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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17 18:09
내용 중 100달러는 10만원을 약간 넘는 돈이죠. 전 개인적으로 정약용 선생이 꼭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인데, 아쉽게도 최근에 기사에서 인물의 변경은 없다고 한 것이 생각나네요.
05/04/17 18:26
수정하겠습니다. 최근 외세 독립의 한 방안으로 [표준시]30분 앞당기기 주장을 봤는데, 그것과 아울러 3자리수 단위로 ,찍는 것 한국처럼 4자리마다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달러=원으로 바꾸는 셈이 서툴러서 100달러=100만원이라고 했네요. 이 긴 글을 끝까지 보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05/04/17 19:23
만약 펌글이라면 펌글과의 구분을 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화폐 개선안에 대한 인물 설정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퍼오실떄 그 부분만 퍼오셨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ps 부분은 논제와 벗어나서 영 껄끄럽게 느껴지는군요.
05/04/17 21:57
세계 각국의 표준시 http://www.kriss.re.kr/time/time/wst.jsp
30분/45분의 표준시를 쓰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그 표를 보시면 전세계적으로 서머타임제를 쓰는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대한 정상시에 가깝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겠죠. 현재의 표준시는 실제 시간은 일본보다 30분 늦기 때문에 일본의 오전 6시가 매우 밝은데 반해 한국의 오전6시는 어둡게 되어 한국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30분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결과를 낳습니다. 요새 같이 [아침형 인간]이 중요한 시대에는 손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도 서머타임제를 부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aydreamer님// 링크 눌러보셨나요? 안눌러보셨나요? 기본적으로 ===으로 링크된 글의 요약본과 제 글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펌글은 당연히 [펌]이라고 씁니다. 저는 자긍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ps부분은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런 연상작용으로 덧붙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싸움을 중재할 때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하는 것을 알면서도 국가간에서는 그러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한쪽 주장만을 반복해서 들을 때 곧 세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05/04/17 23:13
사실 저도 어디까지가 펌인지 잘 구분이 되진 않습니다. === 전후에 인용 정보까지 명시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리고 몇 가지 이의 제기. 1. 김구는 실질적으로 분단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점이 결격 사유가 될 것 같습니다. 2. 거북선은 최초의 철갑선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그 전에 이미 노부나가가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죠. 하지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임은 틀림 없기에 화폐에 쓰이는 것은 찬성. 3. 독립 관련은 좀 반대입니다. 사실 온전한 우리 힘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기에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들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어쨋든 결론은 대체로 동의합니다.
05/04/18 00:04
기본적으로 글 전체는 저의 작문이고 링크의 요약을 제 글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 앞부분의 링크가 그 근거의 전체문장이고요 === 뒤가 제 순수 작문입니다.
거북선에 대해 하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6&dir_id=612&docid=76343 http://blog.naver.com/durure.do?Redirect=Log&logNo=80011935342 거북선의 원조는 금나라의 배라는 말도 있고, 티무르 말릭이 쓰던 배도 이런 구조고... 오다 노부나가의 철갑선도 이런 식으로 되어 있으니 태종13년 '왕이 임진강을 순시하는 중에 한 귀선이 훈련을 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는 오다노부나가의 철갑선이 실용적이었다면 왜 임진왜란에는 안썼는지 의문이 듭니다. 어쨋던 전쟁사에서 실제적으로 활용된 것은 이순신의 귀선 같네요. daydreamer님// 발췌 요약이 그리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전문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누르면 될 것이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요점만 정리해주는 것일 뿐인데요 뭐.. ps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논의를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불필요한 논쟁에 이를 수 있겠죠. 그냥 [잡담]이라 생각하시고 넘어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극히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개인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라 객관적 근거 제시하기도 힘든... 제가 여기서 더 알고픈 것은 [화폐 도안]에 들어갈만한 여성들..그리고 글에 나오지 않은 한국의 자랑스런 문물이나 인물은 누가 있는가 입니다.
05/04/18 00:25
라캄파넬라님//http://www.fusosha.co.jp/ 후쇼사 홈피고요. 그들이 한글번역해서 올린댔으니 올릴때까지 기다려보죠. 번역기 돌리시고요. 이 밖에 제가 본 책은 오사카 서적의 역사교과서입니다.(교과서 채택률 1ㆍ2위를 자랑하는 도쿄서적과 오사카서적) http://www.osaka-shoseki.co.jp/
후쇼사 교과서는 별 문제되지 않으나 도쿄와 오사카 서적은 점유율 50%가 넘어가기 때문에 이들 교과서에서의 왜곡은 큰 문제입니다. 한번 번역기로 돌려서 읽어보세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지금은 역사교과서 원문 링크가 어디있는지 찾기 어렵네요. 직접 찾아보세요.
