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06/20 17:25:45
Name
Subject (09)폭풍 속의 알바트로스
당신은 735일 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어쩌면 가라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당신이 폭풍을 부르는 날개를 가졌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뱃사람들의 미신을 믿지 않았다.

당신은 가끔, 불시착한 알바트로스처럼 허공에 날개를 휘저어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날아오르지도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며

당신의 구겨진, 어쩌면 이제는 너무 낡고 바래어 쓸모없어졌을 거대한 날개가 절망적으로 펄럭이는 것이

가끔은 희극적이라고 생각하며 당신을 지나치곤 했었다.

가장 오래, 가장 높이 나는 날개, 폭풍 속에서 자유로운 이름의 새라고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내게 당신은 너무 오래 날아와, 이제 낯선 육지에서 기울어지는 몸을 바로잡아가며

헛되이 바람을 기다리는 무정물처럼 보였다.


아마 당신에게 말을 해줄 수 있었다면 나는

터질 듯이 바람을 안고 파도를 타넘는 삼각돛의 시대는 갔다고,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에서도 제트엔진을 달고 현란한 궤적을 수놓는 금속 날개들의 시대가 당신을 에워싸고 있다고

어쩌면 다소 빈정거리듯이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으며

가끔 그런 당신의 뒷모습이 노을빛에 온통 휩싸여서는, 고집스레 시간의 길목을 막아선 커다란 새의 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오늘 당신은 아예 날개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날 수가 없다는 듯이, 아무도 꺼내어 쓰지 않던 낡은 배에 타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실어날랐다.

아주 천천히, 눈부신 금속성 기계음 사이에서 답답할 만큼 느릿느릿 옮겨지던 그것은 어쩌면 당신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투박하고 조금은 거친 그 손놀림에서, 나는 문득 바다와 바람 사이를 수없이 저어온, 아주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점차 그 오래된 나뭇결 사이를 오르내리는 무게들이 차고, 또 비워지면서, 조금씩 뱃전을 움직이는 그 흔들림이 무엇인지

조금씩 조금씩, 머언 수평선부터, 이내 거대한 항구의 무표정 안쪽까지 깊이 흔들어 울리는 이 움직임이 무엇인지

나는 바다 전체가 소리치며 내게 불어닥치는 듯한 환상 속에서,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날개를 목격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아주 오래, 그렇게 등돌리고 앉아 있었지만

착륙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동안 오래 이륙중이었던 것이었다.

무너지는 배를 지켜보아야 할 선주들조차, 폭풍 속에서 가장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속삭이며

당신은 역시 폭풍을 기다리는 이름이었다고 했었지만, 오늘 당신은 스스로 폭풍을 일으키는 이름이었음을 나는 안다.

당신이 고집스레 실어나르던 어떤 무게들이, 우리 마음 안쪽에 내려놓이며 만들어내던,

오래 잊혀져 왔던 바람의 소리들을 기억한다. 당신은 어쩌면 또 아주 먼 훗날에야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당신이 마침내 날아올라, 어딘가에서 항상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사실

당신이 더 이상은 가장 빠르게 날지도, 가장 높이 날지도 못한다는 걸,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더랬다.

폭풍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름, 알바트로스를 물어보면 오래된 뱃사람들이 대답하듯이,

당신이 가장 오래 나는 이름이라는 것도. 이제 우리는 안다.

당신은 아직도 날고 있다.

.
.
.




홍진호의 경기 VOD를 보다 보면, 눈가를 붉힌 팬들의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힌다.

그는 이제 예전처럼, 아주 많이 이기지도, 아주 압도적으로 이기지도, 아주 쉽게 이기지도 못한다.

그보다 강력하고, 안정적이고, 승률이 높은 저그 플레이어는 이제 그 수가 제법 될 것이다.

그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구시대의 선수로 비난받거나, 혹은 신시대의 부적응자로 비춰지곤 할 때도 있다.

그보다도 화려하고, 그보다도 강력한 선수들이, 이제는 너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옐로우의 팬들은, 이제

그가 이기거나, 혹은 지거나, 항상 그의 경기 후에 밀려드는 눈물을 감추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으며

여전히

계속되는 그의 싸움에 묵묵히 응원하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다.


오늘의 경기가 끝난 뒤에도, 다음 시즌의 그에게 설레일 준비가

아직도

그의 승리에 환호할 준비가, 우리는 되어 있다.



스타크래프트의 팬이라면, 종족을, 소속을 떠나 누구나 옐로우의 우승을 바란다.

