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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술을 대표하는 우키요에에 대해서는 생소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우리에겐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은 분들이 다들 자연스럽게 우키요에를 보셨을 겁니다.
‘서양화 읽기’라는 타이틀을 달고 왠 일본 미술이냐고요? 이 우키요에를 비롯한 일본 문화는 19C 중엽의 프랑스및 유럽사회에 ‘자포니즘’ 이라는 유행을 불러 일으켰고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마네, 고흐, 로트렉 등의 수많은 화가들 뿐 아니라 조각, 공예, 건축등의 문화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1편에서는 그 열풍의 진원지인 우키요에 와 그 대가들및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 2편에서는 그 영향을 받은 서양화가들의 그림들을 보겠습니다.
I. 우키요에
우키요에(浮世繪)
우키요에는 주로 풍속을 소재로 에도시대에 성행했던 채색 목판화입니다. 일반적으로 다색 목판화이지만 흑백 목판화나 붓으로 그린 그림들도 해당됩니다. 우키요에는 원본을 그리는 한시타에시, 원본을 목판에 새기는 조각가, 종이에 찍는 인쇄사로 나뉘어 분업화된 공동 작업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색 판화로서의 우키요에는 18C 중엽이후에 등장하여 신년선물용 달력주문을 하려는 하이쿠(5.7.5 음수율을 가진 일본의 짧은 전통 정형시) 동호회의 후원과 배경을 타고 에도시대 말기까지 유행 했습니다.
‘우키요’ 라는 말은 ‘근심스럽고 걱정으로 가득 찬 덧없는 세상’ 이라는 뜻으로 쓰인 우키요(憂世)였으나, 근세에 들어오며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그렇게 잠시 머물다 갈 덧없는 세상이라면, 우리 어디 한번 들썩거리며 마음 편히 살아보자는 쪽으로 변모되어 우키요(浮世)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우키요에의 주된 소재들은 자연히 신흥 도시인 에도를 중심으로 최첨단의 풍속이나 유행을 담아냈습니다.
작가및 작품
1. 기타가와 우타마로 (喜多川歌磨, 1753-1806)
관상 미인화의 대가로 불리웁니다.
선과 색채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면서 다양한 여성들이 보여 주는 성격이나 기질, 미묘한 심리같은 내면적 개성까지 그려냈다는 평을 받습니다. [가센 고이노 부], [부녀인상십품], [부인상학십체] 등의 작품집을 남겼습니다.
상념에 젖은 사랑 거울을 든 여인
음식준비 게이샤와 하녀
부엌
2. 도슈사이 샤라쿠 (東洲齊寫樂, 연대미상, 활동기간:1794-1795)
샤라쿠는 일본을 대표하는 우키요에 작가이지만 그의 생애는 완전히 비밀에 쌓여 있습니다. 샤라쿠는 혜성처럼 홀연히 등장해서 겨우 10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동안 150점이 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 밝혀진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동시대의 어느 누군가가 변장해서 활동한 것이라는 가설 아래 장르와 화파를 불문하고 수많은 화가들이 입에 오르내렸지만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영희라는 사람은 김홍도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스파이 활동을 하며 샤라쿠로 행세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실은 책을 일본에 낸 적도 있습니다. 며칠 전엔 듣도 보도 못한 작가와 출판사가 아예 샤라쿠 김홍도 어쩌구 하는 소설을 출판했구요. 제발 이런 짓들은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상이야 자유지만 그걸 책이라는 형식으로 외부에 발표하면 책임이 따릅니다. 소설은 원래 허구니까 상관없을까요?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으며 연구가 거듭되고 있고 서구쪽에서도 가장 훌륭한 초상화가로 굉장한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유명 화가를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면 민족적 자부심이 올라가는 걸까요. 거꾸로 샤라쿠 라는 일본인이 사정상 조선에서 김홍도로 행세하다가 자기 실력을 시험하고자 잠시 조국을 방문해 큰 반향을 일으키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라는 주장을 일본인이 발표하고 소설도 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내 기분이 나쁘면 같은 상황에서 남의 기분도 나쁜 겁니다. 물론 확실한 근거가 있으면 당연히 저런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샤라쿠가 활동하던 시기에 김홍도의 국내활동이 없었다는 것이 저 주장의 가장 큰 근거가 된다는데 그럼 10개월의 공백이 있는 수많은 한중일의 화가들은 다 샤라쿠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 외에도 이것저것 논거를 만들어 냈나 봅니다만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고 우겨대는 일본의 X라이들도 나름대로 근거를 대고 있지 않습니까.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듯이 저렇게 베일에 쌓여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을 타인으로 둔갑시키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진정한 민족주의자라면 김홍도를 샤라쿠로 둔갑시켜 인정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려 김홍도나 신윤복이 그들의 훌륭한 작품에 걸맞는 정당한 명성을 누리게 노력하겠죠.
