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03/07 22:35:11
Name 북고양이
Subject 안녕, 동안
거울을 보다 한숨이 나와서 적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미리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과학 기사에 보니까 인간은 세 번 늙는다고 했다. 단백질 수치가 달라진다나. 잔인하게 34, 60, 78세라고 시간도 딱 정해 주었다. 거시적인 인생 전반으로 본다면 저 시기들 일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 20~30대 남자들이 노화되는 원인으로만 특정해본다면 따로 세 가지를 꼽아볼 수도 있다. 바로 군대, 취업, 육아이다. 국가와 사회와 가정이 살포시 건네는 이 세 번의 고난을 거하게 겪고 나면 소년은 아저씨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주변을 살펴보면 한두 번 운 좋게 시련을 이겨 낸다고 쳐도 결국 다들 세월을 직방으로 맞게 되어 우울해하고는 했었다. 어린이부터 중후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노안들이 우리는 그대로라며 의기양양해지는 시기도 이때라 볼 수 있다. 동안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같은 때이다. 당연한 것이 청소년에게 동안이라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안의 소유자였다. 길을 가다 옛 친구를 만나거나 경조사에서 동창들을 마주치면 안부인사보다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너는 어떻게 그대로냐?」라는 소리였다. 그럴 때마다 너스레를 떨며 「물 많이 마시고 술, 담배 하지 않고 일찍 잠자고 좋은 마음을 품고 살면 된다」라는 시중에 널린 자기 개발서 한 구석에서 발췌한 듯한 헛소리를 하고는 했다. 진짜 으쓱도 했다. 내가 봐도 그 검붉은 낯빛들과 내 탱탱한 얼굴은 차이가 났으니까. 어느 날은 병원을 갔는데 원장님이 약간 놀라면서 내 나이와 얼굴을 두어 번 살폈다. 그러더니 「와, 엄청 동안이시네요. 언제부터 동안이셨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 태어났을 때부터요」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은 단점도 많았다. ‘만만히 보이기 쉽다’, ‘반말 듣는 건 예사이다’라는 잘 알려진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연애 시장에서 꽤나 불리하다. 한창 짝짓기를 해야 하는 타이밍에 동안 소리를 듣는다는 건 다른 말로 한다면 수컷의 매력이 부족하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다른 장점을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 본능적 남성성만으로 이성을 유혹할 때 나는 열심히 웃기고 떠들고 이상한 이야기라도 열심히 들어주는 노력을 해야 했다. 동안은 따지고 보면 자랑할 것도 못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물난리가 났던 것처럼 아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잘생긴 사람은 잘생겼었구나, 키 큰 사람은 키가 크구나. 하지만 동안이었던 사람에게 ‘어렸었구나’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건 누구나 그랬으니까. 그래도 가진 것 하나 없었던 시간의 나에게 동안이라는 것은 약간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사실 부릴 게 그거밖에 없었다.

그러나 30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지금 급격한 노화가 왔다. 거울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과학이 겁을 줬던 서른네 살도 무사히 넘어가길래 ‘거봐라 과학이라고 다 맞는 거 아니다’라며 의기양양했지만 내 얼굴이 드디어 무너졌다. 맨주먹의 가난한 대학원생이 느지막이 결혼도 하고, 취업도 하고, 귀여운 딸도 낳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행복의 값을 얼굴로 치렀다. 이제 알았다. 인생에 무임승차는 없었다. 나는 뒤늦은 삶을 살아서 이제야 대가를 냈다. 친구들 얼굴이 상한 것은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과 육아에 지쳐서였다. 내 얼굴이 팽팽했던 것은 그동안 생각 없는 댕기머리로 편히 살아서였다. 덕분에 이제 나는 「아직도 얼굴이 그대로」라는 말 대신 「너도 갔구나」를 한동안 들어야 한다.        

얼굴뿐 아니라 생각도 나이가 들어간다. 누가 BTS를 아냐고 물었을 때 「그거 간선급행노선 아니야?」라고 대답했었다. 간선급행노선은 BRT이다. 또 카카오 페이지에서 만화를 볼 때, 보는 것마다 ‘기다무 웹툰’라고 쓰여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기다무’가 독과점 웹툰 업체 이름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 말은 ‘기다리면 무료’의 약자였다. 나도 쉬었구나, 이제 꼰대구나라며 머리를 감싸 쥐자 아내가 한 마디 위로를 해주었다. 「자기는 꼰대는 아니야. 그냥 옛사람이지」.    

