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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10/05 03:40:12
Name 신불해
Subject 고려 말, 요동의 정세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는 원말명초 시기. 마찬가지로 당시 고려 말 시대 장군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령에 따라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군하다가 이른바 '위화도 회군' 을 일으켜 반란을 감행, 고려의 정권을 장악 하여 조선을 세우는 첫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의 인물,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18년 전, 장군 지용수 등과 함께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진군, 요동성을 지키던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의 군대를 격파하고 한반도의 국가는 발해 멸망 이후 무려 256년 만에 이 요동성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군량 부족과 주변 군벌들의 위협 때문에 금세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비교적 싱겁게 보였던(실제로는 어마어마한 강행군을 펼쳤기에 휘하 장병들은 대단히 기진맥진 했었을 겁니다) 바로 이 1차 요동 정벌 - 이 표현은 문제의 여지가 좀 있는데 뒤에 후술 하겠습니다 - 과 더불어, 그 일을 재현하려는듯 해보였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한 2차 요동 정벌... 이런 움직임 때문에 원말명초기의 고려 말 요동에 대해, 이런 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고려 말 요동은 무주공산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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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깃발만 꽂으면 고려 땅이다....!






그러나 대단히 널리 퍼진 이 인식은, 실제 당시 요동의 형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원말 명초기 요동 지역은 단 한번도 공산(空山) 이었던 적이 없으며, 무주(無主) 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바로 그 주인 자리를 얻기 위한 혈전이 끊임없이 벌어지던 대격전지였습니다. 최소한 무주공산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목가적이고 태평스런 풍경은 완전히 집어치워도 무방할 겁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하면, 이성계의 1차 요동 원정(1370년)에서, 위화도 회군(1388년)은 물론이거니와, 정도전(사망 1398년)의 생에 후반부에 있었던 조선의 요동 원정 계획 등은 각각 20여년에서 30여년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대중적 인식에서 '요동 무주공산' 이야기는 이 30여년에 걸친 시기가 두리뭉술하게 같이 엮이는 판입니다. 1차 요동 원정 때 쉽게 성공했으니 이는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이고, 위화도 원정 때도 무주공산이었을 것이며, 정도전이 요동 원정 하려고 했을떄도 무주공산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이 2018년인데 30년 전이면 세가에서 메가 드라이브를 내며 16비트 고사양 게임기라고 광고하던 시절입니다. 이를 한데 묶는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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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동 지역을 이끌어가던 가장 중심적인 세력으로 가장 먼저 살펴 봐야 할 것은 바로 '옷치긴 왕가' 입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일반적인 중화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 판도를 보여줬는데, 일단 이른바 '몽골 제국' 은 크게 4개의 울루스(Ulus)로 구성 되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원나라가 중국 지역에 있었고 서쪽으로 가면 중앙 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 동유럽과 아시아 일대에는 킵차크 칸국...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여기까진 잘 알려졌는데....



문제는 이 4개의 대 울루스가 다가 아니라, 울루스 내에서도 '또' 울루스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울루스를 칭기즈칸의 일족인 '황금씨족' 가문의 일원이 사실상 자치를 하구요.  



그런 원나라 내부의 독립적인 울루스 세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이 바로 한반도의 북방 지역에 자리 잡았던 '옷치긴 왕가' 였습니다.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이었던 '테무게 옷치긴' 으로부터 이어진 이 옷치긴 왕가는 내몽고의 후룬베이얼을 중심으로 만주 지역까지도 영향력을 지녔던 세력이었습니다. 



즉 몽골의 초원에서는 말을 키우고, 만주의 수렵지대에서는 수렵과 목농을 기반으로 하고, 농업에다가 원나라에 항복해 접촉이 빈번해진 고려와 중국의 교역까지 중간에서 장악할 수 있던 입장이라 원나라의 여타 독립적인 제왕들 중에서도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세력이었습니다. 심지어 동방의 여러 왕가를 지원하며 그 쿠빌라이 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입니다. 성공은 못했지만, 성공 후에도 쿠빌라이도 완전하게 손을 볼 수는 없어 여전히 세력이 내려왔으니 대략 그 위세를 짐작할 만 합니다.



