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10/16 12:20:45
Name 순욱
Subject 면도를 잘하고 싶다

아직 면도를 하는게 익숙하지 않다. 면도를 시작한 것은 내가 25살이 된 올해 여름이었다. 면도를 시작하면서 내가 면도에 관해서 저주받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면도를 시작한지 몇달이 지났지만, 면도를 하고 나면 으레 잔수염이 남아있거나 면도날에 베어 얻어 붉은 피를 보곤 한다.  

나는 25살에 시작한 서투른 면도 같은 사람이다. 많은 것이 늦고 서툴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것도, 대학에 입학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남들보다 늦고 많이 서툴렀다. 그 중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서툰것은 아마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존경하는 사람을 적는 곳에 나는 에디슨과 장열실과 슈바이처를 적곤 했다. 아버지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라고 존경한다는 친구들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싫어하거나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의 삶은 내가 정말로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다. 그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으며, 번듯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반대로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달리 공부도 못한편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반장도 놓치지 않았었다. 가족중에 유달리 하얀편이기도 했기때문에 어머니는 종종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 배 아프고 낳았지만, 내 새끼 아닌것 같다. 어떻게 우리를 저렇게 안닮았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의 말씀처럼 나는 부모님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닮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보다 더 성공하고 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은 바로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동생이 태어났다며 병원에 가자고 두툼한 손으로 세살이 된 꼬맹이인 나를 이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세상의 모든것을 막아설 수 있을만큼의 큼지막한 등이었다.

아버지만큼 커다란 등을 내가 가지게 된것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키를 따라잡고 집안에서 가장 키가 크고 넓은 등을 가진 남자가 되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친구네 아버지의 차는 외제차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한의사며, 다른 친구는 50평의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하여튼, 나는 세상으로부터 그런것들을 더 많이 배웠다. 세상으로 배운 그런것들이 아버지의 등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재수를 실패하고 삼수를 하려고 마음 먹었던 것은 어느 해 겨울이었다. 아버지가 나의 방으로 찾아 온 것도 그때였다. 아버지가 꺼낸 이야기는 뜻 밖이었다.

"준섭아. 인생에서 항상 제일 좋은 자리에서 출발 할 필요는 없다. 제일 좋은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너의인생은 뒤쳐진게 아니며, 설사 뒤쳐졌다 하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따라잡으면 되는 일이다"

"정답"이었다. 내가 찾던 정답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나를 가르치려 한적도 막아선적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나의 결정을 따르고 존중 해 주었다. 그가 나를 막아선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찾지 못한 나의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내가 우습게 보던 아버지보다도 한참 모자란 아들이었다. 물리적으로 아버지보다 더 큰 등을 가지고,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나는 그의 등 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첫 기억을 시작하던 세살의 꼬맹이 그대로였다. 그 해 겨울에도 말이다.

이후로, 나는 실패한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시대의 거센 바람에 맞서 가족을 지키다가 만신창이가 된 그를 이해하는데 나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서야 나는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지, 아직 아버지를 이해하는데 서투르다.  

오늘은 오랜만에 면도를 한다. 이번에야 말로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진다. 목욕재개, 심기일전, 임전무퇴, 배수의 진을 치고 나는 면도를 시작한다. 새로 산 면도크림 때문인지 어느때보다 면도기가 더 매끄럽게 움직인다. 쓰윽 쓰윽 몇번의 면도질 끝에 면도가 거의 끝났다. 편의점에서 산 오중날 면도기가 마지막 수염을 베는 순간, 어김없이 또 상처를 입었다. 오늘도 실패를 했다.

여전히 나는 많은 것이 늦고 서투르다. 면도를 하는것도, 사랑하는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것도,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도 늦고 서툴르다. 언젠가는 늦고 서투른 것들을 상처없이 깨끗하게 해내고 싶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18 04:46)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나도가끔은...
11/10/16 12:29
수정 아이콘
훌륭한 아버님이시군요. 그럼에도 존경한다고 말씀하시지 못하신 이유는 아마도 한번만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준섭님께서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함께 인생을 바라보고 이끌어주는 더 훌륭한 아버지가되실겁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생각을...부끄럽게도 전 못했거든요.
3시26분
11/10/16 12:29
수정 아이콘
아...글 정말 좋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아라리
11/10/16 12:32
수정 아이콘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생각도 합니다.
내가 나이를 먹고 가정을 꾸려 처자식이 있을 때,
과연 지금의 우리 아버지 만큼 '열심히' 살 수 있을지.