이제 동안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정식으로 이별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마음 아파서 쿨하게는 못 보내겠다. 다만 어느 날 그 사람이 없어도 내 인생에 티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젊음과 서서히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그 삶이 얼굴에 비친다고 했다. 내가 동안에 집착했던 것은 얼굴에 새길 불확실하고 두려운 미래보다는 만만했던 과거에 미련을 두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돌이켜보면 딱히 좋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이왕지사 나이 드는 거 이제는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접고 겪어낼 앞날에 대한 생각을 해야겠다. 한 번 더 나이들 60세에는 그동안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살았구나를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더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 안녕 내 젊은 날의 얼굴, 그 얼굴은 내 딸에게서 찾아볼게. 그동안 고마웠어.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6-30 11:0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Hammuzzi
21/03/07 22:41
수정 아이콘
확실히 확 늙는 시기라는것이 있는것 같아요. 어느정도 지나시면 다시 그 시기가 올때까지 동안 이야기 들으실거에요~
북고양이
21/03/08 17:27
수정 아이콘
좀 예고라도 하고 늙었음 좋았을텐데 이렇게 훅~~ 바로 갈줄은 몰랐지요
21/03/07 22:44
수정 아이콘
"꼰대는 아니야. 그냥 옛사람이지" 이거 좋은 말이네요..
북고양이
21/03/08 17:30
수정 아이콘
옛사람으로 남으려구요 꼰대로 흑화하기는 싫습니다ㅜㅜ
나주꿀
21/03/07 22:44
수정 아이콘
신체 나이가 늙는게 1차함수 직선처럼 늙는게 아니라 특정 나이에 훅 늙는 계단형이라고 들었습니다
북고양이
21/03/08 17:34
수정 아이콘
갑자기 얼굴이 달라져서 거울보고 놀랬다니까요 와 세상에 이런일이
21/03/07 23:16
수정 아이콘
마흔넘으면 자기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데 절제와 자기관리의 상징이라 생각합니다
북고양이
21/03/08 17:34
수정 아이콘
넵~ 나이값 해야지요 낄데 안낄데 잘 가리고
This-Plus
21/03/07 23:26
수정 아이콘
저도 동안 소리 지겨웠는데
어느 순간부터 뚝 끊기듯이 안들리네요.
몸이 30중후반 즈음부터 갑자기 밸런스 패치라도 한 느낌이...
북고양이
21/03/08 17:28
수정 아이콘
그르게요 신기할따름입니다
세월이기는 사람은 없는것인지...
Leader'sDisaster
21/03/08 01:04
수정 아이콘
동안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자들은 27~28쯤에 확 늙더라구요. 20~26까지 한결같던 여자들이 27쯤 지나니 몇개월만에 얼굴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30넘어 애낳고 한번 더 확 늙는거같고...
북고양이
21/03/08 17:34
수정 아이콘
운동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더 훅가기 전에
남성인권위
21/03/08 08:36
수정 아이콘
글을 읽으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지셨군요. 남자나 여자나 결혼을 하고 출산 육아를 거치면 노화가 빨라지는 것 같더군요.
북고양이
21/03/08 17:30
수정 아이콘
그렇더라구요 정기를 아이에게 몽땅 뺏기고 나니 남는것은 노화뿐...
밀물썰물
21/03/08 12:29
수정 아이콘
위에도 말씀 하셨지만 동안이 꼭 좋은 것 만은 아니죠. 나이 만큼 들어 보여야죠.
이제 나이 만큼 들어 보이시니 좋다 하시면 되겠네요.

저도 나이가 덜 들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러는데), 30쯤 때 어떤 약주 한잔 하신 분이 "어이, 대학생" 이러더군요. 그건 제가 직접 들었던 경우인데 알게 모르게 불편한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예를들어 대학교 4학년 때 미성년자 취급도 당하기도 하고.
북고양이
21/03/08 17:33
수정 아이콘
그것도 그래요...사실 동안이 아닌건 상관없는데 그냥 한것도 없는데 나이든게 서글프더라구요
요한슨
21/03/08 12:38
수정 아이콘
보통 이런주제면 눈가만 검은 막대로 가리고 인증사진정도는 올려주셔야.....?
북고양이
21/03/08 17:29
수정 아이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구라치지는 않았습니다 정말이에용~
21/03/08 12:40
수정 아이콘
30 중후반을 달려가는 저도 요즘 안녕을 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북고양이
21/03/08 17:31
수정 아이콘
같이 안녕~ 해서 다행입니다
곱게 늙어요 우리
내맘대로만듦
21/03/08 13:30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저도 얼마전에 도대체 '무야호'가 뭐의 약자일까를 한참 고민하다가... 실체를 알고나서는 그냥 따라가는걸 포기했습니다.

