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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기반찬입니다. 사실 이 글은 '21. 1. 21. 유게에 올라온 글 중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은 웅진으로 파천하여 지방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협공하여 격멸할 계획이었다'는 글에 관해 댓글로 달았던 글입니다. 그런데 댓글 작성 당시 이미 1 페이지에서 넘어간 글이기도 하고, 왠지 쓰고 나니까 아깝기도 해서, 나름 정리해서 자게에 글로 올려봅니다.
저는 역사 전공도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역덕일 뿐, 내공이 깊지는 못하니 재미로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의자왕에게 처음부터 웅진에서 항전한다는 대전략이 있었는지 여부
위 글은 의자왕이 처음부터 사비성을 내주고, 웅진성으로 피난간 뒤 지방세력과 연대하여 나당연합군을 격멸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웅진방령 예식진(예식)의 배신으로 실패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하지만 사견으로는, 위와 같은 주장은 백제에게 유리한 요소들을 좀 강조해서 말한, 다소 거칠게 말하면 사료에 나타난 의자왕의 실제 행동과는 거리가 있는 추측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가. 먼저 지방통제력이 완전하지 않은 고대국가에서 왕령지를 내준다는 전략을 구상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당시 삼국이 중국의 군현제 같이 지방 행정구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고구려, 백제 모두 중앙 귀족들은 근거지인 지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거든요. 당연히 왕권의 중심지가 되는 곳은 수도입니다. 당장 개로왕이 참수당할 때, 고구려가 한강 이북까지 밀고 왔는데도 백제는 끝까지 한성에서 버티면서 개겨보려고 했습니다. 한성이 날아가면 왕의 권력 기반도 날아가니까요.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권과 대성팔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의 대립이 심하게 나타났고, 권신에게 왕권이 농락당하는 일이 펼쳐집니다. 권신 해구에게 문주왕이 살해당했고, 동성왕은 백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무령왕과 성왕을 거치며 왕권강화 정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사하고 난 뒤, 위덕왕이 왕위에 올라 출가하겠다고 할 때도, 백제 귀족들이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던집니다.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 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무릇 도리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늙은 노인(耆老)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말을 들어서 관산성에서 그 꼴이 되고도 또 우리 말 안 듣겠냐는건데...성왕의 한강 유역 확장 정책이나 대 신라 정책에 대해 귀족들의 반대가 느껴지지요. 성왕 전사 이후 귀족 쪽으로 기울었던 권력의 추는, 의자왕 재위 시점에서는 다시 국왕쪽으로 기웁니다. 의자왕은 귀족 세력에 대해 강력한 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백제의 정계에 파란이 발생하죠.
[17년(서기 657) 봄 정월, 임금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서기 654년 정월,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하고, 갑자기 죽습니다. 655년 경 의자왕은 태자를 부여융에서 은고부인의 아들 부여효로 교체한 것으로 보이고(백제본기 의자왕 4년에는 태자가 융으로 기재되어 있다가, 660년에는 태자가 효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듯 백제 멸망당시 부여융과 부여효는 별개의 인물로 등장합니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좌평 임간이 김유신과 내통하기 시작합니다. 656년 3월 성충과 흥수가 숙청됩니다. 657년 의자왕은 기존의 좌평 관등체제를 무너트리고 자신의 서자를 모두 좌평으로 삼죠.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의자왕이 귀족들을 상대로 아주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을 펼쳤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임간으로 대표되는, 기존 귀족세력들의 불만도 함께 표출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황산벌에도 나오는 이 대사가 당시 상황을 잘 말해준다고 봅니다.
[그 나라(백제)가 우덜 나란가? 느들 부여씨들 나라제. 왕자들 41명을 죄다 좌평에 앉혀 놓은 뒤로는 우덜 나라는 없어져부렀제!]
