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무가 우승을 했다. 묘하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msl에서 결승에 올랐었지만 별다른 임팩트 없이 콩라인에 머무른 그 때부터 사실 허영무가 우승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접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육룡시대도 아니고, 이번 스타리그에서 허영무가 우승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그 누가 했을까? 프로리그에서 간간히 가능성을 내비추지만 개인리그에서 그 가능성을 터트릴만한 선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잘하는 김택용도 예선에서 죽을 쑤고, 기껏 결승을 간 송병구도 3:0으로 발리고 마는 게 이 바닥의 씁쓸한 현실, 가을이고 전설이고 모두 잊혀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영호를 날빌이나 운이 아닌 완벽한 운영으로 격파하고, 삼성토스의 천적인 어윤수를 3:0스코어로 제압해버릴 때에도 스타리그에서 프로토스를 계속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의 연장이라고만 생각했지 딱히 어떤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이미 전 시즌에서 그렇게 나에게 커튼콜을 외치게 해놓고서는 처참하게 무너져버리는 다른 토스에게 받은 배신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지 않았다. 결승전 현장을 찾았을 때 고막을 울리는 엄전김 트리오의 목소리와 사운드가 내 가슴을 달궜고 1경기 완벽에 가깝게 깔끔, 대범한 그의 캐리어가 가슴 속 불꽃을 지피는가 싶었지만 2경기를 정명훈에게 내주는 그를 보며 다시 내 가슴은 싸하게 식어갔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어디냐, 지더라도 제발 준비한 만큼만 제대로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3경기, 존재감 없는 허영무의 유일한 필살기, 바로 테란전 속업 투셔틀 플레이가 터졌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투 셔틀이 골리앗의 미사일을 비집고 들어갔고 정명훈의 본진 한복판에 떨어진 리버는 마침내 아머리와 서플라이 다수를 파괴해냈다. 기다리고 있는 상대방의 가슴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정권을 날리는 이 용기와 날카로움, 이것이 바로 허영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4경기, 비록 패배했지만 전멸 직전까지 가서도 기어이 승기를 빼앗으려는 그 근성에 나는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오는구나, 정말로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그 앞에 넘어선 듯 하면 새로운 벽이, 최후의 벽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구나. 한 인간이 인생 최고의 환희와 안타까움의 갈림길을 앞에 두고 서있는 그 순간 나는 감히 어떤 결과도 예측하지 못했다. 콩라인이 어떻고 가을의 전설이 어떻고...절박한 인간은 기도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속으로 계속 해서 제발이라는 말을 중얼거릴 뿐. 그리고 최후의 결전인 5경기가 다시 한번 허영무의 과감한 선택으로 다소 유리하게 시작될 때에도 섣불리 이겼다는 예측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놓아버린 순간, 얄팍한 희망은 커다란 절망으로 뒤바뀌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내 초조함을 읽은 듯이 정명훈은 허영무를 흔들기 시작했고,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불안처럼 허영무의 본진 한 구석에 병력을 자리잡고 스타게이트를 부수고 말았다. 초라한 인터셉터 한 두기는 터렛 앞에서 무력하게 날아다녔고 모든 일꾼을 피신시켜야 할 정도로 허영무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해설진들은 모두 한 입으로 어렵다고 했다. 지난 시즌 송병구의 비통한 패배를 장내 큰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었다. 나는 끝 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자원과 인구 표시창이 보이질 않았다. 일단 캐리어가 떴으니 모으기만 하면 뭐라도 하지 않을까, 주체를 못하고 참으로 근거빈약한 소리가 어느새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당시 경기 화면이 똑똑히 보였다면, 내가 요즘 패스파인더에서 플테전을 했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그런 소리가 말이다.
할 수 있다!!!!
사람이 너무 간절해지면 그 염원은 믿음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설사 스타의 신이 온들 모든 것을 걸고 경기하는 저 둘의 승부에 감히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승부를 두고 지금 나는 그가 이기게 해 주세요 하고 다른 어느 누구에게 승패를 맡겨버리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허영무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의 승리를 바라는 내가, 우리가 그를 믿을 수 밖에 없다. 프로토스의 가장 기본 유닛은 바로 광신도들이 아니던가.
