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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7/24 23:57:29
Name comet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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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역사] 일제 치하 도쿄제대 조선인 유학생 일람 (수정됨)



화면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긴 명단을 보고 놀라셨을 수 있을 텐데, 위 명단은 일제 치하에서 도쿄제국대학에 유학한 조선인 명단입니다. 적색란은 요절, 월북(추정) 등 불운을 겪은 인사를 의미하며, 법학부(법과대학), 경제학부(상과대학), 문학부(문과대학), 의학부(의과대학), 이학부(이과대학), 공학부(공과대학), 농학부(농과대학) 출신으로 구분됩니다. 

(업로드된 파일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딱 가운데쯤에 위치하면 좋을 터인데)

개인적인 자료 정리 차원에서, 그리고 지난 번 연재와도 관련이 어느 정도 있기도 한 점에서 일제 치하 도쿄제대를 비롯한 관공립 대학 유학생의 해방 전, 그리고 해방 이후 행적을 조사해보았습니다. 시중에 출간된 "제국대학의 조센징(정종현)"에서도 도쿄제대 출신 조선인 명단을 다룬 바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최근 규슈대학에서 복원한 졸업-재학생 명단이 나왔습니다. 위 명단은 상기 두 자료 및 두 자료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창씨개명자, 해방 전후 이력 등을 조사하여 보완한 것으로, 아마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자료 중 가장 자세한 자료일 것입니다.

아래 글은 일종의 해제격인데, 도쿄제대를 거쳐간 조선인 유학생들의 삶, 그리고 식민지에서의 도쿄제대(그리고 대학서열)가 갖는 의미와 해방 후 그것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살피는 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식민지인과 도쿄제국대학]

일본의 대학 서열 시스템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전에도 견고했습니다. 그 정점에는 수도 도쿄에 위치한 도쿄제국대학이 있었습니다. 본토의 일본인들은 물론, 식민지의 조선인들에게도 도쿄제대의 위상은 무척 컸습니다. 어쨌든 제도적으로 조선인의 입학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면서도 1년에 수 명 배출되는 데 불과한 도쿄제대 졸업생은 곧 3천 만 식민지 조선인 중 최고 엘리트의 자리를 약속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쿄 대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현재의 도쿄대학

그러나 식민지인들에게는 본토인들과 다른 제약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도적으로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하지는 않았으나, 제국대학은, 특히 경쟁률이 있었던 제국대학인 도쿄제국대학은 대학 예비과정인 고등학교 3년을 거치지 않고서는 입학이 사실상 불가능했는데, 문제는 식민지에는 단 한 곳의 고등학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 학생에게는 첫째, 중학교(고등보통학교) 4년 또는 5년을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 도쿄, 교토제대 입학을 준비하느냐, 둘째, 본토에 남아 경성제대 예과 또는 경성법전, 경성고상, 연희/보성전문 등 전문학교에 들어간 다음, 경성제대 학부 또는 도호쿠-규슈제대 편입을 준비하느냐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존재했던 셈입니다. 해방 후에도 한 동안 학비 부담으로 서울 유학을 꺼렸던 시기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일제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더라도 전자의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중학교 졸업 후 조선에 잔류한 다음, 자기의 커리어를 준비하는 수재들도 많았습니다. 이 점은 인재 유출이 심각했던 대만 총독부가 조선의 상황을 부러워 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서북지방의 본토 유학 열풍]

그러다 보니 흥미로운 현상도 발견됩니다. 이북, 특히 서북지방은 인구 대비 일본 본토에 소재한 도쿄, 교토제대 진학자수가 많았습니다. 특히, 의학부의 경우, 평안도의 진학자수가 절대숫자로도 경기(서울 포함) 지역보다 많을 정도였습니다.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 그리고 관북지역의 조선인 입장에서는 사실 서울 유학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모될 뿐더러, 이들 지역은 구한말 이후 서양 선교사와 일제에 의한 근대 문물 유입의 영향을 가장 빠르게 받아 어느 정도 서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중심성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평양이중(평양고보) 출신의 회고담에 따르면 "옛날 30년대의 우리 (평양고보) 선배들은 경기고 출신들에게 「너희들은 경성제대를 먹어라, 우리는 동경제대를 먹을 테니까」라고 말 할 정도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지역의 조선인 수재가 곧바로 본토 유학을 선택한 동기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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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중학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진학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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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의학부 진학통계


