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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3/10/22 08:55:21
Name Naraboyz
Subject [유머] [펌] 거꾸로 보는 삼국지(소설 삼국지와 실제역사비교-_-)
거꾸로 읽는 삼국지 1
도원결의는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세 사람이 공적으로는 군주
와 신하, 사적으로는 의형제 관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송, 원대 이후 민간문학 분야에서 세 사람의 관계 및 이들의 천하평정 과정이 문
학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는 미화되고 과장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서서히 도원결
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삼국지연]의 저자 '나관중'은 원대에서 명대에 걸친 혼란의 시대를 산 사람으로, 당시 많
았던 농민본가의 대부분이 결의의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나관중 자신도 왕이 되려는 뜻을 품었었고, 농민봉기와 깊은 관련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원나라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키려는 '반원기의'에 참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이유로 그가 도원결의 이야기를 쓸 때에도 송, 원대부터이며 형성되어 있었던 이야
기에 현실사회에서 보여지는 결의의 형식을 전형화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
다.
이 이야기는 역사를 합리적으로 연장시키고 발전시켜 만들어졌으며, 인물들의 성격을 독
자들의 심리에 일치시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결과 수백 년 동안 누구나 알게 될
정도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 것은 물론, 다른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진수'의 [삼국
지]
에 약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대접했다고 하며, 유비는 두 사람을 특히 신뢰했
다고 한다. 또한,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은혜는 형제와 같다', '은혜는 부자지간과 같다',
'의리에 있어서는 임금과 신하였다'는 등의 일반적인 형태의 서술만 있을 뿐 세 사람이 정식
으로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 때문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도원결
의의 이야기는 작자가 꾸며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반드시 허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은 '은혜는 형제와
같다'라는 기록과 역사적 측면에서의 이들의 관계, 그리고 역사적, 문학적 사실성의 측면에
서 도원결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이야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으며, '하북성'
탁현에는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구체적인 지점인 '충의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
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장비의 집 뒤뜰에 있던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
라는 것이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의심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탁현에는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곳은 복숭아
나무가 있는 정원이 아니라 탁현의 남쪽에 위치한 '수문구'의 옆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여기
에는 세 사람의 의로운 사람의 묘인 '삼의묘'가 있었는데, 건물은 세 명의 의로운 사람인 유
비, 관우, 장비를 비유해 길이, 넓이, 높이가 모두 1미터 정도 되었다고 한다.
사실 유비, 관우, 장비는 [삼국지연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으며 힘을 합쳐 재난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보은하며 아래로
는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하고자 맹세한 이야기, 또 동년, 동월, 동일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동년, 동월, 동일에 죽자고 서로 맹세한 이야기, 그리고 유비가 관우, 장비의 복수를 하기 위
해 오나라를 토벌하는 이야기까지, 나관중은 전체의 반이 훨씬 넘는 지면을 이용해 세 사람
의 충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은 결의로 형성된 의협심을 위해서는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결의는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도원결의에 관한 이야기가 비록 허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 이리 실제
로 행해졌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2
맏형은 유비가 아니라 관우였다
중국문학사에서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을 남남끼리 형제를 맺는 관계의 소설이라 일컫
는다면, 이러한 소설의 흐름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소설 가운데 <와강채> 이야기, [설악전] 중의 <우고>, <탕회>, <악비>의 이야
기, [삼협오의] 중의 <오서취의> 이야기 등은 모두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같이 결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
을 미친 것은 역시 유, 관, 장의 결의이다. 사람들은 도원결의를 의형제의 정을 표현하는 대
명사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 이야기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복숭아꽃이 만발한 정
원의 숲 속에서 소와 양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하늘에 맹세함으로써 의형제를 맺는다. 이
때 나이 순으로 유비가 맏형, 관우가 둘째, 장비가 막내가 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민간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을 때, 누가 형이 되고 누가
아우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한바탕 옥신각신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세 사람 모두 형이 되고 싶어 그것을 나이가 많고 적은 순으로 결정하기로 했
다. 그래서 서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태어났는가를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같은 연, 월, 일을 대었다.
