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4월 27일 아직 한국에 아파트라는 생활 공간이 많지 않았던 무렵, 어느 66세 남성이 집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66세면 노인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윤 노인 피살 사건이라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윤 노인은 단순한 일반인이 아니라 일제 때 이미 규슈제대를 나오고 조선 최대의 회사 중 하나였던 경성방직 공장장으로 근무한데다 해방 후에도 한국탄닌공업이라는 회사를 운영 중인 거부였다는 데서 관심이 쏠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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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아파트에서 살인, 한국탄닌공업 회장 윤주복 씨 피살
빨랫줄로 손발 묶여
퇴근길 양자가 발견, TV-녹음기 없어져
연고자 중점 수사...원한도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6동 2층 207호에서 수양아들 이남수(28, 동인화학 사원) 씨와 함께 살던 윤주복(66세, 한국탄닌공업주식회사 회장) 씨가 4월 27일 오후 6시 30분쯤 빨랫줄로 두 손과 발이 묶인 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서울경찰 수사진은 범인 검거를 위해 총동원, 수사를 벌이고 있으나, 28일 새벽 3시 현재, 결정적 단서를 얻지 못한 채 관계자들의 증언을 계속 청취하고 있을 뿐이다.
오전 중에 살해된 듯
[사건현장]
윤 노인은 두 손과 발이 빨랫줄로 묶이고 입에는 수건이 틀어막힌 채 양자의 방 마룻바닥에 엎어져 숨졌다. 양자 이 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시체는 마룻바닥에 누워 있어 관리인 김민배(38) 씨를 불러 시체를 침대로 옮긴 후 112에 신고했다.
윤 씨의 아파트는 방 2개, 마루 1, 부엌 1개의 89평, 집에서 기르던 발바리 개 두 마리는 부엌에 갇혀 있었다.
시체를 검안한 공덕의원 의사 김성섭 씨는 사망 시간을 오전 8시에서 11시 사이로 추정했다.
현장조사 결과 휴대용 소니 7인치 TV 1대, 녹음기 1대가 없어졌으나 책상 서랍의 현금 8천 원과 저고리 주머니에 든 9만 8천 원짜리 예금 통장, 책상 위에 풀어 놓았던 오메가 시계 등은 없어지지 않았다. 윤 씨 이웃 방인 209호실 최상경(22) 씨는 이날 아침 8시 30분쯤 윤 씨의 아들이 출근한 후 그 방을 지날 무렵, 방 안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친구 국순엽(61) 씨는 이날 오후 4시쯤 종로에서 윤 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만 가고 응답이 없어 외출한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양자는 친구 아들...기술고시 위원이기도...
[윤 노인의 신원]
윤 노인은 63년 5월 당주동 56번지에서 이 곳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와 양자 이 씨와 함께 생활해 왔다.
6.25 때 사망한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던 윤 노인은 8년 전 친구 이종주 씨의 아들 이 씨를 양자로 맞아 들였으며 호적에 입적한 진짜 양자는 일본에 있다.
성격이 쾌활한 편이며 현재 고등고시 기술직(방적) 고시 위원이기도 한 윤 노인은 때때로 독선적인 경우가 많으며, 평소에 마작을 즐겨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일본 규슈제대 출신인 윤 씨는 해방 전 모 저명한 방직회사(경성방직) 사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반도호텔 600호에 탄닌공업주식회사 사무실을 갖고 있으며, 영등포 당산동 5가 9번지에는 공장을 두고 있으나 1년 전에 문을 닫고 휴업 상태에 있었다.
단둘이서만 자취...전차만 타는 알부자..
[생활 주변]
매일 아침 7시면 집에서 기르는 발바리 2마리를 이끌고 아파트 주위를 산책하는 윤 노인은 주민들로부터 루시 할아버지로 불렸다. 식모를 둔 일이 없으며 아침은 양자 이 씨가 짓고, 저녁은 윤 노인이 직접 지어왔다.
