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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6/06 20:16:07
Name 글곰
File #1 20190528_203609.jpg (1.46 M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열다섯째 날, 마지막


  저녁에 비바람이 거세질 것이라는 예보가 있더니 배 시간이 앞당겨졌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열 개쯤 되는 크고 작은 짐보따리를 죄다 차에 실었다. 트렁크뿐만 아니라 조수석까지 짐으로 그득하다. 숙소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서귀포를 떠났다. 제주까지 오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바퀴 달린 창고로 변해버린 차를 늦지 않게 배에다 올려놓았다. 출항하기 삼십여 분 전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완도까지 한 시간 이십 분의 운항이 무탈하기를 바라며 가족들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빗방울이 더욱 세차졌지만 다행히도 파도는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배는 생각보다 더 많이 흔들렸다. 쾌속선이라 그런 모양이다. 출발 전에 멀미약을 먹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배의 출렁임에 따라 위장이 함께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배에서 내가 보름 동안 쓴 글들을 대강 훑어본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민망하다. 얼굴이 화끈해져 오는 것이, 시간에 쫓기고 귀차니즘에 시달리며 대충대충 쓴 티가 너무 난다. 두서도 없고 균형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다. 쓰려고 했지만 깜빡하고 넘어간 부분도 있고 반대로 왜 썼는지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대목도 있다. 전자책 제안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삼분의 일은 대폭 수정하고 삼분의 일은 완전히 새로 쓴 다음에나 시도가 가능할 것 같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는 건 역시나 어려운 일이다.

  다행히도 별 문제 없이 완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자 이제야 제주도를 떠났다는 실감이 든다. 보름 살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들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경험이었지만 세상은 원래 예측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는 법 아니겠는가.

  지금은 완도의 작은 숙소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곳에서 하루를 묵은 후 내일이면 공주에 들렀다가 모레면 마침내 서울로 돌아간다.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나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와는 천양지차인, 시끄럽고 요란하지만 동시에 푸근한 도시로. 우리의 집이 있는 곳으로.

  아내는 여행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한다. 나도 동감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잘 살펴보니 아내가 그보다 더 좋아하는 때가 있다. 바로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시점이다. 그 때 아내는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때로는 여행 자체보다 준비하는 과정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아내에게 있어 제주도는 특별한 곳이다. 결혼한 후 네 번이나 제주도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결국 다섯 번째 여행으로 제주도 보름 살기를 감행하고야 말았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나면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할 정도다. 그건 아마도 절반 이상은 진담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여정을 마치면서 여섯 번째가 그리 멀지 않음을 예감한다. 아마도 이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으리라.

  그렇기에 제주도를 떠나면서, 잘 있으란 인사보다는 이 쪽이 더 낫겠다.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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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
19/06/06 20:18
수정 아이콘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
보름은 아니라도 저한테도 세번째 제주도가 있었으면 좋겠네요ㅠ
19/06/06 20:29
수정 아이콘
작년 초 제주도에 갓 돌 된 아들하고 갔었어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산 중턱 호텔에 고립도 되고 렌터카 바퀴도 터쳐보고 비행기 지연돼서 공항에 널부러져보기도 하고 했내요. 음식이 비싸지만 맛있어서 다시가고 싶네요. 방문하신 식당들 몇 개는 메모해 놔야 겠어요.
19/06/09 02:08
수정 아이콘
뭔가...... 엄청나게 인상적인 여행을 하셨군요. 무서울 정도입니다.
19/06/11 18:25
수정 아이콘
크크 눈 막 오는 저녁에 호텔 데스크에 내려가서 저녁먹고와도 될것 같아요?라고 물어봤을때 어이없어하던 직원 표정이 잊혀지지 않네요.
영혼의공원
19/06/06 20:30
수정 아이콘
속보가 계속 올라오던데 무탈하게 마무리 하시길 기원합니다.
19/06/09 02:08
수정 아이콘
호우경보가 내린 완도에 있었지만 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19/06/06 20:33
수정 아이콘
제주도는 22살 이후로 한번도 안가봤군요.. 뭔가 국내여행.. 특히 제주도는 돈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요?