당시 에도에서는 가부키 공연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당연스럽게 가부키 배우들에게도 대중들의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이에 가부키 배역으로 분장한 유명한 배우들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키요에 화가들에게 중요한 일이 되었죠. 마치 지금 유명 배우의 브로마이드나 포스터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하인 에도베 역할의 오타니 오니지 다케무라 사다노신 역할의 이치카와 에비조
배우가 연기를 하다보면 감정의 흐름에 따라 동작이나 표정 등이 그야말로 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샤라쿠는 바로 이런 순간 배우의 모습을 포착해 인간 감정의 순수한 모습을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샤라쿠의 판화 중 가장 널리 알려졌을 왼쪽의 작품을 보시죠. 이 에도베 라는 극중 인물은 잇페이라는 착한 사람에게서 금품을 빼앗으려고 하는 악당입니다.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고야 말겠다는 냉혹한 모습, 악한의 흉악하고 극적인 순간의 생생한 모습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들은 자신의 우상인 배우가 저런 모습으로 그려진 그림을 좋아할까요? 좀 과장해서 비교하자면 ‘순간 캡쳐’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우스꽝스러운 순간을 찍어서 ‘김태희 진실된 순간’이라는 화보를 만들면 얼마나 팔릴까요.
샤라쿠는 배우의 분장하지 않은 맨얼굴이나 연기중의 나쁜 습관까지도 개성으로 파악해 그려 낸 결과 대중에게 외면을 받았고 결국 시장에서 도태되어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때로는 추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본연의 모습을 통해 리얼리즘을 추구한 샤라쿠는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졌습니다. 그가 20C 초에 와서야 다시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습니다.
농부 쯔치조로 변장한 코레타카 왕자 역할의 나카무라 나카조 초자에몬과 카나가와야 역할의 나카지마 와다에몬과 나카무라 코노조
3. 가츠시카 호쿠사이 (葛飾北斎, 1760-1849)
어릴 때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었던 호쿠사이는 대가인 가츠카와 슌쇼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전통적인 우키요에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유곽의 여인들이나 가부키 배우들을 주제로 삼았던 그는 30대에 이르러 일본 내 여러 화파를 섭렵하고 중국화나 서양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이는 당시 폐쇠적인 회화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어서 결국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단가 형식의 문학인 교카 관련 인쇄물의 삽화를 그렸고 풍경화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40대에는 중국의 패관소설에서 응용한 전기 소설인 요미혼의 삽화쪽에 전력을 기울였고 50대 중반부터는 사물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데생한 [호쿠사이 만화] 라는 소묘집을 냈습니다. 70대에 이르러 그를 대표하는 걸작이 된 [후가쿠36경], [치에의 바다], [후가쿠100경]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수없이 호를 바꾸고 이사를 하면서 작은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한 그야말로 그림에 미친 화가였습니다.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神奈川沖浪裏)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후가쿠36경] 은 호쿠사이를 대표하는 작품집입니다. 이 <카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는 <붉은 후지산> 과 더불어 누구라도 한번쯤 봤을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이죠. 저 멀리 후지산이 바라보이는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어선을 덮치려합니다. 어부들은 격노한 바다의 맹위에 굴복하듯 배에 납작 엎드려있습니다. 앞쪽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를, 뒤쪽에는 후지산을 배치한 이중 이미지를 통해 대자연 앞에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극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의 교항시[바다], 특히 3악장은 이 작품에서 큰 영감을 얻어 완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붉은 후지산(凱風快晴)