즉, 지방에 기반을 가진 귀족들과 대립이 발생한 상황에서, 의자왕이 왕권의 근거지인 사비를 버릴 것을 각오하고, 지방 세력의 원활한 지원을 전제로 한 대전략을 짤 수 있었을까를 고려하면, 이는 분명 회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나. 의자왕이 장기전을 기획하고 있었다면, 사비를 버리고 웅진에서 저항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그냥 요충지 막고 지방 세력 동원하여 최대한 당군과 신라와 합류를 저지하는 겁니다. 삼국사기에서도 성충, 흥수가 이런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성충은 죽을 떄...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흥수가 말했다. “당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기벌포(伎伐浦)와 침현(沈縣)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해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충, 흥수안은 당의 침공을 경고하는 한편, 지연전을 펼치라는 의견으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지연전을 펼치려면 '당군은 기벌포에서, 신라는 탄현에서' 막고 합류를 저지하고 지연전을 벌이면서 지방 세력을 동원하는게 더 안전하지, 왕의 근거지인 사비를 내주고 적극적으로 당, 신라군을 격멸하려는 모험적인 전략을 짤 이유가 없거든요. 하지만 의자왕은 성충•흥수 안을 묵살했습니다. 사실 다음에 보듯 당의 침공은 처음부터 논외로 두고, 이에 대비하는 기본적인 전략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펼쳐지고 소정방이 덕적도에 올 때까지도 백제 조정은 얘네가 고구려를 칠지, 백제를 칠지 감도 못잡고 있었습니다. 당군이 밀고 들어올 떄도 의견이 갈립니다. 좌평 의직은 당군이 멀리서 와서 지쳐있을테니, 상륙하면 먼저 당군을 공격하고 했고, 달솔 상영은 반대로 당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고, 신라군을 먼저 요격하자고 합니다. 결론을 못내린 의자왕은 고마미지현에 귀양가 있던 흥수에게도 의견을 묻습니다. 흥수의 의견은 위에서 본 바와 같죠.
"당군은 기벌포에서,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고 지연전을 펼쳐라." 그러나 흥수의 의견은 조정에서 기각됩니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의 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오게 하여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여기서 보듯, 당군의 공격에 백제군은 대응 전략 자체가 없었습니다. 당군을 먼저 공격할지, 신라를 먼저 공격할지, 아니면 기벌포에서 당군의 상륙 작전을 막을지, 아니면 영토 안쪽으로 끌어들여 공격할지 같은 기본적인 전략도 정해지지 않았았죠. 그런데 의자왕이 웅진으로 천도한다는 장기적인 대전략이 있다? 회의적입니다. 심지어 논의 과정에서 사비를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한다는 안건은 아예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라. 결국 백제의 전략을 요약하면, 유리한 지형으로 신라군과 당군을 끌어들여 각개 격파하자는 것입니다. 즉, 결전을 벌여 연합군에게 타격을 주어 몰아낸다는 것인데, 의자왕이 장기전을 의도했다는 의견과는 상충됩니다. 그리고 당군은 기벌포를 통과하여 백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신라군도 탄현을 돌파했습니다. 이제 지연전의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마. 백제는 병력을 나눕니다. 주력군은 사비로 접근해 오는 당군을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라군은? 바로 그 유명한 계백 장군이 등장합니다. 계백은 처자식을 손수 죽이고, 황산벌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서 싸웁니다. 완전 평지에서 싸운 것은 아니고, 신라본기에 따르면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세 개의 영채에 설치했다고 하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노수리 산'에 진을 쳤다고 합니다. 현재 추정에 따르면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에 3개 진영을 세우고 주변 보루에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과 교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과적으로 계백의 분전은 전설로 남았지만, 5천 결사대는 전멸했습니다.
바. 소정방은 기벌포에 상륙한 뒤, 금강 좌안을 통해 거슬러 올라와 산 위에 진을 칩니다. 소정방이 진을 친 곳은 현재의 오성산으로 비정됩니다. 의자왕은 웅진 어귀에서 소정방을 막으려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등산가가 이겼습니다. 백제군이 패퇴된 사이 당의 수군은 조수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순식간에 당군은 사비로부터 30리 근방까지 접근합니다. 의자왕은 마지막으로 결전을 시도하지만 평지 회전에서는 당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백제군 1만 명이 전사합니다. 이 전투로 백제 중앙군은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사. 7월 9일 나당연합군이 합류합니다. 7월 12일 소정방은 사비성으로 접근하여 소부리 벌판에 진을 칩니다. 7월 13일 밤,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와 좌우 측근들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달아납니다. 후술하듯 이 과정에서도 조정 신료 대부분이 사비성에 남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여기까지가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파천하게 된 과정입니다.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에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크게 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즉, 의자왕은 보유하고 있던 중앙군을 죄다 날려먹고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에 접근한 다음에야 밤중에 웅진성으로 파천하는데, 정말 의자왕이 웅진으로 떠나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 있었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입니다. 그럴려면 웅진 방위를 도모할 중앙군은 확보했어야죠. 앞서 본 기록들을 검토하면, 의자왕의 의사는 장기전이 아니라 단기결전에 있었던 것은 비교적 명확하다고 보입니다.
