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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9/07/06 11:06:31 |
Name |
happyend |
Subject |
(09)과거로부터의 편지-by 이승휴 |
1.
1264년 여름, 길고긴 장마가 끝나갈 무렵, 고려의 임금 원종은 깊은 시름에 빠졌습니다. 40년간 끌어오던 몽골과의 전쟁은 그 막바지에 이르렀고, 일곱차례나 국경을 넘나들며 고려땅을 도륙했던 몽골은 원종에게 직접 자기나라의 궁궐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나의 덕이 모자라구나.”
원종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깊은 시름에 빠진 임금을 무신정권의 또다른 실력자인 김준이 찾아왔습니다. 김준도 원종도 이번 몽골여행의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굴욕. 이미 태자시절 몽골땅을 밟았던 원종이지만 그때는 강화사절단을 이끄는 신분이었으나 지금은 한나라의 왕. 자주국가의 앞날이 위태로웠습니다.
“폐하, 신 김준 감히 아뢰옵니다.”
전쟁 전, 고려의 왕실은 무신정권의 칼날아래 허수아비정권으로 전락했습니다. 전쟁은 국가간 외교전 중의 하나. 외교의 수장은 무신정권이 담당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고려의 왕실은 기묘한 왕권회복의 기회를 잡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몽골을 등에 업은 왕권회복이 어떤 미래를 약속할 것인지는 원종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자주국가의 왕으로서의 양심과 왕실의 권위의 회복이라는 오랜 숙원은 양날의 검과 같았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목을 벨 것이라는 것을...
김준은 원종의 두려움을 잘 알았습니다.
김준은 천하디 천한 최씨집안의 노비에서 운명을 베고 또 베어넘겨 최씨집안의 오른팔로 성장했고, 삼별초를 이끌고 최씨 무인집권기를 자신의 칼로 쓸어넘기며 천하의 권력을 자신의 칼집속에 담아냈습니다. 원종은 김준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거라.”
원종은 김준의 매보다 날카롭고 승냥이보다 교묘한 눈빛을 피하며 말했습니다.
“고려는 자주국가입니다. 몽골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되옵니다.”
“알고 있느니라.”
원종은 김준의 말이 끝맺기도 전에 짧고 빠르게 대답했습니다. 김준은 원종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누런 미소를 흘렸습니다.
“폐하, 신이 풍수지리사인 백승현에게 들은 바, 참성단에 제사를 지내면 필시 하늘의 힘으로 몽골의 억지스런 모욕을 벗어날 것이라고 하옵니다.”
“참성단?”
“그러하옵니다. 폐하.”
김준은 머리를 바닥에 찧을 듯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원종은 김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원종이 가진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김준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다는 것을. 임금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2.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려는 완벽한 문민통치를 이루어내는 듯 했습니다. 왕건이 호족과의 연합정책의 핵심은 결혼. 가는 곳마다 사돈관계를 맺으며 이루어낸 통일은 왕실을 이어받은 광종에겐 골치덩어리였습니다.
이 호족을 누르기 위해 광종이 선택한 방법은 과거제의 도입과 노비안검법, 그리고 아들 경종의 전시과제도 등으로 이어지며 문민통치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호족들의 땅은 소유의 근거가 없어졌고, 사병은 해방되었으며 권력은 아둔한 무관들의 칼끝이 아니라 책상머리전쟁에서 승리한 문관의 붓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승리의 화룡점정은 김부식. 김부식은 수천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비합리성과의 투쟁을 선포합니다. 그 무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문민통치가 100년을 넘기면서 낳은 새로운 귀족인 문벌사회는 합리성을 무기로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학자 김부식은 한반도의 역사에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매스를 대어 완벽한 수술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가 ‘삼국사기’ . 역사에 비합리성은 그렇게 축출되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민족의 신화와 설화와 전설은 김부식이 집도하는 칼날에 도려졌습니다.
문민통치는 수려하지만 교만했습니다. 차츰 송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모방으로 흘렀고, 벽란도의 상인들은 송나라 비단,도자기, 책을 실어다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느라 밥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폭력앞에 견딜 수 없게 된 비합리주의 세력인 묘청의 도전은 이 평온한 문벌귀족의 세상을 끝낼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송나라식 문민통치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힘의 응징’시대였습니다. 거란,여진이 잇달아 북방을 평정하며 북송시대를 끝장냈고, 고려도 이 시대의 칼바람을 빗겨가기 어려웠습니다. 전쟁은 일상화 되었고, 문민통치는 부패했습니다.