그리고 마지막엔 언제나
힘들다, 로 결론 나네요. 흑 ㅠ
아부지 화이팅~
XellOsisM
11/10/16 12:36
수정 아이콘
방금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 뭉클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SummerSnow
11/10/16 12: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정을 지키느라 온몸이 까맣게 되신 아버지를 이해한지 몇년되지 않았습니다.
어릴때는 '우리 부모님같이 되지 않을꺼야!'라고 항상 다짐을 했지만,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니 우리 부모님이 왜 그러셨는지,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아버지.
11/10/16 13:14
수정 아이콘
항상 제가 고민을 안고 있으면, 아버지한테 말씀 드리지 않아도 한 마디 해주시며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즘 내가 가는 길이 맞나에 대해 정말 누구도 답을 주지 않고 혼자 방황했는데, 어제 아버지께서 답을 또 주시더군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승리의기쁨이
11/10/16 13:26
수정 아이콘
글쓴님의 글에서 묻어나오는 글은 따뜻하시네요
글쓴님의 가치관이 좋으신거 같으신데 그 영향은 좋은 부모님 때문인거 같으시네요
사랑한다는말 아끼지 마세요 ^^
abrasax_:JW
11/10/16 13:28
수정 아이콘
눈물나는 글이네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하나하나, 예전엔 몰랐던 것들을 살면서 알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사람은 변하는가 봅니다.
28살 2학년
11/10/16 13:47
수정 아이콘
와 정말 좋네요. 스크랩해뒀다가 한번씩 읽어야겠습니다.
11/10/16 18:08
수정 아이콘
질 읽고 갑니다..
우리 또한 그러한 아버지가 되길 바랍니다.
열심히 사시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 힘내세요 [m]
리니시아
11/10/16 19:09
수정 아이콘
저희 아버지랑 너무나 비슷하신것 같아서..
글에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잔수염이 많이 남고 상처도 좀 남아서 어떻게 하면 요령있게 잘 하나 하고 들어왔는데.
이토록 감상적이 되어질 줄이야 ^^
11/10/17 00:06
수정 아이콘
고등학생이 된 자식 키우면서도 아직까지 수염이 별로 안나서 콧수염을 어쩌다가 한번 면도하고 턱은 평생 면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면도 그게 뭔가요 흐?
팔순이 넘으신 아버지는 평안북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시고 전쟁때 내려오시면서 많은 형제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독립운동하시는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셔서 그런지 늘 냉정하고 차가운 분이셨네요. 얼마전 있었던 팔순 잔치에서 처음으로 자식들 모아놓고 '내가 너무 너희에게 차갑게 대했구나 나를 따르지 말거라' 하면서 눈물을 보이시더군요.
어떻게 살아도 아버지를 넘어서는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절반을 따라가기도 참 버겁더군요. 그런데 그분은 저를 자신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있구나라고 칭찬을 늘어 놓습니다. 여전히 그분을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그저 한해한해 조금씩 알아갈 뿐입니다.
11/10/18 19:07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나는 글이군요.
우리네 아버지들은 미리 어디서 연습한것도 아닌데, 처음 맡은 그 역할을 어찌 그리도 담담하게 잘해내는지 알 수가 없네요.
잘 읽었습니다.
글로벌퇴깽이
11/10/18 23:56
수정 아이콘
저는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랑 교류가 많아서 그랬는지 인생의 목표가 항상 '아버지처럼 살기' 네요.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위대함이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인거 같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523 (09)내가 진짜로 듣고 싶었던 말 [23] 키큰꼬마8066 09/12/04 8066
1522 (09)멀어지는 과정. [17] 50b5292 09/11/19 5292
1521 왕자의 난 - (1) 조선의 장량 [10] 눈시BBver.25021 11/11/02 5021
1520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本(본) 편 : 초대Ⅰ [4] 르웰린견습생5549 11/11/01 5549
1519 한미 FTA에 대해 알아봅시다. [92] Toppick8127 11/10/29 8127
1518 (09)[고발] 데일리e스포츠, 그들이 묻어버린 이름 '위메이드' [60] The xian12162 09/11/08 12162
1517 (09)라이터가 없다. [7] kapH4728 09/11/03 4728
1516 고려의 마지막 명장 - (5) 폐가입진, 해가 이미 저물었구나 [5] 눈시BBver.23918 11/10/26 3918
1515 꿈은 조금 멀어지고 죽음은 조금 가까워진. [19] 헥스밤6572 11/10/11 6572
1514 (09)Neo Kursk - By Flash & Firebathero, 경기 분석글. [14] I.O.S_Lucy5726 09/10/21 5726
1513 (09)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구두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결혼도 안하던 초식남 구두장인이 있었습니다. [36] 양치기6977 09/10/19 6977
1512 (09)매혹적인 행성들 [30] 세린6548 09/10/13 6548
1511 windows 8 사용기 [31] 5956 11/10/25 5956
1510 최대한 쉽게 써본 무선공유기 이야기 - (상) 무선공유기의 선택 [27] 마네6188 11/10/25 6188
1509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17] nickyo5523 11/10/24 5523
1508 (09)홍진호. 그 가슴 벅찬 이름에 바치다. [14] 세레나데7999 09/10/13 7999
1507 (09)[스타리그 10년-5]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스타리그 10년 [13] Alan_Baxter5367 09/10/11 5367
1506 (09)[인증해피] 신발에 관한 잘못된 상식들과 올바른 관리법! Part - 2 [28] 해피7277 09/10/06 7277
1505 그 차장 누나들은 어디 계실까? [11] 중년의 럴커6431 11/10/24 6431
1504 은은하게 멋내고 싶은 남성들을 위한 정장 50계명 [56] 월산명박11232 11/10/24 11232
1503 불휘기픈 나무 - 정도전, 태종, 세종대왕 [55] 눈시BB7654 11/10/22 7654
1502 ‘病身’에 대한 짧은 생각, 긴 여운… [9] Love.of.Tears.5643 11/10/22 5643
1501 [정보&팁]인터넷서점 비교 및 책 가장 싸게 구매하는 법(내용 쪼끔 깁니다~) [28] 하늘의왕자6895 11/10/22 689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