[도쿄제국대학 출신 조선인의 해방 후]


각설하고, 해방 후 도쿄제대 출신 중 적지 않은 수는 역시 일제 당시의 경력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의 엘리트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몇 안 되는 도쿄제대 출신 중 유기천, 권중휘, 윤천주(서울대 정치학과 편입), 고병익(서울대 사학과 편입) 등 4명이나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사실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적지 않은 수가 일제 당시의 화려한 이력, 대학 서열의 정점이라는 상징적인 학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정국, 6.25 전쟁을 거치며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기자 조갑제는 과거 총독부 인사, 그리고 일제 당시 도쿄제대 출신 인사를 취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十日會(일본인 조선 총독부 근무자의 친목모임)」회원들의 순탄한 人生 역정과 퍽 대조적인 그룹이 있다. 임문환 任文桓씨가 쓴「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졸업자 10명의 운명」(80년 9월1일치 「友邦」)에 따르면 1932~1935년 사이 任씨와 함께 법학부에서 공부했던 한국인은 모두 10명이었고 전부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관리가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진염종씨. 신익희는 상해에서 귀국 직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들을 끌어 모아 신생 국가의 기본 정책을 입안토록 했다. 진 씨는 추운 사무실에서 과로하다가 40세에 병들어 죽었다. .... (기타 동창생의 비운을 토로) ...


지금(80년대 초) 살아남아 있는 것은 임문환 씨 뿐이다. 임 씨는 『나의 중·고·대학 동창생은 전부 일본인이지만 8할 이상이 지금도 원기왕성하게 유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十日會」와 도쿄대학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총독부 출신들이 패전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하지만 同시대의 한국인이 겪은 고난에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인 10명, 그것도 가장 우수한 知能을 가진 엘리트들이 겪은 질병, 갈등, 전쟁, 망명은 日帝 식민통치가 남긴 분단과 분열의 유산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5129&C_CC=AZ )


제가 정리한 표를 보면 아시겠지만, 식민지에서 아마 가장 손꼽히는 재능을 가졌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가장 성공가도를 달렸을 이들조차 상당수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온전히 비껴나가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북으로 간 과학자들]


자연계열 유학생의 해방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북행을 택한 이들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학부의 4할, 경제학부와 문학부의 2-3할이 해방 정국에서 (자의이든 타의이든) 북행 등으로 이후 이남에서의 행적이 불분명한 데 반해, 자연계열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비율이 높아 의학부와 공학부는 5할 남짓, 이학부는 무려 7할 가량이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은 하나의 경제 단위로 취급되어 한반도 이북에 공업 시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가 패망으로 치닫으면서 만주와 중국 본토 침략의 병참기지화 목적까지 더해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이든, 공학이든, 산업과 연계된 연구 인프라는 그나마 이북이 상대적으로 잘 구축되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도쿄제대의 경우, 유학생의 연고지 역시 서북, 관북 지역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북행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됩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북으로 간 도쿄제대의 자연계열 출신들의 처지는 인문사회계열의 그것보다는 대체로 나았습니다. 북한 정권에게도 기초과학 연구자, 엔지니어, 의사는 귀중한 인력이었습니다. 대학 교수로든, 국가적으로 대우받는 과학자로든, 심지어 과학, 공업 분야 고위직으로든, 동토의 왕국 북한에서조차 이들의 근황이 심심찮게 우리에게도 전해져 왔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에 이끌려 해방정국에서 남로당 등 좌익 활동을 벌이거나 해방 후에도 고문 시험 패스 경력을 인정 받아 법조, 공직에서 활동하던 법학부, 경제학부 출신 상당수가 이북에서의 행적을 찾을 수 없거나 숙청 소식만이 간간이 들려온 것과는 퍽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당초 북행을 택한 목적이었을 산업시설이 밀집된 이북에서 과학입국을 실현하겠다는 포부는 전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남에 남았던 과학자들이 어려운 시기를 거쳐 조국이 폐허로부터 일어서고, 부족하다고는 해도 식민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 손으로 후진을 양성할 수 있었던 세상을 목격한 반면, 북으로 간 과학자들은 그런 운명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교토제대를 다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토제대 출신의 이태규와 이승기가 겪은 운명의 차이도 그랬습니다. 북한 정권의 거버넌스가 실패한 이상, 정권이 이들 과학자에게 허용할 수 있는 은전의 최대한은 개인의 안위가 한계였습니다. 물론 북행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그조차도 보장되지 않았지만..


