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8/25 00:39:55
Name SCVgoodtogosir
Subject 마지막 예비군 훈련
오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습니다.

2003년 겨울의 낯선 입대, 다 같이 뜬눈으로 지새운 첫날밤, 새벽에 일어나 주섬주섬 군복을 입던 그 어색함.

보충대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 그리고 마지못해 쓴 티가 역력한 교회 학생의 위문편지와 바깥에서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듯한 사탕들.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팔뚝을 잡아보고 몸을 만져보고 하던 소대장에게 이끌려 간 비만소대... 그리고 지옥같은 6주...
밥을 "회"를 떠서 주더라고요. 밥을 먹고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덕분에 6주만에 27kg 를 뺐지만 그때 제 머리숱의 1/3이 확 줄어버렸어요. 원래는 숱이 너무 많아서 스트레이트 파마 두번은 해야 머리가 내려오곤 했는데 지금은...
죽을것 같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점점 할만해졌던 구보, 마냥 재밌기만 했던 사격, 친구가 배식당번하면서 빼돌려준 명태튀김 부스러기.. 그 얼어버린 부스러기를 동기와 주워먹으며 (그 동기 이름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121번 훈련병 김유진..  122번이 저. 123번은 김영환..) "엄니 제가 이렇게 살아유 흑흑흑" 하던 각개숙영의 추억.. 유격때까지 편지가 안와서 똥줄타게 만들었던 여자친구.. 그러나 유격다녀온날 20통이 한꺼번에 와서 담당 조교가 연병장에 편지를 하나하나 표창 날리듯이 날렸는데 그거 주으러 뛰어다니면서도 마냥 행복했던 기억 (그리고 그 여친님이랑 내년에 결혼합니다 크크). 마지막 유격이라고 PT 8번만 한시간 했던 고통.. 소대장이 가장 자상하게 대해주었던 수류탄 투척.. (근데 제가 송구가 god of bottle 이라 옆사로에 명중.......) 어째어째 마감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던 마지막날 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주특기 부여. 60mm 신형 박격포........ (남들 버스, 기차탈 때 더블백 매고 가서 차려포를 한다고 열심히 놀리던 그 박격포......)

같은 과 선배 두분이 조교 왕고를 하고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건만 하필이면 TO가 없어서 논산 조교로 남지도 못하고 배치받은 7사단.. 미친듯이 눈치우던 춘천 102보.. 그리고 사단 보충대에서의 꿀맛같았던 휴식 2주.

그리고 나서 연대 인사과에 2일간 머물렀는데, 그 때 또 연대 인사계원이 제 과 동기의 친구였어요. 그 때 그분이 자기가 말년인데 자기 부사수로 오지않겠냐고 했는데 지나가던 인사담당관님이 "뭘 또 꼬시고 있냐"라고 핀잔주는 바람에 무산됐었죠. 나중에 인사담당관님하고 친해지고 나서 "내가 왜 너를 그때 안 데리고 왔는지 참 후회된다" 라는 립서비스 같은 이야기도 들어봤네요.

뭐 어쨌든 자대배치를 받고 갔는데 대대 앞에 써있던 "산악전의 프로"..... 흠좀무..

박격포를 들고 뛴 150km RCT.. 다녀오고나서 알게 된거지만 고참들은 저를 두고 내기를 했더라고요. 서울 4년제 대학생들도 보기 힘든 보병중대이다보니 덩치는 크지만 맨날 공부만했을거 같은 제가 훈련을 뛸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나봐요. (특정 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재수없다고 얼굴에 침뱉던 고참도 있었을 정도...) 근데 그들은 몰랐던거죠. 제가 살찌기 전 까지는 등산이 취미이자 특기였다는걸. 발바닥이 물집투성이가 되고 발톱도 빠져버린 동기들과 달리 말짱하게 훈련을 받고 와서 혼자 동기들 몫 정리를 다 하고 그날 밤에 탄약고 근무까지 섰고, 그 뒤로는 고참들도 어느 정도 그런 시선들은 줄어들었죠.

일병 달기 일주일 전에 나간 위로휴가.. 다녀오고 나니 인사계원이라는걸 하라더라고요. 시키니까 했죠. 제대 아침까지 일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는걸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아무튼 그래도 인사계원 하면서 훈련 뛸거 다 뛰고 작업도 다 뛰고 사격, 주특기도 다 하고.. 힘들긴 했지만 일이 두배인 만큼 인정도 두배로 받고 사람들과도 두배로 친해졌어요. 위염을 얻고 일하다 과로로 세 번 쓰러져서 병원을 가기도 했지만 그 때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역시 사람은 바쁘고 힘들어야 얻는 것도 많고 배우는 것도 많나 봅니다.

