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ESPN의 매거진에 한국의 배트 플립 (소위 빠던)에 대해 기고된 글이 있었습니다. 원문은
KBO에서는, 배트플립이 단순히 허용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배트플립은 열렬히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한국처럼 격식을 갖추고, 예의 많은 나라에서도 배트플립은 무례하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영어권 팬들을 위한 mykbo를 2002년부터 운영중인 한국계 미국인 댄 커츠가 말했습니다. "타자는 배트를 던져도, 투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게임의 일부일 뿐이에요." 커츠는 배트플립, 혹은 한국의 "빠던" ("빠따"와 "던지다"의 합성어)은, KBO에서 흔히 보여지는 장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이런일이 흔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봐요, '왜 MLB에선 이런걸 하지 않죠? 한국의 어디에서 이것은 유래되었고, 왜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라구요."
여름이 시작 될 무렵, 저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미국과 한국의 야구 기자들과 전문가들에게 문의했습니다. 대부분은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 '배트 플립은 KBO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항상 그래왔기 때문이다.' 저는 몇번씩이나 그런 관습은 몇년째 지속되어왔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아무도 왜 이런 화려한 행위가 예의가 뿌리깊이 박힌 나라에서 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해설자 대니얼 킴은, 전화통화에서 저의 질문을 몇몇 선수들에게도 물어봤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선수들은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어떤 선수가 배트플립을 했다고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대니얼 킴이 말했습니다. "(한국의) 배트플립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신은 꼭 여기서 경기가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봐야 할것 같아요." 저는 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습니다.
"KBO의 한 경기에서 보여지는 열정과 감정은... 설명하기 힘드네요. 그냥 경험 해보셔야 해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주 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났습니다.
사직 야구장
해안가의 대도시 부산은 열정적인 팬들로 유명한 롯데 자이언츠의 연고지입니다. 찜통더위가 기승하는 7월의 어느 밤, 수천명의 팬들은 고층아파트들 사이에 위치한 사직야구장에 모였습니다. 필드를 어느정도 둘러본 다음에, 저는 외야석이나 익사이팅존이 아닌, 팬들이 안테나 처럼 생긴 갈매기(롯데의 마스코트) 머리띠를 하고있는 한 섹션에 앉았습니다. 게임이 시작되자, 그들은 조용히 마른 오징어나 족발을 씹고 있었습니다. 그런 음식이나 머리띠를 제외하면, MLB의 모습과 별 다를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1회초가 끝나자, 모든것이 바뀌었습니다.
홈팀이 공격할 준비를 하는 동안, 4명의 치어리더들이 짧은 청바지와 풀 메이크업을 한채로 응원단상에 올라왔습니다. 마치 K팝 스타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작지만 활발한 사내가, (나중에 배웠는데 "응원단장" 이라고 합니다) 단상 위 앞에 올라왔습니다. 누군가가 북을 치자, 응원단장은 마이크를 들어 올리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거칠게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자이언츠의 1번타자, 손아섭이 덕아웃에서 나오자, 큰 스피커가 노래를 힘차게 틀기 시작했습니다. 제 주변의 모두가 일어섰고, 똑같은 율동과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이언츠 손아섭 승리를 위해! 오오!"
손아섭의 타석이 끝나자, 관중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몇초 뒤, 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타자, 새로운 노래, 새로운 춤.
"롯데 자이언츠 안타 김문호! 오 오 오 오 오"
경기 내내, 팬들은 다양한 종류의 안무를 선보였습니다. 몇몇은 롯데유니폼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수염많은 한 미국인의 리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캐리 마허(Kerry Maher)이고, 몇년전에 한 대학교에서 교수로 부산에 온 이후로 모든 자이언츠의 경기를 직관했습니다. 지방 유명인사가 된 셈입니다. "그들은 절 롯데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마허씨가 말했습니다. "어딜 가던, 누군가가 절 알아보죠."