05/04/18 00:48
off-topic이지만 흥미 있는 이야기니 좀더 끄집어내면, 노부나가의 철갑선도 당시에는 전술적으로 대단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상대였던 모리에 수군에서는 절대적으로 뒤지고 있었습니다. 모리 수군은 수전에 익숙했고 비교적 작고 빠른 배로 화공을 퍼부었기 때문에 수전에 익숙지 않아 큰 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의 수군이 이를 당해내지 못했었죠. 그런데 당시 노부나가 수군의 목적은 단지 모리의 수군을 압도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혼간지를 바다에서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화공만 막아낸다면 비록 상대 수군을 궤멸시킬 수는 없다해도 상대가 전면전을 걸어오면 배의 크기 차이로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있었죠. 그래서 철갑으로 화공을 막아내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거점 확보에 성공해서 혼간지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철갑선은 방어에 좋은 대신 기동성이 떨어지고 화력도 높지 않았습니다. 배를 철판으로 덮었으니 화기를 배치하기도 어려웠겠지요. 당시 왜군의 목적은 바다를 병력 수송로로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수송선을 철갑선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혼간지 공략 때처럼 거점 장악 능력이 있는 철갑선보다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수 있는 공격력이 좋은 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철갑선을 전선에 투입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리고 노부나가의 사후 집권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비하면 진취성이 좀 부족한 인물이었던 것도 철갑선을 개량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일 겁니다. 반면 조선은 당시 건조 기술은 일본을 앞서 있었기에 거북선처럼 기동성이 뛰어나면서 나름대로 괜찮은 공격력을 갖춘 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것도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겠지요. 사실 그 이전에도 철갑선의 존재 기록은 여기저기 꽤 많습니다만 실전에 활약한 기록으로는 일본 이전의 기록은 다소 신빙성에 의문이 있죠. 실전에서 활약한 최초는 노부나가의 철갑선으로 보는 것이 맞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면적인 해전에서 "검증된" 철갑선은 거북선이 최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이순신의 함대를 해전에서 이길 수 있는 부대는 전 세계에도 아마 없었을 겁니다. 넘 off-topic이 길어져서 죄송스런 마음으로 주제에도 한 마디 언급을 하자면-_- 여성으로 꼽을 만한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범위 내에서는 선덕 여왕이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유관순이 광개토대왕, 이순신, 이이 등에 비견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죠. 이에 비하면 선덕 여왕은 삼국시대 전체에서 손꼽힐 만한 명군이었으니 세종대왕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라해도 역사 상의 여성 중에는 단연 손꼽히는 존재입니다.
05/04/18 01:07
죄송하지만 선덕여왕의 치적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진평왕의 맏딸로 진평왕의 후사가 없어서 백성이 옹립.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된 것도 자랑스런 사실은 아니고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것도 아니고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었다. 땅을 거의 잃기만 한 여왕이네요. 업적은 분황사를 창건하고 첨성대/황룡사9층탑 건조. 그런데 외적으로는 성을 많이 빼앗겼어도 안으로는 구휼산업과 민생은 안정되었나보네요. 무슨 힘이 있어서 바다밖 일본에서도 보였다는 거대한 탑 황룡사9층탑을 건조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가 안되네요.
