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8/05/12 23:47:39
Name 글곰
Subject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좋은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좋은 것에는 대체로 세간에 통용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을 어지간히 충족시켰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것이라 평가한다. 물론 완벽하게 객관적인 기준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대체로 인정받는 정도의 기준이라는 건 존재한다. 예컨대 후추를 곁들여 미디움 레어로 구워낸 안심 스테이크는 좋은 요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비틀즈의 Let it be는 좋은 음악인 것처럼.

  좋아하는 건 조금 다르다. 이건 좀 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가다. 집단적인 논리보다는 개개인의 감성에 호소하는 감정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스테이크가 라면보다 좋은 음식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미쉐린가이드 별 셋짜리 레스토랑의 셰프가 갓 만들어낸 스테이크보다 동네 단골 분식집에서 밤참으로 사먹는 양은냄비 라면을 훨씬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좋아한다는 건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이유 따윈 딱히 필요하지 않다. 단지 내가 좋아한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피동적이다. 능동적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저절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피지알에 가입한 지 대략 십오 년쯤 되었다. 그 동안 게시판에 올라온 많은 사람들의 글을 보았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글이란 대체로 그렇다. 처음 서너 문장쯤을 읽으면 대개 그 글이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 뒤의 남은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건 그 판단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는 게시판에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과정을 기꺼이 만끽하곤 했다. 그건 언제나 기쁘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글을 쓰는 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누군가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이십대 초반에서부터 시작되어 삼십대 후반에 이른 기나긴 피지알 죽돌이 생활 동안 오직 한 사람의 글만이 내게 그런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이 사람의 글이 정말 좋다고. 이 사람의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좋다고. 동시에 그 사람의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내게 얼마나 행운인가 하고.

  그렇기에 그 사람의 글이 올라오면 나는 오히려 독서의 과정을 즐기기 힘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남아 있는 문장이 줄어드는 현실이 두려웠고, 마침내 읽기를 마친 후면 더 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다. 그렇기에 되풀이하여 또다시 그 글을 읽었고 그 후에는 좀 더 깊은 실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젠 정말 다 읽었어. 더는 남은 게 없어. 마치 가루마저 입 안에 털어버린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과자봉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게 그 사람의 글을 어째서 좋아하는지 설명하라면 A4용지 석 장쯤은 바로 가득 메울 자신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을뿐더러 추측 가능한 단서조차 제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기분이 상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될까 두려우니까.

  그러면 대체 왜 이 글을 쓰고 있느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익명성을 빌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글이 너무나 좋다고. 당신의 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자주 글을 써 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누군가가 좋아하게 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8-17 17:13)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안군-
18/05/12 23:54
수정 아이콘
글곰님도 누군가에게는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십니다.
18/05/12 23:55
수정 아이콘
정말 공감 됩니다. 스1 좋아하던 코 찔찔이 중학생 시절 가입했는데, 어느 순간 스1 하지도 보지도 않으면서도 계속 PGR 활동하는 이유가 무엇이였냐면
아주 오래 전 이 곳에서 누군가의 글을 읽고 깊게 감동 받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깊은 감정의 울림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거든요.
댓글 쓰면서 그 때 그 글을 쓰신 분이 지금쯤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실지 궁금해졌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18/05/13 00:08
수정 아이콘
아파테이아님 글 찾아보다가 피지알까지 흘러들어왔고 여기까지 왔네요
그 다음으로는 군대에 있던 시절 책마을에서 봤다가 우연히 피지알에서도 만나게 되었던 그 분도 떠오르고.
지금은 안 보이시는 시적늑대님 글도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또 와서 글을 써주시면 좋으련만

혹시 이런 것도 저격이라고 제재대상이 되는 건 아니겠죠..?
쟤이뻐쟤이뻐
18/05/13 00:17
수정 아이콘
기이한 이야기 보는걸로 pgr 시작했습니다.
전문직이되자
18/05/13 00:37
수정 아이콘
스타 때문에 알게된 피지알에서 느꼈던 소소한 일상에 관한 글과 그에 공감해주는 감성들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게임사이트라고 불리기 애매하지만 그때는 반친구 이겨보려고 스타에 관한 정보들을 많이 얻었던 것도 떠오르네요.

저한테는 사람들 사이에는 섬이 있고 그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 시인의 시에서 말하는 섬이 피지알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Cafe_Seokguram
18/05/13 00:37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저도 최근에 1명이 생겼네요.