동료 사이에는 알부자로 알려졌지만 택시를 타는 일이 없고, 꼭 전차만을 타고 다녔으며 깡통맥주를 마시고 나면 깡통을 모아 고물 장수에게 팔 정도의 알뜰한 살림형이다. 부인이 없는 대신 동성 간에 변태적인 성품도 있었다는 동료들의 말도 있다. 사건이 난 윤 노인의 집은 5년 전 김봉현(28) 여인이 피살된 7동 207호와 1백 미터 간격으로 마주 보고 있으며 호수가 같다는 데서 이웃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집 수리 인부 혐의도..
[경찰 수사]
경찰은 1)문을 밖에서 닫으면 자동적으로 안에서 잠겨지게 되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는 점, 2) 개들이 부엌에 갇혀 있었다는 점, 3) 현금 예금 통장 등은 그대로 있고 TV, 녹음기 등 남의 눈에 띄기 쉬운 물건이 없어졌다는 점, 4) 윤 노인의 평소 성격이 차임벨을 누르면 창구를 통해 방문객을 확인한 후 문을 열어주었다는 점 등을 들어 범인은 평소 윤 노인 집에 자주 왕래가 있거나 지면이 두터운 이가 아닌가 보고 연고 중심의 수사를 펴고 있다.
경찰은 또 10일 전 윤 노인이 3만 5천 원을 들여 집 수리를 했을 때 수리를 맡았던 인부들 주변에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조선일보, 1968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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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는 보도의 느낌이 다릅니다. 어디서 피살됐는지 자세한 집 호수까지 공개되는 건 기본이고, 사망한 사람의 피살 현장이 그대로 나오는데다 가명 처리 같은 건 없이 피해자도 피해자 관계자도 그대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새삼 1960년대의 한국 사회가 무척이나 좁고 프라이버시 관련한 준칙이 없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아무튼 엘리트 출신 부자가 살해 당한 사건이기에 수사가 곧바로 들어갔는데, 문제는 수사 과정에서 윤 노인의 사생활 속에서 조금씩 이상한 점이 관측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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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아직도 못 잡아
- 마포 아파트에서 탄닌공업 회장 윤 씨 피살
27일 하오 6시 40분쯤 서울 도화동 마포아파트 6동 207호 윤주복 씨(66)가 그의 안방에서 타올로 입이 틀어막힌 채 무명끈으로 손발이 묶이고 코에서 피를 흘린 채 엎드려 숨져 있는 것을 동거인 이남수 씨(28)가 집에 돌아오던 길에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안방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라디오가 낮게 켜져 있었다. 경찰은 윤 씨의 시체 해부 결과, 오른쪽 목뼈(갑상연골)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짓눌려 질식사했으며 위의 내용물이 완전 소화된 점으로 보아 윤 씨가 이날 상오 11시부터 12시 사이에 피살된 것으로 밝혀냈다. 경찰은 원한이나 금전관계로 인한 살인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경찰 수사]
사건 발생 48시간이 지난 29일 정오까지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 못하고 기초 수사에만 맴돌고 있다. 경찰은 1)윤 씨의 호주머니 속에 현금 8천 원과 9만 8천여 원의 예금 통장이 그대로 있었고 2)휴대용 3인치 텔레비전 1대와 내셔널 일제 휴대용 녹음기 1대가 없어졌으나 그밖의 값진 물건이 방 안에 그대로 있었으며, 3)죽은 윤 씨를 묶었던 무명끈과 타올이 집 안에 있던 것을 사용했다는 점 등의 상황으로 평소 안면이 많은 2명 이상의 소행이며 원한이나 재산 관계로 인한 살인으로 보고 수사를 펴고 있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지문 채취에 실패한 경찰은 6년 전 이 아파트에 이사온 윤 씨와 동성연애를 했다는 이 모, 조 모, 모 대학생 고 모 군 등 세 청년의 신병을 확보, 범행을 추궁 중이며, 지난 1년 동안 윤 씨 집 방문객 40여 명 중 12명의 청년들의 소재 수사를 벌였으나 이들의 아파트 수위실에 적은 주소는 모두 허위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경찰은 윤 씨의 사업 관계로 인한 살인 여부를 캐기 위해 윤 씨가 최장으로 있는 한국 탄닌 공업의 경리 장부 일체를 압수 수사 중이나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다.