엔터테인먼트는 끊임없었습니다. 여고생들이 "자이언츠 아이돌"이라는 댄스 경연대회에서 춤을 춘 뒤, LED 스타디움의 조명이 꺼지고 모두가 핸드폰을 들어오리며 조명을 깜빡였습니다. 나중에는, 직원들이 수천개의 비닐봉지를 나눠주자 팬들이 그것을 불어서 모자인 마냥 머리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본다면, 바다의 부표같이 보여졌을것입니다. 경기가 끝나자, 팬들은 쓰고 있던 봉투를 풀어서 쓰레기를 수거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제 통역사가 말하길, 몇년 전에 사직야구장에서 한 취객이 파울 폴에 올라서서 내려오길 거부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팀은 그 이후로 주류 반입이 금지되었지만, 팬들은 MLB의 팬들에 비해 더 시끄러워졌고, 더 젊어졌습니다. 20대 위주의 사람들, 많은 여자 관객이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앉아있던 섹션은, 경기내내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기립해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전 말합니다. MLB가 오페라라면, KBO는 락앤롤이라고." 마허씨가 말했습니다.
경기 초, LMFAO의 "Shots"가 울러퍼집니다. 바톨로 콜론보다 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슬러거, 최준석의 등장 음악이였습니다. 관중들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자, 그는 타석에 들어서서 방망이를 머리위로 세우더니, 3루라인으로 평범한 땅볼타구를 쳐냅니다.
그는 배트플립을 했습니다.
최준석이 1루에서 아웃되고 느리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동안, 저는 그가 당황했는지를 지켜봤습니다.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다음 저는 제 주변의 관중들을 쳐다봤습니다. 아무도 저걸 못봤단 말야?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몇 타석이 지나가고, 3회에 또 다시 일이 벌어졌습니다. 원정팀 기아 타이거즈의 외야수 김호령이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이 되고... 배트플립을 했습니다. 기아의 슬러거 나지완이 투런홈런을 칠때, 배트를 던졌습니다. 그의 동료, 김주찬도 2루타를 칠때 배트를 던졌습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배트는 계속해서 럭비공이 기계에서 튀어나오듯 대기타석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날아갔습니다. 투수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저는 그날 경기가 시작되기 몇 시간전 구장을 방문했고, 덕아웃에서 한 미국인을 만났습니다. (KBO팀들은 3명의 용병을 허용합니다) 조쉬 린드블럼은 머쓱하고 사글사글한, 인디아나에서 온 29살 용병 투수입니다. 2008년 다저스로부터 2라운드에서 지명되고, 미국에서 몇년간 메이저리그 생활을 하다 작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린드블럼과 저는 라커룸 밖 계단에 앉아, 여자합창단들의 연습소리를 들으며 소리쳤습니다. 배트플립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가 투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누군가가 빠던을 했고, 저는 "저게 뭐야?" 라고 생각했죠." 린드블럼이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저희에게 그런 일이 있을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흥분하지 말고, 화내지도 마. 여기선 다 그렇게 하는거야'" 린드블럼은 왜 한국 타자들이 빠던을 자주 하고, 왜 누군가는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전 이제 신경쓰지도 않아요." 그가 말했습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요, 저는 이제, '그래서 뭐?' 이렇게 생각하죠."
이틀동안, 저는 자이언츠와 타이거즈의 선수들과 인터뷰 했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해외 미디어와 인터뷰한 경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타이거즈의 벤치코치 조계현은 전직 KBO출신 투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저에게 배트플립이 신경에 쓰인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타자들이 일부러 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거에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들은 빠던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공을 맞추는데 신경을 다 쓰지."
제가 몇몇 한국 선수들은 타격 후 몇초 뒤에 자신들의 타격을 과시하는 마냥 배트플립을 하는걸 봤다고 얘기하자, 조계현은 코를 찡그렸습니다. "버릇이에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 버릇은) 초등학교때부터 자라왔거든요."
몇몇 선수들이 타격 연습을 하는 동안(신기하게도, 아무도 배트플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덕아웃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이거즈의 노장중 한명인 김주찬이 물병을 들고와서 앉았습니다. 제가 김주찬의 빠던을 몇개 봤다고 얘기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드렸습니다. "그냥 그 순간의 일이에요." 그가 말해했습니다. "저는 제가 빠던을 한다는 사실도 몰라요." 그는 그의 동료인 이범호를 인터뷰 해보라고 말했습니다.
몇 분뒤, 둥글둥글하고 따듯한 미소를 가진 이범호가 벤치에 나타났습니다. 제가 배트플립에 대해서 얘기하자, 그의 웃음기는 사라졌습니다. "전 제가 하고 있다는걸 인지하지 못해요." 이범호가 말했습니다. 잠깐 멈춰서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시안 선수들은 스윙할때 풀파워로 스윙을 해야 하거든요" 그는 마임으로 큰 스윙을 한 뒤, 그의 손목이 뒤틀리는 모션을 보여줬습니다. "그때 방망이가 나가는거죠." (한 달 뒤, 댄 커츠는 저에게 이범호가 볼넷으로 나간 뒤 부주의하게 배트플립으로 주심을 치는 동영상을 트윗해줬습니다.)
