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01/26 18:29:28
Name 스타슈터
Subject "요새 많이 바쁜가봐?"
집에 들어가는 길에, 집 근처 백화점을 들렀다. 어느 옷가게에서 세일을 하고 있는데, 유독 세일 마지막 날임을 강조하며 "LAST DAY!"라고 붙어있는 문구가 눈에 밟힌다.

왜 눈에 밟히냐면, 저거... 벌써 같은 곳에 일주일 넘게 붙어있다.

처음 저 문구를 봤을때는, "정말 마지막 날인가?" 싶어 옷이 당장 필요한것이 아닌데도 진지하게 살까 말까 고민해봤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계속 붙어있는 저 문구를 보니, 뭔가 묘하게 사지 않은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대체 마지막이라는 말이 뭐길래 나를 그토록 다급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우리에게 "자주 없는 기회"라는 전제가 주는 여운은 엄청난 것 같다. 평소라면 중요하지 않은 것도, 더이상 기회가 없을수 있다면 어째서인지 놓치고 싶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진짜 필요한지 아닌지는 뒷전이고, 만에 하나 아쉬움이 남을까봐,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현재의 것들을 희생하기도 한다.

물론 과거미화와 추억보정이 끝난 미래에는, "그때 놓치지 않길 잘했어"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세일품목을 사지 않고 나중에 "안사길 잘했어" 하는 경우도, 만만찮게 있다. 어디까지나 세일을 한 품목이라도 우리에게 지출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실제로 경제학에서도 이런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100달러짜리 물건을 세일로 50달러에 샀다면, 당신은 50달러를 절약한게 아닙니다...50달러를 쓴거죠."]

시간을 직접적으로 돈에 비유하는건 적절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들어 우리가 시간을 소비하는 것도 사실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퇴근 후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혹은 주말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결정할 때, 난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고 있기 보다는, 당장 남은 시간을 채울수 있는 일들중, 가장 자주 오지 않는 기회들 위주로 채우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정작 나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지는 사실 이미 뒷전이 돼어버린지 오래였다.

평일 저녁약속을 잡게 되는 것도, 딱히 그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다기보단, 그냥 딱히 할일이 없는데 그 사람들이 때마침 물어봤기 때문이고; 주말에 밖에서 돌아다닐 일정을 만드는 것도, 딱히 집에 틀어박혀있는게 싫어서가 아니라, 뭔가 주말은 혼자 보내면 안될것 같다는 막연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속이 있구나? 다음에 연락할께~"]

하루하루를 돌아보면 늘 정신없는 날들이였고, 그런 하루들의 반복 속에서 나에게 진정 관심을 주는 사람들의 연락은 늘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해야지로만 미뤄지고 있다. 하지만 막상 다음날이 오면, 또 어떤 약속 제안이 오고, 그걸 딱히 뿌리치기도 쉽지가 않다. 오늘은 몇달만에 찾아온 친구가 갑자기 밥을 먹자고 하는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것 같은게 응하지 않기도 어렵다. 내일은 아마도 동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자며 무언가를 제안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든다.

["요새 많이 바쁜가봐? 며칠째 약속이 있네?"]

생각해보면 어느새부터 늘 약속에 쫓기며 살고 있다. 딱히 중요한 일들이 아니라, 그날그날 아쉬운 일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에 쓸 시간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세일품목을 이것저것 필요없는것 까지 사들이다보니 정작 생필품을 살 돈이 부족해진 듯한 기분이다. 생필품은 뭐... 나중에 사면 되지. 딱히 지금이 행사기간도 아니고~ 라는 느낌이다.

그렇게, 명절이란 어느새 행사기간과도 같은, 그런 의미가 되었다.

생필품을 챙겨두기 위한 행사기간과도 같은 것, 늘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잘해주는 행사기간 같은 것. 명절이 다가오는 지금, 가족들에게 전화 한번 드려야지 싶으면서도, "왜 굳이 새해라서만 전화를 드려야 하지?" 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평소에 그렇게 시간을 비우겠다고 한 약속들은 왜 늘 수포로 돌아갔을까.

사람은 정말이지 늘 있어주는 것들의 중요함을 쉽게 까먹는것 같다.