[윤 씨 주변]
1.4 후퇴 때 부인 김영혜 씨(52)를 잃은 윤 씨는 슬하에 소생이 없으며 양자로 일본에 윤응선 씨가 있는데 윤 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29일 귀국할 예정이다.
경성고공(서울대 공대 전신 중 하나) 1회 졸업생으로 일본에서 규슈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윤 씨는 한때 경성방직 지배인을 지냈으며, 중국 톈진에서 대중은행을 경영하여 수십 억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해방 후 재산을 몰수 당한 윤 씨는 해방 이듬해 귀국, 군 관계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6.25 이북 수복 때는 흥남질소비료공장 관리인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윤 씨는 태화방직회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사업가적 능력이 있었으며 작년 9월에는 10여 년 간 교류한 신 모 씨와 함께 서울 당산동 5가 9 한국탄닌공업주식회사를 정 모 씨로부터 6천만 원을 주고 인수했다. 마작 친구인 태순호 씨(52)는 윤 씨의 성격이 솔직하고 괄괄한 편이며 마작을 좋아해 1주일에 한번씩 윤 씨 집에 친구들이 모여 마작을 즐겼다고 한다. 이남수 씨와는 7년 전에 우연히 알아 함께 자취생활을 해왔다.
(경향신문, 1968년 4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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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틀 뒤인 29일, 여러 새로운 정보가 기사에 뜨기 시작했습니다. 윤 노인은 생전 여러 명의 동성애 관계의 여러 명의 남성이 있었으며, 1년 동안 12명의 청년 남성이 그의 집에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 노인은 단순한 거부 수준이 아니라, 해방 전에 이미 수십 억의 재산을 갖고 있었던데다, 해방 이후 재산이 몰수됐어도 금방 재산을 복구하고 6.25 당시 잠시 우리 정부가 북한 지역을 수복했을 때 한반도 이북 최대의 공장인 흥남비료 공장 지배인으로 그를 바로 선임할 만큼 화학공학 업계에서는 거의 첫째, 둘째 수준에 손꼽히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죽기 1년 전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회사를 매매할 만큼 정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서울대 공대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이기도 한데 재산 증식과 관련하여서는 수특보다 더 중요한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틀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범인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밝혀지는 기괴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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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아파트 살인범 구속
- 재물 노린 두 대학생
- 장물 TV 등 압수, 범행은 순순히 자백
서울시 경찰국은 마포 아파트 6동 207호 윤주복(66, 한국탄닌 대표) 노인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5일만인 1일 오전 6시 15분 M대학 국문과 1학년 이효성(22, 성동구 금호동 4가 535)과 K대학 음악과 2학년 변종국(22, 성북구 삼선동 1가 53) 등 2명을 범인으로 각각 그의 집에서 검거했다. 또, 장물인 휴대용 소니 TV 1대(시가 4만 원), 줄리엣 녹음기 1대(시가 2만 원), 세이코 탁상시계 1개(시가 1천 원)도 변 씨의 집 캐비닛에서 압수한 경찰은 이날 밤 범인들을 살인 및 특수 절도 혐의로 영장을 발부 받아 구속했다.
이들은 경찰에서 동성애 관계로 이용 당하고 미국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보복 겸, 전당포에 잡힌 트럼펫을 찾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윤 노인을 죽였다고 순순히 범행 동기를 자백했다.
자백에 의하면 K고등학교 동기 동창생인 이들은 윤 노인의 거짓말과 변태 행동을 증오하는 한편, 윤 노인의 재물을 노려 지난 27일 오전 9시 10분 변 씨의 집 찬장에 있던 3m와 2m의 무명실로 된 노끈을 나일론 책가방에 넣어 윤 노인 아파트로 찾아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범행 당일에도 수양아들 이남수(28) 씨 방에서 “전당포에 잡힌 트럼펫을 찾게 5만 원만 꾸어달라”, “왜 미국에 보내준다고 약속해 놓고 안 보내주느냐, 우리를 이용만 하기냐”라고 따졌다.
그러나 윤 노인은 “이용한 것이 무엇이 있으냐”라고 역정을 내는 바람에 합기도 2단의 이 씨가 윤 노인의 목을 눌러 쓰려 뜨렸으며, 변 씨도 이에 합세, 수건을 입에 틀어막아 죽이고, 갖고 온 빨랫줄로 손과 발목을 묶었다. 그런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휴대용 TV와 녹음기, 탁상 시계를 갖고 도망쳤었다는 것이다.