2.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파천하여 장기전을 시도했다면 승산이 있는가? 없지는 않겠지만 소위 '만골 차이' 정도는 났다고 봅니다.
가. 아까 봤다시피 백제 중앙군은 회전 두 번에 증발했고, 전쟁 시작 후 10일 만에 당군이 코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 무렵 백제 지방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웅진 구원을 시도했다는 정황은 딱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지방군이 조직되고 있었다면, 조직된 지방군을 활용하여 저항한 사람이 나타나야 할텐데, 그렇게 추정할 사람도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된 흑치상지가 있겠지만, 흑치상지는 처음부터 임존성에 있지는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흑치상지는 의자왕이 항복하자 뒤따라 항복한 뒤, 당군의 행패를 보고 임존성으로 도주하고, 이 때 부흥군의 첫 불길이 일어납니다.
나. 보급 문제도 나당연합군이 유리할거야 없지만, 보급이 아예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백제부흥운동 과정을 보면, 백제 지방군이 나당연합군의 보급로를 고립시킬 수 있었느냐도 사실 그렇다고 확답 내리기 어렵다고 봅니다. 소정방이 철군하고 난 뒤 백제부흥군이 기세를 올리고 사비성 인근까지 진출하여 사비와 웅진을 고립시키기는 합니다만, 유인궤가 지원군 끌고와 웅진의 목책을 부수고, 다시 보급로가 뚫립니다. 그리고 신라도 661년 2월 지원군을 보내 사비성 인근까지 공격해 온 백제부흥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구원했으며, 661년 7월 문무왕이 옹산성(충남 대덕군으로 비정됩니다)을 점령하고 웅현성(공주 인근으로 비정됩니다)을 쌓는 등 웅진 일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거든요. 육로나 당나라에서 바다를 통한 직접 보급이 어렵다면, 한강 유역 - 금강을 통해서 신라가 수로로 보급을 해도 됩니다. 사실 백제 중앙군이 격멸된 시점에서 지방군을 모아서 나당연합군의 보급로를 괴롭혀 '쫓아낸'다면 모를까, '격멸'하는건 이미 물건너 갔다고 봐야죠. 애초에 백제 부흥군은 수로를 통해 접근하는 당의 지원군을 저지한 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걸 막아낸다 쳐도 조금만 가면 신라로 갈 수 있는데...
다. 그리고 보급으로 크게 뭘 기대하기는 시기상조였다고 봅니다. 661년 소정방은 또다시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칩니다. 사실 이 때 소정방의 상황은 의자왕이 웅진으로 파천하여 저항할 때보다 심각했습니다. 원래는 각 도행군이 평양성을 공격한 소정방을 지원해줬어야 하는데, 설연타의 준동, 연개소문의 분전으로 싹 다 쓸려나가고 소정방만 평양성에 고립되버렸거든요. 그렇게 고구려 야전군이 멀쩡한 상황에서도 소정방은 8월부터 다음해 초 김유신의 지원을 받을 때까지 몇 달간 어찌저찌 버팁니다. 반면 백제가 소정방이 덕적도에 상륙하고 백제가 망하기까지 10일 정도밖에 안 걸렸습니다. 신라군과 합류하면서 추가적인 보급도 받았을테구요. 보급 문제로 당군의 퇴각을 논하기는 너무 이릅니다. 여기서 보급 문제가 거론되는건 게임 기울었을 때 클템이 외치는
[50분까지 버티면 반반입니다!] 정도의 의미라고 봅니다.
라. 결국 장기전이 의미를 가지려면
[50분까지 버틸 수 있느냐], 즉 웅진성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웅진성, 즉 현재 공산성은 방어하기 좋은 지형은 맞습니다. 금강을 끼고 있고, 산세도 험하죠. 그러나 웅진성이 얼마나 버텼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일례로 김헌창의 난 때는 반란의 거점으로 삼은 웅진성은 10일 만에 함락됐습니다. 물론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의 장안국의 전적이 안습하긴 합니다만, 웅진성이라고 무적의 요새는 아니란거죠. 아마 나당연합군의 전력은 그 때의 신라군보다 약할리도 없고요. 또한 앞서 보았듯 백제도 전쟁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웅진성이라고 장기전 대비가 잘 되어 있었을까요? 아니, 지방군이 조직되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그 지방군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중앙군을 와해시킨 나당연합군을 돌파하고 웅진성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긍정적인 전례보다는, 이와 유사한 부정적인 전례를 알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의 적군이 전격적으로 진격해 국왕을 천혜의 요새에 포위하고, 각지의 근왕군이 몰려오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저지당한 뒤, 왕은 항복한 사례죠. '병자호란'이라고요..