저는 이범호에게 그의 배트플립이 춤추고 구호를 외치는 팬들을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범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신경을 안씁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그는 저에게 본인은 빠던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슬러거, 최준석이야말로 최고의 배트플립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준석이가 제일 멀리 날려요. 온 몸을 사용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타격 연습 후 땀에 흥건히 젖어있는 최준석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가 타월로 얼굴을 닦는동안, 저는 몇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팬들에게 특별한 것들을 하나요?"
"아뇨."
"배트플립을 할때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일부러 하는건 아니라,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해외의 사람들이 당신의 배트플립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몰랐습니다."
몇 분 후에, 제 통역사는 최준석에게 인터뷰에 응해준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했습니다. 우리 모두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저는 야구장을 나와 라이언 사도스키와 만났습니다. LA 출신의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잠깐 활동 후 롯데에서 3년을 뛰었고, 현재는 롯데의 스카우트로 있습니다. 찜닭을 앞에 두고, 사도스키는 자신은 한국 야구의 환희를 즐긴다고 말했습니다. 선수들은 단순히 안타를 치고 환호할 뿐 아니라, 좋은 수비플레이에도 세레모니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전혀 다른 문화에요." 사도스키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야구선수로서 성공의 기쁨을 드러내지 않아왔다는걸 발견했어요. 야구니까요. 본인의 성공을 기뻐하는걸 보여줘선 안되니까요. 제가 여기서 배운것들을, 미국에 있는 어린 야구 선수들에게 가르쳐주고싶어요."
저는 그동안의 저의 인터뷰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선수들이, 보여지는 증거와는 다르게, 빠던은 고의로 그런것도 아니며 즐기지도 않는다라고 얘기한걸 설명했습니다. 사도스키는 놀라보이진 않았습니다.
"만약에 그걸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리포터에게 인정할것 같진 않네요." 그가 말했습니다.
한강
강동 리틀야구단은 서울의 천만 인구를 절반으로 가르는 한강 옆에 위치해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하는 어느 오후, 선수들은 필드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어머니들은 텐트 밑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역대급 더위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하루 3시간, 1주일 6회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서울의 야구 명문 고등학교에서 경기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2년 전, 댄 커츠는 펜실베니아 주 윌리엄스포트에서 열린 리틀리그 월드시리즈에서 한국 선수들이 배트플립을 하는 장면을 모아둔 영상을 기재했습니다. 강동 리틀야구단의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자, 저는 키가 크고 빼빼마른, 안경 낀 오현석이라는 아이를 불렀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선수는 빠던을 잘하는 내야수, 두산 베어스의 오재원이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전 현석이가 그의 아이돌들을 따라해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열정적으로 끄덕이더니, 곧이어 KBO의 빠던을 따라했습니다. 어깨에 방망이를 올리더니, 스윙 자세 몇초 후, 마치 원하지 않은 우편물을 던지는 마냥 방망이를 내던졌습니다. "기분 좋아요." 뒤에서 낄낄되는 동료들을 애써 무시하며, 그가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재빠르게 다이아몬드로 달려간 뒤, 저는 아이들의 코치 김건우씨를 만났습니다. 전직 KBO 투수출신인 그에게 배트플립에 대해서 얘기하자, 그는 웃었습니다. "전염성이 있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일부러 하는것 같아요. 팬 서비스같은거죠."
저는 제가 인터뷰를 한 선수들은 그렇게 인정을 하지 않았다고 얘기하자, 그는 낄낄 웃었습니다. "저라도 인정 안할텐데요!"