05/04/18 01:20
몇가지 말씀 드리자면, (퍼오신거라면 글 쓰신 분에게)
1. 미국 화폐가 전권이 동일한 녹색임이라고 하셨는데 작년부터 새로 나온 화폐를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지갑 속에 20달러 지폐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색이 참 예뻐서지요;;; 주황색 톤이 지폐의 가운데 부분에 추가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50달러와 20달러의 도안이 변경되어서 유통되고 있고 조만간 다른 지폐들도 따라 갈 것이라고 합니다. 2. `최고권의 상향이 필요하다.(5만원권, 10만원권의 필요) 미국 최고권은 100달러= 10만원임, 일본 최고권은 1만엔 = 10만원임, 우리도 경제규모에 맞게 상향 조정이 필요.`라고 하셨는데 찬성이고 반대고를 떠나서 이 문제는 논외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액권 발행 문제에 대해서만 따로 토론방을 열어도 될 만큼 아주 많은 말들이 있으니까요. 연관성이 아주 없는 주제는 아니지만 도안 문제와는 따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3. 그리고 한은에서 이미 결정을 한 듯 보입니다: 기사 링크입니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01&article_id=0000977774§ion_id=101§ion_id2=259&menu_id=101
05/04/18 01:52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선덕여왕의 치세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한일합방을 고종의 잘못으로 평가할 수 없듯이 말이죠. 즉위 당시 신라는 진흥왕 이후 다시 국력이 하락세로 돌아선 상태였고 백제와 고구려에 연거푸 깨지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굴욕을 참아가며 당과의 외교를 유지했고 팽팽한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후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하게 되는 그 저력을 쌓은 것이 선덕여왕 시대입니다. 선덕여왕이 무리하게 토목공사나 일으키는 왕이었다면 얼마 안되서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세종이 압록강을 확보하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은 그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태조와 태종의 치세에서 오는 탄력이 있었기 때문이듯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원동력은 김유신과 무열왕의 군사적 전과 이전에 선덕여왕이 쌓은 저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여성으로 왕 노릇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도 숱한 역경을 뚫어야했고 당나라로부터는 조롱까지 당해가면서 왕 노릇을 해야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잘 이겨내고 삼국 중 가장 국력이 뒤지는 상황에서 이후 삼국통일을 이뤼낼 발판을 마련했다면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나치게 영토 확장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의자왕은 신라로부터 숱한 전과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져 백제가 망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진짜 승자는 의자왕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한 선덕여왕이 아닐까요?
05/04/18 03:03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docid=663771 여기를 읽어보시면 진흥왕 이후 국력 하강시기라는 것과는 배치되는 진술이 나오고 있고요.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저력을 쌓았다고 하셨는데 진흥-진지-진평-선덕-진덕-태종무열왕(삼국통일)의 계보에서 특별히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 저력이란 것이 혹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나당연합군의 반쪽짜리 삼국통일에 있다면 더더욱 평가절하되야하는게 아닐까요?
http://blog.naver.com/les130.do?Redirect=Log&logNo=80002345200 아울러 선덕여왕은 68세때 재위 16년이었으니 왕이 된 것은 52세네요-_- 아리따운 여왕을 상상했었는데..게다가 키가 175였다고 하네요. 진덕여왕도 사촌동생이라고 하니 60대였을 것이고, 신라왕조는 진덕여왕이 마지막 성골로 그 명맥이 끊어졌다 할 수 있겠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수 없는 상황이었네요. 그리고 또하나의 여왕 진성여왕이 그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여왕이었네요. 다른 자료도 보았으나 선덕여왕은 즉위후 매년 당에 사신을 보낸점. 김유신이 없었다면 백제에게 망했을 것이라는 점. 당나라 황제의 [여자가 왕이라서 약하다]는 말에 부하가 반란을 일으켜 그 수습하다 죽었다는 점에서 별로 대단한 여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05/04/18 03:54
움. 역사는 아직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말하기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현재 삼국시대를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직접 읽어본다면 진흥왕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이 거의 없고 오히려 백제와 고구려에게 패해 영토를 잃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국운이 기울어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다시 밀린 감이 있는 건 사실이죠. 또 계보상으로도 통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무열왕 시대이므로 선덕, 진덕의 시대는 둘다 재위 기간이 길지 않았으니 묶어서 저력을 축적하는 시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요. 단순 시간적 순서 뿐 아니라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치적으로도 이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쪽 짜리 통일이라는 건 민족을 강조해온 역사 교육의 산물입니다. 사실상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나 고구려, 당나라 모두 외국일 뿐이고 원교근공에 따른 외교정책을 취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고구려와는 민족 구성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으니 한 민족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은 적죠. 오히려 한반도가 한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멀리 있는 외국과 연합하여 적을 물리치고 통일을 이룬 것이 평가절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전쟁에서 동맹국을 이용하고 그 보상도 나누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당나라라고 해서 공짜로 도와줄 리 없고 그렇다고 그 대가를 주기 싫어서 이용하지 않는다면 더 어리석은 일이지요. 신라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국익이지 민족의 이익이 아니니까요. 노부나가도 쇼군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다케다에게도 붙었다가 우에스기에게도 굽실거렸다가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략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한 민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반란을 수습하다 죽었다는 것도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큰 해석입니다. 우선 반란은 이미 수습이 끝난 상태였고 선덕여왕이 나이가 많은 상태였고 반란으로 인해 심리적 충격을 받아서 사망이 다소 앞당겨진 것 뿐입니다. 역사를 요약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fact를 넘어선 truth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을 간도와 연결 짓는 것이라든지, 왕의 치적을 영토 확장으로 평가하는 것, 신라의 통일을 평가절하하는 것 등을 볼 때 다소 투쟁적인 사관을 가지신 것 같은데 그 요약을 넘어선 역사를 본다면 생각이 조금 바뀌실 것입니다.
