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1/12/16 05:20:26
Name 영혼
Subject 뜨거운 커피는 식는다.
#1
집 근처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커피집이 덜컥하고 생겨났다.
도서관 앞 커피창고, 육교 건너 슬립리스까진 제때제때 눈치를 챘는데 그 다음부터는 순서를 알수가 없이 중구난방 생겨나버렸다.
이마에 하나, 볼에 하나 났던게 시작인건 알겠는데 그 다음부턴 순서를 알 수 없는 여드름을 보는 기분이라면 정확한 표현일까.

당최 뭐가 뭔지 알수가 없구만. 그 어떤 커피집에 들어가 방대한 메뉴판을 볼 때마다 헤메였던 눈길만큼이나, 나의 발걸음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왠지 기분이 나서 비싼 테캇커피 한 잔 손에 들고 출근하려던 계획에 조금씩 차질이 생기는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커피집에서, 가장 눈에 익은 카라멜마끼야또를 테캇한다.
근데 생각해보니 평소와 다른 사치를 부릴 돈은 충분했건만 그 사치를 위한 시간을 미처 생각지 않았다. 멍청하긴.


#2
사실 나에게 커피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에스프레소에 적당량의 이걸 넣으면 저게 짠, 저걸 넣으면 이게 짠, 이라는데
사실 그건 이 수식에 미분을 하면 요게 짠, 적분을 하면 조게 짠, 하고 나타난다는 설명이나 진배없다.
흥미가 전혀 생기지도 않고, 나에게 별다른 의미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커피라면 자고로 적당히 달달한 맛에 카페인이 들어있는듯해서 잠이 안올법한 플라시보 효과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다.

음, 이야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인데 커피에 대한 생각은 사랑에 대한 생각과도 엇비슷하다.
내가 요렇게하면 이런 사랑이 짠, 조렇게하면 저런 사랑이 짠, 그런건 별 관심이 없다.
적당히 달달한 맛에 애정이 들어있는듯해서 행복한듯한 플라시보 효과만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니까.
가만, 생각해보니 이것 참 그럴싸하네. 한참을 생각하다 커피를 받아들고 부리나케 버스를 타러 간다.


#3
커피는 식는다. 혀가 데일만큼 뜨거운 커피를 달라고 했어도,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점원의 목소리와, 이쁘장한 포장의 컵.
그리고 마침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받아들면, 그 뜨거움은 이제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다.
테캇한 커피가 왜 차가워졌느냐고 클레임할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 던져버린 야구공처럼, 놓아버린 IV주사처럼, 식어버린 테캇커피는 어쩔 수 없다.

이 커피가 뜨거웠을땐 이보다 조금 더 달콤했겠지. 조금 더 나를 달래주었겠지. 하고 생각해볼 뿐.
애석하지만 식어버린대로 만족을 하거나, 그게 싫다면 식기전에 후루룩하고, 아 뜨거워, 그래도 좋네. 하고서 마셔버리면 그만인 것을.

잠시잠깐 눈 돌릴틈도 없이 바쁜 일들이 나를 닥쳐올때가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걱정을 하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게끔 만들어버리는 갖가지의 일상들.
그렇게 조금의 정신머리도 유예할수 없게 되는 순간 그렇게 커피는 식는다. 아마 사랑도, 그렇게 식는다.
받은 이후의 책임은 나의 것이였음을, 오늘 다시 한번 통탄하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신다. 혹시나 내가 받은 사랑이, 식어버리진 않았을까 걱정하며.

아, 젠장. 커피는 식어도 맛있구나. 사랑은, 혹시나 식어버렸다면, 그것 또한 달달하게 감내할 수 있을까?
글쎄,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문제다. 아무쪼록 사랑이 식지 않았기를, 혹시나 식었다면, 음.


"정시출근 했습니다!"

