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 시끄럽다 싶으면 그냥 끄세요. 분위기 맞출 만한 게 찾기 어렵네요.
일단 외쳐! _-)/
그 분과 엮고 싶지만 이이의 경우는 이름과 달리 1위만 하고 지내서 말이죠 ( - -);
아무튼 2x2x2월 (x도 두 개) 22일 황ㅛ일을 앞두고 2시 22분 황시를 기념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pgr에는 글 올린 시각이 안 나오는 게 아쉽네요.
+)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좋은 내용이지만 물론 읽지는 않을 내용은 담지 않겠습니다. 한 번 공부해 보고는 싶은데 들여다보는 것만 해도 어질어질하네요 ( - -); 이해도 못 했는데 쓰는 건 좀 그렇죠.
+) 왜 저번 글에 안 썼는지 모르겠는데 pgr에서 악플에 시달리는 꿈을 꿨습니다. 뭘까요 이거 orz;;
1. 구도장원공
이이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장원만 아홉 번 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붙은 이름이 구도장원공입니다. 당시 과거제는 생원과, 진사과를 거쳐 대과로 가는 단계였는데 그것도 각기 초시와 복시로 나뉩니다. 여기에 대과에는 전시가 따로 있어서 최종 관문이 되죠. 이걸 모조리 장원으로 넘긴 겁니다. 진사과 초시에는 13살 때(!) 한 번, 29살 때 한 번 했고, 여기에 특별시까지 장원을 함으로써 총 9번이 달성된 거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천재성이 발휘됐다고 합니다. 한글도 아니고 한문을 말을 배움과 동시에 배웠다고 하죠. 세 살 때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지고 뭐 같냐고 하니까 나온 답이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이었습니다. 옛날 시에 있던 걸 말 했다고 하네요.
16세 때 그녀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습니다. 3년 상을 마친 그는 홀연히 절로 떠나죠. 의암이라는 법명까지 받은 걸로 보아 머리도 깎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를 1년, 유교에 다시 뜻을 가져 산을 내려옵니다. 이 일은 후에 두고두고 욕 먹는 이유가 되죠. 그의 행장에서도 절로 들어간 걸 딱히 숨기진 않았지만, "이단이 잘못된 걸 깨닫고 버렸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나 더 재밌는 건, 명종 시절에 그가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았던 승려 보우를 욕 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거죠. 불교를 아예 버리긴 한 모양입니다.
29세. 그는 장원을 휩쓸며 마침내 관직에 들어갔고 선조 1년,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됩니다. 다음 해에는 교리로 올라가죠. 그의 나이 34세 때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선조를 만납니다.
2. 경장
"민생들의 극도한 폐해를 바로잡으려면 옛법을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전하께서 그런 옛법을 그대로 지키고 경장하려 하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선치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선조 7년 2월 1일)
"상께서 매양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기 때문에 끝내 실효가 없었습니다.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선조 7년 2월 29일)
"반드시 경장(更張)한 뒤에야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형세입니다." (선조 8년 6월 24일)
"(경장(更張)하자고 하면 시끄러워서 왕이 일 일으키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이런 것을 염려하여 태평지치를 구하는 마음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선조 9년 2월 10일)
"(전략) 경장(更張)할 생각이 적으시고, 신하된 자들은 (중략) 감히 경장하자고 주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선조 수정 7년 1월 1일)
"어리석은 신이 번번이 경장(更張)의 말을 올리기 때문에 전하께서 매우 듣기 싫어하고 계시는 실정입니다" (선조 수정 11년 5월 11일)
헥헥 -_-; 뭔가 많죠? 이 정도면 선조가 싫어할 만도 합니다. 뭔 일이든 무조건 경장 경장... 경장은 간단히 말 하면 개혁입니다. 갑오개혁도 갑오경장이라 불리죠. 선조 초부터 그는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를 다 뜯어 고쳐야 된다는 주장을 계속 했고, 7년에 이르러서는 "경장"이라는 말로 구체화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 늘 하던 것처럼 사직이 반복되죠. 그가 선조의 신임을 받은 건 이조 판서에 임명된 선조 15년 때부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죠.
3. 동서 분당
(1) 분당의 시초
이 즈음 시작된 것이 바로 사림의 분열이었습니다. 선조 초부터 조정에 남아 있던 구신들은 노당, 신진 사림들은 소당이라 불렸죠. 소당이 보기에 노당은 윤원형 등을 막지 못 한, 사라져야 할 수꼴일 뿐이었습니다. 노당은 그런 상황에서도 강직하게 조정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죠. 이 대결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노당의 영수라 할 만한 이준경이 죽은 것이죠. 그 후 노당은 급속히 밀려나고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제자와 기대승을 비롯한 젊은 층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죠. (이황과 기대승 같은 경우 선조 초에 올라왔다가 노소 갈등 과정에서 사직하고 물러납니다)
이준경은 죽기 전에 선조에게 네 가지를 상소하는데, 그 중 네번째가 미래를 예언한 듯 한 내용이었습니다.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 한 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중략)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직은 붕당이라는 말이 반역과 다름 없는 의미로 쓰일 때였습니다. 조광조가 죽은 이유도 그것이었죠. 선조도 놀라고 대신들도 놀랍니다. 이이 역시 이를 크게 비판합니다.