저도 아무 힌트 안 줄래요.
유스티스
18/05/13 01:06
수정 아이콘
전 두 분 있네요. 더 생각해보면 더 있을지도. 두 분다 과작하시는지라 올라올 때마다 허투루 읽지 말아야지 합니다!
18/05/13 01:13
수정 아이콘
전 글곰님 글 좋아해요. 그리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건 댓글로 마구마구 공감해주고 티를 내주는 분들은 전부 좋은 분들이고 특히 몰라서 질문을 하면 척척 대답해 주는 분들 좋아하고 고마워요.

이제는 최감독님이 되신 최연성 선수 너무 좋아해요. 제가 가입하고 눈팅만 할때는 대세는 다른 선수고 소위 말이 튀는 선수라 좋아한다는 표현하기가 두려웠는데 이제 추억이네요. 힘든 시기에 최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이겨내던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DavidVilla
18/05/13 01:26
수정 아이콘
이런 글도 너무 좋네요!
18/05/13 01:52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 글이네요. 저도 특별히 반가운 글쓴이들이 몇 있습니다.
러브레터
18/05/13 02:49
수정 아이콘
저도 임요환을 좋아했지 스타크래프란 게임 자체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 사이트가 제 최애 사이트 중 하나가 된것은 좋아하는 글들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좋아하던 선수들이 많았던 저는 그런 선수들에 대한 애정어린 글들에 공감하고 감동하면서 피지알이 더 좋아졌어요.
지금은 애 둘 키우느라 게임도 못하고 관심도 못 가지지만
그래도 피지알에 하루 한번 이상은 꼭 들어와 보는거 같네요.
아, 그리고 글곰님도 제가 피지알을 좋아하게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수줍게 고백합니다.
사악군
18/05/13 03:50
수정 아이콘
시적늑대님 그립습니다..최애캐(?)셨는데..ㅜㅜ

계신 분들은 언급하기 뭐하고.. 이 틈에 좋은 글 써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김성수
18/05/13 06:06
수정 아이콘
(수정됨) 역시나 저도 비슷한 감정이 있습니다. 다만 글과는 멀어서 그런지 보다 관점 자체에 빠지는 편입니다. 어그로성 문장에도 대게 부분적으로나마 일리 있음을 느끼는 편이라 쉽게 자리를 내주는 성향이긴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근저에 새겨진 사고 회로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거든요. 물론 바위를 바라보는 돌멩이의 시선일 뿐이죠. 어쨋거나 그렇게 피지알 활동하면서 현시점에서 돌이켜볼 때는 딱 두 분한테 느꼇던 것 같고 한 분은 어느샌가 떠나셨을까?하고 한 분은 현재 글 목록에서도 찾았다! 흐히

저도 그렇듯 피지알에 글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서 댓글은 일일이 남기시지 못하셔도, 글곰님을 비롯한 소중하게 글을 적어주시는 그런 귀중한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보다 소중했기 마련이죠.

아, 진짜 꾸울팁인데 쪽지로 감사한 마음 보내는 것도 큰 부담 없이 분명 괜찮을 겁니다. 지금 확인해보니 준 쪽지가 없어졌네요. ㅠㅠ 저도 이건 피쟐에서 좋은 분께 배워서 실천했습니다. 현실에서 그런 것에 낯 많이 가립니다만 인터넷상에서는 해볼만 하더군요.
18/05/13 06:54
수정 아이콘
저에게 그런 느낌을 첫번째로 주었던 분이 지금은 이곳에 안 계셔서 너무 아쉽네요.