05/04/18 12:08
자자...릴렉스. 님께서는 선덕여왕을 후보로 내세우셨고, 단지 태종무열왕의 전단계의 선덕-진덕 라인으로 선덕이 여성 중에서 뽑힐만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 같습니다. 선덕을 뽑은 것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제게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은 재위중 잦은 백제/고구려의 침략에 대한 자구책으로 당에 매년 조공을 보냈으며 독자적인 인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점과 호국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의 황룡사9층탑 건립은 인정될만하나 왕권이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김춘추가 없었다면 비담/염종에게 죽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수습하다 죽은 것-> 수습후에 노환으로 사망으로 수정합니다. 진덕여왕 시대엔 김춘추에 의해 독자적인 연호도 포기하고 당의 제도를 따라하고 했던 것으로 봐서 자주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님의 [신라의 입장]주장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 민족의 원류를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의 라인으로 보는 한 [반쪽자리 통일]이란 평가 역시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질문~ 과연 그당시 마한/진한/변한은 한이라는 공통의식이 있었을까요? 삼국통일을 신라주도로 한정하게 되면 3한이 남한의 원류로 한정되어버리는 문제점이 있지는 않겠습니까? 신라가 가장 약한 나라로서 가장 늦게 발전한 나라이면서 외세와 결탁해(외교를 잘한 것이겠지요) 삼국을 통일한 것이 맞지요. 무열왕 이후 문무왕때는 당과 백제/고구려 잔존세력과 싸우느라 고생했고요. 그 와중에서 청천강 이북의 땅을 모두 잃은 것이 유감입니다. 사실 부여-고구려-백제-일본 나라 라인과 가야/신라는 민족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고조선/발해는 요동/만주사로 보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고요. 신라가 역대 왕조에서 유일하게 여왕을 3명 배출한 나라이고 성골/진골 등의 독특한 체계를 가진점은 흥미로운 연구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왕건의 신라흡수, 후백제 통일 과정과 견줘보면 성골이 끊긴 진골 신라의 통일과정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아직도 잦은 외세침입에도 그런 거대한 9층탑을 세울 경제적 능력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해답은 제시해주고 있지 못하시네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렇게 많은 성을 빼앗겼다면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데 말입니다.
05/04/18 20:44
우선 한 가지 짚어야할 것. 김춘추와 김유신을 요직에 등용한 것이 바로 선덕여왕입니다. 통치자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적재 적소에 인재를 쓰는 것이죠. 그리고, 왕권이 강하다는 것이 그 왕을 높이 평가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진덕여왕 시대에 독자적인 연호를 포기한 것은 선덕여왕과 무관한 일이죠.
반쪽 짜리 통일이라는 평가가 지금의 민족 시각으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당시의 선덕여왕을 비롯한 신라의 정책을 평가절하하는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청천강 이북의 땅을 잃었다는 것은 지금의 시각이고 당시로서는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대한 것이죠. 논점은 신라의 통일이 이후 역사에 미친 영향이 아니라 선덕여왕의 치적에 대한 평가라는 점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잦은 외세침임이라고하지만 이건 사실 선덕여왕 이전에 다소 약해진 군사력의 결과이며 선덕여왕이 집권하면서 점차적으로 군사력이 안정을 찾았고 선덕여왕 말기에는 백제, 고구려와 팽팽한 대치 국면을 이루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그 시절에 침략 당해서 성을 잃었다는 것이 선덕여왕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찰을 건립한 것을 마치 외세에 시달리는데 백성의 고혈을 짜내서 낭비한 것처럼 인식하시는 듯 한데 물론 백성들을 무리하게 동원한 점도 없지 않지만 선덕여왕 집권 이후 경제력이 많이 향상되었고 당시 호국 불교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덕여왕은 지도자로서 한국 전체 역사를 걸쳐서 보기 쉽지 않은 모범 사례입니다. 어지러운 정국에 여성의 몸으로 왕위에 올라 정국을 수습하고 외세에 밀리던 상황에서 오히려 통일의 저력을 비축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었고 적재 적소에 인재를 등용했으며 삼국의 치열한 투쟁 상황에서 다른 왕들은 군사에 주력했지만 선덕여왕은 군사 뿐 아니라 내치에도 힘을 쏟아 민생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만한 업적을 이룬 왕이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성이라는 점을 배제하더라도 명군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입니다. 여성이라는 +알파를 생각한다면 세종대왕까지는 몰라도 영정조에 비견하기에는 별 부족함이 없다고 봅니다.