"이준경이 죽을 임시에 진언하면서 붕당을 깨뜨리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이준경이 사림을 해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가 오늘날 한 말로 보면 지난 해에 떠돌던 말이 어찌 헛소리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 수정 5년 7월 1일)
"옛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선했지만 오늘날은 죽을 때에도 그 말이 악합니다" (동고년보)
택도 아닌 소리고, 기묘사화 때처럼 사림을 없애려고 한 말이라는 거였죠. 하지만... 불과 2년 후 그 일은 현실이 됩니다. 선조 수정 실록에서도 이를 "예언하였다"고 적고 있죠.
선조 7년,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 정랑 자리가 비었습니다. 유력했던 사람은 김효원이었죠. 이 때 딴지를 건 사람이 있었으니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오빠인 심의겸이었습니다. 그는 김효원이 윤원형 집에 살던 적이 있다면서 반대하죠. 반격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필 김효원의 후임으로 거론된 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었죠. 김효원은 반대했고, 사림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서인, 김효원을 지지한 측이 동인이었죠. 그 많은 사화를 거치고 제대로 정권을 잡자마자 한 게 분당이라는 게 참 웃기죠.
전체적으로 보면 동인이 유리하다 못 해 대다수였습니다. 동인에는 서경덕의 제자 허엽, 이황의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 조식의 제자 정인홍 등 엄청난 스승 빨이 있었거든요. 반면 서인은 학문으로서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스승이 없고 소수였습니다. 애초에 심의겸이 외척이었으니 더 욕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 때의 서인은 그저 심의겸을 보호하는 소수의 무리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이도 있었죠.
이이의 입장은 이랬습니다.
"심ㆍ김 두 사람은 모두 학문하는 선비들이니, 흑ㆍ백과 사ㆍ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진정으로 틈이 벌어져서 기필코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이로 인해 조금 사이가 벌어지고 근거 없는 말들이 오가느라 어지러워서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다 외직으로 내보내어서 쓸데없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하겠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그 사유를 아뢰어야 하겠소"
이 말을 들은 우의정 노수신은 (우의정이나 되는 양반에게 말 할 정도면 영향력이 컸긴 한 모양입니다) 그들을 잠시 지방으로 보내라고 건의하는데 위의 얘길 보면 알 수 있듯 이이는 이 상황에서도 "그냥 다툼일 뿐이다"고 진정시키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후 그의 말이나 제자들의 말에서도 일관되게 이런 입장이 나타나죠.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돼야 말이죠.
이 때 선조는 심의원은 개성 유수로, 김효원은 경흥 부사로 보내는데 위치가 정말 극과 극이었죠. 아무래도 외척이긴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싶은데, 이이는 김효원이 병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가까이 옮기길 건의합니다. 이에 따라 심의겸은 전주로, 김효원은 삼척으로 가게 되죠. 그나마 거리가 비슷해졌네요.
하지만... 이 때문에 이이는 양 쪽 모두에게 욕 먹게 됩니다. 서인에게는 김효원을 가까이 옮기게 했다는 것으로, 동인에게는 애초에 변방인 경흥까지 보내게 된 이유가 이이에게 있다는 것으로요. 서인인 정철은 김효원을 배척하라고 권했지만 이이는 듣지 않습니다. 언어 과목의 최종 보스답게 그는 시를 지어 주죠.
그대의 뜻이 산과 같아서 끝내 움직이지 않는데 / 君意如山終不動
내 가는 길은 물과 같으니 언제나 돌아올꼬 / 我行如水幾時回
한편 동인은 동인대로 이이를 미워하게 됩니다.
"세상에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없소. 공이 요사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시비를 알지 못하고 양쪽 모두 온전히 하려고만 하니 인심이 불만스럽게 여기오"
이런 말에 그는 이렇게 답 했다고 하죠.
"세상에는 진실로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있으니, 백이ㆍ숙제가 서로 왕위를 사양한 것과, 무왕과 백이ㆍ숙제가 서로 합하지 않은 것은 곧 둘 다 옳은 것이요, ‘춘축 전국 시대의 싸움은 둘 다 그른 것이오. 요사이 심ㆍ김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마침내 그들 사이의 알력으로 조정이 불안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둘 다 그른 것이오."