후지산은 일본의 상징이며 자부심이죠. 잡다한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형태와 색채, 구도를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함으로써 붉게 물들어 우뚝 서 있는 후지산의 기상을 더욱 강렬하게 해줍니다.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슨슈 에지리(駿州 江尻)
거센 바람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과 날리는 종이들로 역동적 가로동선을 구성했습니다. 이를 세로로 서 있는 나무가 잘라내고 있습니다. 화면을 수평으로 분할해 놓고 그 아래쪽의 번잡함과는 달리 위쪽은 아주 단조롭습니다. 그런데 극도로 단순한 선으로 묘사한 후지산 하나가 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사실감과 활력이 넘치는 그림이네요.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카이 카지카자와(甲州 石班沢)
거친 파도와 세찬 바람이 느껴지는 바위에서 힘겹게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가 위태로워 보입니다. 자연과 싸우며 생존하는 인간의 모습을 후지산이 굽어보고 있습니다.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혼조 타테카와(本所立川)
수직으로 나란히 서있는 공사용 목재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후지산이 구도의 포인트가 되는군요. 앞쪽에서 작업중인 인부들은 묵묵히 서있는 후지산과 대조를 이룹니다.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도카이도 카나야에서 보이는 후지산(東海道金谷の不二)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코이시카와의 아침설경(礫川雪の旦)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오덴의 물레방아(隠田の水車)
[후가쿠36경(富嶽三十六景)], 스미다강의 세키야 마을(隅田川関屋の里)
[치에의 바다], 시모사 초시의 어선들
4.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1797-1858)
우타가와(또는 안도) 히로시게는 소방감독관인 최하위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우타가와 도요히로 밑에서 에게 우키요에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 기간에 여러 화파와 서양화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습작과 인물판화 위주의 작업을 하였고 1830년 무렵부터는 풍경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까지 여행하는 동안 53개 역참에 묵으며 스케치한 그림을 바탕으로 1832년 발표한 작품집 [도카이도53역참(東海道五十三次]의 성공으로 큰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기소가도 69역참(木曾街道六十九次)], [오미 8경(近江八景)], [에도 근교 8경 江戶近郊八景] 등 대표작들을 발표하여 가장 인기있는 우키요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히로시게는 차분하고 서정적인 시적 감각으로, 자연과 사람이 밀착되어 서로 호응하는 새로운 풍경화라는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 하였습니다. 뛰어난 경치뿐 아니라 나그네의 여정까지 그려 넣은 그의 작품은 먼 곳을 여행하기 힘든 서민들에게 대리 만족의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만년에 온 힘을 쏟아부은 최고 걸작인 [명소 에도 백경(名所江戶百景)]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카이도53역참(東海道五十三次] 중에서
미시마
안개가 깔린 이름 아침에 길떠나는 나그네의 모습. 안개가 주변의 사람과 사물들을 어렴풋이 감싸고 있습니다.
하라
거대한 후지산자락 아래의 한적한 들판을 두 여인과 짐꾼이 걷고 있는 모습.
하라 근방은 후지산의 웅장한 경관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간바라
많은 눈이 쌓인 역참 부근의 밤풍경. 고즈넉한 분위기가 납니다.
쇼노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길을 급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바람에 마구 흩뿌리는 빗발의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대각선구도에다가 인물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동적입니다. 그러나 화면을 가로지르는 산길의 각을 숲속 나무들의 실루엣이 완화시켜주며 빗줄기는 직각으로 산길을 잘라주면서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기소가도 69역참(木曾街道六十九次)] 중에서
모치즈키
기본적인 구도는 위의 <쇼노>와 비슷하지만 우뚝 선 소나무들이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서 좌우를 완전히 분할해버리는 독특하고 대담한 화면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풍경화들은 중앙에 무엇인가를 배치해서 중심을 잡거나 길이나 가로수를 그려도 한쪽으로 몰아놓고 나머지 큰 공간에 주요 풍광을 펼칩니다. 한가운데 길을 그리더라도 원근법을 강조하면서 좌우의 균형을 맞추는게 보통입니다. 저 그림처럼 저렇게 존재감이 큰 사물로 화면을 대각선으로 잘라버리는 구도는 흔하지 않을 겁니다.