이상한 관계와 돈과... 윤 노인 살해 사건의 전말
저당 잡힌 악기 찾을 돈 없어... 유학 약속에 동성애도 감수...
마포 아파트 살인 사건은 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던 황혼기의 노인과 두 대학생의 이상한 동성애 관계가 빚은 것이었다. 이 관계는 마침내 증오로 번져 윤 노인을 살해하고 만 것이다. 이번 살인극의 발단에서 범인 체포에 이르는 줄거리를 더듬어 보면...
[범행 동기]
지난 겨울방학 때 구미서관 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 씨는 (68년) 1월 20일께 동료 안 모(20) 군과 같이 윤 노인 방에 책을 팔러 찾아간 것이 인연이 돼서 윤 노인을 알게 되었다.
안 군은 윤 노인의 가학성 음란증에 염증이 나 곧 발을 끊고 이 씨만 20여 차례 놀러다녔다.
“미국과 일본에 내 회사가 있으니 해외에 보내주겠다”라는 윤 씨의 말에 이 씨는 윤 노인의 변태적 행위도 참아왔다. 그러던 중 학교가 개강했다. 3월 5일 이 씨는 고등학교 동창인 변 씨와 함께 변 씨의 전공 악기인 트럼펫을 종로 5가 동진사 전당포에 잡혀 마련한 4만 원 중 1만 원을 교제비로 쓰고 3만 원을 취업 보증금으로 내어 관수홀 6번 웨이터로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보증금 3만 원만 날려버리고 취직 20일 만에 직장을 잃었다.
이 사이 이 씨는 변 씨를 윤 씨에게 소개, 변 씨는 6차례나 윤 씨와 야릇한 관계를 맺으면서 윤 씨에게 외국에 보내줄 것을 졸랐다.
그러나 윤 노인은 점점 냉담해졌다. 이때부터 이들은 윤 노인의 변태성을 증오하기 시작, 지난 3월 중순엔 두 차례에 걸쳐 윤 노인 아파트에 찾아가 잠겨 있는 현관문을 열쇠와 옷핀으로 열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절도에 실패한 이 씨와 변 씨는 트럼펫을 찾기 위해 4월 8일부터 26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윤 노인에게 “5만 원만 주면 당신 급사라도 하겠다”라고 간청하다가 거절당하고 강도짓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범행은 의자에 앉았던 이 씨가 윤 씨의 등 뒤로 달려 들어 급소인 목뼈를 눌러 부러 뜨린 데서 눈깜짝할 사이 벌어지고 말았다. 윤 노인이 반항하자 합기도 2단인 이 씨는 윤 노인의 팔을 간단하게 비틀어 쓰러뜨렸던 것이다.
[도피경위]
아파트 문을 나선 이들은 층계를 내려와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마포발 정릉행 좌석버스를 타고 삼선동 변 씨의 집으로 왔다. 장물을 변 씨의 방 캐비닛에 넣어두고 이 씨는 금호동 집으로 갔다.
이튿날 조간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읽고 윤 노인이 죽은 것을 알았다. 28일 하루종일 방 안에서 고민하던 이 씨는 29일 아침 도봉산으로 올라가 소주를 마셨고 저녁에는 영화 다방에서 친구와 만나 범행 사실을 비치고 자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의논까지 했었다고 한다. 변 씨는 그동안 극장 구경을 하며 지내오다가, 29일 이 씨를 영화 다방에서 만나 장물을 모두 가져가라고 말했으나 거절, 그대로 캐비닛에 두었다.
[서울시 경찰국의 개가]
서울시 경찰국 강력계장 윤현용 경감, 강력주임 오진배 경위, 김남기 경사팀은 사건 발생 닷새만인 1일 오전 6시 15분 범인을 그들의 집에서 일망타진함으로써 개가를 올렸다.