앞서 말한 쿠빌라이 칸에 대항한 반란 실패 이후 옷치긴 왕가의 어마무시한 세력은 비록 좀 줄어들긴 했지만, 고려 말 당시에도 옷치긴 왕가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옷치간 왕가의 존재만으로도 무주공산이라는 말은 쏙 들어가게 됩니다. 고려 말 당시, 옷치긴 왕가의 주인은 요왕(遼王) 아자스리 였습니다. 아자스리는 만주 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를 가진 봉건 귀족으로, 옷치간 왕가의 이름을 빌려 여전히 요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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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칼리(木華黎)



칭기즈칸 시기 몽골의 주요 장수들 중에 '무칼리'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유럽의 군사와도 싸웠던 수부타이나 제베보다 덜 유명한듯 싶은데, 칭기스칸이 중국 금나라와의 싸움 도중 갑자기 서쪽 호라즘을 치러갔을때, 거의 단신으로 대중국 전선이라는 큰 전선을 담당했던 '군단 사령관' 이었던 인물입니다. 당연하게도 칭기스칸에게 엄청난 신임을 받았고 생에 수십년동안 전장에서 세운 공훈으로 인해 무칼리의 가문은 몽골 제국의 명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 무칼리의 후예 중에 한 명이 바로 에센부카(也先不花) 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개원(開元)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끌던 그는 요동 지역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이를 격파하기도 했으며, 다름 아닌 원나라 황제인 순제가 북으로 쫒겨나자 그를 찾아가 수만필의 비단과 수천석의 곡식을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패망의 위기에 놓였던 원나라 황제의 명줄을 좀 더 붙여줬던 인물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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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옷치긴 왕가의 야자스리, 개원의 에센부카가 선조로부터 이어지는 '몽골식 봉건 귀족' 이라면, 중화제국으로서 원나라가 만들었던 통치기구, 즉 행성 조직 중 하나인 요양행성(遼陽行省)의 군사세력 역시 이 지역에는 존재했습니다. 



이런 행성 기구의 관제에 의하면 가장 높은 직위인 승상이고, 그 승상의 아래가 평장정사(平章政事)인데 어느 시점에서 각 행성에서 승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행성의 최고직이 평장정사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요양행성의 평장정사인 유익(劉益)은 요동 반도의 중앙 부근인 푸셴(復縣) 득리(得利) 지역에 군사를 배치해서 명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평장산(平頂山) 일대에는 고가노(高家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심양에는 '카라장' 이, 요양에는 '홍보보' 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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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 아닙니다. 고려의 반역자 '기철' 의 아들인 기사인티무르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려에서 반역자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 며 요동 지역의 '동녕부' 에가서 사람을 모아 세력을 결성하고, 고려의 북방을 본격적으로 위협 했습니다. 요동 군벌들 중에서는 기사인티무르의 동녕부 세력이 고려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고 해도 될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하추(納哈出)가 있습니다. 나하추는 에센 부카처럼 무칼리 집안의 후예로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요동 지역에는 본래 세력이 없었고, 중국 강남에서 주원장과 직접 맞서 싸웠다가 포로가 된 후, 주원장이 자비를 베풀어 풀어주자 요동으로 가 이곳에서 세력을 모아서 군벌이 된 특이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의 소유자 입니다. 





또한 이들 요동 세력은 군사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례로 중국 내부에서 펼쳐져서 그 잔당이 한반도까지 수십만이 넘어온 '홍건적의 난' 당시, 중국에서 한반도로 지나가는 홍건적들은 당연히 이 요동 군벌들을 지나쳐야 할텐데, 그런 군벌 중에 한 명인 고가노가 단독으로 홍건적 4,000명을 참살하고 그 대장마저 참살할 정도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360년대 ~ 1371년 까지의 요동 지역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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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위치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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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공산....어디?"







어떤 의미로는 이 당시 요동이 '무주' 였다고 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느라 주인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그 서로간의 자세한 내역이야 기록의 미비로 제대로 알 수 없지만, 타 세력과 연관된 큰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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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362년 경, 이 지역의 군벌 중 하나였던 나하추는 고려의 반역자이자 탈주자 조소생(趙小生) 등이 고려 공격을 회유하며 길잡이를 자처하자, 이에 솔깃하여 고려의 북방을 쳤습니다.



이 당시 나하추는 행성승상(行省丞相)을 자처했는데, 앞에서도 살짝 이야기했지만 원래 행성 기구에서는 승상이 최고직입니다. 다만 행성 기구의 승상직이 어느 시점부터 폐지되어서 평장정사가 가장 높은 지위가 된 것인데, 여기서 나하추는 자기 스스로 자기가 행성승상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는 지역의 다른 몽골계 군벌들에게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거나 나하추는 이때까지만 해도 외부에서 요동으로 흘러온 몸이다보니 아무래도 세력이 아쉬웠을 것이고, 그렇다고 현지의 군벌들과 노골적으로 적대하며 드잡이를 펼치기에도 좀 마땅찮았을 겁니다. 그런 나하추에게 있어 고려의 북방은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테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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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나하추는 고려의 동북면에 들어온 이후에도 무슨 쭉쭉 치고 나간다던지, 고려의 수도를 노리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던지 하는 행보를 보이는 대신 몇달간 고려 동북면에 웅크리고 있는등, 아예 이 지역에 자리를 피고 드러눕기를 시도합니다. 2월에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7월까지 움직이지도 않고 드러눕기만 했을 정도니, 한반도 땅이 등에 따숩긴 했나 봅니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후 이성계에게 패퇴하여 물러났고, 이후 한반도 쪽으로는 달리 군사적 욕심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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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의 습격으로부터 8년이 지난 후, 1370년 고려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성계와 지용수 등을 파견하여 요동 지역을 공격 합니다.  이는 기사인티무르의 동녕부 세력이 고려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기에 펼친 작전이었습니다. 