그 이후로도 몇 분 계시고 또 그 중 몇 분은 간간이나마 글 올려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름 밝히지 않고 이러고 있으니 꼭 마니또게임하는 거 같네요. ^^
스테비아
18/05/13 07:49
수정 아이콘
과거 만우절이벤트가 생각나네요 흐흐
저는 판님 글을 아직도 기다립니다...
현직백수
18/05/13 09:05
수정 아이콘
글곰님글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잘아시겠지만 확인시켜드리고싶어서 하하하
혜우-惠雨
18/05/13 11:49
수정 아이콘
지금은 떠나간 분이계세요. 그게 너무나도 아쉬워서 처음으로 쪽지를 드렸던분인데ㅠㅠ 스쳐가는 시간이라도 직접 뵙고 싶을만큼이요. 언젠가는 돌아오시리라 믿으며 기다리는 분입니다.
어렸을때는 피지알의 자유게시판이 참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친근해졌어요. 사람냄새가 많이 느껴지거든요.
은하관제
18/05/13 12:55
수정 아이콘
문득 이 글을 보니까 종종 게임 게시판 등에 올리는 글들을 좀 더 잘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네요.
여러 게시판에 양질의 글 올려주시는 분들께 이 게시물을 빌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려 봅니다.
링크의전설
18/05/13 13:51
수정 아이콘
저는 글곰이라는분 글이 그렇게 좋던데...
세인트
18/05/14 13:37
수정 아이콘
저는 글곰이라는분 글이 그렇게 좋던데... (2)
The Seeker
19/08/08 23:13
수정 아이콘
저는 글곰이라는분 글이 그렇게 좋던데...(3)
무더니
18/05/13 14:05
수정 아이콘
제가 좋아하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18/05/13 14:16
수정 아이콘
저도 몇 분 있는데, 매일 아침 혹시 오늘은 글을 쓰셨나? 하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VrynsProgidy
18/05/13 14:24
수정 아이콘
글곰님 글 항상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진돗개
18/05/13 19:56
수정 아이콘
부럽네요, 자신의 글을 누군가가 기다려 주는 글쓴이라니..
저도 꼭 그런 글쓴이가 되고자 합니다.
메모네이드
18/05/13 20:26
수정 아이콘
따뜻한 글이네요.
피지알 자게 글쓰기 버튼이 무거운만큼 무거운 주제도 많이 올라와서 몇 번씩 읽다가 상처받고 돌아서고 했었거든요. 오랜만에 자게 들렀는데 이런 예쁜 글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행복한 밤 되세요.
혜정은준아빠
18/05/13 21:41
수정 아이콘
드래곤나이트 다음편은 도대체 언제입니꽈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엽감는새
18/05/13 23:40
수정 아이콘
피지알 두더지님... 14년전인데 아직 피지알 이용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기회되면 글 한번 써주세요.
18/05/14 09:59
수정 아이콘
저도 팬이라구요! 저도 힌트는 안드리는걸로.
18/08/28 23:44
수정 아이콘
스스로에게 반하신건 아니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957 심심해서 써보는 미스테리 쇼퍼 알바 후기 [34] empty23718 18/05/22 23718
2956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30] 글곰11575 18/05/12 11575
2955 육아를 뒤돌아보게 된 단어들 (feat 성품학교) [22] 파란무테14207 18/05/09 14207
2954 내 어린 시절 세탁소에서 [41] 글곰13801 18/05/03 13801
2953 육아 커뮤니케이션. [29] 켈로그김13482 18/05/02 13482
2951 이번 여행을 하며 지나친 장소들 [약 데이터 주의] [30] Ganelon12327 18/04/20 12327
2950 아내가 내게 해준 말. [41] 켈로그김19187 18/04/19 19187
2949 텍스트와 콘텍스트, 그리고 판단의 고단함 [34] 글곰14231 18/04/11 14231
2948 [7] '조금'의 사용법 [27] 마스터충달10687 18/04/06 10687
2947 우리나라 보건의료정책의 이해 [151] 여왕의심복32723 18/04/04 32723
2946 독일 이주시, 준비해야 할 일 [25] 타츠야15049 18/03/30 15049
2945 내가 얘기하긴 좀 그런 이야기 [41] Secundo14467 18/03/27 14467
2944 태조 왕건 알바 체험기 [24] Secundo12821 18/03/27 12821
2943 요즘 중학생들이란... [27] VrynsProgidy16819 18/03/26 16819
2942 부정적인 감정 다루기 [14] Right10757 18/03/25 10757
2941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28] 삭제됨16448 18/03/11 16448
2940 고기의 모든 것, 구이학개론 #13 [44] BibGourmand12802 18/03/10 12802
2939 일본은 왜 한반도 평화를 싫어할까? <재팬패싱>이란? [57] 키무도도19673 18/03/10 19673
2938 더 늦기 전에, 이미 늦어버린 은혜를 갚아야지. [10] 헥스밤12589 18/03/04 12589
2937 우울의 역사 [57] 삭제됨11828 18/03/02 11828
2936 억울할 때만 눈물을 흘리는 누나였다. [32] 현직백수19843 18/02/21 19843
2935 올림픽의 영향들 [50] 한종화16959 18/02/19 16959
2934 지금 갑니다, 당신의 주치의. (5) [22] 자몽쥬스8509 18/02/11 850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