목 끝까지 갔던 그가 문득 고개를 돌려 이 쪽을 바라본 것이다.
순간 들킨 건가 하는 생각에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강식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골목을 꺽어
사라져버렸다. 강식은 등어리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끼며 겨우
숨을 돌리고 스포츠 가방을 똑바로 둘러맸다. 커다란 스포츠 가방
안에는 절단기와 드라이버, 줄톱 등의 연장이 들어있었다. 그가
그녀를 가두어 둔 것이라면 분명 여러 가지 방비를 해 놓았을 거란
생각에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조심스럽게 골목 주변을 살핀 강식은 그의 집 담을 넘기 시작했다.
담위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그는
가방 안에서 두터운 담요를 꺼내 담위에 걸쳤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고 담위로 몸을 끌어 올렸다. 별로 더운 날씨가 아닌데도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담위로 몸을 올린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담
아래는 작은 화단이었다. 가방을 먼저 던져놓고 훌쩍 뛰어 내렸다.
그리고 재빨리 담 위에서 담요를 거두었다.

가게의 셔터 문을 올리던 상인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며칠 전 부터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 동안 전혀 내왕이 없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느낌없이 무덤덤하게
그를 대하던 이웃들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다른 때 보다
더 유심하게 그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것도 뭔가 캐내려는 듯한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곤 했다. 집을 나설 때마다 뒷덜미가
근질거릴 정도였다. 여느 때처럼 무시하려 했지만 무언가가 자꾸만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집을 나서면서 부터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 끝까지 갔다가 그가 한번 뒤돌아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골목 반대쪽 끝에 무언가 까만
점 같은 것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그냥
지나쳐 왔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셔터를 반쯤이나 끌어올렸던 그는 다시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 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같이 불안한 마음으로는 가게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긴 일자 드라이버로 어렵게 현관문의 열쇠를 딴 강식은 이마에 땀을
한번 훔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안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 가운데 탁자에
놓여있는 장난감 탱크였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아마도 상당히 공을 들인 듯한 프라모델이었다. 눈을 들어 집안을
살피던 그의 몸이 일순 멈추면서 바르르 떨렸다. 두꺼운 자물통이
세개나 채워진 방문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무언가 울컥하고
그의 마음에 치솟는 게 있었다. 방향으로 봐서 그가 훔쳐보던 그 방이
분명한 듯 했다.
그 순간 그는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대로 몸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영원 같은 아득한 시간이 거실 공기에 눌러 붙듯 흘러갔다.
강식은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서른 여덟 번 째의 숨을 세고 나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간 그는 아주
작게 문을 두드려 보았다. 문안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아까
보다 좀 더 세개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문안에선 어떤 기척도 없었다.
갑자기 미칠 듯한 다급함이 몰아쳐 왔다. 그는 있는 힘껏 문을 두드
렸다. 고함도 마구 지르기 시작했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당신 거기에 있잖아요. 대답을 해요. 이봐요."
방안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강식의 마음에 노도 같은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찢을 듯 거칠게 가방을 열어 젖힌 그는 절단기를 꺼냈다. 그리고 맨위
의 자물통에 이빨을 맞추고는 힘껏 눌렀다. 끼잉 하는 듣기 싫은 금
속음이 메아리치며 절단기가 미끄러졌다. 순간 힘을 주느라 불안정한
자세로 경직되어 있던 몸이 중심을 잃으면서 그는 바닥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단단히 부딪혔는지 고통이 퍼덕거리면서 몸안을 휘저으며
파고들었다. 입술을 힘껏 깨문 채 아픔을 참는 그의 입에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고통이 더해져 그의 마음은 다급함 불안감 암울함이
마구 교차되고 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자물통 고리에
절단기를 맞추고 온 몸을 싫어 힘껏 눌렀다. 가벼운 소리가 나며 고
리가 끊겨 나갔다. 잘려진 자물통을 비틀어 경첩에서 빼낸 후 그는
두 번째 자물통의 고리에 절단기를 갖다 댔다. 이번에도 쉽게 고리는
잘려져 나갔다. 두 번째 자물통을 비틀어 빼내면서 그의 입에 순조로
움에 대한 미소가 약간 어렸다. 마지막 자물통으로 절단기를 옮기던
그는 갑작스런 문소리에 급히 몸을 돌렸다. 환히 열려진 현관문 앞에
그가 서 있었다. 헉하고 짧은 숨이 강식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둘 사이에는 찰나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상인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상인은 저돌적으로 몸을 던져왔다. 상인의 어깨에 가슴을
강타당한 강식은 속절없이 몸이 튕겨지며 문에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경첩의 남은 부분이 등어리의 살을 파고 들어왔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상인의 두손이 강식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완력이
었다. 상인은 도저히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목에 느껴지는 심한
압박감에 무어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던 강식은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내리니 상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부딛
혀 왔다. 문득 그 팽창해 가는 눈동자에 그녀의 파리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러자 강식의 마음에 분노가 다시 휘몰아쳐 왔다. 근원을
알수 없는 힘이 솟아나왔다. 강식은 손에 든 절단기로 상인의 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한번 두번. 세번째 내려치는 순간 뻐걱하고
절단기와 상인의 다리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상인은 고통스런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의 손은 어느새 강식의 목에서 흘러내
려져 있었다. 목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지자 강식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허리깨 쯤에 수그려진 상인의 머리가 보였다. 그걸 보자
그에 대한 미움이 쏟구쳐왔다. 강식은 절단기로 힘껏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상인의 몸이 푸들거리면서 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절단기의 무겁고 두터운 헤드가 상인의 머리를 파고들자
그의 몸은 천천히 무너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이 잠시 푸덕
거리더니 멈췄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잠시 멍한 상태로
서 있던 강식은 힘없이 절단기를 들어올려 두 손으로 잡았다.