아이들이 캐치볼을 하는걸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 53세의 김건우씨는 아마추어 야구는 한국에서 언제나 진지한 사업이라고 얘기했습니다. KBO가 태어나기 전, 고교야구는 많은 관중을 동원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사실 이 나라는 1904년 미국 선교단이 YMCA에서 야구를 전파하기 시작한 후로부터, 이 스포츠에 대해 미쳐있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력은 아무래도 일본에서부터 받았겠죠." 그가 말했습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은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전파하였고, 야구는 재빠르게 농구와 축구를 넘어 국가의 대표 스포츠가 되었습니다. 조셉 리브스의 "아시아 야구의 역사"에 따르면, 식민지 통치자들은 "한국 어린이들을 일본식으로 주입시키기 위해" 국사나 한국어 같은 수업을 폐지시키고, 대신 야구같은 운동을 권장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리브스가 말하길, 스포츠는 문화적 탄압의 용도로도 사용되었지만, 어린 한국인에게는 "그들의 통치자들을 달래면서 도전시키는" 배출구의 역할도 주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야구는 흥했지만, KBO는 1982년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 쿠데타로 일어난 새로운 정부는, 리브스에 따르면, "친근하고 관대한 관료의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라고 합니다. 같은 해 말, 서울의 잠실경기장에서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일본과 토너먼트에서 맞붙었습니다. 한국의 한 선수가 폴짝 뛰어 번트, 지금까지도 알려진 "개구리 번트"를 통해 경기를 동점으로 만든 후, 역전을 만들어 낸 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게 터닝포인트였던거죠." 김건우 코치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야구는 여전히 과거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야구의 전통과 그림자 속에 살았습니다. 많은 코치들과 베테랑 선수들은 일본에서 건너왔고, 결과적으로, KBO는 컨택트, 속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복학습을 강조하는 일본 리그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김건우씨는 그런 탄압의 유산이 막 싹트기 시작하는 KBO리그에 큰 짐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옛날엔,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들을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에게 뭐든 할수 있다고 생각 한거죠." 그가 말했습니다. "초창기 한국의 야구 스타일은, 그런 부분에서 채용되었습니다." KBO의 초창기, 선수들은 오래 일하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코치들에게 체벌을 당하는 암묵적인 위험에도 따라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계급방식은, 감독이 하라고하면 하는겁니다." 그거 말했습니다.
몇년동안, 심지어 리그의 위상과 사이즈가 커지더라도 독재적 문화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1990년대, 김 코치에 말에 따르면, "융화되길 거부한" 한 신인 선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활기넘치고 용감한 이 선수는 끝 없는 스웨거와 함께 경기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최다 홈런 기록을 깨부셨고,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홈런을 칠때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이전까지는 한번도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마치 만세를 외치는듯한 제스쳐로 두 팔을 번쩍 들더니, 1루 베이스라인으로 배트를 던진것입니다.
김건우가 말해준 그의 이름은, 양준혁이였습니다. "그가 껍질을 부쉈어요."
강남
양준혁 야구재단에 도착했을때, 저는 분명히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택시는 저를 강남구의 한복판, 별 설명도 없는 건물단지 구역에 내려줬습니다. 1층에는 노래방이 있고, 그 옆 골목에는 어르신들이 흡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구선수 이름과 관련된 어떤 사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 입구를 발견했고, 곧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후, 저는 작고 비좁은 한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크고 붉은 광대를 가진 한 남자가 옆문에서 나타났습니다.
"미안합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변변치 않은 곳이에요."
반바지를 입은 양준혁은, 삼성라이온즈 시절의 기념품들로 가득찬 작은 방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피라미드처럼 진열된 수많은 야구공들과 카메라에 보여질 많은 넥타이들 사이로(그는 현재 해설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수트를 입은채 새끼 사자를 안고있는 그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또 그의 재단에서 뛰고 있는, 저소득층과 탈북소년들을 위한 선수들의 사진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명함을 건내주었습니다. 명함의 뒷면에는 몇가지 기록들이 적혀있었습니다. 통산 타율 2위(.316), 통산 득점 및 타점 1위, 타격왕 4회.
양준혁은 삼성라이온즈의 연고지 대구에서 야구를 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빼빼한 사내였는데, 고등학교때 매일 밤 치킨 한마리씩을 해치우며 몸집을 불렸다고 했습니다. 그가 라이언즈에게 지명된 무렵, 그는 MLB 선수들의 테이프를 보기 시작했고, 스윙을 조금씩 바꿔볼까라는 영감이 생겼습니다. "코치들은 어떤 자세로 서서 몸을 낮춰서 컨택하라고 가르쳤어요. 저는 오픈 스탠스에 밀어서 올려치는 자세였죠. 많은 선수들과 해설자들은 제 폼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양준혁이 말하길, 그의 자세는 "개폼"으로 보여졌다고 했습니다. "개폼"이란, 정상이 아닌 모습을 일컫는 한국의 은어입니다.