양 쪽이 극이 되면 될수록 가운데에 몰린 사람은 욕 먹기 마련이죠. 하지만 이이는 이런 상황을 최대한 타개해 보려 했습니다. 특히 동인 강경파 이발과 서인 강경파 정철에게 매번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두 사람이 의논을 화합하고 한마음으로 조정한다면 사림이 무사할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그는 최대한 중립에 서서 양 쪽을 화해시키려 했고, 싸우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양비론은 지금도 그리 통하지 않고, 중립을 자처하는 이는 다수에게 반대편으로 몰리게 마련이죠.
(2) 이이, 성혼의 당
당시 이이에게 힘이 되었던 이는 백인걸, 박순, 성혼 등이었습니다. 백인걸은 그가 중이었다가 돌아왔음에도 개의치 않고 받아들였고, 적극적으로 천거했습니다. 박순은 서경덕의 제자로 한참 후배인 이이를 존경하였고, 열성으로 도왔죠. 성혼은 그의 친구로 그에게 큰 힘이 되었죠. 이외에도 정철 역시 그와 대립하면서도 친분을 유지했습니다. 이이도 그가 성격은 독해도 능력이 괜찮다면서 칭찬하죠. 그리고 이들 모두는 서인으로 분류됩니다.
동인에서 그와 친했던 것은 이발이었습니다. 그 역시 동인 강경파임에도 친분은 여전했죠. 김우옹도 그와 뜻을 같이합니다. 그 외에 류성룡 등도 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에 동조해서 서인에게 온건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동서의 대립은 계속되었습니다. 동인은 서인 윤두수 형제가 뇌물을 받았다고 탄핵하면서 더 나아가 심의겸을 탄핵하려 했습니다. 이발, 정인홍 등 강경파였죠. 이이와 성혼은 이를 막으려 했습니다. 심의겸의 힘은 이미 약해졌으니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다는 거였죠. 정인홍은 이에 대응해 사직하고 낙향하려 했고, 이발은 이이를 설득합니다. 이이도 수긍하고 심의겸 탄핵 상소를 짓게 되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이가 쓴 글에는 심의겸 자신에 대한 것만 있었지 다른 이들에 대한 게 없었습니다. 또 "여기에 다른 말을 덧붙여서 의혹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것을 말 하며 정인홍에게 이를 다짐 받습니다. 하지만 정인홍은 여기에 자기의 생각을 덧 붙이죠.
"사류를 끌어 붙여서 명성과 위세를 조정한다"
심의겸 혼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당"을 이루었다는 거였죠. 당연히 선조는 따져물었고, 정인홍은 한 번 뺀 후 "정철, 윤두수, 윤근수" 등을 말하며 이들이 "당"을 이루었다고 대답합니다.
이이는 "정철은 절개 있는 선비고 내가 전에 그를 칭찬했는데 이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라고 하며 그것을 취소하라고 요구합니다. 정인홍은 한 발 물러서서 "친분은 두터웠지만 사적으로 당을 이루지 않았다"고 하죠. 그리고 낙향해 버립니다.
일은 커졌습니다. 동인은 정인홍이 무슨 죄가 있냐면서 연일 상소를 올렸고, 이에 밀린 이이와 정철도 사직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동인에게 있어서 이이는 중립인 척 하면서 심의겸을 편 드는 무리가 됐을 뿐입니다. 선조 14년, 이제 동-서 분당은 이제 심의겸과 김효원 둘의 문제를 벗어났습니다.
사실 동인이 이이를 좋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스승의 주장을 신봉하게 되는 게 유학자의 특성이죠. 하지만 이이는 이와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황을 존중하기는 했으나 그의 틀린 점을 지적하고 "자품과 정신이 옛 사람에 미치지 못 한다"라고 하여 그 제자(김성일)의 미움을 샀고, 서경덕도 비판하였습니다.
자신의 스승 백인걸에 대해서도 "기가 세고 글이 거칠다"고 평하고 친구 성혼에 대해서도 "학문은 나보다 낫지만 재주는 못 하다"라고 한 걸로 봐서 (그것도 임금 앞에서 - -; ) 이런 건 그 자신의 성향으로 보입니다. 겸손이 미덕이고 스승을 신격화 하는 상황에서 이런 건 왕따의 지름길이죠.
선조 15년. 선조는 그를 이조 판서에 앉힙니다. 선조는 바보가 아니었죠. 그는 재위 내내 동서인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역시 이이를 기용해 동인을 견제하려는 것이었겠죠. 그에 맞춰 동인의 타겟도 바뀝니다. 이제 서인은 "심의겸과 아이들"이 아니라 "이이와 성혼의 당"이었습니다.
반면 이것은 그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의 주장과 열정이 이 때 제대로 나타나죠. 9월 1일에 그가 상소한 내용 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3년간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세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신에게 기망한 죄(임금을 속인 죄)를 내리소서"
개혁에 대한 의지, 이것이 성공해야 나라가 산다는 강력한 승부수였죠. 선조도 여느 때와는 다른 강력한 지지를 보여 주었구요.
하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 한 3년 후도 보지 못 하고 눈을 감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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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졌군요. 뒷편은 황황시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8-23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