여러 군사세력을 물리치며 나아간 원정군은 마침내 요동성 앞까지 도착했는데, 기사인티무르는 무슨 배짱인지 수성전이 아니라 성 밖으로 군사를 뺴서 회전을 시도했고, 이성계 군단에게 대패하여 마침내 요동성이 함락 됩니다. 그러나 이후 군량이 불에 타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고려군은 황급히 퇴각 했습니다.



이 일련의 군사 작전은 주로 '제 1차 요동 정벌' 로 불리기는 하는데... 여기까지 글을 보신 분들이라면 이 표현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고려군은 요동을 전부 장악한게 아니라, 요동의 수많은 군사세력 중 동녕부 세력만을 격파한 것 뿐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외국의 사서까지 갈 것도 없고, 이 사건을 다루는 '고려사' 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時萬戶裴彦等, 擊高家奴于石城未還, 欲留待, 以乙俊言班師. 

당시 만호 배언(裴彦) 등이 석성(石城)으로 고가노(高家奴)를 공격하러 갔다가 귀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기다리려고 했으나 노을준의 건의에 따라 군사를 돌렸다. 



城甚高峻, 矢下如雨, 又雜以木石, 我步兵冒矢石, 薄城急攻, 遂拔之。 賽因帖木兒遁, 虜伯顔, 退師城東。 張牓納哈出、也山不花等處曰: 

성은 매우 높고 가파르며, 화살이 빗발처럼 내려오며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서 내려오는데, 우리의 보병(步兵)들이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성에 가까이 가서 급히 공격하여 마침내 성을 함락시켰다. 새인첩목아(賽因帖木兒)는 도망하므로 백안(伯顔)을 사로잡아 군사를 성 동쪽에 물리치고, 나하추(納哈出)와 에센부카(也山不花) 등지에 방문(榜文)을 포고하기를……





고려사에 보면, 요동성을 장악한 고려군은 "좋다, 이걸로 작전 끝!" 이 아니라, 일부 세력을 나눠 근처의 군벌을 공격케 시도했는가 하면, 기사인티무르 일파를 물리치면서 근처의 나하추와 에센 부카에게 글을 보내 "우리가 이러저러한 목적으로 온 것이다." 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밝혀 오해를 피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회군하면서도 나하추의 추격을 우려해 서둘러 지름길을 통해 이동했을 정도 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요동 정벌' 이라는 것은 '요동 지역의 주요 군사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확고하게 이를 유지할 뻔 했다' 고 보긴 어려움이 있습니다. 일단 요동으로 원정을 갔으니 요동 원정이 아예 틀리지는 않긴 한데... 여기서 느껴지는 어감의 모호함이 '요동 무주공산설' 의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가장 직관적인 표현으로 이 사건을 말하자면, '동녕부 원정'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1370년의 동녕부 원정으로 요동 지역에서도 요양 지역은 군사적 공백기가 생겼고, 이 지역은 동녕부의 잔당 및 소규모 여진족들이 활보하며 고려 국경을 심심하면 쳐들어오는 매드맥스스러운 환경으로 변모합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 중에 하나가 '호바투' 고, 이 당시만 해도 여러 약소 세력들과 같이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던 호바투는 10여년 뒤엔 대세력이 되는데, 이건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여하간에 고려를 포함해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요동 세력은, 바로 이 시점에 크나큰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강남에서 출발한 명나라가 여기까지 당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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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 상우춘 등의 장군이 이끄는 25만 대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한 명나라는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장악하고, 이에 원나라의 순제는 상도로 몸을 피했으나 명군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결국 상도에서도 몸을 피해 응창으로 이동했지만 명군은 다시 여기까지 쫒아왔고, 이 시점에서 순제는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요동 군벌들은 전전긍긍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중에서도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요동 반도의 유익이었습니다. 명군이 여기까지 닥치는건 시간문제인데 맞서 싸울 자신이 없던 그는 명나라에 항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유익 입장에서 한가지 걱정되는것은, 일단 항복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몸을 숙여 복종을 표시하되 실제로는 요동 반도에 그대로 남아 자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떄쯤에 일이 틀어지면 천하의 명나라를 상대로 빠져나올 방법도 없었구요.