[희미해지는 도쿄제대]


식민지 대학 서열 최정점에 서있던 도쿄제대 출신의 영향력은 해방과 함께 점차, 그리고 상당히 급격하게 쇠감합니다. 원인은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더이상 인력이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유학생이 소수나마 해방 후에도 있기야 했다지만(백남준..) 더 이상 학계에서든 공공부문에서든 실업계에서든 한국의 대학이 아닌 도쿄대학을 나온 한국인이 수의 우위를 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해방 전에도 같은 일본 대학이라도 제국대학은 특성상 입학이 까다로웠으므로 와세다대학 등 사립대학에 비해서도 이미 동문이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둘째, 식민지에서 도쿄제대를 나왔다는 것은 본인의 탁월한 공부 재능이 기반이 되었겠습니다만, 도쿄제대라는 일본제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이라는 권위에 힘입은 측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이러한 권위가 타격을 입었습니다. 물론 일제 때의 위상이 완전히 없어지지야 않았다지만, 국내에서는 경성대학과 그 후신인 서울대학으로, 국외에서도 최고 명문의 위치를 빠르게 미국 대학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식민지배의 상징이라는 점 역시 권위의 침식에 기여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그래도 한국의 최고 학부로서, 어쨌든 새로운 역사를 만들 동량을 키워낸다는 정체성을 덧씌우고 있던 데 반해, 도쿄제대를 비롯한 여타 제국대학은 여전히 1945년 당시에 박제된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조소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약력」들일수록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것이 한가지 눈에 띈다. 「권위」를 가진 구절만은 길이 보존되고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가령 「동경제국대학」, 「경도제대」하는 학력난.그런 사람일수록 본적을 「경성부 황금정」이라고는 적지 않는다.「아나크로니즘」도 이쯤 되면 권위다. 서울대학교 출신은 전신경성제국대학. 현 서울대졸이라고 써야 될 것 같다. 백서에 「제국대학」이 어찌되었다는 뜻인지 어리둥절하다. 요즘의 대학을 다니는 20대는 그런 가치체계로는 정말 약력다운 약력을 한 줄도 쓸 수 없겠다. 「제국」은 커녕, 수학일수도 간신히 될까 말까한 「한가대학」을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 학벌과 권위에 등을 기대는 시대는 벌써 사라졌다. 동경제대의 「제국」이란 글자가 사라지기 이전부터 그런 시대는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있었다.약력 속에 「제국」을 장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고 속에도 「제국정신」을 장식하고 싶지 않을까 겁난다.「제국」은 오히려 부끄러운 상처이지 영광스런 훈장은 아니다.「제국」으로 남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돈·키호테」뿐이다. 명사들은 우선 약력부터 다시 정리해 두고 소명을 기다리자. (중앙일보, 1967년 6월 29일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24523#home )


셋째, 졸업생 상당수가 이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점 역시 꼽을 수 있습니다. 1편에서 살펴보듯, 이북 출신은 상대적으로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 많이 진학했습니다. 경성제대의 조선인 중학 진학자수 2위 중학이 경복중학인 반면, 도쿄제대 진학자수 2위 중학은 평양이중이었고, 심지어 도쿄제대와 교토제대 의학부는 평안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는 통계는 상징적입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단으로 다수의 도쿄제대 출신은 북행을 택했고, 이남에 남은 도쿄제대 출신들 또한 연고지가 이북인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네트워크의 축소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성제대 출신의 해방 후 한국 정관계에서의 화려한 약진에 비해, 도쿄제대의 그것은 학계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래도 약간은 빛이 바래 보입니다. (어쩌면 평양고보-평양이중 출신이 겪은 남한에서의 삶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의외로 대학 간 경계가 느슨했던 제국대학들]


