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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1/08/27 01:23:30 |
Name |
nickyo |
Subject |
좁은 세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우연. |
우연은 상상치 못하기에 우연이다. 준비할 수 없기에 놀라고, 그 갑작스러움에 당황한다. 어떤 유명 드라마에서 젊은 날에는 별게 다 별일인데, 세상사는게 다 별일이지 않느냐 라는 말에 우린 그래도 젊기때문에, 그런 별일을 별 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가 없이 죄다 큰일이다. 라고 말했던 것 처럼 우연은 별 일이다.
며칠 전이었다. 몇 년 쓰다보니 낡게 된 싸구려 지갑의 사진등을 보관하는 투명 속지의 접착제가 떨어져 나간 것이. 지갑에 원체 돈 말고는 정리를 잘 안했기 때문에 뭐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신분증, 교통카드 뒤에 켠켠히 쌓인 낡은 명함들 사이에 그것은 있었다. 언제 받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반짝반짝한 명함. 네모난 카드가 아닌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흰색 명함은 조금 때가 탔지만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 울음과 웃음이 섞인 얼굴이. 이 명함을 얻었을 때 그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곳으로 가버린 님에 대한 슬픔과, 노력한 결실이 가져다 준 환희가 뒤섞여 어쩔 줄 몰랐던 얼굴이. 그럼에도 처음 받은 명함이라며 창백하게 야윈 얼굴로 건네준 그 일들이 주마등처럼 슥-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사실은 이미 멀어질 만큼 멀어졌기에. 추억상자에서 꺼내고 또 꺼내는 반복도 충분히 할 만큼 했기에. 그녀와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쓴 글들이 쌓이고 쌓였기에. 그 주마등처럼 스쳐간 기억들은 선이 희미해진 그녀의 웃음을 다시 선명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 크게 요동치는 마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오늘. 어쩌다 보니 약속이 파토가 나고, 어쩌다보니 즉석 약속이 잡혀서 나는 그 거리로 어쩌다보니 가게 된 것이다. 수험생과 시험과 학원, 음식과 환락과 번잡함이 뒤섞인 '인간군상'의 거리. 노량진 말이다.
노량진 하면 예전에는 재수하면서 다녔던 학원이라거나, 싼 값의 길거리 간식, 북적대는 사람들, 수많은 맛집 등이 생각났지만 지금에는 노량진하면 제일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는 기억이 있다. 낡고 높은 돌계단을 걸어올라야 나오는 모 원룸빌딩 지하의 스튜디오와 그녀. 그녀와 멀어진 뒤 그녀를 다시 찾으려 매일같이 왔었다면 몇 번이고 만날 수 있었을 테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부러는 한번도 찾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다 무슨 약속이 노량진에서 생기기만 하면 그 주변을 몇시간 전부터 와서 기웃대고, 걸었던 거리를 다시 또 다시 빙글빙글 돌며 그녀의 자취를 찾고는 했었다. 오늘도 여전히 당연히 만나지 않을 것 처럼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훔쳐내며 주변을 걸었다. 처음 먹었던 파스타 집같은 곳을 지나며 주변 사람을 열심히 둘러보아도 같은 사람은 없었고, 함께 걸었던 길 위에 점점 옅어지는 감상과 차오르지 않는 울컥거림은 시간덕택이라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추억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그런대로 슬그머니 느껴지는 거리의 기억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잡힌 약속은 친구의 동생을 만나는 일이었다. 수험생 경력이 남보다 배 길었기에, 입시학원 직원으로 길게 일했던 경력이 있기에, 대학생활을 겪었기에 해줄 수 있는 조언들을 해주고, 동생을 걱정하는 그럴듯한 형의 모습을 하는 친구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 만났음에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최선을 다해 전했다. 지금 내 앞길 세치도 모르건만 건방을 떤 것은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래도 잘 되길 바라는 응원을 담아 이야기 했다. 우연찮게도 계산을 하며 지갑에서 돈을 빼다가 그 명함이 다시 삐죽 튀어나왔다. 아 이게 있었지, 하는 사이에 그 동생은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고 했고 우리는 그 친구가 사는 원룸을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그렇게 우연은 일어난 것이다. 명함을 채 지갑에 잘 갈무리 하기도 전에.
단 한번도 그 돌계단을 올라간 적은 없었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처럼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거리를 뱅뱅 돌며 그녀의 자취를 찾았던 것은, 그럼에도 그 스튜디오를 찾아 그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던 것은 마주침의 두려움이 너무나 커다랬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동생과 친구는 그 돌계단을 총총 올라갔다. 당황스러웠다. 돌계단을 올라 돌면서 넌지시 물었다. 이 근처에 XX교육 촬영 스튜디오가 있다며? 아 예 형. 어 아마 제가 사는 원룸.. 뭐? 하고 되묻고 돌아선 건물에는 교육 컨텐츠 및 어쩌구저쩌구가 적힌 간판이 걸려있던 것이다. 위가 철렁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동생이 사는 집을 구경하며 스카치 테잎과 볼펜을 빌렸다. 그리고는 그 명함을 슬쩍 꺼내어 한 마디 글을 적었다. 동생은 살갑게 우리를 배웅해주었고, 나는 뻘쭘하게 그 건물 손잡이에 그 명함을 붙여놓고 돌아섰다. 궁금해 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친구에게는 적당한 말로 설명하였다.
세상은 정말 좁다. 그녀가 출퇴근하는 건물에 친구동생이 산다니 무언가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추억의 파편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오늘은 그렇게 기억상자 하나를 그 곳에 떨어뜨리고 온 것이다. 이렇게 기억하는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명함을 문고리에 붙여놓고 나올 때의 기분은 혹시나 이 명함을 그녀가 발견한다면 한 마디 말이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누군가 함께 일하는 사람이 그 명함을 보고 이런게 있었다고 말해준다면, 내 명함이 왜 여기..하며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잠깐이나마 스치길 바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붙이고 돌아설 때에는 아쉬움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이제 그녀에게 받아 남은 것은 저 명함 하나 뿐인데 그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고 밤하늘을 보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찾으려 하지 않았던 곳을 알게 되고, 가려고 하지 않았던 곳을 밟고, 그렇게 남겨진 것을 놓고 나오는 동안 무언가를 조금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많은 파편들 사이에 남아있던 몇 안되는 물증에는 내 생각보다 많은 미련이 남겨져 있던 것인지 그리도 쿡쿡대더라.
다음주 입대 전에, 사람들에게 짤막하니 문자를 보내야겠다.
만약 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면, 하는 기대가 있다.
지난 기억을 가지고 이렇게 여러번 되새기기도 참 어려운 일인데 어째 까도까도 벗겨지는 양파마냥, 그녀는 여기저기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상치 못해서 상상할 수 없는 우연처럼, 그렇게 우연히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 드는 밤이다. 내게 있는 조각만큼이나 그녀에게도 그런 조각이 불쑥불쑥 나오길 바라는 그런 나쁜 밤이다. 그래서 꼭, 날 기억해 주길 바라는 그런 밤이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29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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