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7/09 12:03:26
Name 초모완
Subject 단면

예전 치킨집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의 일이었다.

내 맞선임은 나보다 두 살 어린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하루동안 본인의 일을 나에게 인수인계 하고 퇴직하였다. 사모님이 밝게 웃으시며

“나중에 꼭 놀러와요. 닭 한마리 해줄게.”
“감사합니다.”

라고 밝게 웃으며 가게를 나갔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일주일 정도 뒤에 자신의 동생 손을 잡고 놀러 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어머. 어서와요.”
“동생이랑 놀러 왔어요.”
“잘 왔어요. 자리에 앉아요.”

라며 밝게 웃던 사모님은 주방으로 들어와서는

“오란다고 진짜 오네.”

하며 혼잣말을 하셨고 옆에서 듣고 있던 사장님은

“에이.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놀러 오라고 했으니까 놀러 왔지.”

라고 말씀 하셨다.

이때에는 사모님이 매정해 보이고 사장님은 인정 많은 사람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두 달여 동안 일 하며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꼭 그렇지 만도 않았다.


사모님은 멀티 플레이어였다. 닭 튀기고 설거지 하고 계산하고… 실상 가게 일은 사모님이 다 하셨다.

사장님은? 뻔질나게 오락실에 출근하면서 - 아도겐 말고 - 열심히 그림 맞추는 놀이를 하였다. 사모님 입장에서는 매일매일 열불 터졌을 것이었다. 일은 바쁜데 일하는 사람은 나랑 사모님 밖에 없었으니. 홀 서빙을 열심히 하다가 배달이라도 들어오면 가게 안은 혼란에 휩싸였다. 사모님은 조심히 오토바이 조심히 타라고 하며 튀긴닭을 내어 주셨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기 전 가게안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았다. 매장은 아수라장이었고 동분서주하는 사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안되겠다 싶어 배달 갔다 오는 길에 사장님이 자주 가는 오락장에 들렀다. 사장님께 조심스레 지금 가게가 너무 바쁜데 사장님이 안계셔서 사모님이 많이 화나신 거 같다고 조심스럽게 전달하였다. 사장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게 곧 뜰 때가 됐다는 거다. 지금 자리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였다.
- 경품 오락장 속설로 기계 안에 내부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어서 일정 시간이 되면은 그림이 딱 맞춰 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오락장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알바를 불러 넌지시 어느 기계가 터진지 오래 되었냐고 묻고 그곳에 자리 잡곤 하였다.


대충 알겠다고 하며 가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날은 오락장 기계가 아니라 치킨집이 터진 날이었다. 평소 서너번 나갔던 배달 전화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홀 장사 안된다고 창문만 닦았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홀이 가득 찼다. 여기저기서 추가 주문이 들어오고, 매장내 배달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댔다. 갑자기 주방에서 뭔가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모님은 화딱지 나서 더는 못하겠다고 말하며 가게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여기서 가장 당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1. 치킨 시켜 놓고 기다리는 손님
2. 그림 맞을 때가 됐는데 자꾸 안 맞는 사장님
3. 치킨 왜 안 나오냐고 성 내는 손님들과 마주해야 하는 나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이 화를 내고 가게를 나갔다고 전달 하였다. 사장님은 별 놀라는 기색도 없이 혀를 끌끌 찼다. 기분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가 사모님이 나간것에 대한 리액션이 아니라 그림이 안 붙는것에 대한 아쉬워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 후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았다. 사모님이 아예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다시 출근하라고 사장님께 연락이 왔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모님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 사모님이 나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긴 했다.  

사장님이 어쩌다 하루 그 날 일탈한 것이었을까?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아니었다. 수십년간 매일매일 일탈한 것을 매일 같이 받아주다가 그날 딱 하루 사모님이 폭발한 것이었다. 사모님의 평상시 까칠한 태도가 이해가 되는 지점이었다.  


아르바이트 기간이 거의 다 끝나갈때쯤 사장님이 들어와야 할 돈이 안 들어와서 월급이 조금 늦어질것 같다고 말하자

“거 아르바이트 월급 얼마나 된다고… 질질 끌지 말고 빨리 줘. 그냥”

라고 일갈 했던 사모님이었다.



이런 사모님 덕분에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무사히 월급을 받고 퇴직할 수 있게 되었다.