05/04/19 11:54
데모 (2005-04-19 11:39:30)
박영록님// 님의 주장을 다시 검토해보겠습니다. 1.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한 명군이었다. 역사상의 여성중 단연 손꼽히는 존재. 당시 상황 : 1. 진흥왕 이후 국력 하강세. 고구려와 백제 침입에 의해 영토의 손실. 2. 굴욕을 참아가며?(원했던 것은 아니고?) 당과의 외교를 유지.(신라가 당에 조공을 보낸 것은 진흥왕때 한강유역확보후 진평왕621년부터였습니다.) 3. 고구려/백제와 팽팽한 전선 유지. 업적 1. 김유신과 김춘추의 등용 주된 주장 : 한일합방은 고종의 잘못이 아니라 이전 왕들 또는 시대에도 책임이 있다. 세종의 전성기는 태조와 태종의 치세의 영향도 고려해야한다. 마찬가지로 삼국통일 역시 그 이전 선덕-진덕의 영향도 고려해야한다. 즉. 왕의 업적을 그 왕의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의 영향도 따져야한다는 주장. 그러나 저는 그 왕의 업적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반론1: 그런 식으로 말하면 굳이 선덕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따지면 율령을 제정하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법흥왕때부터 따져야하지 않겠는가? 반론2 : 왕의 치적에서 영토확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객관적인 기준(어느 시대던지 전성기에는 최대영토를 유지했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토론이 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이런 사관을 [투쟁사관]으로 평가절하하셨군요. 반론3 : 인터넷으로 찾는 것으로 부족하다면, 삼국사기/삼국유사를 직접 읽어보셨다면, 독자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십시요. 요약으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하시기 전에 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부터 선행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질문 : 한반도가 한민족의 개념이 생긴것이 삼국통일로부터 기인한다셨는데 근거는요? 최초의 통일이라서요? 이 질문에 대답해주실려면 먼저 제가 드린 질문 마한/진한/변한에서 [한]의 공통인식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고찰해주세요. 그리고 신화적으로 고구려-백제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백제는 민족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지요? 기본적인 님의 주장은 선덕여왕-오다노부나가(통일의 시초를 닦음) 삼국시대-최초의 통일 : 전국시대-일본 최초의 통일의 비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시고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국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김춘추와 김유신의 등용을 선덕이 했으므로 선덕의 치적이 많다는 주장이신데..그런 식이면 고려 현종 때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의 공은 고려 성종의 치적이 될 것이며, 고려 우왕때 왜구를 이성계와 토벌한 최영장군의 공 역시 고려 공민왕의 치적이 되겠군요? (아울러 김유신부자를 등용한 것은 진평왕때부터입니다만) 그리고 청천강까지 영토확장의 치적 역시 문무왕의 치적이 아니라 선덕의 치적이겠군요? [진평왕은 628년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고 629년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김유신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청주)를 공격하여 항복받기도 했다] 이 글을 보면 님의 글이 왜곡이라 판단됩니다. 1.김유신부자를 쓴 것은 진평왕이 먼저. 2.선덕여왕 이전에 다소 약해진 군사력?은 이 글로서 왜곡임이 밝혀짐 3. 선덕여왕 집권후에 수많은 성을 빼앗긴 후의 평화상태를 군사력의 안정과 팽팽한 대치국면이라 보는 점. 멸망안하고 조공외교로 간신히 버티는 것이 팽팽하게 보이시나봐요?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일이며 태종무열왕-신문왕에 이르는 전제왕권 수립시기와 비교해보면, 왕권이 강한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제 한몸 보살피기도 바쁜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랬기에 매년 중국에 조공을 보냈겠지요 선덕여왕의 주된 업적은 1. 대신 [을제]로 국정을 총괄케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 633년 1년간 주군조세를 면제하여 민심수습. 2. 634년 분황사, 635년 영묘사, 643년 황룡사9층탑 건립 등 많은 사찰을 건립 또한 그녀 시기에 642년 의자왕의 침공으로 40여성을 잃고 신라의 한강거점인 당항성도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받았다. 백제의 윤충에게 낙동강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되다. 박영록님// 백성을 무리하게 동원했다는 기록이라도 있습니까?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는 기록이라도 있습니까? 선덕여왕을 영-정조에 비기실려면 적어도 어떤 문헌적 근거를 제시해주셔야하는 것 아닐까요? 제가 보기엔 님의 소설로만 여겨집니다만.. 다만 한가지 오다-선덕여왕 비교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 사실은, 백제-고구려가 수/당과 접해 있어서 서로 치열한 전투를 하는 반면, 신라는 직접적 접촉이 없어서 그렇게 조공외교로서 통일을 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여-고구려-백제-일본 나라의 라인으로 생각해보면 신라(즉 왕따)의 당과의 연합 영토확장계획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평왕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圓光)에게 〈걸사표 乞師表〉를 짓게 하고,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를 보시면 오늘날의 [민족]개념으로 판단하면(물론 이런 판단이 맞지는 않습니다만)신라는 참 얍삽하다고 해야할까요.