세바
히로시게 특유의 서정성이 정말 한껏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수양버들 사이로 둥근 달이 떠있고 강물위에서는 사공이 짐을 운반하는 거룻배를 천천히 저어가고 있습니다. 청아한 달빛아래, 바람이 수양버들을 만지는 쏴아~ 소리와 나룻배 젓는 소리만이 들리는 한가로운 밤풍경입니다. 푸른 강물과 들판의 녹색, 나룻배와 멀리 보이는 노적가리의 노란색 사이의 조화도 깔끔합니다. 역시 대각선의 화면 분할이 보입니다.
미야노고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의 정다운 모습입니다. 한 아이는 아버지 등에 업히고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들었습니다. 큰 아이가 가리키는 것은 달일까요. 어두운 밤에 달빛을 받은 건너편의 모습이 어스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카사키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미있는 그림이네요. 제 생각엔 모자를 벗고 굽신대는 사람은 아무래도 주점에서 뭘 먹고 낼 돈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 옆의 남녀는 여행중인 부부인데 방금 전 저 남자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했을 겁니다. 남자는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부부에게 뛰어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고 주인은 남자가 도망 가는 줄 알고 서둘러 뛰어나오는 모습이 아닐까요.
[명소에도백경(名所江戶百景)] 중에서
요츠기도리 수로의 끄는 배 타마 강변의 벚꽃
대교 코우메 강변
아타고시타의 야부 골목 젠조쿠 연못의 가사 장삼을 걸었던 소나무
메구로 다리 일몰의 언덕 후쿠가와 강의 목재 저장소
[명소에도백경]은 독특하고 대담하며 파격적이지만 안정을 잃지 않는 구도, 서정성을 듬뿍 머금은 풍경, 깔끔하고 간결한 기본색들 간의 조화로움이 어우러진 히로시게 판화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흐는 파리에 머물던 시절 히로시게의 작품 두 점을 모사한 경력이 있습니다. [명소에도백경]을 보면 왜 고흐가 히로시게를 좋아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림의 포인트가 되어 전체화면을 살려주는 노란색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첫 번째 소개한 <요츠기도리 수로의 끄는 배> 의 경우, 고흐라면 이 그림을 반드시 모방했어야만 한다는 필연성까지 느껴집니다.
일본이 밀려오다
1854년 일본이 다시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 뒤 많은 일본 제품들이 유럽에 수출되었고 파리에서는 일본 상품들을 취급하는 상점도 문을 여는 등 주로 미술가와 문인들을 중심으로 유럽인들은 이 이국적인 물건에 차차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는 여러 나라들의 특산물이나 공산품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고 본격적으로 일본 예술이나 공예품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됩니다. 이때 일본이 출품한 전시품들은 대부분 도자기류였는데 일본에서 도자기를 포장할 때 충격흡수나 완충제 용도로 우키요에가 그려진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우리들의 달력 종이처럼 흔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포장지들이 유럽인들의 눈에 아주 이국적이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와 큰 유행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더구나 우키요에는 판화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같은 그림을 쉽게 소유할 수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특히 파리에서는 일본 미술품과 도자기, 공예품, 의상들이 컬렉터들을 크게 자극해서 상당히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졌고 곳곳에 일본풍을 불러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왜 우키요에 였을까?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E.H.곰브리치는 자신의 저서 (E.H.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p524-525)에서 인상주의가 승리하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는데 하나는 사진술이고 두 번째가 바로 우키요에 입니다.