이때 유비가 태어난 시간으로 순서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장비가 가장 먼저 자기가 태
어난 시는 새벽녘이었다고 했고, 관우는 "나는 더 빠르다. 태어난 시는 첫닭이 막 울었을 때
였다"라고 했다. 그러자 유비는 한술 더 떠 그전의 캄캄한 한밤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장비는 자신이 막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말했다.
"둘 다 거짓말 마시오. 이건 없었던 일로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유비가 물었다.
장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장비는 나무 오르
기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무 오르기로 정합시다."
장비는 이렇게 말하고는 유비와 관우의 동의도 얻지 않은 채 나무에 달려들어 단숨에 꼭
대기까지 올라갔다.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아예 응했지만, 그는 줄기 중간 정도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 한가운
데라면 위로는 형이 있고 아래로는 아우가 있으므로 이것으로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내
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서두르지도 않고 침착하게 나무 밑둥에 다가서더니 선 채로 나무를 부둥켜
안았다.
장비는 의기양양해서 크게 외쳤다.
"둘 다 형님이라고 불러!"
유비가 말했다.
"서두르지마! 자네에게 묻겠는데 이 나무는 뿌리가 먼저인가, 아니면 줄기가 먼저 자란 것
인가?"
"물론 뿌리가 먼저 있었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 우선 '나'라는 사람이 있고서야 자네들이 있는 것이네."
장비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또 다시 번복을 하자니 이미 한번 스스로 약속을 깨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신이 제안한 것이었기 때문에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
우도 유비의 지혜가 뛰어난 것을 보고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유비, 관우, 장비의 순으로 서열이 결정된 것이
다.
위와 같은 민간의 전설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정보
는 얻을 수 있다. 곧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 순서는 나이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유비가 최
연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들 중 최연장자는 유비가 아니라 관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유비의 나이는 중평 원년의 도원결의 때 이미 28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의 <선주전>에는 태어난 연도는 없고, 장무 3년인 223년에 죽었을 때가 향년
63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죽은 사람의 나이는 만으로 계산하지 않는 것을 근거로 하면, 유비가 태어난 해는 연희 4
년이 된다. 따라서 중평 원년에는 24세이지 28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관우의 나이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장비전>에는 "관우는 장비보다 몇 살 연
상으로, 장비는 관우를 형으로 모셨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전정방의 [소설총고]에 의하면, 청나라 때 관우의 고향에서 출토된 '관후조묘비기'
에 , 관우는 연희 3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여림의 [관공연보]에는 "관우는 실은 유비보다 한 살 위였다."라고 쓰여 있다.
장비는 [삼국지연의]에 56세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221년에 이미 죽었다는 설이나
[관공연보]에 기록된 '장비는 유비보다 네 살 연하'라는 설을 가지고 추리해 본다면, 장비는
57세에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가 되었을 때 관우는 25세, 유비는 24세,
장비는 20세가 된다. 그러므로 나이순으로 볼 때의 맏형은 관우이지 유비가 아닌 것이다.
[삼국지연의]의 설은 역사서의 '은혜가 형제와 같다'라고 하는 기술을 근거로 한 상상이
며,,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 이런 점은 나관중의 삼국지가 정확성에 문제
가 있다는 한 예에 불과하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3
장비는 추남이 아니었다
[삼국지연이]에서는 장비를 소개할 때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키가 팔 척에 표범 같은 머리, 반짝이는 눈, 근육질의 아래턱, 호랑이 같은 수염에다 목
소리는 우레와 같고, 힘은 거친 말과 같다."
완전히 거친 남자에, 추남의 전형이다. 성도의 무후사에 있는 장비의 인물 조각상의 생김
새도 겁을 자아내게 하는 얼굴이다.
무후사의 인물 조각상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 장비의 얼굴이
검은 것은 주로 야담가와 연극의 인물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중국의 연극에 등장하는 과장된 인물 분장은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4 평
가와 미의식이 담겨 있다.