손아귀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영광의 흔적을 가진 자들의 안타까움이란 어떤 것일까?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한 자가 아니라 패배자로 각인되고 마는 잔혹한 세상에서 될 놈과 안 될 놈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까? 어쩌면 최후의 즐거움을 걸고 하는 것이기에 우승의 그것에 비례하는 것은 준우승의 슬픔뿐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기쁨을 몇 번씩이고 누렸던 사람들, 단 한번이지만 그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단지 그들을 바라봐야만 했던 사람들... 아무 생각없이 집중하고 있을 허영무를 보면서 외려 내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허영무의 지상병력이 역러쉬를 감행하던 그 때, 캐리어가 탱크를 하나 둘 정리해나갈 때, 다시 한번 믿음은 희망으로, 희망은 설레임으로 그렇게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드라마가 허영무라는 프로토스의 손에서 완성이 되었고 나는 다시 한번 아련함에 젖어들었다. 수많은 관중이 허영무 이름 석자를 연호하고 있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짧게는 3개월의 기다림이, 길게는 3년의 기다림이 프로토스 팬들의 바람을 성사시켜준 이 가을, 그리고 허영무에게는 약 6년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은 이 가을. 이제 말라버린 줄 알았던 오래된 거목에서 핀 꽃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강산이 변하기 전 김동수에게서, 박정석에게서 전해내려진 그 씨앗, 그들의 게임을 보고 자라던 꿈나무가 지금은 이렇게 수많은 이들의 꿈을 이어받아 실현시키는 버팀목이 되어있었다. 왕가의 철퇴 앞에서 고귀한 혼의 영웅은 다시 한번 굽히지 않고 우뚝 서고야 말았다.
최근 들어 나는 스타방송을 전처럼 즐길 수가 없었다. 화려한 기술과 담대함을 뽐내던 많은 선수들이 원치 않게 게임을 중단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누가 더 세고 누가 더 강하냐 하는 것이 모두 부질없게만 느껴졌었다. 이제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몇 안되는 취미마저도 흔들리는구나 하는 위기감에 모든 경기들이 재미없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게임에서는 치열함을 느낄 수 없었고, 이 흔들리는 판에서도 약자는 강자 앞에서 무릎 꿇고 쓸쓸히 퇴장해야 하는 진실에 냉혹한 현실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 스타리그를 통해 나는 한 사람이 어떻게 꿈을 이뤄나가는지,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슴 깊이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s급, a급, b급으로 각각 선수들을 나누고 그 능력치를 비교하고 키워나가며 서로를 맞붙이는 프로리그의 계산적인 재미와는 또 다른 그 무언가가 스타리그에는 있었다. 누가 얼마나 잘 하고 뛰어난가 하고 선수들을 측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한 선수의 노력과 열정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개인리그의 참맛을 이번 진에어 스타리그를 통해서 간만에 느꼈다. 기업을 홍보하고 파이를 키우는 다른 목적 대신 도전하는 자, 막아서는 자, 이룰 수 없던 자, 마침내 이뤄내는 자 한명 한명의 꿈이 별처럼 빛나는 그 무대가 스타리그의 본질은 아닌지 곱씹어 보게 된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이뤄지는 곳, 이 다음 허영무가 일으킨 바람이 누군가에게 이어질 것인지 다시 한번 가슴 벅찬 바람을 기대해본다.
한 명의 꿈, 수많은 이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허영무 선수와 온게임넷 관계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쓸데없는 소리입니다만, (眞)로열로더가 향후 5년간은 안나왔으면 좋겠습니다. 4,5년씩 묵은 선수들도 이렇게 고생하면서 우승하는데 갑툭튀한 선수들이 우승하면 뭔가 달갑지 않을 것 같아요 하하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25 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