(고구려가 백제의 침공에 맞서 원군요청한 신라를 도와준 것과 신라가 밀서로 수에 고구려를 쳐달라고 했던 것을 비교하면 말이죠) 신라의 통일은 김유신/김춘추의 힘이 절대적이었고, 결국 [성골]이 아닌 [진골]의 힘이었습니다. 성골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권력 [진골]로 통일을 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비록 독자적인 힘으로의 통일은 아닐지라도...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docid=663771 길어서 다 올리지는 못하지만 여기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신라통일의 과정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05/04/19 18:31
1-1. 그래도 선덕일 이유? 하나의 이유만으로 선덕여왕을 꼽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의 이유를 비판하려면 그 이유가 맞다 아니다를 따져야지 그 이유라면 다른 왕도 있다..라는 식의 반론은 합당하지 않죠. 세종대왕을 명군이라는 근거로 압록강 국경 확보를 들었다고해서 그 논리대로라면 광개토대왕이 더 위대한 것 아니냐..하고 반론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제가 이전 시대를 이야기한 목적을 돌이켜보십시오. 이는 선덕여왕의 치세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영토 상실을 평가 절하의 이유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근거로써 이야기한 것입니다. 1-2. 이것 역시 님이 처음 선덕여왕을 "땅을 잃기만 한 여왕"으로 폄하한데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것입니다. 님이 선덕여왕을 평가함에 있어서 영토에 대한 비중이 너무 컸고 이외에도 간도 문제 등에서 투쟁사관의 흔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한 것이죠. 이런 영토 중심적 사관의 한계는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의 비유가 또다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어떤 식으로 제시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약한다면 어차피 또 저의 판단이 개입될 테고 그냥 인용하긴 꽤 많고. 그래도 일단 요약해본다면, 진지왕, 진평왕 시대에는 전투에서 패전한 기록이 많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 시절에는 초기에는 패전 기록, 중기 이후에는 승전 기록이 있죠. 그리고 그 밑에부터 1. 김유신, 김춘추의 등용은 가장 강력한 근거로 든 것도 아니고 그들의 업적이 곧 선덕여왕의 업적이라고 든 것도 아닙니다. 다시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통치자로서의 인재 등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분명히 "요직에 등용했다"라고 했습니다. 2. 왜곡? 위에 밝힌 정도면 충분히 답이 될 듯. 3. 전 당시 정세를 '평화'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승률 50%를 넘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경제력에 관한 기록은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사실 삼국시대의 경제에 관한 것은 대부분 추정에 의거한 것이라서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고 과연 경제라고 할만한 것이 있었는가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민생이 안정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수많은 문화사업을 추진했음에도 이후의 시대에 통일 전쟁을 수행할 힘이 있었다는 점에서 추정해보는 것이죠. 소설? 머, 추정을 전부 소설로 몰아붙인다면 할 말 없습니다. 다만 이 정도 추론은 무리한 추론이 아니기에 학계에서도 꽤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민족 개념에 대한 답.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만, 우선 신화적인 근거는 단지 통치자의 문제일 뿐이고 백성들의 민족 의식과는 큰 연관이 없습니다. '신화'라는 점도 약간 불리하게 작용하고요. 그런 반면 언어상으로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많이 달랐고 실제 민족 구성도 달랐다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정설이 되었죠. 그리고 신라/백제는 비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컸으나 실제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한 상대라 적대감이 워낙 커서 한 민족이라는 발상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구요. 그래서 딱히 통일해야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죠. 그래서 고구려가 융성기에 백제/신라를 병합할 힘이 있었음에도 병합하지 않았고 백제 역시 신라를 크게 위협한 경우가 많았지만 본격적인 병합을 시도하진 않았습니다. 김유신이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았다면 몇 백년은 더 그렇게 싸웠을지도 모르죠. 어쨋든 그래서 그 이후 후삼국 시대에는 삼국 모두 통일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 개념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답이 필요한 내용 같진 않으니 생략합니다.