장비를 표현하는 검은 분장은 바로 검은 얼굴로써 강직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녹색 분장은 잔인함을 표현하며, 흰 분장은 엉큼함을 표현하고, 붉은 분장은 충의
를 표현한다는 등의 연극의 분장 약속과 일치한다. 이같은 인물의 조각상과 연극의 분장은
소설 묘사에 의거해 만든 것으로 재창조의 결과인 것이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나타난 장비의 인품에 대한 묘사는 솔직하고 거칠며 악을 미워하는
사람의 전형이다.
예를 들면, 화를 참지 못하고 순찰관을 채찍질한 것이나,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의
예를 다하는 장면에서 불평을 하는 태도 등으로 장비의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잠시 조조를 섬겼던 관우에 대해 의심을 품었던 이야기나, 고성에서 영웅이 회합하는
장면에서의 장비는 거칠고 난폭해도 세세한 곳에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장판교에서 세 번 호통을 쳐서 적을 움츠러들게 한 그 모습은 정말 용맹스러운 것
이었으며, 또한 의형인 관우의 원수를 토벌하기 위해 장비가 죽음을 맹세하는 장면도 의리
에 불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장비의 인물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난폭하고 거친 장비'
였다.
그럼 실제로 장비의 용모는 어떠했을까?
관련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삼국지연의]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추남은 아닌 것이 확실
하다.
나관중은 장비의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을 토대로 해서, 그가 술을 팔고
돼지를 잡아 파는 장사를 했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민간설화도 많아서 오늘
날에도 중국의 도축업에 관계하는 사람들은 장비를 자신들의 원조로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장비의 집안이 대대로 탁군에 살았고 전답과 금전도 충분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출신은 낮은 신분이 아닌 일정한 지위를 갖는 상인 계층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관중이 그린 장비의 인품과 기호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에다 거칠고 난폭
한 덩치 큰 남자였으나, 원래의 그는 시문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서화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
람이었다. 또한, 정사의 장비전을 보면 '소인을 귀여워하지 않고 군자를 경애하는'성품이었
다.
이것만 보더라도 확실히 장비는 도리를 모르는 거칠고 난폭한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4
관우에게는 청룡언월도가 없었다
[삼국지연의]의 제1회에는 유, 관, 장이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생사를 함께 하며 서로
협력해 위기에 대처하고, 위로는 나라에 총성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재난에서 구할 것을 맹
세하는 것이다.
그 후 우선 준마를 사고, 유비는 도공에게 명해 쌍고검을 만들었으며, 관우는 무게 82근의
긴 자루가 붙어 있는 반달 모양의 큰칼인 청룡언월도(별칭 냉염거)를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20여 년에 걸쳐 계속되는 정벌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관우의 이 청룡언월도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용맹한 관우는 평생 전장을 누볐다 청롱언월도에 의해 안량과 문추가 목숨을 잃었고, 다
섯 관문을 지나는 장면에서는 조조의 부하 장수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밖에도 청룡
언월도에 희생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민간전설에 나오는 청룡언월도는 더욱도 그럴 듯한 치장이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관
우는 마음에 드는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 도검 제작의 명인 몇 명에게 부탁해, 두 달에
걸쳐 강철을 담금질해서 겨우 푸른빛의 큰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인들은 이것으로 다 되
었다고 생각했지만, 관우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더 담금질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담금질은 다시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달이 하늘에 높이 뜨던 날, 장인들이 불 속에
서 그 칼을 꺼내어 담금질하려고 하자 칼에서 하늘을 향해 한 줄기 빛이 솟았고, 바로 그대
하늘에서 한마리 청룡이 내려와 빛에 맞았다. 용의 피가 칼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며 우레
와 같은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관우가 다가가서 보니 맑고 투명해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칼이 땅 위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 칼이 반달을 닮았고 청룡의 피로 담금질해서 완성된 것이라 하여, 청룡언월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민간에는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우의 오른팔인 주창도 청룡언월도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관우의 칼이 이미 망가
져 버렸기 때문에 관우는 주창의 청룡언월도를 얻기 위해 주창의 사소한 과실을 문제삼아
그에게서 청룡언월도를 받아냈으며, 그 이후 주창의 수중에서는 청룡언월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민간전설 모두 그냥 믿어버리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럼 관우는 정말 청룡언월도를 사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진수의 정사나 다른 역사책에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정사에서는 두 곳에
서 관우의 무기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관우전>에 나오는 안량을 벤 대목
이다.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해 다가갔다. 원소의 대군
이 보는 앞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여러 장수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관우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 중에 관우를 상대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하나는 <노숙전>에 나오는데, 관우와 노숙이 익양에서 회견하는 단도부회(한 자루의
칼을 지니고 회담에 나아가다)의 부분으로 여기에서는 '대도, 칼'등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양나라의 도홍경이 저술한 [고금도검록]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는 유비에게 총애를 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몸소 도산의 철을 캐서 칼 두 자루
를 만들고 '만인적'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전투에 패하자 그는 칼을 아끼는 마음에
물 속에 던졌다."