때문에 궁리하던 유익은 차선책으로, 놀라운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명나라 대신 고려에 귀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려의 영토에 사는 사람으로서 명나라에 항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북원(北元)의 요양성평장사(遼陽省平章事)인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했으나 명나라가 이곳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킬까 우려한 나머지, 요양이 본디 고려 땅이니 고려 조정에서 명나라에 요청하면 이주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우리 조정에 사자를 보내 의사를 타진해 왔다. - 고려사 공민왕 20년(1371년)



유익과 그 일당으로 보이는 왕우승 등은 이 당시 고려에게 사람을 보내, 



"지금 내가 명나라에 항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요양은 원래 고려의 땅이다!"


"그러니까 고려 조정에서도 명나라에 요양은 원래가 고려의 땅이었다고 말 좀 해주라!"


"그렇게 되면 고려 사람이 고려 땅에서 사는거고, 고려 사람을 타국으로 끌고 갈순 없으니 우리도 여기서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요양 지역은 고려의 땅인데... 자기는 그 '고려의 땅' 에서 계속 머물 생각이고... 고려에서 '이쪽은 원래가 우리 땅이었습니다.' 하고 말 좀 해주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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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려버전의 쌍성 총관부 비슷한 상황이 되는겁니다. 본래 고려의 실효지배하던 고려 동북면에서 몇몇 반란군이 일어나 이 지역을 장악하고 원나라에 항복한 후, '고려 땅에 있는 원나라의 영토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자신들이 하던' 게 쌍성 총관부 입니다.




현재 요동 반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유익이 '요동은 고려 땅' 이라고 ok를 했으니, 고려가 이를 받아들여 '요동은 고려 땅' 선언을 하고, 그 이후 명에게 적당히 숙여주면서 "저희도 명나라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 그런데 요동에 유익이라는 얘가 군사 거느리고 있잖아요, 근데 거기도 저희 땅이구요, 당연히 저희랑 같이 명나라 형님을 따르는 중입니다. 걱정할거 없어요^^" 이러는 상황이 된다면,




당시 아직까지 북원과의 전쟁이 한창이고, - 심지어 바로 다음 해인 1372년에는 카라코룸으로 명나라의 15만 대군이 기세좋게 진군하다가 너무 긴 원정거리로 말미암아 대패하여 여러모로 외교적으로 난처한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 이런저런 외교적 문제를 더 만들기 애매했던 명나라가 "오냐, 알았다. 대충 그렇게 알고 있을테니까 나도 더 터치 안할련다. 북원애들이랑 손만 좀 끊고, 알았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유익이 자치를 하며 실효지배하는 형태로 요동 지역은 고려땅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무슨 요동 원정이고 할것도 없이, 그냥 막 굴러들어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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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당시 고려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익이 몇달 뒤에 사람을 보내 공민왕의 생일까지 축하하며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도 고려는 아무 말도 없었고, 유익은 딱히 고려 쪽에서 무슨 말을 해주는것도 없이 '그냥' 명나라에 항복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떄 유익은 그냥 항복한 것이 아닌, 자신의 지위를 통해 가지고 있던 요동 지역의 주요 지리적 사항, 병마의 배치, 돈과 식량등을 기록한 대장을 명에 바쳐 명나라는 요동 지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항복한 유익이었지만 말로는 좋지 못했습니다. 유익 외에 나하추나 여타 몽골 군벌들은 여전히 원나라(이제는 몽골로 쫒겨간 북원)을 지지했으며, 이렇게 되자 그들이 유익을 적대해서 공격을 퍼붓었던 겁니다. 유익이 투항한지 몇달 되지도 않아 홍보보와 마언휘(馬彦翬) 등은 유익을 참살했고, 유익의 부하였던 장량좌(張良佐)가 다시 마언휘를 죽이고 재차 명나라에 항복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명나라는 손 한번 안대고 코풀면서 요동 반도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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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반도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명나라는 직후인 1372년에 바로 군사 활동을 개시 합니다. 이때 평장산 지역의 고가노는 명군과 교전했으나 처참하게 대패했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지만 가족이 모조리 포로로 잡혔다는 말을 듣자 저항 의지를 잃어버린 채 명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그런데 명군의 대두는 요동의 여러 군사 세력 중 나하추에게는 오히려 이득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난립하던 요동 군벌들은 유익이 항복 이후 '정말로 이제 곧 명이 여기까지 온다' 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고,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북원' 의 이름으로 뭉쳤으며, 이 과정에서 어쩌다보니 무리의 중심이 나하추가 된 겁니다. 즉, 나하추를 중심으로 요동 군벌이 결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나하추는 과거 이성계와 교전했다가 패배하고 물러났을때와는 체급이 완전히 달라졌으며, 요동의 초거대 군벌로 성장합니다. 나하추는 세력은 인구 10만에서 한때는 20만에 달할 정로 늘어났고, 여러모로 사람이 부족한 요동에서는 이는 굉장한 전력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한참 뒤인 조선 세종 시기, 당시 나라에서 집계한 한반도의 서북과 동북면 인구의 합계수가 172,422명에 불과합니다. 물론 잡는다면 당연히 인구를 더 잡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굳이 그렇게 열렬하게 인구를 빠짐없이 집계하는 편이 아니라 이런건 적게 쓰는걸 미덕으로 여기긴 했습니다만은, 아무튼 세종 시기 조선의 서북, 동북의 세수 납부 가능 인원보다도 더 많은 숫자가 나하추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이에 반해 요동의 명군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명나라의 국력이야 당연히 어마어마하지만, 문제는 이 요동이라는 지역이 중원 본토에서 너무 먼 곳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이곳에 들어선 명나라로서는 물자도, 사람도 너무 부족했습니다. 인력과 물자 모두 저 멀리 산동에서부터 보급을 해와야만 했는데, 현지에 20만 명을 집결 시켜놓고 수만 대군을 동원하는 나하추에게는 역부족이었씁니다.



