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뒤적거리다 남규리씨가 철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쁜 얼굴로 이 앙다물고 거침없이 레버를 휘저으며 버튼을 파파박 눌러대는 모습을 보니 잠금장치 해놓았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수년 전, 신논현에 철권 기계로만 채워진 오락장이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폴을 주캐로 사용하는 친구를 꼬셔 그곳에 놀러 가기로 했다. 부풀고 설렌 마음으로 우린 그곳으로 향했다. 오락장 문을 열자 내 눈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검정 가죽 자켓에 짧은 가죽 치마를 입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입구로 들어오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녀 곁에는 여왕벌의 총애를 받으려는 듯 남자 네명이 둘러 싸고 있었다. 환히 웃고 있는 남자들 속에 무표정한 그녀 얼굴이 대비되어 기억에 남았다.
‘머야. 저건. 오락장 왔으면 게임을 해야지. 지 이쁜거 자랑하고 있어.’
속으로 흉 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이뻤음을 잊지는 않았다.
친구는 적당히 자리를 잡고 기계에 동전을 흘려 넣었다. 나 또한 적당한 기계를 찾아 보는데 내가 쉬이 도전할 만한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롤에서 라인전을 시작하며 한합, 두합, 세합을 겨루게 되면 알게 된다.
‘아. 이노마는 내 상대가 아니구나.’
움직임이라든지, 스킬 쓰는 위치, 타이밍, 스킬 피하는 모습등을 통해 실력차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0/6/0 : 아. 저게 안 죽네’
가 나온게 된다.
그날의 그 게임장에서 플레이 하는 사람들의 횡이동, 백대쉬, 콤보 수준을 보니 내가 상대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아놔. 일단 컴퓨터랑 몸 한번 풀고 있어야겠다. 싶어 빈 기계를 찾아 동전을 넣었다. 컴퓨터랑 몇판 정도 진행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도전해 왔다. 잔뜩 긴장 되었다.
상대는 금발 머리 부잣집 딸과 팬더를 골랐다. 근데 캐릭터 커스터 마이징이 괴이했다. 온갖 핑크분홍한 악세사리들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아. 이 오타쿠 새퀴. 이런놈한테 지면 안되는데.”
레버를 쥔 왼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경기 내용은 박빙이었다. 아마 이 사람도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할 만하다 싶어 도전한 듯 싶었다. 간발의 차로 내가 승리를 챙겼다. 속으로 캬캬캬 거리며 좋아하고 있자 바로 재도전이 들어왔다. 내 캐릭터의 승리 포즈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는 상대가 빡쳤음을 의미한다.
이번엔 내가 패배했다. 정말 한 끗차이였다. 이상한 커마를 한 캐릭터가 잔뜩 신나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바로 동전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이겼다. 다시금 재도전이 들어왔다.
한판 이기고 한판 지고를 수차례 반복했다. 연속으로 두판 이기면 진짜 째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거 같은데 그게 쉬이 되지 않았다. 같은 상대와 계속 싸우다 보니 서로서로가 상대의 패턴 파악이 되었다. 처음에 통했던 기술이 이제는 곧잘 막혔다.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2연승은 내가 아니라 상대가 차지할 것만 같았다. 내 불안한 마음을 상대가 읽었던지 더욱 공격적으로 플레이 하였고 나는 패배 하였다. 이제 내가 동전을 넣어야 할 차례였지만 나는 망설였다. 여기서 넣으면 또 질 것 같아서 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도망치기로 했다. 상대에게 2연승을 선사해 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 재도전 하지 않고 옆의 빈 기계로 가서 동전을 넣었다. 비굴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내 캐릭터를 고르고 첫판을 시작하려는데 누군가가 도전해 왔다. 설마 했는데 그 사람 이었다. 옆자리로 넘어 와서 나에게 ‘히어 컴스 더 뉴 챌린저’ 한 것이었다.
굳이 자기가 하던 기계를 놔두고 옆자리로 따라 왔다는 것은…
‘너 개 못하잖아.’
를 돌직구로 날린 것이었다.
- 비슷한 것으로 상대방 캐릭터 고를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고르고 나면 동일 캐릭터 고르는 것이 있다.
갑자기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넌 뒤졌다. 내가 오늘 널 철권계에서 은퇴시켜 주마’
수차례 되뇌이며 플레이에 임했다. 이번에 지면 2연패다. 라는 압박감이 날 짓눌렀다. 하지만 나는 그걸 극복해 내고 승리를 쟁취하였다. 나의 의기양양함도 잠시 바로 재도전이 들어왔다.
치열하게 합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너무 흥분했던 탓이었을까. 어림도 없는 큰 공격을 내지르다가 뒤지게 쳐 맞았다. 너무도 쉽게 패배를 내 주었다. 크게 쉼호흡을 한번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려는데 잡히지 않았다. 총알이 다 떨어졌다. 동전을 바꾸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내 자리 차지할까 싶어 서두르며 돌아오다가 보게 되었다.
나와 상대 했던 사람은 출입문을 열때 무표정한 얼굴로 맞아주었던 그 여왕벌이었다.
면상 붕권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그녀는 여전히 다리를 꼬고 허리는 꼿꼿이 세운 채로 화면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멍 때리고 있다가 터덜터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얼굴도 예쁜데 게임도 나보다 잘하네.’
‘얼굴은 못생겼지만 게임은 잘해’ 라던 평소의 내 자위는 이제 할 수 없게 되었다.
‘얼굴도 못생긴게 게임도 못해’ 가 되어버렸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서둘러 친구를 찾아 나가자고 했다. 친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왜? 라고 물었다.
“나 어제 육회 먹었어.”
“뭔 개소리야?”
“그냥 나와.”
그리고 출입문을 나설때 고민했었다. 그녀를 뒤돌아 볼 것인지 말 것인지. 뒤돌아 보면 소금 기둥이 될 것 같았지만 왜인지 나는 돌아보게 되었다. 뜻밖에도 화면을 보고 있을 줄 알았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예의 그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소금 기둥이 된 나를 친구가 끌고 나왔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01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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