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08/24 04:10:03
Name
Subject 그녀들의 졸업식

올림픽 야구 대표팀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진심이란 것에 더, 혹은 덜 이라고 재어볼 수 있다면 아마도 너무나도 더욱더,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동메달을 축하합니다.

저는 사실 중학 시절 아주 잠깐 핸드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달리, 핸드볼 공은 작고, 몹시 단단합니다.

하얗고 커다란, 그리고 새 가죽과 에나멜 냄새를 풍기는 축구공과 농구공들 사이에서

여러 해 바뀌지 않아 때묻은 잿빛 조그만 공들을 처음 끄집어냈을 때가 기억나네요.

손으로 저렇게 던지면, 슉 하고 들어가 버리는 게 아냐? 라고 생각했었지만

커다란 사내아이들이 지키고 선 골망을 흔들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금방 깨달았습니다

핸드볼의 슈팅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아마도, 공으로 하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서, 가장 많이 바닥에 넘어지는 슈터는 핸드볼의 슈터일 겁니다

가장 다루기 쉬운 손으로 던지고 막기 때문에, 슈터는 전신을 허공에 던지다시피 힘을 실어서야

비로소 키퍼의 몸에 비하면 턱없이 좁아 보이는 그 골망을 가를 정도의 스피드를 얻게 되죠.

날렵한 반바지는 하루만에 포기하고, 수없이 까지는 무릎을 위해 한여름에 우리는 긴 바지를 입곤 했습니다.

그래야 운동장 흙바닥에 던져지는 자신의 몸 대신, 앞으로 곧게 뻗어나가는 자신의 공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요.

처음에는 크다는 이유만으로 키퍼에 자원했던 동기 녀석이 시합 전날, 샤워를 마치며 돌아섰을 때

소년답게 하얗고 근육이 채 자리잡지 못한 그 팔다리에 무수히 아로새겨져 있던 둥근 멍 자국들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첫 시합에서, 우리는 턱없이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의 마지막 시합이기도 했죠.

쉴새없이 주고받는 핸드볼의 공수교대에서, 3점 이상의 점수 차이는 아득할 만치 큽니다

그리고 이미 십여 점이 벌어진 그 아마추어 핸드볼 경기를 마치고 멍하니 주저앉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십여 명의 우리 까까머리 중학생 모두가, 한 번씩은 서로의 손을 터치하고 코트에 섰었다는 걸요.

그해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같이 나뒹굴었던 우리 모두가

온종일 연습해왔던 것처럼 서로의 공을 한번씩 받아보고, 서로에게 패스를, 혹은 응원을 보낼 수 있었다는 걸요.

젊은 시절 무명의 핸드볼 선수였던 검은 얼굴에 멋대가리 없는 농담을 던지던 그 코치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그토록 어이없어 보이는 급조된 팀의 첫 경기에, 후보 선수들을 아낌없이 코트에 세웠던 것일까요.

매끄러운 LCD모니터 너머로 헝가리와의 3,4위전을 지켜보면서

저는 문득 그때, 경기 종료의 호각을 들으며 코트로 달려나와 우리에게 웃어 보이던 그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무려 여섯 골 차이, 한국의 승리는 확정적이었고, 벤치의 헝가리 선수들은 이미 패배를 예감한 듯 눈가를 붉히고 있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일 분 남짓, 그리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팀의 작전 타임이 선언됩니다.

항상 두 눈을 치켜뜨고 코트를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임영철 감독이 메달을 목전에 두고,

손짓을 해가며 선수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혼잣말처럼, 자신의 팀에게 하는 명령도 아닌 것처럼, 자신에게 되뇌듯이 마지막 작전지시를 내립니다.

너희가 이해해줘야돼. 마지막이야. 선배들 마지막이야. 너희가 이해해 줘야 돼.

성옥이, 정호, 영란이, 몇 명이야, 몇 명이야.. 너희들이 나가...

십대에 태극 마크를 단 후, 이제는 자식과 남편들을 남겨 두고 다섯 번째 올림픽, 마지막 올림픽에 나선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아줌마 선수들을 코트에서의 메달을 향한 마지막 일 분을 위해 하나씩 이름을 불러 내보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과 몇 미터 떨어져, MBC의 중계석에 앉아 울먹이며 밀리지 말라고 외치던

오랜 전 동료, 임오경 해설위원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제가 뛸 때는 이 기분을 몰랐어요, 이걸 몰랐어요 라며 울먹이던 오랜 한국의 에이스, 임오경선수가

자신과 함께 어깨를 겯고 달리고 넘어지고 던지던 동료들의 모습에,

이제 마지막 메달을 위해 일 분이 남은 코트에 들어서는 그들을 보며 넘치는 눈물로 마이크를 감싸쥐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리고. 동메달. 금빛보다 찬란한 동메달.

이승엽의 야구처럼, 박태환의 수영처럼 스피커를 가득 메우는 환호도, 열광도 없었습니다.

단지 침묵하는 캐스터와 끅끅대는 임오경 해설의 울음만이 그 순간을 가득 채우고 흘러갔습니다.

사랑합니다, 여자핸드볼, 사랑합니다를 울먹이며 반복하던 십여 년차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선수와

그녀의 오랜 동료들의 졸업식이 눈물처럼 반짝이며 베이징의 핸드볼 코트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오래 달려온 아줌마 대표 선수들. 정말로 사랑합니다.