끝으로 다소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대학 간에는 전출입 등 대학 간 이동이 자주 관측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후 일본 사회와도 비교되는 차이이며, 한국식 사고는 물론 전후 일본에서도 나타나지 않을 법한 전출입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령, 이러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도쿄제대 공학부를 다니다 교토제대 이학부로 전출, 도쿄제대 문학부를 다니다 도호쿠제대 이학부로 전출, 도쿄제대 문학부를 다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나 도호쿠제대 법문학부로 전출, 도호쿠제대 법문학부를 다니다 도쿄제대 농학부로 전출 등. 학사편입까지 포함하면 더욱 다양한 사례가 관측되는데, 안익조처럼 도쿄제대 농학부 졸업 후 경성제대 의학부에 편입하거나, 최인기처럼 규슈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교토제대 문학부에 편입했다가 다시 재학 중 도쿄제대 농학부로 전입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제국대학 간, 각 학부 간 느슨한 서열은 있으나 한국이나 전후 일본보다 유연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특정 소수만을 추려 교육시키는 고등학교라는 공통 분모가 있어서 아닐까 짐작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른바 진보파 학자 사이에서 거론되는 국공립대 공동 학위제의 이상일텐데, 반대로 저로서는 전전 일본만큼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국립대학 진학기회 및 대학 1-2학년 수준의 교양교육을 제공하는 '(구제)고등학교'라는 예외적인 환경이 애당초 구축되지 않는다면 실현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3-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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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비쳐
22/07/25 00:45
수정 아이콘
조선인 중학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진학통계, 지역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의학부 진학통계에서 '외부링크 사용이 허용치를 넘었습니다.'라고 뜨는 것 같습니다.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2/07/25 00:51
수정 아이콘
일단 수정해보았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키비쳐
22/07/25 00:59
수정 아이콘
예, 지금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22/07/25 01:47
수정 아이콘
다행이네요. 경성제대 편도 준비 중인데 그림 파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고민..
스타본지7년
22/07/25 01:29
수정 아이콘
길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22/07/25 01:47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으로돌아가야해
22/07/25 01:58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당시 북한행을 택한 이학부 출신들은 당시 기준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애기간을 통틀어 생각해 봐도 괜찮은 선택이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70년대까지는 북한이 남한에 비해 기술력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얘길 들은것 같네요. 이후의 드라마틱한 크로스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떠오르게 만들지만요..
22/07/25 02:33
수정 아이콘
사실 똑같이 북행을 한 법학부, 경제학부 졸업생들의 말로가 대체로 불운했던 것과 비교하면, 북행을 택한 과학자들은 북한에서도 전반적으로 학계 원로로 대접을 잘 받은 편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예후는 설사 북한 같은 폐쇄적인 체제에 놓이더라도 대체로 전문성이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월북 당시 기준으로는 북한에 한반도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등 북한의 이과, 공과대학 교원에게 투입된 예산 등의 대우가 남한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나았다는 점에서 이북쪽이 오히려 더 좋은 편이었고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운명은 한편으로 비정치적이고 독립적일 것만 같았던 과학자들조차 속한 체제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분명히 이들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을 테고, 최소한 같이 북행을 택한 문과 계통 지식인보다는 나은 삶을 누린 것은 맞습니다만, 남한에 잔류한 과학자들과 비교하면 과학자로서는 이들이 택한 대가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도쿄제대 출신 잔류 과학자는 물론,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타 제국대학 출신, 그리고 경성제대-경성대학 이공학부 출신 중 잔류한 과학자들은 어려웠던 시기조차 미국이 대표하는 세계 과학계와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60년대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 인프라 구축으로 이들은 학계에서든 산업계에서든 다방면으로 진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학계에 남은 사람들은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자리 잡아 본인 연구는 물론, 제자를 키워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북행을 택한 과학자들은 연구자라면 늘 갈망했을 세계 학계와의 교류가 단절됐고 북행 당시만 해도 선진적이었던 연구 환경은 그 이상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짧게 언급한 교토제대의 두 조선인 정교수 이승기와 이태규의 삶이 그런 점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북행을 택한 이승기야 북행 직후부터 북한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스스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한 연구 업적을 남기며 북한에서는 애국 과학자로 대접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있었을 때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던 세계 학계와의 교류는 사실상 단절됐으며,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연구환경 역시 몸담고 있는 정권이 실패함에 따라 점차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반면 이태규는 남한의 혼란스러운 학내 분규 상황(국대안 사태)을 거치며 환멸을 느끼고 단신으로 미국으로 떠났으나, 어쨌든 세계 학계와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더러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한국인 유학생들을 제자로 받아 육성하였고, 70년대 이후로는 모국으로 귀국하여 카이스트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비정치적일 과학자들조차 (이승기부터도 호남 출신이나 더 나은 연구환경을 찾아 북으로 택한 것이었으니..) 체제라는 제약은 강력했던 셈입니다.
집으로돌아가야해
22/07/25 02:46
수정 아이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덕분에 지식이 많이 늘었습니다.
AaronJudge99
22/07/25 02:12
수정 아이콘
저는 왜인지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구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교육체제와 당시 대학들 이런거…
나무위키에서 여러 해외 대학들이나 우리나라 대학들, 해외 입시 체제나 일제강점기 교육체제 등에 관한 문서를 읽곤 해요
약간 교육과정이나 교육체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런 생각도 종종 하고요
22/07/25 02:35
수정 아이콘
연속성도 있고, 그렇지만 중대 사건(해방 등)을 거치며 분명히 이전과 이후가 구분되는 면도 있고, 그렇습니다.
언젠가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연재를 다루게 되면 이 점도 한 번 포괄적으로 살펴볼 의향이 있습니다.
AaronJudge99
22/07/25 02:44
수정 아이콘
도쿄제국대학….
현재의 도쿄대학도 물론 일본 사회에서는 학벌의 왕으로 취급받지만 당시의 도쿄제국대학 졸업이라는 말이 주는 권위는 특히나 식민지에서는 더욱 컸겠죠
그토록 잘 나가던, 조선에서 손꼽히는 엘리트였던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평양전쟁/중일전쟁 중 사망하고, 병사하고, 한국전쟁 중 죽고, 북한으로 넘어갔더니 숙청당하고….
참 역사라는 수레바퀴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싶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이 격동의 시기의 조선이 아니라 지금, 발전된 선진국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참 잘 살았을 텐데요…..
성야무인
22/07/25 03:03
수정 아이콘
자료 감사합니다.