3. 당대 백제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가. 계백 장군이 처자식 죽이고 황산벌로 나간건 다들 아실겁니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게 낫다(與其生辱 不如死快)". 신라군 요격을 맡은 지휘관조차 당시 전황은 절망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나. 소정방이 소부리산에 진을 치자 의자왕은 13일 밤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으로 피난갑니다. 그러자 바로 백제 왕족이 분열됩니다. 사비성을 지키던 왕자 부여태가 백제 왕을 자칭합니다. 그걸 보고 부여융, 부여융 또는 부여효의 아들 부여문사와 대좌평 사택천복이 항복하고, 부여태도 따라 항복합니다. 사실 부여융이 항복한 이유는 좀 애매하긴 합니다.
[태자의 아들 문사註 가 왕의 아들 융註 104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당군이 포위 풀고 가버리면 어쩌지? 하고 당군에게 항복한다는게 선뜻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늦어도 중앙군이 소멸하고 사비성을 버린 시점에서 둘째 아들이 왕을 자칭하고, 전 태자 부여융(앞서 보았듯 655년 경 왕의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 되었습니다)과 태자의 아들 부여문사는 반란군으로 몰릴까봐 그냥 항복해버리고... 어쨌건 의지왕의 리더십은 이 시점에서 파탄을 맞은 상태였을겁니다.
다. 부여문사는 삼국사기에는 부여효의 아들로, 자치통감에는 부여융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문사가 부여효의 아들이라면, 의자왕은 손자도 못챙기고 태자(부여효)랑 몸만 빼서 도망갔다는 말이 되죠. 사실 나당연합군이 코앞까지 온 상황에서 밤중에 파천하는데 조정 내각을 데리고 갔을리 없죠. 그렇긴 해도 구당서에도 부여문사를 의자왕의 '적손인 문사(嫡孫文思)'로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태자의 아들'로 적고 있습니다.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의 차이는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부여융으로, 삼국사기에는 부여효로 기재된 것에 차이가 발생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쨌건, 부여문사는 차차기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좌평의 수장인 대좌평 사택천복도 사비성에 남아있다가 부여문사, 부여융과 함께 항복했는데, 이에 비추어보면 의자왕이 파천하던 당시에는 적손인 부여문사와 좌평들의 수장인 대좌평도 웅진으로 피난을 못가는 급박한 상황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라. 7월 18일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합니다. 항복 당시의 기사도 의미 심장합니다.
[의자왕(義慈王)이 태자(太子)와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의자왕과 부여효 말고는 '웅진방령' 즉 예식진과 예식진의 군사만 언급됩니다. 즉, 의자왕이 거느린 신료 중 주요 인물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의자왕이 거느린 군사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사실 그럴만 합니다. 앞서 보았듯 중앙군은 이미 소멸했고, 나당연합군이 코 앞에 온 상황에서 밤중에 파천했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왔을리가 없죠. 애초에 예식진이 의자왕을 끌고 왔다는 것 자체가, 예식진이 이끄는 군사가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를 압도했다는 말이니까요.
마. 또 전 태자인 부여융, 적손인 부여문사가 항복했다는 것도 정치적으로 타격이 크죠. 이미 의자왕의 리더십이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전 태자와 적손이 항복했는데, 만약 당군이 이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본서기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成忠)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삼국사기
백제의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될 당시 백제 내부에도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소정방이 세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일본서기에도 언급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도 성충의 숙청 등, 그 진통이 어렴풋이 언급되어 있죠. 어쩌면 상당수의 귀족들은 부여융을 태자로 지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나중에 부여융은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돌아와,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회맹합니다. 당나라도 구 백제 지역을 통치할 얼굴마담으로 써먹은거죠. 만약 상황이 장기전으로 흘러갔을 때 당나라가 부여융 카드를 실제 역사보다 좀 더 일찍 써먹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바. 이쯤되면 예식진의 배신도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백제 중앙군은 이미 소멸했고, 왕은 몸만 빼서 간신히 도망왔습니다. 사비성은 금세 함락됐고 전 태자와 왕손, 대좌평도 항복했습니다. 이제 웅진의 지방군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솔직히 올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다른 지방군이 올 때까지 나당연합군의 맹공을 견뎌내야 합니다. 공산성이 천혜의 요새기는 한데, 이거 가능할까요? 적어도 예식진의 생각은 50분 버티면서 반반싸움 못 갈 거 같았겠죠.