양준혁이 1993년 KBO에 나타났을때, 리그는 여전히 엄격함과 겸손함을 강조하는 일본 야구를 롤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준혁은 그 기대에 저항했습니다. 그는 귀걸이를 하고 클럽하우스에 나타나 코치들에게 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그들의 상대팀 팬들 앞에서 뽐내면서 세레모니를 하자 라면국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튀어나온 못은 두들겨 맞는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야구역사를 가르치는 토마스 세인트 존이 말했습니다. "양준혁은 튀어나온 못이 된것에 행복해 했습니다."
세인트 존은 1990년대 한 영자신문의 한국야구 섹션을 담당했습니다. 양준혁이 스타로 뜰 무렵입니다. "(그 무렵) 홈런을 치면, 선수는 돌같은 표정으로 베이스를 돌고 홈으로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대신에, 양준혁은 배트플립을 하고, 팔을 "하늘 위로 높이, 마치 NFL의 심판이 터치다운 콜을 하듯" 높이 들었습니다. 감독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양준혁의 성공은 - 그해 그는 신인왕을 차지합니다 - 그를 비난으로 부터 격리시켰습니다.
"양준혁은 잘했어요. 자신도 자기가 잘하는걸 알고 있었어요." 세인트 존이 말했습니다. "더 좋은 단어가 생각이 안나는데, 그는 "x까" 라고 말하는듯한 스타일이 있었어요."
양준혁에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묻자, 그는 씨익 웃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잘못된 걸 인정하지 않아요." 그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목표를 달성했기때문에, 제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배트플립을 했지만, 다른 이들이 곧 그를 따랐습니다. 1990년대 후반, 그가 말하길, 적어도 10명의 타자들이 똑같이 따라했다고 합니다. "숫자를 딱히 세어보진 않았어요. 나중에 뒤돌아 봐서야, 그랬구나라는걸 알았죠. 하지만 그 당시에 저에게 딱히 와닿진 않았습니다."
2000년대엔, 한국야구가 일본야구의 잔재를 떠나 서서히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선수들은 그들이 감정표현을 하는데 좀더 편해지고, 단타 위주의 게임이 파워히팅으로 변화했다고 얘기합니다. "연습하는걸 보면, 한국 선수들은 본인들이 원하는걸 자유롭게 할수 있어요. 반대로 일본의 경우는, 모두 지정된대로이지만요." 삼성 라이언즈의 슬러거이자 일본에서도 몇 년 뛴 경험이 있는 이승엽이 말했습니다.
국제대회에서의 성공도 뒤따랐습니다. 2000년 올림픽에서 동메달, 2006년 WBC에서 4강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은, 마침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결승에서 쿠바를 꺾으며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그 우승부터, KBO의 유명세는 급증하기 시작합니다. 그해 리그 총 관객수는 830만명으로, 전 해에 비해 14%나 오른 수치입니다. (비교를 위해 얘기하자면, MLB의 작년 총 관객수는 약 7380만명으로, 그 전해보다 1% 감소한 수치입니다.)
저는 양준혁의 홈런기록을 깨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뛰었던 이승엽에게 왜 올림픽에서의 성공이 나라에게 큰 의미가 있었냐고 물어봤습니다. "제일 우선, 야구에서 나온 첫번째 금메달이였거든요." 이승엽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준결승에서 일본을 꺾었기 때문이죠."
잠실 야구장
양준혁과의 대화 이후, 저는 마침내 제가 찾던 사람(주: 빠던의 시초)을 만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몇가지 새로운 질문도 남겨뒀습니다. 만약 빠던의 기원이 그런 자랑스러운 역사와 얽힌 행동이라면, 왜 선수들은 그것을 말하는것에 주저하는 걸까요? 몇몇 사람들은 저에게 홍성흔이라는 선수와 이야기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베테랑 파워타자입니다. "그의 성격을 보면, 이해할 거에요." 세인트 존이 말했습니다.
홍성흔은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두산베어스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잠실야구장으로 입장하는 길에, 저는 게이트 근처 흡연구역에서 한 두산 팬을 만났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이 사람은 야구장에 오기위해 일을 빼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저에게 작년 한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나온 한 영상을 보라고 했습니다. 선수중 한명인 오재원이, 어마어마한 배트 플립을 날렸습니다. 제가 그 배트 플립이 몬스터 홈런을 축하하기 위해서 나온거냐고 물었습니다. "펜스앞에서 잡혔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혹시 누가 저 플라이로 득점을 한건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 그럼 왜 저게 대단한 순간인거죠?