나하추는 명군이 고가노를 무찌르며 기세를 타던 1372년, 오히려 역공을 가해 명나라의 중요한 요동 보급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략했습니다. 이떄 나하추는 무려 미곡 10만석을 불태우고, 명군 5,000명을 참살하는 엄청난 공적을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일단 요동에서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던 명으로서는 정말 너무나도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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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요동에서의 혈전에서 비록 주역은 아닐지언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여진족 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지역에서의 인구라고 해봐야 숫자가 제한적이었는데, 그나마 그들 대다수가 여진족이었습니다. 따라서 여진족을 얼마나 포섭하느냐에 따라 군사 전력은 물론이거니와 생산력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그렇게 멀지 않는 동북면의 이성계 역시 여진족들이 자신의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하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하추의 군대 다수는 여진족이었고, 대신 나하추는 가축을 피우면서 남쪽의 고려 등과 여진의 교역을 도우면서 기록에 따르면 군수품이 넘쳐나고 가축이 번성하여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여기에 나하추는 고려에도 계속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공민왕의 의뭉스런 사망 이후 급하게 즉위해 정통성이 취약하고 절차가 미비했던 우왕의 책본 문제를 자기 손으로 해결해줬습니다. 대신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병력을 좀 보내서 같이 명나라와 싸우지 않을래?" 하는 서신을 보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무렵, 한반도의 서북 너머, 요동 반도의 명나라와 세력이 인접한 과거 동녕부 지역 즈음 정도로 예상 되는 곳에서 정체불명의 제3 세력이 점점 덩치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진족 호바투 입니다.



명군이 요동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1371년 초반만 해도 세력이 미비하고 일개 동녕부 잔당 중 하나로 치부되며 치고 빠지기를 전술로 쓰던 호바투는, 1380년 무렵에는 갑자기 초거대 세력으로 성장해서 병사 1,000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을 치는가 하면, 최소 수천에서 최대 수만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이끌고 아예 멀리 고려의 동북면까지 들어가서 고려 정규군과 일대 회전으로 정면 승부를 펼칩니다. 이런 10여년 정도에 걸친 호바투의 활동 동안 요동으로 잡혀간 고려 서-동북면과 여진족의 숫자만 장장 수만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동북면에 걸친 광활한 영지와 (호바투를 제외한) 거의 대다수 여진족들의 지지를 받던 이성계조차 동원할 수 있는 사병이 2,000명 정도가 최대치 였습니다. 그런데 일개 여진족 추장에 불과한 호바투가 병사 1,000명은 '그냥' 동원하며, 기록에 따라 최대 수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기도 한다는 것은, 무언가 너무 이상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를 도와줬다고 하면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나하추는 가능성이 낮습니다. 앞서 보았듯 이 당시 나하추는 최대한 고려와 우호를 맺으려고 했으며, 고려의 힘을 빌려 명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명나라가 배후에 있었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설명이 되는 점이 많습니다. 첫째, 지리적으로 볼때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명군이 버티고 있던 요동 반도 지역은 가까워서 연계가 용이 합니다.


둘째, 앞서 말했듯이 나하추 휘하에는 여진족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하추와 호바투가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나하추에 협력적이지 않은 여진족' 이라면, 명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서 시간을 들여 그런 식으로 육성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셋쨰, 호바투가 잡아온 물자인 '인간' 은 당시 인력 부족이 심했던 명나라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호바투가 잡아왔던 사람들은 일정 시점 이후에 '전부 명나라 사람이 되어 명나라 동녕위의 군역에 소속되게 됩니다.' 