저중에 제가 아시는 분도 명단에 있는데

징집 피해서 월북하신 게

아니라 소련으로 도망갔다가 해방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온 다음

6.25때 남한으로 내려 오신 분 성함도 있네요.
22/07/25 10:02
수정 아이콘
오, 재월남하신 분이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분이실지
성야무인
22/07/25 10:17
수정 아이콘
김동휘라는 분이실겁니다.

그리고 저 분 중 청목영남 1943년 중퇴하신 법학부 87번분의 성은 김씨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오래되서 틀릴수도 있지만)
22/07/25 11:5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영남이 한국 이름일지, 히데오라는 일본 이름일지..
성야무인
22/07/25 12:06
수정 아이콘
한가지 더 알려드리자면 40-45년 일본으로 유학간 신의주 고보 출신들끼리

구락부를 만들어서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몇몇 분들 중 소련으로 도망가신 분들 중에는

조봉암 선생이랑 관련되서 진보당 창당 때 핵심 역할을 하신 분도

진보당 사건 때 같이 사형선고 받으신 분도 계십니다.

진보당 사건 이후 행적이 묘연해 지신 분들도 있고 재야에서 조용히 계시던 분도 있구요.
22/07/25 14:25
수정 아이콘
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그분들이 겪었던 세월의 혼란상은 마치 백이숙제처럼 은거의 삶을 택하게 만들었을 수 있겠다 싶네요.
22/07/25 03:26
수정 아이콘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와 분석 감사합니다. 요즘 시대에도 해외유학은 적잖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저 시대의 유학생활은 대체 어땠을런지 쉽게 짐작이 가질 않네요. 물론, 저당시에는 구제고등학교만 다녀도 엘리트 취급이었으니, 거기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분들은 정말 대단한 우대를 받기도 했겠지만요.