결국 전쟁 영웅들에 대한 푸대접을 낳은 문민통치는 무신집권기의 칼 아래 스러졌고, 무신들은 송나라 추종자 나부랭이에 불과한 문벌귀족들에 대한 가차없는 보복의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이 민족주의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광종이래 이어져온 권력에 대한 합리적 접근을 붕괴시킴으로써 힘에 의한 권력분배의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권력을 부르짖었습니다. 천민들의 반란은 권력의 정당성을 잃은 무신정권에게 위협적이었고, 그만큼 많은 양보를 얻어냈습니다.
이때, 몽골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3.
전쟁은 마지막 남겨져있던 권력의 정당성을 벗겨냈습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제도라면 중세 왕정은 하늘로부터 그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왕권신수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보여준 무신정권과 왕실의 무력함은 고려백성들을 분노케 했습니다.
‘하늘은 우리 임금을 버렸다.’
이때부터 고려인들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고려보다 더 근원적인 곳에 두기 시작합니다. 동명왕의 전설이 부활하고, 백제와 신라의 옛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모든 반란의 깃발에는 ‘삼국시대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적혀있었습니다. 고려왕실과 무신정권은 몽골보다 더 무서운 적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무서운 지역감정으로 표현된 국론분열.’
김준은 이 위기의 대처법을 간파한 무장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천민었던 사람이고, 스스로 권력의 속성을 보면서 자란 사람이었고, 무신 정권의 칼의 약점이 무엇인지 최씨집안의 타협을 보면서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백승현이라는 풍수지리사는 그런 김준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냈습니다.
“왕실의 기원을 삼한시대 이전으로 돌리셔야 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삼국시대,그리고 그 기원인 삼한시대에 기초하여 분리되었습니다. ”
김준의 설득은 원종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과거 문민통치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한 김부식은 삼한에서 나라의 기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못박았습니다. 삼한시대는 삼국시대의 뿌리. 그 이전시대는 신화의 시대였고, 그것은 도무지 합리적인 김부식을 납득시킬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정약용도 김부식과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김준은 고려시대 모든 임금들이 자신의 교서의 서두를 장식하는 ‘삼한 땅의 임금으로서...’라는 근본적 정통성을 뒤엎지 않고는 국론분열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임금으로서 고통스럽지만 그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구나.”
김준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로서는 일거양득.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자신의 정치적 양심을 채울 수 있고, 몽골과의 협상을 지연시킴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임금은 참성단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마침내 신화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속으로 빨려들어왔습니다.
4.
제사의 효험은 물론 없었습니다. 임금은 몽골로 가서 굴욕적인 훈시를 들어야 했고, 김준은 실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바로 단군의 시대입니다.(그렇게 해서 삼국유사가 탄생합니다)
국론분열, 그리고 몽골에 항복한 나라의 치욕, 결혼도감의 설치, 임금과 관리들의 변발과 호복.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닿았고, 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자존심을 회복할 길이 없었고, 치욕을 되갚을 길도 없었습니다. 왕실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했으나 그것은 몽골에 기대 얻은 굴욕. 그 부끄러움을 모른 채 부원배들이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새로운 비합리성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충렬왕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권력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하루가 멀다하고 임금에게 정신차리라는 상소를 올리던 늙은 신하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승휴입니다.
이승휴는 왕실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삼척에 있는 두타산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이승휴는 자신의 힘을 쏟아 부어 <제왕운기>를 저작합니다.
‘처음에 어느 누가 하늘을 열었던가.
하느님의 손자, 이름은 단군일세.’
<제왕운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나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자손이 세운 나라의 백성들이여, 슬퍼 말아라.
어려움과 고단함이 있어도 너희는 하늘이 도움을 줄 것이다.
하늘이 끝이 없듯 우리 민족의 역사도 끝이 없을 것이다.
백성들이여 우리는 한 할아버지에게서 난 한 핏줄이다.
우리는 서로 싸우고 다투었던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역사가 아니라 중국이 생길 때 우리나라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그 이름은 조선이다.
70개의 나라가 있었지만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그러니 고구려 사람,백제 사람,신라 사람으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 지역감정은 헛된 것이다.
뭉쳐서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백성들이여 그대는 모두 하느님의 손자인 단군의 후손이므로 위도 아래도 없는 형제들이다.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위대한 인간들이다.
몽골에게 짓밟힌 것은 조그만 땅덩어리일 뿐 우리 민족은 아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라.’
비로소 고려인은 자존심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후 <제왕운기>는 민중들 속의 비전으로 전승되다가 마침내 <공민왕>시대에 다시 복간됩니다. 공민왕시대 이후 새로운 시대를 염원한 신진사대부인 성리학자들은 <제왕운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세운 나라의 국호는 ‘조선’이 되었습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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