여하간에 명군과 나하추의 격돌 속에서 그렇게 기승을 부리며 세력을 키우던 호바투는 서북을 넘어 동북면까지 깊숙이 들어왔다가, 길주 평야에서 마찬가지로 여진족을 휘하에 대동한 이성계와 고려+여진병사 vs 여진족의 일대 회전을 펼친 후 완패, 목숨만 건져 달아나지만 이후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렇게 호바투가 이성계에게 제거되자 명나라는 호바투가 남긴 자원, 즉 사람들을 주섬주섬 주워 군역에 포함 시킵니다만.... 만약 호바투가 명측 여진이라면, 그 호바투가 이렇게 나가떨어진것을 보고 이성계의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처음으로 실감, 그게 이후 여진족 문제를 둘러싼 주원장과 이성계의 극심한 갈등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진 너무 추측이 많았으니 일단 각설하고,






앞서 보았듯이 나하추는 이 무렵 대단히 기세를 올리면서 명나라의 요동 수비 지역을 수차례 공격했고, 가히 북원 정권의 슈퍼스타로 떠오른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명군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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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군인송환문제와 조명간 군사외교 - 김경록





설사 고려 말 시기에 요동에 명군이 좀 있었다고 한들, 거대한 명나라 제국의 일부분, 달팽이의 '촉수' 정도 자리에 위치한 요동 반도에 명나라 군이 좀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느냐, 있다고 해봐야 '쩌리 전력' 아니겠느냐... 이런 막연한 생각 또한 '요동 무주공산 설' 의 한 동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실상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동에 있던 명나라군은 제국 전역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강병이었습니다. 그것도 그토록 깐깐하고 예민한 주원장이 직접 "요동의 병력이야 강병들이라 전투는 뭐 크게 걱정없지. 다만 너무 변방이라 지원도 어렵고 피로가 심할텐데, 그러다가 때려치고 조선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할 정도로, 명나라 초창기 요동에 주둔한 병력은 황제가 인증한 '전투 걱정할 필요 없는 부대' 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요.





그리고 말만 그런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뤄낸 성과만 봐도 어마어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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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5년, 한참 기세등등하던 나하추는 대군을 이끌고 명군이 버티고 있는 요동 반도로 쳐들어갔습니다. 적당히 치고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가벼운 공격이라기보다 상당히 준비를 하고 성과를 거두기 위해 쳐들어갔던 듯 합니다.



이 당시는 아직 명나라의 요동 방위 시스템이 덜 정착된 상황이라, 명군은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성벽도 덜 쌓아 올려 여러모로 힘겨운 상태였습니다. 



나하추의 습격을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요동 반도 동쪽의 개주(蓋州) 였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도지휘사 마운(馬雲)은 나하추가 이동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개주로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최대한 수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늦지 않게 내렸고, 이런 지시 탓인지 나하추는 개주 공략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러났으면 그나마 파국은 당하지 않았을텐데, 나하추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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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는 개주가 함락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배후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냥 '돌격' 을 감행, 요동 반도 서쪽으로 한참을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요동 반도의 반도' 로 들어가는 끝자락 부근인 '금주' 지역에 자신의 모든것을 건 공격을 감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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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국경 지대가 이렇게 강하면 내지의 수비는 약하지 않을까....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럴거야... 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나하추의 금주 공격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사실 금주는 성벽도 제대로 아직 쌓아올리지 못했고, 병사의 숫자도 부족했습니다. 이런면에서는 나하추가 판단을 나쁘지 않게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군은 그 모든것을 능가하는 강력한 전투력으로 수비에 성공했고, 그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에 요동반도 여기저기의 성에 흩어졌던 군사들이 한데 모여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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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쯤되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나하추는 어떻게든 본전이라도 회수하기 위해 서둘러 회군을 감행했습니다. 문제는 일선의 기지를 함락시키지 않고 마구 진격한 대가가, 후퇴할때가 되니 뼈아프게 다가온 것입니다. 가장 좋은 회군로는 개주를 통과하는 것이었지만 개주는 함락시키지 못했고 방어도 강했습니다. 때문에 개주 남쪽의 직하(柞河)를 경유해서 빠져나오려 나하추는 시도 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도지휘 섭왕(葉旺)은 나하추가 그렇게 움직일것이라는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했고, 먼저 직하로 이동해 연운도(連雲島)와 굴타채(窟駝寨) 10여리에 걸쳐 얼음을 겹겹히 쌓아 벽을 만들고, 모래에 못과 널판지를 숨겨 늘어놓고, 평지에 함정까지 깔아놓아 완벽한 매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윽고 지옥불 속에 들어온 나하추는 군대를 이동하다 명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돌세례에 대단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목숨만 건져 도주에 성공합니다. 명군은 전리품을 끝도 없이 거두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패배가 어찌나 치명적이었는지, 나하추는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것을 잃고 이때부터는 두번 다시 명군을 선제 공격하지 못했고, 그저 지키는것만으로 전전긍긍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하추가 웅크러든 사이, 명나라는 나하추와는 달리 섣불리 공격을 바로 감행하기보다는 근처의 여진족들을 포섭, 격퇴하는데 집중 합니다. 나하추의 편을 들만한 여진족들이 전부 나가떨어지면서 나하추는 인력도 부족해졌고,경제적으로도 심하게 빈곤해졌습니다. 이렇게 나하추를 몰아넣는데 성공한 명군은 '큰 한방' 을 이후에 준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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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년, 대장 남옥의 지휘 아래 명나라는 20만 대군을 이 지역으로 출동시켰습니다. 한참 전에 카라코룸으로 막무가내로 진격하다 패한 적도 있었던 만큼 이런 대군을 동원한 원정을 그냥 하긴 위험한 일이고, 그만큼 1372년 무렵부터 현지에서 얼마 안되는 물자와 인력을 가지고 악전고투한 명나라 장병들이 여러모로 대군이 움직일 수 있을만한 여건을 마련해줬다고 쳐줘도 될듯 합니다.