8년전에 무한도전에서 방영했던 에피소드를 도대체 어디서 꺼내와서 밈으로 써먹고있는지 크크
북고양이
21/03/08 17:32
수정 아이콘
저도 찾아봤네요 쫓아가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정말이지
체리과즙상나연찡
21/03/08 13:38
수정 아이콘
한번에 늙는다는 단계는 지났지만 외적인 큰 변화는 없습니다 요즘도 담배살때 신분증 요구도 왕왕 받고..
다만 체력이 떨어진건 절실하게 느낍니다. 이젠 좋아하는걸 하려고 해도 아 힘들어서 못하겠다 느껴지고 그게 슬퍼요
북고양이
21/03/08 17:28
수정 아이콘
아이가 일찍 자서 게임이라도 할라치면 힘들어서 의자에 못 앉아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누워서하는 모바일 게임들이 뜨는건가봐요
21/03/08 18:26
수정 아이콘
이제 앞자리수가 많이 달라졌는데도 얼굴은 예전과 많이 달라지진 않아서 동안 비슷한거라도 유지중입니다.
근데 슬슬 탈모가 크크크크
북고양이
21/03/09 19:04
수정 아이콘
탈모는 저도 문제에요 크크 약 먹고 있습니다~
애들이 아빠 머리에 민감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딸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는 먹으려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264 공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의 영상화된 작품들(스포, 공포주의) [22] 라쇼7202 21/04/24 7202
3263 달리기 좋아하세요? [67] likepa7135 21/04/19 7135
3262 [13] 사진으로 홍콩 여행하기 [26] 배고픈유학생4969 21/04/14 4969
3261 기원전 슈퍼히어로의 공상과학적인 후일담: 오디세이아 [36] Farce6144 21/04/13 6144
3260 [번역] 현대미술은 미국 CIA의 무기였다.(Modern art was CIA 'Weapon') [24] 위대함과 환상사이7070 21/04/04 7070
3259 조선구마사 논란을 보고 - 조선 초기 명나라 세력의 영향권은 어디까지 정도였나? [28] 신불해8695 21/04/03 8695
3258 [기타] [보드게임] 보드게임을 소개합니다. (약스압) [83] 레몬막걸리7784 21/04/02 7784
3257 200만원으로 완성한 원룸 셀프 인테리어 후기. [108] sensorylab13445 21/03/28 13445
3256 [직장생활] '야근문화'가 문제인 이유 [53] 라울리스타10077 21/03/24 10077
3255 사라진 문명의 중요한 문서와... 초딩 낙서!? [28] Farce5507 21/03/18 5507
3254 취미 활동의 산물과 그 관련 이야기 [31] 아스라이6276 21/03/25 6276
3253 [스위치] 모여봐요 동물의숲, 1년 후기(스샷 많음) [36] 7684 21/03/24 7684
3252 남의 밥그릇을 깨기 전에 필요한 고민의 크기 [32] 눈팅만일년8125 21/03/19 8125
3251 [슬램덩크] 강백호의 점프슛 이야기 [33] 라울리스타6787 21/03/18 6787
3250 변방인들과 토사구팽의 역사 [20] Farce7999 20/06/05 7999
3249 평생 나를 잊어도, 내 얼굴조차 까먹어도 좋다. [10] 아타락시아16704 21/03/18 6704
3248 2021년 3월달 OECD 보고서 [18] 아리쑤리랑10660 21/03/15 10660
3247 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56] 쉬군5911 21/03/08 5911
3246 안녕, 동안 [26] 북고양이5389 21/03/07 5389
3245 [육아] 떡뻥의 시간 [20] Red Key6128 21/03/03 6128
3244 [콘솔] 마계촌을 통해 엿보는, 캡콤이 매니아들을 열광시키는 방법 [56] RapidSilver7852 21/02/24 7852
3243 미운 네 살이 앓고 있는 병들 [70] 비싼치킨9528 20/05/29 9528
3242 삶의 변곡점 [13] 백년후 당신에게6479 21/02/20 647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