이토록 많은 이들의 한결같은 믿음을 받는 플레이어를, 나는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0-03 04:17)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KIESBEST
09/06/20 17:28
수정 아이콘
홍!!!!!진!!!!!호!!!!!!!! ㅠㅠㅠㅠㅠㅠㅠ
09/06/20 17:29
수정 아이콘
후반부의 글은 예전에 한동욱 선수와 치렀던, 옐로우의 마지막 4강전이 끝난 후 썼던 문단입니다. 3:2로 분패했었지요.
그의 폭풍은 시험기간도 가리지 않는군요. 재방송을 보면서도 눈가가 뜨거워지는 이름.
그가 아직도 날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합니다. NC...YellOw.
윤성민
09/06/20 17:32
수정 아이콘
댓글 먼저 달아야겠어용 흐
ON AIR~!!
09/06/20 17:35
수정 아이콘
멋진 글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창밖의 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09/06/20 17:41
수정 아이콘
감동적인 글 잘 읽고갑니다..
가능성이 없다고만 믿겨졌는데..
좀... 목이 메입니다..
마트리엘
09/06/20 17:45
수정 아이콘
승리 이후 그토록 많은 이들의 진심어린 외침을 들을 수 있는 플레이어를, 나는 오늘 보았다.
09/06/20 17:51
수정 아이콘
계속 천장을 바라보게 하는 글입니다 ㅠㅠ
글쓴이가 누군가 했더니 판님이시네요 @.@
끝없는사랑
09/06/20 18:01
수정 아이콘
임요환의 삼연속 온겜넷 우승을 저지하고 외쳐졌던 가림토 김동수.. 박지호와의 4강전을 기적적으로 뒤집었던 임요환....

그 이후로 경기장에서 열정적으로 이름이 불려진 선수가 있나요???

홍진호...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TPZ... 클레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Kaga Jotaro
09/06/20 18:13
수정 아이콘
정말 감동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

판렐루야!
09/06/20 18:14
수정 아이콘
홍진호 선수가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요.
귀염둥이 악당
09/06/20 18:42
수정 아이콘
택빠로서 실신..

작금의 사태가 웃기면서도 황당하군요.

상대가 왜 김택용이어가지고...
ImSoHorny
09/06/20 18:47
수정 아이콘
판렐루야! (2)
꿈꾸는등짝
09/06/20 19:06
수정 아이콘
아.. 정말 오랫만에 말라버린줄만 알았던 것이..
눈 속에서 솟구치네요...
아.. 감동이.. 너무 아름다운 글이에요...

판렐루야! (3)
AnalysiStratagem
09/06/20 19:06
수정 아이콘
판님도 진호선수 팬!!
홍진호 화이팅!!!
가치파괴자
09/06/20 19:17
수정 아이콘
아..내가 스타리그를 보면서..겨우 프로리그 1승에 눈물을 흘릴줄이야...
스푼 카스텔
09/06/20 19:31
수정 아이콘
저도 모르게 글에 빠져들었네요.
홍진호 선수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09/06/20 19:35
수정 아이콘
아..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의 감동이..
스타판의 시계도 이제 거꾸로 가는 건가요..
홍진호 선수의 승리를 라이브로 보는 날이 다시 올 줄이야..>.<
판렐루야! (2+2)
햇빛이좋아
09/06/20 20:00
수정 아이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만 생각이지만...
만약 4경기에서 정영철 선수 이기고...
에결에서 임진록 나왔스면... 오늘 어때을까요? 므흣
09/06/20 20:25
수정 아이콘
햇빛이좋아님// 그랬다가 임요환 선수가 가볍게 이겼으면 감동이 약간 덜했겠죠? ^^;