이미 세력이 곤궁해진 나하추는 이런 벼락같은 대군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고, 일단 요왕 아자스리의 곁으로 도주했지만 수하 여진족들이 전부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기 불능이라는 것을 깨닫고 결국 수백여명의 수하들과 함께 항복했습니다. 이후 나하추는 명나라의 장군으로서 운남을 공격하던 중에 사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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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가 항복하여 요동이 뻥 뚫리게 되자 이제 명나라는 거칠것이 없었습니다. 이듬해인 1388년, 명나라는 남옥의 지휘 아래 다시 한번 15만 대군을 동원했고, 이 대군은 기나긴 원정 끝에 당시 북원의 수도였던 후룬베이럴를 공격, 포로만 10만 명을 잡는 완승을 거두게 됩니다. 북원의 지배자인 토구스 테무르는 간신히 몸만 빼서 몽골 서쪽으로 달아났지만, 이 과정에서 몽골 내 반대파에게 걸려 척살되고 맙니다. 이후에도 '몽골의 지배자'를 잇는 존재라는 뜻에서 그 지위 자체는 끊기지는 않았지만, 보통 우리가 인식하는 원말명초 시기 북원이라는 정권은 이 시점에서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여태까지 버티고 있던 요왕 아자스리도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주원장은 아자스리를 비롯한 동방의 왕가에게 어느정도의 자치권을 주는 대신 신속을 받는 형태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로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가장 강력하던 원나라의 울루스도 전부 명나라에 정복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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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수십여년에 걸쳐 난립하던 요동 세력은 1388년에 접어들어 명나라의 손에 모조리 통일 되었습니다. 요동에 주둔한 명군은 이 시점에서 전투력과 규모 모두 상당한 수준이 되었고, 위협이 될 수 있는 북원 정권은 완전히 멸망 했으며, 단지 세력만은 유지하고 있던 몽골의 왕공들도 명나라에 적대할 의사를 전부 버리고 신속했습니다. 또한 여진족에 대한 회유 작업도 펼쳐지고 있었고, 호바투가 과거에 잡아왔던 사람들 역시 동녕위의 주민들로서 명나라에 통제에 묶어넣어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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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이 무렵, 고려의 요동 원정군이 출발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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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2-24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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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 vastaan
18/10/05 04:53
수정 아이콘
이성계가 살아남는 유일한 경우의 수...!
미키맨틀
18/10/05 05:20
수정 아이콘
역시 요동은 삼한을 기반으로 한 나라가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군요.
뽀롱뽀롱
18/10/05 05:42
수정 아이콘
회군이 민족을 구했다 수준으로 봐야하나요?

실제로 공략했으면 승리는 요원하고 명나라에서
한반도에 힘을 투사할 빌미와 명분이 되었을것 같네요
akb는사랑입니다
18/10/05 06:12
수정 아이콘
최근에 인문학 세미나로 역사 강좌를 들었는데, 그곳에서도 그러더군요. 비록 조선 왕조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은 있겠지만 당시 요동정벌은 정치적인 목적을 차치하고 군사적인 관점으로는 그냥 어불성설에 가까웠고 실제로 고려군 내에서도 어떻게 우리 따위가 요동을 정벌하고 명과 대치하겠느냐는 정서가 팽배했다고.. 그래서 이성계가 회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수많은 고려 군관들이 이성계에게 회군 안하면 우린 전부 죽는다 는 식으로 어깃장을 놓았다고..
실제로 당시 요동 정벌군은 고려 입장에서는 거의 전력을 긁어모은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병력의 숫자와 질 면에서 당시 떠오르는 명나라에게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고 하더라고요.
La La Land
18/10/05 07:12
수정 아이콘
요약하면