출신고교를 자세히 뜯어보면 유독 경제학부와 문학부에서만 영미권의 퍼블릭스쿨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7년제 고등학교나, 일본 재계와 연관이 깊은 세이케이, 세이죠 출신이 여럿 보인다는점이 흥미롭네요.
22/07/25 10:56
수정 아이콘
예. 70, 80년대 유행했던 명사들의 회고담을 보면 종종 구제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밴 회고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대학, 학부, 기수 보면 유독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고교가 모이기도
League of Legend
22/07/2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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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2/07/25 11:5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경계인
22/07/25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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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현재 교토대학 유학중이라서 저도 관심있는 주제였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북지방, 대체로 평양출신들은 당시 아웃사이더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륙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돈이 모이던 곳이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는 멀었던, 그래서 더욱 서구화 근대화 개화운동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평양대부흥 운동도 연관되는데,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은 지역으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다보니, 머리속에 조선의 이념인 [유학]의 색채가 옅어서 신문물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쿄로 유학가는 숫자가 많았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출세할 길이 없다면 유학가서 돌아오겠다? 뭐 그런거요
22/07/2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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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일제 때의 평양은 인구야 부산과 비슷하다지만 서울과 대비되는 하나의 중심지 같은 느낌이 뚜렷합니다. 서울 유학을 할 바엔 일본 본토로 건너가겠다라는 마인드라든지, 유교와 대비되는 개신교의 총본산이라든지
메타몽
22/07/25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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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상의 풍파에 휘말리면 답이 없다는걸 데이터로 잘 보여주는군요
22/07/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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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징집, 1945년 전후 정치테러와 분단, 1950년 6.25 전쟁, 한국인에게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22/07/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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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22/07/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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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유지애
22/07/2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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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감사합니다.
제 진외삼촌도 동경제대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성함을 정확히 모르니
전체적으로 출신지며 나이며 맞는 이분이겠거니 하고 보고있는데 행적 기록이 없네요
이 분도 전쟁에서 돌아가셔서 현충원에 묻히셨습니다.
한국역사의 비극이 많은 지식인들을 죽게 만들었네요...
22/07/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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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분으로 짐작하고 계신가요?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든 게 1940-50년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유지애
22/07/25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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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충북 출신이시고 김씨라는 것에서
문학부 김학준씨이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22/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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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제3지대
22/07/2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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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엘리트 지식인이고 뭐고 다 소용없어지는군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뭘 믿고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기는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2/07/25 12:03
수정 아이콘
극단적으로 일제 내내 한국의 최고위층으로 살던 조선귀족들조차 해방, 6.25전쟁을 거치며 행적 불명이 된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빈자고 부자고 가릴 것없이 평등한, 그리고 참혹한 폭력이었던 셈입니다.
SAS Tony Parker
22/07/2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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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게로 보내야할 글이네요
22/07/2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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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자수도승
22/07/2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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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 하나 보탭니다
22/07/25 12:04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속 격으로 경성대학 편도 준비 중인데 역시 그림 파일 링크가 걸리네요.
메타몽
22/07/25 12:16
수정 아이콘
전에 어느분이 구글 블로거에 작성하고 복붙하면 그림 포함 잘 넘어온다고 알려주셨는데

그 글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네요 @_@

다른 분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22/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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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Promise.all
22/07/2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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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런 자료는 참 보기 힘듬데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22/07/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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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으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22/07/2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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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표로 나열했을뿐인데도 너무 흥미로운 역사네요..
22/07/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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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이력의 나열일텐데도 시대와 겹쳐져 전혀 단순하지 않은 기록의 모음이 되었습니다.
22/07/25 13:02
수정 아이콘
이 글의 논지와는 다소 벗어나는 말일수도 있는데, 도쿄제국대학이 당시 일본 대학의 정점에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들이 최고의 엘리트였다는 것도 틀림없습니다만 본문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시피 절대적인 졸업생 숫자, 그리고 최정점은 아니라지만 당시 식민지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어느 정도는 집안 환경이 괜찮은 수준이어야 가능했다는 점 등을 감안해보면... 사실상 더 영향력을 넓게 발휘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립대학 출신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 소케이 출신은 아닙니다만 제가 나온 대학에도 고 김수환 추기경이 동문이시더라구요.
22/07/25 14:35
수정 아이콘
예. 김수환 추기경이면 천주교계 대학일 조치대학이겠지요.

본문에도 썼지만 지적하신 점이 해방 후에는 도쿄제대의 그림자가 옅어지게 되는 데 기인하였습니다. 도쿄제대의 경우, 대학 본과 진학 전 3년제 고등학교부터 타지인 일본에서 유학해야 했다는 점이 특히 진입장벽으로 작용했고, 사립대학과 달리 전문부 등을 운용하지 않았으므로 도쿄제대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는 풀이 좁은 편이었습니다.