요즘 잘나가는 정명훈 선수가 나와서 벙커링을 해서 앞마당을 깨버렸는데

발업저글링 역러시 혹은 원해처리 저글링러커 최후의

올인러시로 역전승 했다면 집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실신하는 사람이 나왔을수도..하하
레미제로
09/06/20 21:05
수정 아이콘
선수들의 이름이 불려지는 경기가 다전제도 아닌 프로리그에서 나왔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겁니다.
그만큼 홍진호 선수가 특별한 것이겠죠.
저의 기억 속에선 신한은행 스타리그 시즌2 4강전 오영종 대 전상욱의 경기가 끝나고 울렸던 오영종 선수의 이름이 울려퍼졌던 경기 이후
첨인것 같네요.
더군다나 4강과 같은 다전제도 아닌 프로리그의 수 많은 경기 중의 한경기에서 그런 외침을 들었다는 것이 참 가슴 뭉클합니다.
그 전에 콜이 퍼졌던 선수들은 당시대의 실력자들이었지만 지금의 홍진호 선수는 지금은 그런 실력의 선수도 아니죠.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큰 함성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 홍진호 선수는 e-스포츠의 아이콘 그 자체입니다.
임요환 홍진호 선수 이후 e-스포츠의 아이콘은 없는데 e-스포츠가 더욱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팬은 아니지만 박지수 선수가 부활했으면 좋겠네요.
임진록의 두 선수 이후 e-스포츠의 최대 유행어를 탄생시킬 정도니까요..허허허
안단테
09/06/20 21:34
수정 아이콘
오늘 폭풍의 모습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바나나 셜록셜
09/06/20 22:08
수정 아이콘
이 글의 리플은 이제 22개가 됩니다. 헤헤
황금빛
09/06/20 23:21
수정 아이콘
vod계속 돌려 보는 중이에요 감동 ㅠ.ㅠ
폭풍의언덕
09/06/20 23:46
수정 아이콘
감동적이네요. 글 잘 봤습니다.
하나린
09/06/21 02:14
수정 아이콘
행복합니다......
하나린
09/06/21 04:10
수정 아이콘
레미제로님// 태클은 아니고 관중들의 네임콜은 마재윤 선수 신한3 우승했을때도 있었어요~^^
wkdsog_kr
09/06/21 09:45
수정 아이콘
아니 질렛 4강전에서 최연성 선수를 넘어서고 관중석에서 울려퍼지던 박성준 연호를 기억하는분은 아무도 안계신겁니까 ㅠㅠ
09/06/21 20:0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네, 정말 홍진호 선수는 희망입니다...
허느님맙소사
11/10/03 08:45
수정 아이콘
아... 판렐루야의 글이 올라오다니 추억돋네요 ㅠㅠ 어디가서 뭐하시는지.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466 공중 공격 탱크 VS 일반형 공격 드라군? [179] VKRKO 9574 11/10/04 9574
1465 잡스를 추모하며... 그가 남긴 말들. [20] 젠쿱8326 11/10/06 8326
1464 와패니즈, 서양 속의 일본 [추가] [101] 눈시BB10924 11/10/05 10924
1463 [롤 개론학] 초보자들을 위한 리그오브레전드 공략 [28] 모찬7473 11/10/02 7473
1462 게시판이란 무엇일까? [12] 김연우4323 11/10/05 4323
1461 (09)[16강개막기념] 택뱅리쌍 그리고 스타리그 (예고 추가) [51] Alan_Baxter7671 09/06/23 7671
1460 (09)동영상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제목은 '폭풍가도' [34] 유유히8204 09/06/22 8204
1459 (09)See you at our Star-League [18] Hanniabal6179 09/06/22 6179
1458 [연재] 영어 초보자를 위한 글 9탄_to부정사 동명사 편(부제_긴 명사 1) [23] 졸린쿠키4311 11/10/03 4311
1457 그 때 그 날 - 임오화변 [27] 눈시BB4209 11/10/01 4209
1456 (09)폭풍 속의 알바트로스 [29] 10538 09/06/20 10538
1455 (09)당신의 법치는 정의로운가요? [20] happyend4308 09/06/19 4308
1454 (09)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18] happyend5417 09/06/10 5417
1453 청춘이 지난 삶에 대하여. [2] nickyo4811 11/09/29 4811
1452 아버지와 페이스북 [13] 순욱6644 11/09/29 6644
1451 (09)신상문, 죽기로 결심하다. [23] fd테란9725 09/06/11 9725
1450 (09)MSL 개편 반대 선언문 [84] Judas Pain13930 09/06/09 13930
1449 (09)누군가의 빠가 될때 [24] becker7100 09/06/08 7100
1448 그 때 그 날 - 과거 (4) 아버지 아버지 [15] 눈시BB3454 11/09/26 3454
1447 SC2 오프라인 주요대회 일정 (~WCG 2011) [13] 좋아가는거야4647 11/09/22 4647
1446 [연애학개론] 데이트 성공을 위한 대화의 기법 (1) - 데이트 신청 [43] youngwon7797 11/09/24 7797
1445 (09)현재의 저플전 트렌드 [38] 김연우11015 09/06/08 11015
1444 (09)'좌빨'이라 불려도 할말없는 나의 이야기. [14] nickyo5243 09/05/30 524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