1차 요동정벌(?) 때는 명나라도 아직 신생이고, 여타 군벌들이 많아서 혼란스러워서 하나씩 끊어먹는 느낌으로 정벌 가능

2차 요동정벌때는 명나라가 싹 통일(?) 시켜놔서 명나라랑 정식 한타 붙어야하는데 당연히 말도 안되니 회군
뱀마을이장
18/10/05 07:36
수정 아이콘
선추천 후감상요

유로파 유니버셜리스4에서 한국어로는 과이심 커얼친 옷치긴은 보르기진 씨족이라 들어왔는데 표현이 다르군요

냉정하게 보면 요동 영유권 주장은 왕건이 발해 세력 손절하는 시점에서 끝났다고봅니다
물속에잠긴용
18/10/05 07:42
수정 아이콘
세종때 육진을 개척하고 두만강 국경을 확정하는데, 이후에도 지키기 힘들다고 철수하자는 얘기들이
제법 있었죠. 두만강이라는 확실한 경계선이 있는데도 그랬습니다.
요동은 일시적으로 점령할 수야 있겠지만, 영토로 삼기에는 그야말로 헬인 땅이죠.
됍늅이
18/10/05 08:01
수정 아이콘
두줄요약 : 무주는 맞아도 공산은 아니었다. 주인이 명나라가 됐을 땐 게임 끗
맞나요!? 유ㅡ익 언제나 감사합니다!
아이지스
18/10/05 08:41
수정 아이콘
여기서 신불해님의 전설의 게시물, 달려라 이성계 머나먼 저 대륙으로가 연결되는 겁니까 https://pgr21.co.kr/?b=8&n=51225
미도리
18/10/05 11:28
수정 아이콘
으라차차 성계형!!
으와하르
18/10/05 08:41
수정 아이콘
요동이야 자체 생산력으로 인구부양 제대로 못하는 땅이라 강한 생산력을 가진 배후지가 필수적인데 이 점에서 한반도와 중원은 상대가 안되었죠.
그나마 하북이라건 산동만 상대라면 할만할지도 모르는데 상대는 개발된 강남을 가진 명.... 겜셋.
kicaesar
18/10/05 08:49
수정 아이콘
이후에 북경에 부임하는 영락제....
영락제 정도면 황제 타이틀 빼도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지휘관으로 봐야겠죠?
전자수도승
18/10/05 10:00
수정 아이콘
지휘관으로 돋보인다긴 좀....... 여러 차례 위기를 겪다가 건문제가 생포하라는 뻘명령 따라야 했던 적장들 덕을 좀 많이 봐서
차라리 무공이 뛰어났다는 표현이 더 적확해 보입니다
처음과마지막
18/10/05 09:17
수정 아이콘
이렇게 뒤돌아보니 위화도 회군이 정답이였군요
병사들입장에서도 요동에서 개죽음보다야 이성계장군과 함께 개국공신이 되는게 좋았을테구요
Jon Snow
18/10/05 09:53
수정 아이콘
뒷-북 오졌네요 크크크
좋은 글 감사합니다 꿀잼
18/10/05 10:16
수정 아이콘
저는 이성계 정도 되는 사람이 그냥 아무것도 못하고 망했을거 같진 않아요. 형주를 뒤흔든 관우처럼 요동 판도를 뒤흔들 수준은 되지 않았을까...합니다.
결말은 '그' 이성계도 이건 도저히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정해져 있긴 했다고 보긴 합니다.
요플레마싯어
18/10/05 10:32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카카오페이지에 더퍼거토리라는 대체역사소설이 원말을 다루는데요 이글과 같이보면 좋을거 같습니다
루크레티아
18/10/05 11:15
수정 아이콘
어허허허 타이밍이 어허허허
18/10/05 11:21
수정 아이콘
크크 이성계입장에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좀 더 가능성 있는 쪽에 도박수를 던진 듯
홍승식
18/10/05 12:51
수정 아이콘
남경이 기반인 명에서 요동은 변방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북경이 기반인 명에서 요동은 변방이 아니죠.
요동의 중심인 심양에서 북경과, 서울의 거리는 비슷하거든요.
펠릭스-30세 무직
18/10/05 13:58
수정 아이콘
비행기로 하루면 지구 한바퀴를 돌 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중국의 입장에서 인도와 30만명씩 대처해도 그거슨 변방의 소란 일 뿐이지만 북경와 평양의 거리를 보면 북한의 일은 뱃속의 우환과 같지요.
18/10/05 14:31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트럼피즘
18/10/05 17:11
수정 아이콘
위화도 회군은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이 들긴하죠..
그전에 가지 하기엔 권문세족에 왜구 홍건적..

근데 이성계는 무슨생각으로 그 후에 요동정벌을 시도한걸까요? 노망이들어서? 사병을 해체하려는 명분일까요
蛇福不言
18/10/05 23:30
수정 아이콘
잘 배우고 갑니다.
18/10/06 02:22
수정 아이콘
마지막짤 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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