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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6/01 00:34:10
Name 글곰
File #1 20190531_164737.jpg (972.7 KB), Download : 55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아홉째 날, 내일을 위해


  아침에 눈을 뜨기 전부터 날이 궂음을 알았다. 허리가 아프고 몸 전체가 눅진하니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흐린 날이면 신경통으로 고생하는 노인들 이야기가 벌써 현실로 닥쳐오는 나이라니. 시계를 쳐다보니 아홉 시 삼십 분. 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놈이라 차마 꼭두새벽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고, 그냥저냥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억지로 일어났다. 아내와 딸아이가 일어난 시간도 도긴개긴이었다.

  사흘 묵은 식빵을 식칼로 썰어 토스트기에 넣고 구운 후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홍차밀크 잼을 발랐다. 거기다 서니 사이드 업 달걀 프라이와 달짝지근한 커피를 곁들이니 그만하면 충분히 훌륭한 아침 식사다. 설거지를 마친 후 오랜만에 세면대 앞에 서서 면도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와서 면도를 하는 건 두 번째였다. 휴직한 후 가장 편한 건 매일 면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고 나는 제주도에 와서도 그러한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며칠 동안이나 손을 대지 않으면 턱 주변이 워낙 지저분해지는지라 나조차도 최소한의 체면치레만은 빼놓을 수 없었다. 이 또한 내게 양심이 존재다는 명백한 증거다. .

  오늘은 아내가 볼일이 있어 인근의 동녘도서관에 들렀다. 아내는 컴퓨터가 있는 종합열람실로 밀어 넣고 나와 딸아이는 어린이 열람실로 향했다. 작은 동네 도서관이지만 뜻밖에도 어린이 도서가 충실하고 정돈이 잘 되어 있다. 시험 삼아 책 두어 권을 뽑아 훑어보니 여러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이 찾지 않는 도서관이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이 슬픈 공간일 터인데, 이곳 동녘도서관은 다행스럽게도 많은 이들이 들렀다 가는 모양이다.

  책을 보는 아이의 옆에서 미리 준비해 간 테드 창의 단편집을 읽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볼일을 마친 아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두 시였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아이를 설득하여 밖으로 나와 밥을 먹으러 갔다. 메뉴는 돈가스. 가게 이름은 살찐고등어인데 어느 모로 보나 생선구이 가게 같지만 실상은 메뉴가 돈가스밖에 없는 곳이다.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고기의 질이 의외로 괜찮았다.

  식사를 마친 후 인근의 해녀박물관으로 향했다. 해녀를 주제로 하는 이 박물관은 곧 근현대 제주 여성들의 삶을 다룬 공간이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서 물질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간 억척같은 그들의 삶이 자못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러나 박물관에 온 아이의 목적지는 언제나 기념품 파는 곳이기 마련이었다. 박물관 한쪽 구석에 마련된 조그만 가게 안에서 나는 아이와 잠깐 실랑이를 했고, 결국 천오백 원짜리 해녀 종이인형 만들기 체험으로 상호간의 합의를 마쳤다. 손가락에 풀을 묻혀 가며 인형을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했다시피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인형을 소중히 끌어안으며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구겨버린 후 울상을 짓는 것은 아이의 역할이었다. 다행히도 아내가 구겨진 인형과 아이의 얼굴을 동시에 도로 펴 주었다.

  빛의 벙커는 과거 제주도의 국가 기반 통신시설 공간으로 쓰이던 곳을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장소다. 저명한 화가의 그림을 영상 형태로 이미지화하여 공간 내에다 흩뿌리고 그 위에 클래식을 위시한 강렬한 음악을 얹은 방식으로 거대한 지하공간을 가득 메운다. 우리가 갔을 때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주제로 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당히 비싼 요금을 내고 들어가서 한 시간 가량 둘러본 감상은 뭐랄까....... 인상 깊은 포스트모던적인 융합예술과 자기만족을 위한 예술적 허영심 사이의 거대한 간극 속 어딘가에 내가 위치해 있는 기분이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서 있었던 걸까. 하지만 굳이 영상 형태로 재탄생한 그림을 보느니 차라리 명화 도록이라도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싶었던 건 내가 이미 낡아빠진 인간이 되었다는 증명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저녁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치킨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치킨 좀 그만 먹으라고 타박했다. 억울했다. 누가 들으면 삼시세끼를 치킨으로 먹는 줄 알겠구먼. 하지만 아이는 뜻밖에도 집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저녁밥을 차려야 하는 위기에 놓인 나는 아이를 설득하여 외식을 하려 했다. 나의 시도는 장렬하게 실패했고 결국 냉장고에 든 오리훈제고기를 볶아서 몇 가지 밑반찬과 함께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꼭 나쁜 일인 건 아니었다. 결국 아내가 내일은 치킨을 사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내일은 치킨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치킨 말고도 한 가지 소원을 더 빌 수 있다면, 내일 저녁은 하늘이 개었으면 좋겠다. 제주도에 있는 내내 날씨가 흐려서 천문대에 가질 못하고 있다. 제주도를 떠나기 전에 토성의 고리를 다시 한 번 관찰하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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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탕망탕
19/06/01 10:02
수정 아이콘
"살찐 고등어".. 돈까스 맛집.. 기억하겠습니다.
노스윈드
19/06/01 10:10
수정 아이콘
테드창 극한직업에 나왔던 악당이름인데? 했는데 유명한 작가였네요…
19/06/01 22:56
수정 아이콘
아무리 SF업계가 협소하다지만 테드 창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인지도가 없을 줄이야... 흑흑 ㅠㅠ
19/06/01 18:20
수정 아이콘
테드 창..? 창식이???? 아 어라이벌...
4막2장
19/06/01 20:18
수정 아이콘
제 눈이 멈춘곳과 동일한 곳을 지적하시는 군요 크크
Je ne sais quoi
19/06/01 20:29
수정 아이콘
저도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제주와 같은 데는 필요할 거 같습니다. 비싼 돈 들여서 전시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으니까요. 예전에 중문에서 고흐 전시회 갔는데, 실제 유화를 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격차가 제대로 느껴질 거란 생각부터 들었거든요.
19/06/01 22:55
수정 아이콘
순수하게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림 복제화 여러 장 걸어두는 것보다야 훨씬 장사가 잘 되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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