윤 경감팀은 마포경찰서 수사진과는 별도로 윤 노인의 비밀장부 겸 일기장에 흥미를 느꼈다. 암호로 된 일기장에서 이효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고, 이효성에게 지급된 금액이 암호로 표시돼 있었다. 또, 윤 노인 소지품에서 ‘관수홀 웨이터 6번’이라는 명함 조각이 나왔고, 관수홀을 답사, 6번은 이효성과 변종국의 공동 번호라는 것을 밝혀냈다. 3월 25일부로 이 홀에서 보증금이 없어 쫓겨나 요즘에는 을지로 5가 영화다방 주변에서 배회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포경찰서의 수사 미스]
엽기적 살인사건이나 기타 중요한 사건의 경우, 일부 수사관의 선입견이 이따금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놓쳐버리는 수가 많다. 윤 노인 살해 사건을 관할하던 마포경찰서가 이번에 그 전철을 또 밟고 말았지만, 이 때문에 윤 노인과 탄닌공업회사를 함께 인수한 신두식 사장이나 수양아들 이남수 씨가 한때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마포경찰서는 지난 28일 이남수 씨로부터 “사건 나던 날 아침 윤 선생(이남수 씨는 수양 아버지 윤 노인을 평소 이렇게 불렀다)이 외부 전화를 받더니 관수홀에 있는 6번 웨이터 이 군의 전화라면서 퉁명스럽게 수화기를 놓았다”라는 내용의 진술을 세 번씩이나 들었으나, 한 차례 관수홀을 답사한 끝에 “6번 웨이터는 이 씨가 아니고 변 씨이며 3월 26일 이미 그만두었다”라는 사실만 알아내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스스로 팽개치고 말았다. 그만큼 수양아들 이남수 씨와 신두식 씨에게 엉뚱한 미련을 안고 있었고, 30일 재산 관계 수사 결과 신 사장의 용의점이 완전히 풀리자 이 씨에게로 수사력을 총 집중하여 30일 밤 안으로 범행을 자백 받겠다고 큰소리까지 쳤었다.
그래서인지 1일 오전 진범이 서울시 경찰국 팀에 잡혔을 때까지도 마포경찰서는 계속 이남수 씨에게 범행을 자백하라고 울러댔었다.
(조선일보, 1968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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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1960년대 한국에? 싶지만 1960년대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포경찰서의 엉터리 수사로 고통을 겪은 양아들 이남수 씨와 신두식 씨의 사례 역시 오늘날에도 종종 반복되고 있고요. 심지어 마포경찰서는 범인 빼앗긴 게 분하다고 분풀이식으로 별건으로 범인의 주변 인물들과 양자 이남수 씨를 구속 신청하기까지 했습니다.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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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체포 공 빼앗겨, 마포경찰서에선 분풀이?
(전략)
수사 도중 관할서인 마포경찰서 수사진이 보인 태만과 겉핥기식 수사는 반성해야 할 일. 결국, 마포서는 공을 서울시 경찰국 강력반에 빼앗기고 말았는데, 5월 2일엔 범인들의 친구인 서 모, 심 모 군을 절도 미수로, 윤 노인의 수양아들 이 씨는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 분풀이(?) 수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동아일보, 1968년 5월 4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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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은 둘 모두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둘 모두 아버지가 대학을 나왔고 한 달에 용돈을 5천 원, 1만 원씩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에게 용돈 타는 게 쑥쓰럽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돈 주는 노인인 윤 노인을 알게됐고 성관계의 대가로 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경찰 추산 이러한 청년들은 40여 명에 달하고 윤 노인은 이들에게 대가로 양복, 구두 등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윤 노인의 관심이 시들면서 미국에 보내주겠다던 약속을 지켜주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사준 트럼펫을 전당포에 맡기고서는 찾을 돈이 없자 살인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23일 검찰은 두 범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였고 일 주일 뒤인 10월 31일 법원 역시 그대로 선고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사건이 일어난 마포아파트 6동 207호는 1970년대 아파트 붐에 힘입어 집값이 나날이 올라왔고 2년 뒤인 1970년 훨씬 비싼 값으로 전세를 줬다고 합니다. 당시 기사에서는 이웃에서 살인 사건이 나도 관심 없는 아파트 세태를 꼬집기도 했는데, 이는 1970년대 본격적인 고도성장기로 접어 들면서 익명성이란 개념의 본격적인 대두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4-2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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