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08/03/07 22:56:37 |
Name |
당신은저그왕 |
Fil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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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이영호를 통해 그 시절을 회상하다 |
김택용과 이영호와의 4강전은 제가 지금껏 본 경기들중에 몇안되는 소름끼치는 경기였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김택용의 패배에 대한 아쉬움이 이영호의 압도적 운영에 지배당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상대자에 대해 인정했던 적이 언제였나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저 저에게 당신은 잘했던 프로게이머였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2003년 여름...
적절한 더위속 적절한 무료함을 만끽하고 있던 나의 눈에 우연찮게 들어온
게임채널..그 속의 문화...
꽤나 똑똑하게 생긴 안경낀 청년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을 가진 소년의 대결..
그 한경기만으로 나는 강민이라는 프로게이머에게 매료되었고 그런 강민을 통해서
스타크래프트속의 유닛 움직임을 새로이 해석하게 됐다.
왜 지금껏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을까? 왜 이제서야 이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
쓸데없는 반성을 하며 매경기 매경기를 습관적으로 바라보게 됐고 점점 스타리그라는
문화에 매료되어갔다. 그리고....
당신이 등장하였습니다. 천재 이윤열과의 첫경기에서 패하며 곧바로 패자조로 향하든
그 이전 프로리그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프로게이머였든 임요환의 제자든 저에겐 그저
떠오르는 신인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터져나오는 물량의 위압감보다 한순간의 꿈같은
아슬아슬함의 설레임을 안겨주었던 강민의 아스트랄함이 더 좋았습니다.
그저 당신은 물량만 많이 뽑아 무식하게 힘으로 이기려는 비겁한 승리자일 뿐이었습니다.
강민의 탈락과 동시에 스타리그를 바라보는 저의 맹목적 시선은 거두어지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처절한 항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홍진호의 간지를 기억합니다. 큰 색안경 너머로 느껴지는 카리스마 있는 눈빛과 한껏 어깨에 힘을 준
KTF의 유니폼 그리고 작고 동그란 얼굴과의 싱크로율의 절묘함에서 나오는 그의 간지를 기억합니다.
그는 무서울것이 없었고 거침이 없이 결승으로 직행했습니다. 여린듯 여린듯 하지만 숨겨진 이면의
무서움을 간직한 천재조차도 짓밟아 버린 그의 포스를 기억합니다.
그렇게 무너진 천재와의 대결에서도 당신은 그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천재를 침몰시켰습니다. 해설자와 캐스터들의 목을 쉬어가게 하며 정말 당신은 너무나도
엄청난 물량, 이해할 수 없는 물량과 운영으로 천재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후, 씁쓸한듯 담담한 천재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당신의 앳된 기쁜 표현의 미숙함을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전 여전히 당신을 응원하지 않았었습니다. 기존의 세력속에 비범하게 침입하려는 신진세력에 대한
반발감이 당신의 실력마저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의 게임속 압도적 운영의
하드웨어적 움직임보다 홍진호의 넘쳐나는 간지의 소프트적인 이끌림이 더더욱 좋았었습니다.
귀찮은 학원에서의 수업을 얼른 마친체 서둘러 귀가해 튼 채널속 파란배경이 가져다준 묘한 기분을 기억합니다.
묘한 기분의 선명한 원인을 파악해낸 그 순간에도 전 여전히 당신의 승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스승 임요환이 전수해준 클로킹레이스 빌드로 홍진호를 마음껏 유린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만천하에 알리
려는 끈질긴 당신이 싫었습니다. 두기의 드랍쉽이 저그의 본진에 무사히 안착하며 쓸어버리기 직전까지도
그리고 그런 막연한 기대의 끝자락을 움켜쥐게 만들어준 당신의 무책임한 컨트롤로 인해 무참히 전사해 나간
2부대가량의 마린메딕의 장렬한 전사를 보며....마지막 엘리 직전의 극적인 순간에서의 극적인 생존에 성공한
해처리의 모습을 보며....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이의 마음 마냥,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머리속에 그리며
철저히 당신을 거부했었습니다.