"그 배트플립은 사람들을 열광시켰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한국은 그 경기에서 4:3으로 승리했습니다.
홍성흔과 저는 스타디움의 제일 내부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Big Popper"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구리빛색으로 염색하였습니다. 우리가 자리에서 앉자, 한명의 외국인 선수가 지나갔고, 홍성흔은 우렁차게 말했습니다. "와썹?"
다른 동료들과 달리, 홍성흔은 빠던에 대해 얘기하는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팬들이 (빠던을) 사랑한다는걸 부정하긴 힘들죠." 그가 말했습니다. "선수들은 그들을 위해서 표현하는거에요. 빠던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홍성흔은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위해 뛰었는데, 당시 상대방 타자인 김재현이 홈런 이후에 배트플립을 했었습니다. 저는 그런 세레모니가 그를 화나게했냐고 묻자, 그는 싱긋 웃었습니다. "저는 김재현 선수가 정말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마치 폭발하는것 같았다니까요! 김재현 선수는 그의 에너지를 보여줬고, 팬들은 그걸 느꼈을거에요."
홍성흔은 왜 배트플립이 이곳에서 수용됐는지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해줬습니다. 첫째로, 이런 배트플립을 개척한 선수는 양준혁이였습니다. 그의 업적이 그런 기이함을 합리화해준, 리빙 레전드였죠. 두번째로는, 한국 선수들은 필드에서 다른 선수들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전 모든 10개구단에 친구가 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KBO가 그들 스스로의 불문율이 있고, 그 대부분은 한국의 가치를 존중하는 가운데(예를들어, 만약 투수가 선배타자를 맞추면, 투수는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 불문율이 폭력적인 응징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최근에 MLB에서 금지된, 내야수를 향한 태클도 이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벤치 클리어링도 흔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의 기자인 유지호씨에 따르면 서울에는 고교야구팀이 몇개 되지 않기 때문에, KBO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고 합니다. "서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거죠." 그가 말했습니다. 몇년전에, 롯데 자이언츠의 용병선수 한명이 바디슬램으로 포수를 쓰러트렸을때, 팬들은 간담이 서늘해 했습니다.
몇몇 선수들이 말하길 KBO에서 용병제도를 도입한 1990년대 후반 이전엔, 배트플립이 그곳에서는 절대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는것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배트 플립"이라는 단어 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배트 플립'이라는 걸 용병선수들이 와서 지적하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양준혁이 말했습니다. "투수들이 저를 맞출려고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KBO에서 제가 만난 모든 선수들은 MLB에서 배트플립이 금기시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그것이 "불법"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야구는 굉장히 배트플립에 대해서 민감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SK와이번스의 건장한 체격과 훌륭한 배트플립 스킬을 가진 포수, 이재원이 말했습니다. "바로 보복하더라구요." 제가 많은 미국의 사람들은은 사실 배트플립을 사랑한다고 얘기하자, 그는 놀랐습니다. "팬들은 안 좋아하는걸로 아는데요."
처음에는 이런 한국의 배트플립이 미국에서 밈이되고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고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댄 커츠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언제부터 이런 영상이 퍼지기 시작했냐고 물어보자, 그는 2013년도에 나온 두가지 클립을 알려줬습니다. 하나는 거대한 슬러거 최준석이 엄청난 파울타구를 날린 후에 날린 배트플립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 그의 팀메이트인 전준우가 워닝트랙에서 잡히는 플라이볼을 쳤을때 나온 배트플립이였습니다. 언급된 영상들을 온라인에서 검색해보았습니다:
한국으로부터, 역대 최악의 배트플립
한국의 야구선수들은 파울볼 날린것에도 세레모니를 한다
야구에서의 배트플립은 한국에서 재밌는 유행거리가 되고있다.
이런 이야기는 미국으로부터 퍼져나갔고, 그리고 다시 KBO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의 선수들은 그런 빠던이 혹시나 미국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는지, 더 나아가 우리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홍성흔이 말했습니다. "언론이 그것을 이슈화 한것이죠."
명동
박찬호는 서울을 지내가던 참이였고, 화려한 동네, 명동에 있는 한 밀랍 인형관에서 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어린이들에게 강연을 하기로 예정이 되어있었습니다. 인형관 깊숙히, 많은 한국의 스포츠 영웅들 가운데, 얼굴을 찡그리며 어깨를 뻗는,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전설적인 투수의 밀랍 인형이 있었습니다. 진짜 박찬호가 이벤트에 나타났고, 그는 포르쉐 폴로셔츠를 입고 비싼 비누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는 다음날에 한국 군대 훈련캠프를 체험하는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을 찍기위해 떠날 예정이였습니다.
