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1/09/21 11:33:15 |
Name |
화잇밀크러버 |
Subject |
어릴 적에 친구에게 배운 것 |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교실 뒤편의 사물함 위에 책꽂이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는 독서를 꽤 즐겼었기 때문에 그 책들을 자주 봐서 4학년때는 독서상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 책을 좋아하는 버릇은 5학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아서 새로 들어간 교실의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상당량의 책을 보고나서, 책마다 지정된 위치가 있었지만 그 순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제 나름의 분류법으로 책의 장르를 나눠서 마음대로 책의 배치를 하는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꽤 뿌듯했던게 제 기준에서는 기준없이 꽂혀있던 책들이 원하던 배치대로 책장안에 박혀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지정된 위치를 어긴 책의 배치였습니다.
지정된 위치와는 다르게 꽂혀진 책들을 보고 당연히 그때의 담임 선생님은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누가 책을 어질러놓고 마음대로 꽂아놓았냐며 그 누군가를 찾았지만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두려웠고 용기가 없던 저는 자백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전전긍긍 했죠.
급기야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를 책상위에 앉게 하고 눈을 감으라고 한 후 책을 마음대로 꽂은 사람이 자백하기 전까지는 책상위에서 못내려오게 하겠다며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당연히 자백을 해야 했겠지만 이 사태까지 가니 자백하고 난 후 아이들이 날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까지 커져버렸습니다. 눈을 감으라고는 했지만 누군가는 눈을 뜰 것이고 당연히 누가 아이들을 힘들게 만들었는가 알아낸 후 소문을 낼 것이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덩달아 발까지 무거워진 것 마냥 책상 밑으로 내려가 자백할 힘을 잃었죠.
집단이 있으면 그 중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되었던 때지만 제가 소속해 있던 반의 강지훈이라는 아이는 희생을 할 줄도 알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지훈이는 아무도 자백을 하지 않자 책상을 내려가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벌을 받고 있는 순간이 짜증나서 일수도 있겠지만 평상시 그 애는 리더쉽을 가지고 있던 애였고 그런 애가 자백을 하자 선생님도 그것이 거짓 자백이라는 것을 눈치챘죠. 그렇기에 지훈이를 혼내지 않고 반 아이들에게 책을 제대로 꽂으라는 짧은 훈화 끝에 우리가 받고 있던 벌은 끝났습니다.
벌이 끝나고 나서 애들은 당연히 지훈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애초에 지훈이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죠.) 자기가 혼날 수도 있는데도 거짓 자백을 한 지훈이에게 몰려들어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전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멀리서 용기라는 후광을 반짝이고 있는 그를 동경하게 되었죠.
그 후에 6학년이 되어서도 지훈이와는 같은 반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학년내내 같은 자리였으며 제가 지망하던 중학교를 지훈이가 따라와서 중학교 시절을 그와 같이 보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제 어릴 적의 성격은 그에게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거에요.
지훈이와는 고등학교를 가면서 갈라지고 새로운 장소에서 또 다른 생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학년 국어수업 시간에 5학년때 겪었던 일과 아주 비슷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지만요.
반에는 꽤 뚱뚱한 몸매를 지닌 A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의 의자에 A 돼지 뚱땡이라고 크게 써놨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친구끼리의 장난이었고 그것을 본 A도 그다지 신경안쓰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본 민감한 성격이었던 국어 교사가 매우 화를 냈고 그 낙서를 한 학생을 찾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초등학교 5학년 때처럼 책상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게 되었죠.
책상위에 정좌를 했을 때 묘하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릴 때 자백을 하지 못했던 때와 똑같은 상황. 하지만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그 자리에 있던 전 지훈이처럼 용기를 발휘하여 아이들을 벌에서 구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제 나름대로 속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누군가 바로 나서지 않는다면 제가 거짓 자백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1~2분이 흘러도 낙서한 이의 자백이 없자 전 제가 했다며 거짓 자백을 했습니다. 지훈이 때처럼 교사에게 혼나지 않고 넘어가진 못해 엉덩이를 몇 대 맞는 체벌이 있었지만 그 몇 대 맞는 벌까지 어릴 때 혼나지 않았던 벌을 이제야 받는 기분으로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물론 자위에 불과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지만 저 일로 어린 날의 창피했던 기억을 한 꺼풀 벗겨낸 것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미디어 매체를 통해 누군가 희생해야하는 장면이 나오면 '난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지만 그래도 어릴 적 스스로의 죄에도 나서지 못했던 때와는 조금이라도 다를 것이라 생각해요. 적어도 이 일을 겪은 후로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23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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