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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5/29 23:02:06
Name 글곰
File #1 사본__20190529_133756.jpg (874.6 KB), Download : 56
Subject [일반] [연재] 제주도 보름 살기 - 일곱째 날, 바람 부는 날이면 바다에 가야 한다


  날은 맑았고 아이는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제안한 원대한 도전에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해 출전 준비를 했다. 수영복. 워터슈즈. 갈아입을 여벌의 옷. 커다란 수건 둘, 돗자리. 그리고 원터치형 텐트까지 모든 것을 구비한 후 우리는 위풍당당하게 출정했다.

  물론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는 법이다. 세계2차 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에게는 철저한 방어 계획이 있었다. 허나 그들은 독일에게 작살나게 얻어맞고 완벽한 참패를 당했다. 그 독일 또한 동부전선에 프랑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심지어 그들의 러시아 침공은 히틀러의 즉흥적인 결정에 가까웠기에 계획 또한 철저하지 못했고, 그 결과 420만 명이 죽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간단하다. 누구나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평대리 해안의 바닷물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차 안에 있을 때는 황홀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자 광풍이 실로 미친 듯 거세게 불었다. 원터치형 텐트는 공중으로 집어던지자 빙글빙글 돌면서 바다를 향해 날아갔고 나는 텐트가 물에 빠지기 전에 붙잡느라 전력질주해야 했다.
  
  픽 여덟 개를 동원하여 텐트를 바닥에다 간신히 고정시켰을 때 이미 텐트의 절반에는 모래가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벌써 바다까지 뛰어 들어갔다 돌아온 아이는 모래와 바닷물로 흠뻑 젖은 채 텐트 안을 뒹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워터슈즈는 진흙으로 가득 차서 걷기 힘들 지경이었고, 텐트는 또다시 모래바람의 세례를 받았으며, 따가운 햇볕을 받은 아내는 햇빛 알레르기로 인한 발진 및 두드러기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야 할 시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평대리 해안에는 샤워시설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모래인간에 가까운 존재가 된 아이의 몸을 수건으로 열심히 털어냈지만 기껏해야 모래알갱이의 절반 정도만이 떨어져나갔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모래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치 나이나, 세금이나, 혹은 빌어먹을 탈모처럼.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텐트를 접으려 시도하려는 순간에서야 나는 내가 원터치형 텐트를 단 한 번도 접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젠가 아내가 내게 미리 연습해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났다.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후회는 늦었다.

  게다가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이 상황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텐트 접기 설명서의 첫 단계를 실행하자마자 텐트는 또다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다행히도 이번에는 공중에서 낚아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햇볕 두드러기가 양 다리로 번지기 시작한 아내는 짜증이 그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 텐트를 버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펼쳐진 텐트와 무거운 가방과 진흙투성이인 아이의 신발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채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가 정말로 텐트를 버리기 전에 내가 구출해야 했다.

  간신히 차에 도착한 나는 트렁크를 열고 텐트를 무작정 쑤셔 넣기 시작했다. 급하면 초인적인 힘이 솟아난다더니, 억지로 힘을 주어 구겨 넣자 놀랍게도 텐트가 모두 트렁크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대략 2킬로그램 정도의 모래와 함께였지만 그건 당장은 사소한 문제였다. 물론 대부분의 큰 문제는 사소한 데에서 비롯되는 법이지만.

  어쨌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간신히 운전대를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이를 바로 욕실에다 밀어 넣은 후 샤워기를 들고 구석구석 모래를 씻어냈다. 그 다음은 모래가 잔뜩 묻은 옷가지를 밖에다 털 차례였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진공청소기를 돌려 모래투성이가 된 집안을 청소했다. 간신히 모래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고 모든 일을 마무리했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였고, 기진맥진한 우리 가족은 컵라면 세 개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철저한 계획 하에 해변에 다녀온 전말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트렁크에서 텐트를 꺼내 설명서를 따라 접는 데는 사십오 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내가 제대로 접은 것인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이 텐트를 다시 펼칠 날이면 어차피 접는 법을 다시 까먹은 지 오래일 테니.

  저녁은 그렇게 유명하다는 명진전복에서 먹었다. 전복돌솥밥이 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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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muzzi
19/05/29 23:30
수정 아이콘
모래라는 것이 꽤 고얀것이긴 합니다. 한때 지구의 끓는 피 속에서 살았던 존재가, 결국 지구밖으로 밀려나와 세월에 져서 잘게잘게 부셔진 원한이라도 사무쳤는지 한번 침입하면 치워도 치워도 사라지지 않고 발가락 사이에 기어이 파고들어 번거롭게 하는 놈들이지요.

하지만 새하얀 그녀석들이 가득한 새파란 바닷물을 두눈 가득 담고오셨을거라 생각하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하얀 백사장과 까만 현무암, 새파란 바다가 너무나 예쁘네요. 주인공인 꼬마 아가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제주도 가고싶어요 ㅠㅠ
(그래도 덕분에 대리만족하며 글올라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비싼치킨
19/05/29 23:33
수정 아이콘
아 오늘편이 제일 재밌네요!! 흥미진진!!
명진전복 진짜 맛있죠 ㅜㅜ
저도 갔을 때 제일 맛있 게 먹었던 게 명진전복이었습니다
19/05/30 23:51
수정 아이콘
전 우와 진짜 맛있다까지는 아니었고 그냥저냥 맛있는 정도라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분명 중간 이상은 가는 가게였지요.
베르기
19/05/30 00:24
수정 아이콘
와 사진 진짜 멋지네요.
19/05/30 00:30
수정 아이콘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소소한 일상과 시트콤의 경계 그 줄타기가 예술입니다.
19/05/30 01:24
수정 아이콘
행복해보이십니다. 부럽네요 ㅠㅠ
풀오름달
19/05/30 09:49
수정 아이콘
저도 글을 이렇게 쓸수있다면 일기를 매일 쓰고싶네요 크크크크크크 넘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재미난글 읿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루트
19/05/30 12:05
수정 아이콘
사무실에서 글 읽으면서 대리만족하는 2인입니다... 사진도 좋네요!
CozyStar
19/05/30 12:28
수정 아이콘
와.... 글 너무 재미나게 쓰시네요 글에 빠져듭니다
요소요소 대박!
콩탕망탕
19/05/30 14:30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1 피할수 없는 존재.. 빌어먹을 탈모..
2 원터치 텐트 처음에 접으려면 정말로 뚜껑 열립니다. 여러번 해봤는데 지금도 자신없습니다.
에인셀
19/05/30 18:25
수정 아이콘
고생하셨지만 아이는 분명 즐거웠을 테고 전복이 맛있으셨다니 성공적인 결말이네요. 다음 글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 기대합니다.
탐나는도다
19/06/04 04:06
수정 아이콘
저도 예전에 한강에서 원터치 텐트 접다가 싸울뻔 한 일이 있어 빵 터졌네요 원터치텐트라는건 싸움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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