4. 예식진이 대접받은 것이 당시 전황을 뒤집었기 때문인가?
가. 전황을 뒤집은 배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배신자들도 그럭저럭 영전했습니다. 평양 포위 이후에 항복한 연남산은 제후로 대접받았고 고구려 멸망이라는 대세가 결정된 시점에서 평양성의 문을 연 신성도 광록대부에 봉해졌죠. 백제부흥군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막타친 흑치상지도 대우 받았습니다. 비록 결말이 안좋았지만.
나. 당군 입장에서는 어쨌건 예식진의 항복으로 '혹시나 50분 갈 수도 있는' 위험부담이 없어 졌습니다. 반드시 전황을 뒤집는 배신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굳이 대우를 안해줄 이유가 없죠. 오히려 정말 전황 자체를 뒤집는 대공이라면 대우가 더 컸어야 할겁니다. 예식진이 항복 이후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한건 맞지만 엄청나게 승승장구 했다는 기록도 없구요.
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이 활발할 때도 당군은 웅진 지방은 끝까지 통제 해냅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진압되고 웅진도독부을 개편하기 이전까지도 당군의 거점도 웅진이었습니다. 이에 비추어볼때 백제부흥군이 기세를 올릴 때도 예식진으로 대표되는 예씨 일족는 당의 지배에 협조적이었을 것임이 추정되죠. 예식진은 웅진도독부 체제 개편 이후(5도독부>1도독부) 웅진 일대를 다스리는 동명주자사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굳이 예식진이 극적인 반전을 불러오지 않았더라도 예씨 일족이 보인 당군에 보인 협조적인 태도나, 웅진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씨 일족의 협조를 얻을 필요를 고려하면 당이 예식진을 좋게 대우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5. 고구려의 개입은 어떤가?
가. 보통 전쟁이 장기화되면 고구려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것도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정말 장기화 되어야 할 정도라고 봅니다. 왜냐, 고구려가 백제를 지원하려면 한강 유역의 신라 영역을 돌파해야 했거든요.
나. 660년 10월, 고구려군이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합니다. 신라에서는 필부가 20일 동안 맞서 싸우자, 고구려군은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합니다. 그러다 신라의 대나마 비삽이 고구려군과 내통했고, 고구려군은 되돌아와 칠중성을 공격해 함락시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돌파하여 백제(부흥군)를 구원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칠중성 전투에서 모든 힘을 써버린 고구려는,..
다.
[ (661년) 5월 9일 또는 11일이라고도 하였다.에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惱音信)과 말갈(靺鞨)의 장군 생해(生偕)가 군사를 합하여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왔다.〔뇌음신이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겨가서 공격하는데, 포차(抛車)를 벌여놓고 돌을 날리자, 그것에 맞는 성가퀴나 건물은 그대로 부서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사람을 시켜서 마름쇠를 성 밖으로 던져 깔아 사람이나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헐어서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얽어서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치고 그 안에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막았다. 이때 성안에는 단지 남녀 2,800명밖에 없었는데, 성주인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능히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기를 20여 일 동안 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힘이 지쳐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천둥과 비가 내리며 벼락이 쳤으므로 적이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왕이 동타천을 기리고 표창하여 관등을 대나마(大奈麻)로 올려주었다.] ...거짓말 같이 참패를 당합니다.
라. 종합하면, 고구려는 백제 멸망 후 3달이 지난 시점에서야 병력을 일으켰고, 신라의 내분에 힘입어 간신히 칠중성만 함락시키고 물러났습니다. 당장 고구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 신라 북변을 돌파할 전력은 없었던 거죠.
6. 결론
- 당시 백제의 상황은 의자왕의 장기전 전략이 있었다거나, 혹은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던 걸로 보입니다. 물론 백제가 무조건 멸망한다고 단언할 수야 없지만, 이미 중앙군은 죄다 소멸했고, 단기간 내의 지방세력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웅진성의 병력만으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야하는, 적어도 당대 백제인들이 보기에도 매우 불리한 전황이었던거죠.
- 물론 이러한 사정만으로 예식진의 역사적 평가는 변하지 않을겁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국왕을 납치해 항복하고, 그 호의호식의 대가를 누린 자를 어떻게 달리 평가할 수 있을까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6-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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