아무튼 그렇게 상병때 쯤 해서 FEBA-A 생활을 마치고 GOP로 올라갔어요. 가서 상황근무도 서고 계산병도 하고, 사람 없으면 상황근무 퇴근하고 야간 경계근무도 서고.. (진짜 이거 하면 하루에 네시간 자기도 힘들어서 죽을맛이었어요.. 그래도 사람이 없으니 근무를 서야 해서...) 그러다 상병 말호봉에 또 일하다 쓰러져서 사단 의무대 실려가고... (사단 의무대에서 그러더라고요. 이 짬밥 먹고 과로로 쓰러져서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고.. ) 그래도 일이 좋았어요. 중대장은 별로였지만 2소대장인 심중위님, 우리 소초장인 박중위님, 행보관님, 부중대장이었던 박중위님, 이중위님이 너무 잘해주셔서 그분들 보며 일했죠. 특히 행보관님때문에 제 인성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보관님은 참 군인이고 진정한 리더고 이시대 최고의 사나이었어요. 만화 멋진남자 김태랑에 나오는 김태랑 같은 사나이..

변심한 애인을 붙잡겠다고 탈영이라도 할거라고 눈을 부라리던 나이어린 동기를 위해 포상휴가증을 위조해서 휴가 내보내줬다가 걸려서 군장도 돌고.. (근데 이 때 영창 갈뻔 했는데 행보관님이 "대대에서 영창 서류 칠줄 아는 놈이 이놈밖에 없어서 다른 중대에서도 다 서류 치러 오는 판에 지가 지손으로 영창서류 치고 가면 얼마나 불쌍하냐." 라며 만류해서 제 포상휴가증 대신 한장 반납하고 군장 일주일 돌고 끝났죠. 다행히. 후임 중대장님이나 다른 간부 분들도 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지금 생각하면 미친짓이죠. 아무리 그래도 위조를... 근데 그 동기의 눈빛이 너무 애절해서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라서 뭔가에 홀렸었나봅니다.)
예전에 유게에 썼던 '파란만장 행보관' 같은 일들도 겪고.. 북한군과 실랑이도 벌이고 (직접 벌인건 아니고요. 저는 계산병 보직을 겸하고 있었으니 준전시 대기포상태.....) 잠깐이지만 소초 px 도 운영해보고 (그런데 정전이 수시로 되어서 냉동식품이 상하는 통에 부대원들이 상한 냉동을 먹고 단체로 포..포풍설사... 를 하는 바람에 황금마차로 바뀌었어요) 그 척박하고 험한 곳에서 시를 써서 병영문학상 당선도 되고 사단 회지에도 실려서 사단장님한테 직접 휴가증도 받아보고.. 그랬네요.

말년휴가 날 내리던 폭설.. 그 폭설을 뚫고 시내 터미널까지 뛰어가서 서울로 차타고 왔는데 저녁 9시...... (보통은 11시면 옵니다.)
그리고 제대하기 전날 "자네 말뚝박지 않겠나" 라고 권하시던 섬뜩한 대대장님의 한마디. 제대하는 날 아침에 폭설이 또 와서 -_-
대대장님 면담 하면서 또 말뚝 박으라고 -_-....  동기와 함께 차타고 위병소 나오며 사진 같이 찍고, 그리고 다시 볼 수 없었던 군대 안에서의 사람들. (물론 3명은 아직도 봅니다. 그중 한명과는 의형제 수준...)

그리고 2006년부터 2011년까지의 동원, 동미참, 향방작계, 소집점검, 학교예비군 훈련들.


이젠, 다 안녕이네요.

오늘 부대에서 나오는데 기간병들이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를 해주더라고요. 물론 그네들이야 그거 하기 엄청 귀찮을거고 시켜서 마지못해 한거겠지만 마지막 예비군 훈련 퇴소하는 저는 그 말을 들으니 뭔가 울컥 하더라고요. 마치 제대하던 그 날처럼. 뒤를 돌아 모자를 벗어 위병소에 경례를 하고 (위병들은 쟤 왜저럼? 크크크" 했겠네요) 돌아섰어요.

이렇게 제 20대가 떠났습니다. 뭐 올해 서른이긴 하지만.. 심리적인 20대가 끝났다고나 할까요.