43세의 박찬호는, 양준혁과 같은 시기에 야구를 시작했지만, KBO에 입단하는 대신 그는 다저스와 계약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뛴 최초의 한국인 선수인 그는, MLB에서의 적응이 처음엔 힘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처음에 그가 심판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자 팀원들은 의아해했고, 그가 샤워도중에 팀원에게 비누 좀 줄수 없겠냐고 하자(한국에서는 흔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꾸중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강도높은 훈련을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몇시간씩 일찍 클럽하우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아마추어들은 엄청 열심히 훈련해요. 근데 미국에 가니까... 다들 너무 게을러요!" 박찬호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2012년 박찬호가 마지막으로 KBO에서 한 시즌을 보낼무렵엔, 그 역시 미국의 야구에 융화가 되어있었고, 배트플립과 같은 몇몇 한국의 부분들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 선수들은 조금더 예의를 갖춰야 할것 같아요." 그가 말했습니다. "타자는 투수를 공경하고, 투수는 타자를 공경하고. 승자는 패자에게 예를 갖추며, 패자는 승자에게 예를 갖추는거죠.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그게 있단말이에요, 아시죠?"
미국에서의 17년간의 선수 생활 이후, 박찬호는 한국의 세레모니 위주의 문화에 불편해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한화이글스에서 경기할때, 저는 제 타자들과 팀메이트들에게 말했어요. '진정하자. 우린 집중하지 않고 있다. 우린 여기에 쇼를 위해 있는게 아니다. 우린 이기기 위해 있는거다.'"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한 다른 선수들도 박찬호의 배트플립에 대한 의견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6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현 해설자 서재응은, 처음엔 그런것들에 대해 당혹해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에 가기전엔, 그런 일이 저에겐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근데 돌아오니까, 너무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박찬호처럼, 서재응 역시 KBO를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스타 선수들이 다른 방법으로 미국에 진출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몇년간 KBO에서 활약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였습니다. 파워가 넘치는 강정호는 2015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계약했고, 그 후 오승환, 박병호, 김현수와 이대호가 뒤따랐습니다. 유지호(연합뉴스 기자)씨가 말하길, KBO 타자들의 향상된 파워와 강정호의 뛰어난 루키시즌이 다른 타자들을 위해 길을 터줬다고 이야기 합니다. "강정호가 한국 타자들에 대한 시선을 크게 열어줬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유기자가 말하길) 이제 많은 선수들이 MLB로 진출하고 싶어하합니다. 그러나 선수들이 그렇게 태평양을 건널때, 그들의 오래된 방식 몇가지를 버리고 갑니다. 미네소타 트윈즈와 작년에 계약한 박병호는, 일치감치 높이 나는 빠던으로 댄의 사이트에서도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왔을때, 그는 그런 자신의 버릇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강정호도 마찬가지구요. 롯데자이언츠의 3루수이자 미국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받고 있는 황재균은, 작년부터 배트플립을 끊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들이 저에게 경고하더라구요. '너가 메이저에서 그걸 하면, 니 머리에 빈볼을 맞을꺼야' 라구요." 황재균이 말했습니다.
몇몇 한국 선수들은, 7월에 마이너로 강등당한 박병호의 부진이, 어쩌면 그의 그런 변화된 모습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의식적으로 그걸 안해야지 생각하고있고, 그게 그 스윙을 걸리적거리게 하는것 같아요." 홍성흔이 말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스트로크를 하던 선수가 조심스레,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는 마냥 배트를 내려놓는걸 흉내냈습니다. "너무 신경을 쓰면, 자신감을 빨아드린다니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배트플립의 강도가 딱히 약해진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은 그런 행위가 몇년간 낙인찍혀왔다는 사실에는 동의했습니다. 심지어 지난 봄, 한 지역방송에서는 이것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전직선수는 그런 풍습을 옹호했습니다만, 다른 KBO의 베테랑은 배트 플립에 반대하는 스탠스를 보였습니다. 배트를 내던질때, "적당한 에티켓"을 침범한다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그걸 안한다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가 물었습니다.