카메라의 발달은 기계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가 없어진 미술가들이 더 심도있는 탐색과 실험을 추구하도록 했으며, 우키요에는 그런 인상파 화가들이 새로운 소재와 참신한 색채 구성을 찾아나가도록 도왔다는 것입니다.
로저 막스(Roger Marx) 라는 유명한 평론가는 그리스-로마의 유산이 르네상스에 중요했던 것만큼 일본이 근대 예술에 중요했다고 말했을 정도이니(Rainer Metzger & Ingo F. Walther [VAN GOGH], TASCHEN 25th Anniversary Special Edition, p86)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지만 어쨌든 당시의 일본풍이 지금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키요에 작가들은 2차원 평면에 공간감을 주기위한 자질구레한 시도 없이 단순한 선과 색으로 새로운 형식의 공간을 창출했고, 이는 새로운 실험을 하려는 인상주의자들을 고무시켰습니다.
인상파 이후의 미술가들은 사물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회화의 오랜 도그마를 깨버렸는데 이런 시도의 처음에는 분명 우키요에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은 우키요에의 명암과 원근법을 무시한 2차원적 평면성, 사물을 보는 방식의 파괴, 대담한 시야와 잘린 화면구성, 일상에서 모티프를 취한 일련의 연작에 열광했습니다. 유럽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이 무시되는 일본 판화의 파격적인 면은 아직도 얼마나 많은 회화적 인습이 남아 있는지 깨닫게 하는 충격이었죠. 그리고 그 스타일에 자극을 받아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볼까요.
1. 대담하고 독특한 화면구성
후쿠카와 강 수사키 즈만츠보 수이도 다리와 스루가 언덕
아사쿠사 킨류잔 사원 미사키 근처의 수이진 숲, 우치 강, 세키야 마을
모두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명소에도백경]에 있는 작품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림은 기본적으로 높은 산이나 건물의 옥상에서 내려다 보는 조감도이지만 바로 눈 앞에 사물을 배치하여 대단히 독특한 화면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세 번째 작품은 지극히 정상적인 풍경구도이지만 앞쪽에 커다란 등을 배치하여 포인트를 주었습니다. 또는 시야를 둥근 창문의 반쪽으로 뚝 잘라버리고 그 안에 높은 방안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을 그려넣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각종 인쇄,영상매체로 인해 다양한 구도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아왔기 때문에 저런 시도가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사진예술과 영상문화의 발달이전에 저렇게 특이한 시점과 구도를 사용하여 대담한 화면구성을 한 그림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니혼바시 교와 에도바시 교 테포쯔의 쉬린 강과 이나리 교
하지만 위의 두 작품은 좀 답답한 감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독특한 화면구성은 히로시게만이 시도한 것은 아닙니다. 선배인 호쿠사이도 풍경 우키요에의 선구자로서 여러 가지 대담한 구도를 펼쳐내었죠
[후가타36경] 속의 작품들입니다. 전면을 압도하는 커다랗고 둥근 프레임이나 대각선을 가르는 불안정한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핵심모티프인 후지산을 집어넣는가 하면, 아예 큰 나무로 화면을 둘로 갈라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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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책으로 출판해도 될 정도의 방대한 자료와 구성에 놀랍니다.
일문과 전공자로써 일본전통문화에대해서 공부도했었고
우키요에에대해서도 책 몇권을 읽어서 대충 안다 싶었는데
부끄러울따름이네요^^;
오늘은 늦어서 내일 다시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글이 있어서 자게가 좋군요,
저번 학기 미술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을 때 서양화 일색이던 수업에서 '우키요에' 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던 경험이 생각나네요.
우리 나라의 화풍도 굉장히 좋은데, 그 당시 너무나 폐쇄적이었던 사회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못한거 같아서 아쉽습니다.
참고로 저도 샤라쿠 관련 이야기를 오늘 티비에서 봤는데 참 걱정되더군요 -.-;; 인터넷 뉴스도 아닌 아침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면서, 분명 저건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그냥 하나의 가설(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 이야기) 일 뿐 인데 방송에서 나오니,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근데 역시나 피지알의 글은 미괄식이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