05/04/20 05:48
미국 화폐에 대한 글 중 잘못된 부분이 있어 지적드립니다.
20달러: 1990 최신권발행 - 인물 앤드류 잭슨(7대 대통령)/백악관 50달러: 1997 최신권발행 - 인물 us.그랜트(18대 대통령)/국회의사당 -------->두 노트 모두 2004년에 최신권이 발행되었습니다. ○ 1센트는 링컨 기념관, 5센트는 제퍼슨의 생가인 Monticello, 10센트는 자유의 횃불, 25센트는 독수리가 삽입됨 ----------> 25센트의 뒷면 도안으로 과거에는 독수리, 독립행진이 사용되었었으나 현재는 각 state의 상징물이 사용되고 있어 실제 뒷면 도안은 60 가지에 이릅니다. 마지막으로 2달러 지폐에 대한 부분이 빠져있군요 2003년에 최신권이 발행 되었습니다. 앞면에는 토머스 제퍼슨(대통령) 뒷면에는 독립선언 장면이 도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수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5/04/20 11:08
내용 추가합니다. shovel님의 지적 [50달러와 20달러의 도안이 변경(주황색톤이 지폐 가운데 추가)되어서 유통] 이 있었습니다.
[S&F]-Lions71님// 20달러는 2003년 50달러는 2004년 발행되었네요. 님의 지적은 링크 http://www.moneyfactory.com/newmoney/main.cfm/welcome/ko 로 확인 되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2003년 10월에, 보안이 강화되고 파란색, 복숭아색, 초록색의 섬세한 배경 색상이 있는 새로운 $20 지폐를 디자인하여 발행한 바 있습니다. $50 신권은 2004년 9월 28일에 발행되었다. 이 시리즈 가운데 다음으로 도입될 화폐의 액면단위는 $10 짜리 지폐로 2005년에 공개된다. $100 짜리 지폐의 경우도 도안을 변경할 예정이지만 언제쯤이 될지 그 도입시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5짜리 지폐에 대해서는 현재로서 도안을 바꿀 계획이 없으며, $1짜리 지폐와 $2짜리 지폐는 도안 변경이 없을 것이다. 미국 주화에 대해 님이 지적하신 부분은 혹시 http://www.i-edukorea.com/renewal/info/us_02.htm 여기 나오는 2000년 기념 13주가 발행한 25센트 말하시는 것입니까? 60가지에 대한 내용은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수정요구 거부합니다. 님의 링크를 요청합니다. 2달러에 대해선 토머스제퍼슨이란 것은 확인되었으나 마찬가지로 2003년에 최신권 발행 뒷면 도안 확인 안되었습니다. 님의 자료 소스 공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달러 토머스 제퍼슨 http://tomowind.egloos.com/930047/
05/04/20 13:43
링크는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는 것 뿐입니다. http://www.i-edukorea.com/renewal/info/us_02.htm <---- 이 링크의 내용은 틀렸네요. 미국에서는 50개 주의 25센트 주화를 다 모으는 것이 유행입니다. 아직 발행하지 않은 주가 있으니 현재로서는 40여가지 일겁니다. 2달러 지폐의 2003년 신권은 아직 저도 본적이 없습니다만 1995년 까지는 발행을 했다고 합니다. 신권과 구권의 디자인 이미지는 거의 똑같고 색깔이 부분적으로 들어간 것 뿐입니다. 그러니 뒷면 도안도 같을 겁니다. 특이하게도 웹상에 나온 부분만 인정하시는군요. 저는 검색자료가 틀린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 웬만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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