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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9/03 23:23:16
Name 지니팅커벨여행
Subject [일반] 첫사랑과의 이별... 그 후
여러분들은 첫사랑을 어떻게 간직(?)하고 계시나요?

어린 시절의 추억인지라 이게 사랑인지, 우정인지, 호감인지, 아님 뭔지...
모를 그런 느낌을 처음 준 사람에 대해서 그냥 '첫사랑'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지난 여름, 첫사랑과 이별하고 와서 한 편으로 소감을 적으려 했다가 글이 길어지는 바람에 실패를 했는데 이제 마무리를 해 보려고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어색한 관계로 저 스스로 거리를 두다가, 아니 거리를 뒀다기 보다는 여자들 앞에서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어졌던 당시의 성격상 다가가지 못했던 거죠.
아무튼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못 보게 되고 나서야 그녀에 대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을 그리워 하였음에도 만나기는 힘들었어요.
고 3때,(혹은 고 2때일 수도 있겠네요, 고 3때는 토요일에도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으니...) 토요일 어느 날 차 안에서 잠깐 마주친 뒤로는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마주쳤던 순간조차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수능을 보고 나서 인터넷이란 걸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얼떨결에 만든 한메일넷 아이디에 바로 그녀의 전화번호가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평생 가지고 갈 아이디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냥 즉석에서 만든 아이디였어요.

이 후, 어떤 새로운 사이트에 가입을 할 때면 이 아이디를 1순위로 고려하곤 했으나, 특별히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른 아이디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재까지 쓰는 그 아이디는 한메일넷과, 자주 들어가지 않는 한두개 사이트 밖엔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붙은 전화번호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현금카드, 신용카드와 같이 숫자 4자리를 암호로 입력해야 하는 곳에서 말이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다가도 가끔은 그녀를 떠올리곤 했어요.

교복을 입고 시선을 회피하며 부끄럽게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얼굴이 제 머릿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사실, 그녀를 딱 한번 보기는 했어요.
바로 2009년 잠실야구장에서 말입니다.

당시 여자친구와 야구를 보러 왔다가, 외야석 한자리에 앉았는데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아니 모자 없이 그냥 온 여자친구에게 내리 쬐는 햇볕을 막기 위해, 즉 모자 하나를 더 사러 가는 도중에 그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친구를 남겨 두고 매점을 향해 뛰다시피 하는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죠.

"지니야..!"

돌아보니 중학교 친구이자 고등학교 때도 알고 지낸 한 녀석이 저를 부르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여자친구가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모자를 사 와야겠고, 그렇다고 이 친구가 아주 친한 친구는 아니어서 제 발걸음은 움직이고 있었어요.

어떻게 왔냐, 어디에 앉았냐며 간단히 인사를 나누다가 그녀석이 대뜸 그러는 겁니다.

"여기 다른 친구들이랑, 유경이도 왔는데..."

손가락으로 일행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더라고요.
거기엔 대여섯 명의 남녀 무리가 있었고, 모두들 제 중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녀도 앉아 있었어요.
근데 저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혼자 남겨둔 여친에게 빨리 모자를 사서 가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고...
물론 십수 년 전에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녀석이 어른 되었다고 달라졌을까요.
그냥 그녀한테 말을 못하니 그녀를 알아봤음에도 어색함+미안함+오랜만에 봐서 낯섬+여자친구 모자 등등을 핑계대며 지나치려 한 것이겠죠.

아무튼 매우 짧은 순간이라 얼떨결에 '안녕' 하고 손을 흔들고는 모자를 사러 도망치듯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10년만에 봤던 첫사랑은 그렇게 야구장 속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7월 28일, 그녀와 공식적으로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뜻밖에도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보이스 피싱.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보이스 피싱으로 금융 사고가 날 것을 우려하여 십년 넘게 사용하던 비밀번호, 바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다른 번호로 바꾸게 된 것이죠 ㅠㅠ
물론 워낙 오래 써 오던 번호이고, 한메일넷에도 남아 있으니 추억은 일부 가져가겠지만,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찾을때 잠시나마 떠올리던 첫사랑의 추억은 이제 그 빈도가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잊혀지고 말겠지요.

여러분들, 금융 사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P.S. : "P.S.가 없는 편지는 이별의 편지래"
다행히도 그녀가 보낸 편지의 한 문구는 아직도 인상적으로 제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 P.S.가 있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요.


@ 지난 글...
1편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52957
2편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52971
3편
https://pgr21.co.kr/pb/pb.php?id=freedom&no=5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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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매니아
14/09/03 23:49
수정 아이콘
첫사랑 페북에 찾아들어갔다가 이명박에 좋아요가 눌려져 있는 걸 보고 그만.....
지니팅커벨여행
14/09/04 06:37
수정 아이콘
아... 취향은 존중해야 하겠지만 뭔가 확 깨네요.
톼르키
14/09/04 09:49
수정 아이콘
중학생때 같이 재밌게 게임하던분이랑 연락이 닿아서 카톡도 종종 보내고 잡담도 했었는데.. 어느날 카스에 전두환사진이 뜨오앜
외계인
14/09/04 00:02
수정 아이콘
첫사랑... 저랑 이별하고 얼마 후 결혼하더니 지금은 이혼녀가 되어 있습니다. 서로 인맥에 교집합이 되는 사람이 많다보니 굳이 만나지 않아도 소식이 들리네요. 제 결혼식 청첩장 보내보려구요. 크크
지니팅커벨여행
14/09/04 06:40
수정 아이콘
첫사랑과의 사랑이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게 부럽습니다.
청첩장은 보내야 제맛이죠!
기쁜 일이니 우편과 온라인, 문자 등으로 모두 보내셔야...
엘스먼
14/09/04 07:03
수정 아이콘
기승전보이스피싱.. 좋은 글이었습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4/09/05 07:54
수정 아이콘
조심하세요 ㅠㅠ
당한 건 아니지만 당할 뻔 해서 비밀번호 바꾸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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