명절이 다가오는 지금, 올해는 이일 저일에 무차별하게 쓰는 시간들을 조금 줄이고,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 그러면 오히려 그런 순간 하나하나가 명절 같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7-04-12 13:2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아라가키
17/01/26 18:32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무언가 잃게 되고 나서야 후회하게 되던군요
스타슈터
17/01/26 20:18
수정 아이콘
사실 늘 있다보면 익숙해지고 존재감이 오히려 없어지죠...
그러다 잃게 되면 엄청 후회하고요.
포도씨
17/01/26 18:54
수정 아이콘
예전에는 [다시 오지않을 기회!] 라며 물건을 팔았다면 요즘은 [모두가 사고있는 그 상품!]이라며 팔더군요. 우리는 너무나 주변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살아가는것 같아요. 나만이 알고있는 가치도 있고 나에게만 소중한것도 있을 터인데...
스타슈터
17/01/26 20:19
수정 아이콘
사실 두가지의 공통점이라면,
딱히 필요없는것을 사게끔 유도한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자극해서 필요 이상의 구매를 하게하는 방법이죠 ㅠㅠ
왼오른
17/01/26 21:10
수정 아이콘
회원 가입하고 처음으로 추천 해 봅니다.

just do it now!
스타슈터
17/01/27 10:20
수정 아이콘
첫추천이라니! 감사합니다~
17/01/26 22:32
수정 아이콘
아...... 괜히 찔리네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구요. ㅠㅠㅠ 연락할게요 연락 아,........
스타슈터
17/01/27 10:20
수정 아이콘
크크... 제가 그런 심정으로 글을 썼네요...
물리쟁이
17/01/27 05:16
수정 아이콘
도입부가 너무 좋네요. 살짝 가볍게 웃겼다가 본론으로 넘어가는 글 넘나 좋아요~
스타슈터
17/01/27 10:19
수정 아이콘
일상에서 소재거리가 보이면 버릇처럼 적어두고 나중에 도입부에 써먹습니다... 크크

사실 저도 시작이 딱딱한 글을 싫어해서 일상 소재거리를 모으기 시작했죠 ㅠㅠ
파랑니
17/01/27 12:52
수정 아이콘
명절에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좋은 글을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46 [역사] 몇명이나 죽었을까 / 복어 식용의 역사 [48] Fig.18726 21/09/07 8726
3345 유럽식 이름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 [53] Farce10721 20/10/09 10721
3344 내 마지막 끼니 [5] bettersuweet5989 21/09/06 5989
3343 이날치에서 그루비룸으로, 새로운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 [38] 어강됴리11976 21/09/03 11976
3342 만화가 열전(5) 청춘과 사랑의 노래, 들리나요? 응답하라 아다치 미츠루 하편 [84] 라쇼8820 21/09/02 8820
3341 DP, 슬기로운 의사생활 감상기 [23] Secundo8560 21/09/02 8560
3340 집에서 레몬을 키워 보겠습니다. [56] 영혼의공원7405 21/09/02 7405
3339 공식 설정 (Canon)의 역사 [100] Farce7814 21/08/30 7814
3338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공포 [20] 원미동사람들6140 21/08/26 6140
3337 대한민국, 최적 내정의 길은? (1) 규모의 경제와 대량 생산 [14] Cookinie6590 21/08/26 6590
3336 독일에서의 두 번째 이직 [40] 타츠야7241 21/08/23 7241
3335 차세대 EUV 공정 경쟁에 담긴 함의 [50] cheme9666 21/08/23 9666
3334 잘지내고 계시죠 [11] 걷자집앞이야9565 21/08/17 9565
3333 [역사] 라면 알고 갈래? / 인스턴트 라면의 역사 [38] Fig.19784 21/08/17 9784
3332 다른 세대는 외계인이 아닐까? [81] 깃털달린뱀13805 21/08/15 13805
3331 LTCM, 아이비리그 박사들의 불유쾌한 실패 [18] 모찌피치모찌피치9794 21/08/15 9794
3330 만화가 열전(4) XYZ 시티헌터와 만나다. 호조 츠카사 [34] 라쇼10056 21/08/15 10056
3329 피지알에 자료를 업로드해보자 총정리판 [56] 손금불산입9923 21/07/22 9923
3328 현재 미국은 무엇을 우려하는가? [106] 아리쑤리랑35613 21/08/13 35613
3327 [도서]정의 중독 - 나카노 노부코 [18] Rays5994 21/08/11 5994
3326 도서관에서 사서들은 무슨일을 하고 있나요? [85] 너랑나랑10843 21/08/10 10843
3325 술핝잔 먹고 쓰는 잃을 가치가 없는 만취글 [14] noname118813 21/08/08 8813
3324 [역사] 술 한잔 마셨습니다... 자전거 역사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 자전거의 역사 [40] Its_all_light7951 21/08/10 795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