사모님은 가게를 나서는 나에게 그 동안 수고했다며 치킨 먹으러 놀러 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며 알겠다고 하였지만 다시 찾아가지는 않았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3-05 08:4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눕이애오
22/07/09 13:30
수정 아이콘
겉으로는 착한 역할만 맡는 사람이 있죠.. 글만 봐도 화가 나네요
22/07/09 15:05
수정 아이콘
제목 "단면" 참 잘지으셨네요
League of Legend
22/07/09 15:18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사업드래군
22/07/09 15:32
수정 아이콘
책임감 없는 남편이군요. 개인적으로 저런 부부를 알고 있는데 남편이 학벌도 좋은데 진짜 한량에 술 좋아하면서 돈은 안 벌어옵니다.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고 겉으로는 호인인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와이프 등골 빼면서 지내는 모습이 한심하더라고요.
-안군-
22/07/09 15:37
수정 아이콘
저게 생각보다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남 일 같지가 않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네요...
피식인
22/07/09 16:02
수정 아이콘
저도 예전에 알바할 때 저런 사장 만난적 있습니다. 노모가 와서 자리 지키는데 본인은 맨날 피씨방 가서 자리 비우고 한번씩 와서 돈만 꺼내가더라구요. 한번은 사장이 근무해야 할 시간이었는데 잠수타고 연락도 없어서 전전타임 알바가 퇴근을 못하고 두타임을 뛴 적도 있구요. 인간한테 실망을 안 하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잘 났는지 그런것 보다는 그 사람의 책임감을 보는게 가장 쉽다고 봅니다. 백프로에요. 사람이 심성이 나쁘고 못 나서 실망시킬 짓을 하는게 아니죠. 착한 사람도 잘 난 사람도 유혹은 똑같이 느끼지만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꼭 사람을 실망시키는 법이죠.
22/07/09 16:46
수정 아이콘
주변에 의외로 많죠. 대표한량중 한분이었던 친인척 한분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없어요. 장례식장에.

죽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슬퍼하는이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참 늦게도 죽었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12년째도피중
22/07/09 23:50
수정 아이콘
제목 정말 잘 지으셨네요. 책임감을 가지고 바쁘게 사는 사람이면서 타인들이 볼 때에도 선인이 된다는 건 참 여려운 일 같습니다. 물론 그게 자기합리화의 근거가 되서는 안되겠지만...
호머심슨
22/07/10 04:36
수정 아이콘
양파
Faker Senpai
22/07/11 10:47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본문의 사모님같은분들이 첫인상은 안좋을수 있어도 알수록 진국이죠. 적어도 베푼만큼은 돌아오거든요.
전알바가 안좋은 예였을뿐 치킨먹으로 가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저같으면 비교적 덜바쁠시간에 가서 치킨한마리 얻어먹고 치킨 5배만큼 일도와주고 올고 같아요. 사모님이랑 친하면요.
지니팅커벨여행
22/07/11 12:44
수정 아이콘
잊을만할 때 한번 찾아 가서 거하게 쏴 주시면 멋질 것 같습니다.
조메론
22/08/11 13:1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너무 잘쓰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53 특전사의 연말 선물 [37] 북고양이6068 22/07/31 6068
3552 폴란드 방산기념 이모저모2 [45] 어강됴리5612 22/07/29 5612
3551 보행자가 무시당하는 사회 [94] 활자중독자6137 22/07/26 6137
3550 중학교 수학과정을 마쳤습니다... [52] 우주전쟁6136 22/07/25 6136
3549 [역사] 일제 치하 도쿄제대 조선인 유학생 일람 [60] comet213415 22/07/24 3415
3548 MCU의 '인피니티 사가' 후속, '멀티버스 사가' 윤곽이 공개되었습니다. [164] 은하관제3808 22/07/24 3808
3547 [역사] 이순신은 정말 무패(無敗)했는가? (2) [15] meson2976 22/07/20 2976
3546 KF-21 초도 비행 기념 T-50/FA-50 이야기1 [24] 가라한2092 22/07/19 2092
3545 대한민국 출산율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110] 신류진3976 22/07/12 3976
3544 [테크 히스토리] 다이슨이 왜 혁신적이냐면요 [33] Fig.14121 22/07/12 4121
3543 설악산에 다녀 왔습니다. [33] 영혼의공원2339 22/07/11 2339
3542 [기타] 히오스는 너무 친절했다. [138] slo starer2539 22/07/10 2539
3541 스포有. 탑건 매버릭. 미국에 대한 향수 [35] 지켜보고있다2305 22/07/10 2305
3540 단면 [12] 초모완1684 22/07/09 1684
3539 (스포) 단 1화 만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빠진 이유 [81] 마스터충달4061 22/07/06 4061
3538 소소한 취미 이야기 - 은하수 촬영 [52] 시무룩2118 22/07/06 2118
3537 관심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 - 구글 시트 공유합니다 [28] Fig.12377 22/07/06 2377
3536 이제 인간은 바둑 AI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가? [87] 물맛이좋아요3172 22/07/05 3172
3535 실시간 감동실화)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쓰다. [102] 스토리북2348 22/07/04 2348
3534 상반기에 찍은 사진들 [20] 及時雨3032 22/07/03 3032
3533 (육아) 여러가지 불치병들...ㅜㅜ [103] 포졸작곡가3653 22/06/29 3653
3532 누리호 성공 이후... 항우연 연구직의 푸념 [155] 유정2815 22/06/28 2815
3531 [웹소설] 지난 3년간 읽은 모든 웹소설 리뷰 [77] 잠잘까2901 22/06/28 290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