연재글 보면서 한번더 안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제스티
19/06/06 20:41
수정 아이콘
저도 지난주에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제주도 갔었는데, 놀기 정말 좋았습니다.
협재해수욕장이랑 성산일출봉 한라산 마라도 등등을 갔었는데.. 먹을것도 괜찮았구요
다 좋았어요
다음에는 여자친구랑 가보고 싶어요~
19/06/09 02:22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장이 왠지 눈시울을 적십니다. ㅠㅠ 홧팅입니다
aDayInTheLife
19/06/06 23:15
수정 아이콘
제주도.... 안 간지 좀 되긴 했네요. 한 3년 전인가 혼자 갔었는데 스쿠터 타고 갔었더랬죠. 크크 그때 교훈은:
1) 50cc 빌리지 말자
2) 50cc 빌리지 말자
3) 50cc 빌리지 말자
스쿠터 두번째 탄다고 50cc 빌렸다가 너무 느려서...

어느 순간 비슷하게 카페 생기고, 개발되고 하다보니 어느 정도 가보고 싶다가 줄긴 했는데, 비자림같은 숲 갔던거 생각하면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 가끔씩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요새 들어서 크크
19/06/09 02:24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때는 스쿠터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거의 못 봤네요. 예전에는 좀 더 많았던 것 같은데요. 여행의 형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aDayInTheLife
19/06/09 02:47
수정 아이콘
그때 스쿠터 너무 힘들더라고요. 크크 50cc 진동 받아가면서 몇시간씩 타니까 진이 다빠져서... 뭔가 그때도 스쿠터 많이 보진 않았던거 같습니다만... 오토바이 대신의 로망이 있는거 같아요. 홋카이도 스쿠터 일주가 있다는데 언젠간 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흐흐
Je ne sais quoi
19/06/07 01:59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다니고 무사히 돌아가셨겠죠? 다음 여행기도 기대해보겠습니다
유쾌한보살
19/06/07 07:34
수정 아이콘
예고편으로 시작하여 보름동안 빠짐없이 연재..... 그 기록정신에 감탄했습니다.
필요한 정보도 쏠쏠하지만 무엇보다, 글을 읽으며 `글곰님`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더군요.
19/06/09 02:26
수정 아이콘
매일 쓰다 보니 글 하나하나의 퀄리티가 극적으로 하강하는 바람에.... 혼자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콩탕망탕
19/06/07 08:46
수정 아이콘
그간 글에 "재미"가 없진 않았습니다. 재미만 있었던것도 아니구요.. 너도 언젠가 제주에서 오래 살아볼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에인셀
19/06/07 16:10
수정 아이콘
글곰님 연재는 제게 제주도 바이럴이었습니다. 넘나 가고 싶은 것ㅠㅠ 제주도 첫 여행이 아주 좋아서 꼭 다시 가보려고 하거든요. 그때 글곰님 글도 다시 읽어보고 가겠습니다. 짐정리 잘 하시고 집에서 푹 쉬세요.
19/06/09 02:32
수정 아이콘
제주도 다녀오시는 길에 제 글이 도움이 된다면 좋겠네요. 저는 이만 푹 쉬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바람숲
19/06/07 22:05
수정 아이콘
어쩌다보니 2015-16-17 삼년 연속 여름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냈고. 올해도 고민 끝에 제주도를 갈 예정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서점 이야기 카페 이야기 ... 재밌었네요.
19/06/09 02:28
수정 아이콘
네번째 가는 여행이라 해도 무수히 많은 새로움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미나토자키사나
19/06/08 22:05
수정 아이콘
재밌게읽었습니다 뭐랄까 일상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들이 파도처럼 쉴새없이 그렇지만 어느정도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글이었습니다 따뜻하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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