반면 사립대학은 비교적 문호가 넓은 편이었는데, 중학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 가능한 전문부는 물론, 학부의 경우에도 예과가 아니더라도 보성전문, 연희전문 등의 조선 내 전문학교나 타 사립대학 전문부를 거친 사람들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국내파는 유학을 안 가도 됐던 경성제대가, 그리고 유학파 중에선 와세다, 주오, 메이지, 니혼 등의 사립대학 출신들이 한국의 해방 후 정계, 학계, 언론계 등지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활동하는 수가 많았으니까요.
중상주의
22/07/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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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부께서 와세다를 나오셨습니다.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안 계신 고향집에 자랑스레 걸린 졸업사진도 있었죠.

잘 아시겠지만 일본의 경우 국공립대와 우리나라의 그것의 위상은 꽤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의 연고대에 비교되는 게이오-와세다는 일본 전국대학순위 10위권이죠.)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유학까지 한 집안치고, 우리 집안은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게 됩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공산주의 활동 비슷한 것을 하신게 아닌가 추정합니다. 당시 지성인의 의무로 간주되기도 했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신 것도 그렇고..)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22/07/2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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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엄혹했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벼락거지
22/07/2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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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아무 생각 없이 글 클릭했다가 진외증조부 성함과 마주쳐서 깜짝 놀랐네요.(집안의 큰 어르신이 신호를 보내주신 것 같아 같아 로또 사러 갑니다.)
자료 정리하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경성제대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22/07/2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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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아마 주말이나 그다음주쯤 될 것 같은데 몇 개의 게시물로 분할될 듯 합니다.
더미짱
22/07/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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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엘리트 조사 관련 업무를 한 2년 정도 한 적 있는데,
조사하다보면 정말 입이 벌어지는 사례들이 많지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례로 경성의학전문학교 45년 졸업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의학도인데도 2차대전 막판이라 졸업하자마자 관동군에 차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간신히 서울로 와서 자리를 잡고 50년 5월에 석사를 획득하였는데 1달후에 6.25 발발.
서울에 남아있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서 인민군으로 전쟁에 복무합니다.
그리고 다시 국군에 체포되서 국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불과 10년도 안되서 비자발적으로 관동군, 인민군, 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거죠.
22/07/2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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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에서는 식민지인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순탄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조차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규슈제대 법과를 졸업한 김호수의 경우, 해방 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하여 일본 본토의 내무성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중기에는 조선인은 고문시험을 붙더라도 자의반 타의반 대개 총독부 소속스로 그치는 케이스가 많았으나, 극후기인 40년대에 접어들면 일본 본토의 성청에 배치되는 케이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김호수는 해방이 되자 월북하였는데(함남 출신이기는 했습니다.), 1950년대 초 정전 직후 남파간첩으로 왔다가 적발, 사형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2/07/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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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봤습니다.
이런것도 정리가 되는군요.
22/07/2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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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마텐자이트
22/07/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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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지게 만드는 자료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셨던 돌아가신 집안 어르신들을 떠오르게 하네요
22/07/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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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본다면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인 겁니다.
국수말은나라
22/07/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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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대만 나와도 초 엘리트인데 당시 동경제대면 지금 하바드 위상에 뒤지지 않았을터 그럼에도 세상이 안좋은 시기니 징집 전쟁 분단 등 엘리트라 해서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보기에도 어렵겠네요
70년대 말까진 북한이 기초과학을 남한보다 월등히 앞섰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화학분야...모든 공산권 국가의 공통이겠지만요
22/07/25 21:01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특히 함흥-흥남은 대표적인 화학공업 지대였고 이북정권이 평양의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설립을 마무리한 후 바로 손댄 과제가 흥남공대의 설립이었습니다.
장헌이도
22/08/19 14:4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우와, 이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시다니 무슨 일 하시는 분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샤한샤
24/03/12 10:42
수정 아이콘
확실히 고등학교 영향이 크긴 한 것 같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과거 카이스트와 ICU가 통합할 때 일반고 출신 학생들은 정말 격렬하게 반대하고 시위했었지만
과학고 출신들은 아 XX이도 그럼 다음학기부터 수업 같이 듣겠네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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