"1분 늦었어. 뭐하느라 이제 온거야? 내가 30분씩 일찍 다니라 했어 안했어, 그리고 너 지난번에…"
* Noam Chomsky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2-19 13:39)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로렌스
11/12/16 08:25
수정 아이콘
여담이지만 저는 카페 엄청 좋아합니다.
동네에 24시간 카페 있는데, 무언가 작업해야 할때 4000원정도 들이고 컴퓨터 들고가서 하루종일 작업하는데
사실 그다지 비싼것 같지도 않고 참 좋아요.
개인적으로 커피도 굉장히 좋아해서 딱이에요. ^_^
PoeticWolf
11/12/16 09:10
수정 아이콘
더운 날엔 일부러 얼음까지 넣어서 식혀먹는 게 커핀걸요. 또, 플라시보로 사랑하면 큰일 나더군요.

잘 읽었습니다. 비교(?)라기 보다.. 전 이 글이 더 좋네요 흐흐
11/12/16 09:13
수정 아이콘
테캇커피는 또 새로나온 커피 종류인가 잠깐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래도 카페 테캇(!)커피는 식어도 맥심처럼 슬픈 맛으로 변하진 않아요~
11/12/16 09:5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아슬뿔테를벗을때
11/12/16 10:39
수정 아이콘
잡생각하면 사회생활 힘들어지는걸 느끼게 하는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
11/12/16 12:54
수정 아이콘
플라시보효과라 뭔가 그럴 듯 한데요?! 크크
잘 읽었습니다.
유리별
11/12/16 14:54
수정 아이콘
식은 커피는 다시 데워마실 수 없지만 사랑은 살짝 식은듯해도 다시 데울 수 있는 듯 합니다.^^
실은 전 테캇커피는 꼭 식혀서 마시지만요. 커피는 엄청 좋아하지만 고양이혀라 뜨거운건 못마시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커피마시고 싶어졌어요. 내리러가야지~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284 [홍보글] 아마추어 스타크래프트 리그! 후로리그입니다 [31] rOaDin8943 11/12/17 8943
1283 아버지께서 시인이 되셨습니다 [62] 야크모11479 11/12/17 11479
1282 화해에 관한 추상적인 힌트 [48] PoeticWolf11573 11/12/16 11573
1281 뜨거운 커피는 식는다. [16] 영혼9192 11/12/16 9192
1280 남극점 경주 - 아문센, 스콧과 섀클턴(2-1) [7] epic9856 11/12/15 9856
1279 언니의 결혼 날짜가 잡혔습니다. [50] 리실10743 11/12/15 10743
1278 수제비는 역시 고추장 수제비 [28] PoeticWolf9965 11/12/14 9965
1277 백제 vs 신라 - (4) 한성 백제의 멸망 [15] 눈시BBver.210222 11/12/14 10222
1276 손님 맞이 [32] PoeticWolf9191 11/12/13 9191
1275 [Text 인데도 혐오] 과학적으로 보는 좀비 아웃 브레이크. [69] OrBef12086 11/12/13 12086
1274 [리뷰] 엘더스크롤 5 : 스카이림 - 겨울은 스카이림과 함께 [33] 저퀴13917 11/12/10 13917
1273 sk플래닛배 프로리그 2주차(12/06~12/07) 간략 리뷰 및 맵별 전적 정리 [4] 전준우7430 11/12/07 7430
1272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가장. 그리고 아내의 조련술. [86] Hook간다11422 11/12/12 11422
1271 인종의 지능 차이 [91] TimeLord21439 11/12/11 21439
1270 마초가 사는 하루 [19] PoeticWolf9915 11/12/11 9915
1269 남극점 경주 - 아문센, 스콧과 섀클턴(1) [18] epic10360 11/12/11 10360
1268 신라 vs 백제 - (1) 혼란스러운 아침 [12] 눈시BBver.29056 11/12/10 9056
1267 이해. [9] Love&Hate8241 11/12/09 8241
1266 차별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24] 구밀복검8564 11/12/09 8564
1265 키보드 배틀 필승 전략 [57] snoopy11993 11/12/08 11993
1264 퇴근 시간에 전화 한 통이 뭐 그리 어렵다고. [52] PoeticWolf12035 11/12/08 12035
1263 두 개의 장례식 없는 죽음을 맞이하며. [5] 헥스밤10044 11/12/08 10044
1262 커피믹스를 원두커피로 바꿔보자. [15] epic9402 11/12/08 940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