수원 종합 운동장
수원의 KT 위즈의 경기를 보러간 날, 35도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스탠드 중앙에 떼를지어 판초나 서핑옷을 입고 있었고, 그들의 핸드폰은 플라스틱 케이스에 넣어둔체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1회 중간쯤에, 저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치어리더 단상에 슈퍼마리오에서 나올법한 파이프가 하늘을 찌를듯 높게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 파이프가 6미터 가량 높게 올라섰을까, 위즈의 응원단장이 나타나더니, 거대한 호스를 들어 팬들에게 물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응원단장 아래 6개의 물대포가 힘차게 물줄기를 쏴댔고, 그런 물줄기는 관중석 상단까지 닿고 있었습니다.
15분정도 지났을까, 저는 외야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humanweapo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한 백인을 발견했습니다. 더 돌아보자 저는 그곳에 미국인들이 굉장히 많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샌달차림의, 혹은 전투복 차림의 많은 젊은 남성과 여성은, 근처 미군부대 출신의 병사들이였습니다. 저는 플로리다에서 온 18살 케이시를 만났습니다. 입대전엔 단 한번도 해외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금발의 아이였습니다. 그는 MLB의 경기는 거의 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 미국 야구는 좀 지루한것 같아요." 그가 말했습니다. 갑자기, 그가 그의 손을 올리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노, 노, 노!"
제가 고개를 돌리자, 한국인 어린이가 저희에게 물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제 여행의 시작무렵, KBO에서 나온 한 스태프가 자신은 MLB의 경기에 가봤고 마치 절을 방문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칭찬의 의미로 이야기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9회말 참패속에서도 소리치고 춤을추며 젖어있는 팬들을 보자, 저는 그것이야 말로 어쩌면 중요한 관점으로 본 설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필드는 숭배의 장소가 아니라, 축제의 장소라고 말이죠. "팬들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한걸 들었어요. '야구장에 오면, 뭔가 뚫리는 느낌이 든다' 라고요." 홍성흔이 말했습니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소리를 치면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죠."
세인트 존이 말하길, 한국의 야구장은 자기표현에 있어서 안전한 장소가 되었고, 한때 일본으로부터의 억압의 상징이였던 야구는, 국가적인 자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행동하는 방법, 배트플립, 팬들이 경기에 몰입하는 방식... 한때 가지고 있었던 복잡함은 사라졌어요." 그가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큰 감정표출입니다."
최근 몇년간, 한국의 야구는 더욱 더 MLB화 되고 있습니다. 몇몇 선수들과 코치들은 야구가 더 나은 변화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스트렝스에 더 큰 중점을 둬서 훈련하기 시작하고, 기존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국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배움을 받지만, 그 반대의 부분도 역시 옳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MLB에서는 팬들을 잃고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그들을 지키기 위한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는것 처럼 보입니다." 16년간 MLB에서 뛰고, 전직 밀워키 브루워스 감독 출신이자, 롯데자이언츠에서 3년을 지도한 제리 로이스터가 말했습니다. "한국에선, 모든 것들이 팬들을 위해서에요."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저는 고척 스카이돔으로 와서 대니얼 킴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한국에 오지 않으면 빠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얘기했던 그 해설자 입니다. 부엉이같은 안경과 조끼, 넥타이를 맨 대니얼 킴이 저를 시원하고 인공조명이 있는 스타디움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초여름에 했던 대화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배트플립 하나만 놓고본다면, 이해하기 힘들꺼에요." 그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야구장에 와서 풀 게임을 본다면, 팬으로서 굉장히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그런 에너지를 먹고 사는거죠. 그렇게 자연적인 현상이 되는겁니다."
스탠드에 앉은 뒤에, 대니얼 김은 저에게 한 비유를 제시했습니다. 90년대 말, 전세계적으로 확장하고 있던 월마트가 한국에 들어와 몇 곳에 메가스토어를 열었습니다. 8년 뒤, 그들은 포기하고 한국을 떠났죠. 그 지역의 트렌드를 잘 읽지 못한 실패때문이였습니다. "단순히 미국에선 통한다고 다른 세계에서도 통용되는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것이 언젠가는 바뀔것인가 물어봤습니다. 빠른 세계화 속에,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의 야구가 하나의 스포츠로 통합되어, 같은 규칙과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될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질 않길 바래요." 대니얼 킴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많은것들은 진화하고, 변화하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어울리는 것을 따라야 해요." 그는 배트플립이 이런 밸런스의 전형적인 예라고 얘기합니다.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진, 두들겨 맞기를 거부하는 튀어나온 못처럼 말이죠.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2-01 18:3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