그 순간 현관 쪽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울려왔다.
"꼼짝마. 손들어."
강식의 눈 속으로 총을 겨눈 경찰의 제복이 희미하게 쏘아져 들어왔다.

김순경은 이 장면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찰 준비를 하던 중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가 들어와 그는 급히
양순경과 차를 몰고 이 집앞으로 왔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고 있던 여자가 나와서 건너편 집의 담을
누군가가 넘는 걸 보았다고 했다. 어렵사리 양순경의 도움으로 담을
넘어 간 김순경은 안쪽에서 대문을 열어 양순경을 들어오게 했다.
양순경이 대문을 넘어서는 순간 활짝 열려진 현관문 안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억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허리춤의 총을 꺼내들고
급히 현관 안으로 뛰어든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쓰러져 있는 한 남자와
절단기를 두손에 들고 희미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또 다른 한
남자 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
부터였다. 그가 총을 겨누고 움직이지 말 것을 종용했음에도 불구
하고 절단기를 든 남자는 몸을 돌려 절단기로 그가 기대어 있던
문의 자물통을 자르려 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움직이지 마라고
소리쳤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양순경이 재빨리 달려가
남자의 팔을 뒤에서 비틀어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꺽어 남자를 꿇
여 앉힌 채 수갑을 채웠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김순경은 양순경의
재빠른 움직임에 감탄하면서 총을 내리고 거실로 올라섰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명백한
살인 사건이었다. 수갑이 채워진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절단기의
헤드 부분엔 약간의 피와 피해자의 것인 듯한 머리카락이 살점과
같이 붙어 있었다. 수갑이 채워졌음에도 절단기를 꼭 쥐고 놓지
않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무슨 말인가가 흘러나왔다.
"저 문을 열어야 돼요. 저 문 뒤쪽에 그녀가 있어요.
그녀는 죽어가고 있어요. 아니 어쩌면 저 자가 이미 그녀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빨리요. 그녀가 ..그녀가 날 기다리고 있어요."
이해되지 않는 그 남자의 말을 귀로 흘리면서 김순경은 문을 살
펴 보았다. 하긴 이상했다. 문에는 세개의 경첩이 달려있었고
맨 아래쪽에는 아직도 두터운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절단기로 잘라낸 듯한 역시 같은 크기의 자물통이 두개 떨어져
있었다. 양순경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양순경에게 뒷덜미를 잡
혀있는 남자는 자꾸만 문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김순경은 그의
손에서 절단기를 뺐어 들었다. 그가 놓지 않으려 하는 탓에
약간 실갱이까지 벌였다. 절단기에 경첩의 고리를 맞추고
힘껏 누르자 쨍하는 소리를 내며 고리가 끊어졌다. 남자의 말대로
정말 이 방안에 누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반쯤 열어 젖히자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이 보였다.
옅은 봄햇살이 두꺼운 커튼의 천을 뚫고 들어오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덕분에 방안은 약간 아스라한 느낌의 밝기가 감돌고 있
었다. 가구나 장식이 일체 없는 방안 가운데 휑뎅그렁하게 이불
이 펼쳐져 있었다. 가벼운 자주색의 이불은 그린 듯 네모 반듯
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모퉁이에 까만 머리가 삐
죽이 솟아나 있었다. 정말 누군가 있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법 소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불 속의 누군가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시체' 라는 단어가 김순경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김순경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내렸다. 이불이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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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boyz
03/07/07 05:21
수정 아이콘
와 +_+;;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천리안 추리동 자주가서 글 많이 읽었었는데 +_+(글쓰시는분들이 신기했었던-_-)
네로울프
03/07/07 21:49
수정 아이콘
헉..천랸 추리동 사람을 여기서 만날줄이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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