팀리그에서의 압도적 포스를 기억합니다. 기록이 아닌 그 현실을 기억합니다. 팀의 패배위기에 당신은 한줄기
희망의 구세주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은 지나가는 무림고수가 우연찮게 놀이판에 참가하여 강자란 강자는 모조리
꺽고 유유히 사라지는 풍운아에 가까웠습니다. 당신의 손이 이끄는 곳은 언제나 최적의 전술적 요충지였고
당신이 읽어내는 게임의 흐름은 그당시 최상의 운영이 되었습니다. 커맨드를 짓는 SCV의 초조함이 당신에게선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너지는 수비라인에 긴급히 투입되는 움직임에도 불안감따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힘없는 나뭇가지 하나에 의지하는 위태위태한 모습도 당신을 통해선 다시 살아날것이라는 기대감의
출발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뽑아내는 물량에서 치트키의 의혹을 제기해도 전혀 이상할것이 없을것이라는
푸념이 나왔습니다. 뒤쳐진 선상이 아닌 다른 선상에서 당신은 앞선 선상의 적들을 모조리 압도했습니다.
종이비행기의 비애는 당신을 통해 효과적인 대형유닛 사냥용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당신의 손끝의 움직임을 통해
뭉쳐다니는 머릿수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게이머가 당신을 내려다보며 벌벌 떨던 그 시절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뽑아대던 쏘아대던 탱크의 징그러운 반복된 포격의 효과음을 통한 파괴력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빵빵한 체력과 커다란 덩치로 일꾼과 성벽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SCV의 사기성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5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전 당신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아직도 저에겐 박태민과의 상대전적에서 앞서있는 기분
나쁜 유저일 뿐이고 지금에 와서 늘어놓는 이 감성적 글은 한때나마 당신의 플레이를 보며 감탄을 자아내었던
내 자신을 있게한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심리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동안 당신은 MSL에서의 독주와 스타리그 정벌을 끝으로 본좌에 등극했고 그 이후에도 당신은 또 한번의
스타리그 우승까지 여전히 우리에게 최고의 게이머였고 그 클래스는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영원한 내 밥이라던 저그에게 자신의 직위를 내어주던 그 순간에도 전 당신의 거만함을 오만함을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눈으로 보아왔고 증명되어 온, 증명된 기록을 알기에 여전히 당신의 건재함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당신은 없습니다. 조금은 어설픈 표정과 유니폼의 풋풋함은 이제 정제된 외모와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의 노련함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포기한 것입니까? 어째서 당신은 믿음을 져버린 것입니까?
패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까? 진정한 강자의 아름다움이 승리의 미소에서 발현된다 생각하신겁니까?
지금의 전 당신을 아니 스타리그를 통해 영원한 강자는 없다라는 받아들이기 싫은 논리를 배움으로써 어린시절의
큰 낭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은퇴는 그런 나의 굳어버린 낭만에 대한 실망을 더욱더 견고히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 자꾸만 가슴이 아픕니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집니다. 어째서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기쁨의
연속성속에서의 깨달음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요? 신이시여 어째서 인간에게 불로불사의 열정을 주지 않으셨나요?
찌들어가는 피부만큼 나의 심장도 그러하다는것을 받아들이기 싫습니다. 물질적인 빈곤함이 마음의 빈곤함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든 신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라는 진리를 지긋지긋하게 또 한번 증명시켜준 최연성 당신이
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알수 없는 환한 미소를 보면 자꾸만 가슴이 아려옵니다.
왜일까요? 왜 이런것일까요?
그래요. 당신을 바라보는 저의 눈도 5년이라는 세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최연성 선수..
-스타리그에 갓 입학한 풋내기 신입생의 풋풋한 새하얀 도화지에 가장 먼저 선명한 획을 그어주었던 당신을 추억하며-
*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3-1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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