군대에 곧 가실 분들, 아직 복무중이신 분들. 건강히 잘 마치세요. 가서 좋은 인연 많이 만드시고 악연이라고 하더라도 무심히 대하면 악연이 아니게 되니 항상 잘 참으시고요. 배울 수 있는 것들, 특히 사회생활에 대한 것은 정말 많으니 자신의 장점을 잘 발휘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단점을 잘 발견하기도 하는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신다면 나중에 사회생할 하실때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때는 제가 여러분들을 지켰지만 이제는 여러분들이 저를 지키고 있으니, 그 노고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처럼 올해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맞이하신 분들께, 모두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이 고생한 제 청춘, 20대의 저에게 수고했다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안녕히.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27 03:37)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1/08/25 00:46
수정 아이콘
야 정말 쉽지 않은 인연을 찾으셨네요! 군대에서 전역하고 곰신님과 결혼이라니! 축하드립니다!
11/08/25 00:47
수정 아이콘
아 부럽네요.. 전 이제야 미지정 3년차 훈련 끝냈는데요
어찌나 1년에 5일이 귀찮은지 예비군만 생각하면 갑갑하네요;;
Darwin4078
11/08/25 01:24
수정 아이콘
37에 아직도 예비군 1년 남은 이 잉여스런 예비군 6년차는 그저 웁니다. ㅠㅠ
t.sugiuchi
11/08/25 01:31
수정 아이콘
내년에 예비군 시작인 저는 어찌하란 말입니까 엉엉..
힘들었던 군생활이었지만 지난 일이 되어버리니 그래도 좋은 기억들이 많이 떠오르더군요. 고작 전역한지 반년도 안되었건만..
11/08/25 02:05
수정 아이콘
전 전역한지 3년하고도 반이 지났는데 아직도 빌어먹을 작전병생활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한글 단축키 하나씩 까먹을때마다 좋아하고 있는데 취직하면 또 기억을 해내서라도 써야될테니까..... 그와 얽힌 여러 안좋은 기억들 되살아날까봐 무섭네요.
11/08/25 04:28
수정 아이콘
우와!! 결혼 축하드려요!! 군대2년을...
군대관련글을 잘 읽지 않지만 꽤 흥미있게 읽었네요..
이상 동원2년차 올림...아 동원...하.....갈때마다 비나 잔뜩 왔으면..
삼정kpmg
11/08/25 10:44
수정 아이콘
혹 03년 12월 22일 군번이신가요? 하하 저와 입대 동기신듯! 전 60mm구형 주특기로 후방으로 갔습니다만..
제대하고, 시험준비 3년하고.. 이제 취직한지 1년여쯤 된것도 저와 매우 비슷하네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게 잘 사시길!
11/08/25 13:06
수정 아이콘
아 7사단 선배님 만나니까 반갑네요 저는 07군번 5연대 2대대 나왔습니다 흐흐
그리움 그 뒤
11/08/25 14:11
수정 아이콘
예비군이 끝났다니 참... 부럽네요
나이 40에 아직도 예비군 5년차라... 내년에도 예비군 훈련 나갈 생각하니....휴....
11/08/25 14:46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네요 크크
저는 8연대 29였습니다
자도 gop에서 전역할때 폭우로 거의 기어서 내려왔었죠 ^^ [옵부심]
the hive
11/08/25 19:39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습니다 흐흐
SCVgoodtogosir
11/08/28 00:18
수정 아이콘
헐 이게 여기 왜 왔나요 헐헐헐;;;;;;
사미르나스리
11/08/28 10:31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축하드립니다 에겔 입성!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385 (08)소소한 답사이야기)잊혀진 신화를 찾아 익산으로 [10] happyend4281 08/08/31 4281
1384 [잡담] 글쓰기 버튼에 관한 잡설 [2] 28살 2학년3330 11/09/04 3330
1383 레바논 전 보고 느낀 점 적어봅니다 [38] 생선가게 고양이7013 11/09/03 7013
1382 [연애학개론] 밀당의 기본 [35] youngwon6923 11/09/02 6923
1381 단종애사 - 4. 숙부와 고립무원의 조카 [26] 눈시BB4003 11/09/02 4003
1380 SKY92님 불판 모음집 [11] OrBef4193 11/09/04 4193
1379 lol, 리그 오브 레전드)euphoria의 챔프 가이드 이모저모 #1 Range AD편 (2/2) [18] Euphoria4222 11/08/22 4222
1378 [해외축구]아스날, 클럽의 구심점과 치고 나갈 타이밍. [63] 대한민국질럿6375 11/09/02 6375
1377 고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한 조언. [15] 凡人6057 11/08/31 6057
1376 (08)너의 '무기'가 되어줄 수 있어 기쁘다! [23] 네로울프7479 08/06/27 7479
1375 (08)1100만원짜리 광고를 사고 싶습니다. [124] 분수8843 08/05/29 8843
1374 (08)경쟁의 묘미-슬램덩크가 재미있는 이유 [18] 총알이모자라7291 08/01/08 7291
1373 [연애학개론] 이런 여자 만나지 마라1 - 솔직하지 못한 여자 [29] youngwon10002 11/08/27 10002
1372 좁은 세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우연. [9] nickyo7162 11/08/27 7162
1371 (08)雷帝 윤용태 [22] 신우신권6895 08/10/31 6895
1370 (08)그저, 안기효 응원글,, [30] 라툴5958 08/10/27 5958
1369 (08)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2009 1Round 3주차 Report (스크롤 압박 주의) [17] Asurada1114645 08/10/23 4645
1368 마지막 예비군 훈련 [20] SCVgoodtogosir5160 11/08/25 5160
1367 [쓴소리] 정신승리법 [25] The xian7426 11/08/24 7426
1366 I am a Gamer (본문 수정) [10] Love.of.Tears.6439 11/08/21 6439
1365 [EE 기념] 율곡 이이 下 [26] 눈시BB4409 11/08/22 4409
1364 [EE 기념] 율곡 이이 上 [28] 눈시BB5519 11/08/22 5519
1363 스타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요?? 상황판단이 잘 되시지 않는거겠죠.( 부제 : 하,중수를 위한 글) [31] Rush본좌5984 11/08/21 598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