당신들은 오늘, 어떤 금빛보다 찬란합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9-22 10:04)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bigaonda2
08/08/24 04:35
수정 아이콘
경기를 보면서도 울지 않았었는데...ㅠㅠ
08/08/24 05:14
수정 아이콘
kbs와 mbc를 돌려가며 봤는데 kbs최승돈 캐스터와 mbc임오경 해설위원 두분 다 우시는걸 보니 너무 슬프더군요..
08/08/24 10:57
수정 아이콘
아흑..ㅠㅠ
Beginning
08/08/24 11:13
수정 아이콘
마치 영화처럼.. 아니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고 자랑스러운 우리 대표팀 선수들입니다!
08/08/24 11:15
수정 아이콘
어흙... 수고하셨습니다...
morncafe
08/08/24 11:25
수정 아이콘
적어도 올림픽 관련 글 중에는 '에이스 게시판'으로 가야할 글이네요. 직접 경기를 볼 수는 없었지만, 님의 글이 모든 걸 얘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08/08/24 11:38
수정 아이콘
경기를 보면서도 울지 않았었는데...ㅠㅠ (2)
다시 한번 읽고 싶어도 겁이 나서 못 읽고 있습니다... 펑펑 울까봐...
08/08/24 12:45
수정 아이콘
정말 마지막 1분여를 남긴 상황에서 그 작전타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스포츠를 보면서 감동받은 적은 많지만 감동의 눈물을 흘린 적은 핸드볼3,4위전이 처음이네요..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신 핸드볼선수들.. 정말 고맙습니다^^
여기로와
08/08/24 15:21
수정 아이콘
다큐를 본 다음이어서 그런지 더 눈물이 나더라구요. 잘싸웠습니다. 고맙습니다.
[LAL]Kaidou1412
08/08/24 17:25
수정 아이콘
MayBee님// 그렇지요..그 작전타임에서의 감독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눈물 날려고 하더군요.. 이번 올림픽에서 모두들 영웅이지만 전 그중에서도 여자 핸드볼 선수들을 뽑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궁을 가장 좋아했지만, 그래도..지금까지의 과정들을 보면..여자핸드볼 팀만큼 불행했던 팀들이 있나요?...)
sometimes
08/08/24 21:08
수정 아이콘
저도 임오경 해설 우는거 보고 너무 심하게 우신다~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따라 울었어요 ㅠㅠ
영화였다면 안 울었을텐데... 현실이고, 체험했던 사람이 감동해서 우는 모습을 보니 안 울수가 없더라구요..
정말 여자 핸드볼 대표팀 너무 멋졌습니다.
Ma_Cherie
08/08/24 21:16
수정 아이콘
ㅠㅠ 추천..ㅠㅠ
08/08/25 00:36
수정 아이콘
이 글 다시 보니까 여기 있을 글이 아니에요..ㅠㅠ

에게로!
Hidden Box
08/08/25 12:16
수정 아이콘
자리를 옮겨도 될만한 글이네요..ㅠㅠ
08/08/25 13:32
수정 아이콘
에게로 안가나요?
08/08/25 21:42
수정 아이콘
졸업 축하드립니다..
에게로-
산들바람-
08/09/22 14:20
수정 아이콘
ㅠ_ㅠ 훌쩍
Hellruin
08/09/22 21:30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나네요.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런던에서는 꼭 금메달을 목에 거시길 바랍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282 So1 <2> [27] 한니발11423 08/12/18 11423
1281 야구를 통해 유추해본 스타크래프트... 1. [28] 피터피터8379 08/12/18 8379
1280 [L.O.T.의 쉬어가기] Always be With you [13] Love.of.Tears.6724 08/12/12 6724
1279 하얗게 불태워버린 후. [27] legend11568 08/12/09 11568
1278 제2멀티로 보는 향후 관전 포인트 [22] 김연우9767 08/11/28 9767
1277 So1 <1> [23] 한니발11837 08/11/15 11837
1276 안생겨요 Rap ver. [39] ELLEN11729 08/12/04 11729
1275 6룡(龍)의 시대 [41] kama17892 08/11/12 17892
1274 [서양화 읽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45] 불같은 강속구11273 08/11/06 11273
1273 마재윤 선수 이야기 [97] CR203219964 08/11/04 19964
1272 미래로 가는 길 [20] 김연우12719 08/10/05 12719
1271 라바최적화의 힘과 저그의 새로운 빌드 [108] 거울소리20241 08/09/24 20241
1270 내 인생을 바꿔 놓은 사람, NalrA 그를 보내며.... [34] honeyspirit13681 08/09/12 13681
1269 사라진 마에스트로 [24] 김연우17312 08/09/11 17312
1268 그녀들의 졸업식 [18] 17241 08/08/24 17241
1267 [와인이야기] 와인을 먹어보자! [41] kikira7967 08/08/15 7967
1266 [서양화 읽기] 밀레의 <만종>은 살바도르 달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 모방과 재해석 그리고 오마주4 - [15] 불같은 강속구8681 08/07/23 8681
1265 '올드' 이윤열에 대한 잡담. [26] 구름지수~11913 08/09/02 11913
1264 엔트리 후보제 -가위바위보~ 하나빼기 일 [36] 김연우7827 08/08/30 7827
1263 마재윤, 강하니까 돌아올 수 있다. [38] 구름지수~9938 08/08/06 9938
1262 [음악과 이런저런 이야기]뛰대리의 새로운 시도 [18] 뛰어서돌려차8189 08/07/18 8189
1261 이대호 이야기 - 누구나 슬럼프는 있다. [34] 회윤13324 08/07/18 13324
1260 [에버배 결승 감상]박성준, 존재의 이유 [11] 보름달10866 08/07/12 1086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