이상의 기술에서 관우가 사용한 무기는 확실히 칼이다. 그러나 그 칼이 자루가 긴 대도였
는지, 아니면 청룡언월도라 불리우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도 무후사 박물관의 담량소는, "관우의 칼은 청룡언월도가 아니며, 관우는 청룡언월도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고 말한다.
고대의 병기는 크게 장단(길고 짧은 무기), 원사(멀리 쏘는 무기), 방구(방어용 도구)등의
종류로 나뉜다.
예를 들면 검이나 박도(자루가 짧고 폭이 좁은 장도), 비수 따위는 단병기이고, 여러 종류
의 창은 장병기이다. 활은 주로 멀리 쏘는 무기이고, 방패와 갑옷은 방어도구이다.
삼국시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은 출현하지도 않았다.
주위가 지은 [중국병기사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대에는 극(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창)의 제작이 성행했고, 모(자루가 긴 창)가
그 다음이었다."
곧 당시의 장병기는 극과 모였다는 것이다.
[후한서][삼국지]에는 긴 자루가 달린 칼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극백만(긴 극이
무수히 많음)'이라든가, '극을 얹어서 모를 잡는다'와 같은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한대 유적
지에서도 긴 자루가 달린 대도는 출토되지 않았다. 창이나 대도가 장병기가 된 것은 당대부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 사서 속의 관우가 사용한 칼은 어떤 무기인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단도
이고, 안량을 찌른 무기는 당시 유행하던 '모'일 것이라고 담량소는 보고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5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
조조(155-220)는 자를 맹덕, 아명을 아만이라 하고, 패국의 초현(지금의 안휘성 박현)사람
이다. 삼국시대의 뛰어난 정치가, 군략가, 문학자로서 후한말 한대의 관리등용방법인 '지방장
관이 각 지방의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난 인물을 추천하면 조정에서 관리로 채용하는 효렴
에서 선발되었다.
조조는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관동의 제후들과
함께 동탁 토벌에 가담했다. 그러나 나중에 천자를 수중에 두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복황후
를 죽여 조정을 독점한 일로 인해 천 년 이상의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으며, 나관
중이 쓴[삼국지연의]에서도 희대의 간신으로 그리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제4회는 동탁이 조정을 독점해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며 정치를 문란케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당시 왕윤을 비롯한 신하들은 나라가 기우는 것을 근심하며 슬퍼했다. 특히 효기교위(근
위무관)인 조조는 한이 골수에 맺혀 있었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동탁을 죽여 천하
에 사죄하고 싶다며, 왕윤에게 '칠보도'를 빌려간다.
조조는 마침 동탁의 부름을 받아 승상부로 갔다. 동탁은 조조가 자기의 부름에 늦게 오는
것을 탓했다.
"마른 말이어서 늦었습니다."
조조가 변명하자, 동탁은 여포에게 준마를 가져오게 했다. 여포가 없어진 틈에 조조는 동
탁을 죽이려고 했지만, 상대가 힘이 장사인 동탁이어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동탁은 뚱뚱했기 때문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해서 누었다. 조조는 서둘러
칼을 빼려고 했지만, 동탁이 거울에 비친 조조의 움직임을 보고 방향을 바꾸었다. 동탁은'무
슨 짓을 하려고 하느냐'며 조조를 경계했다. 마침 그때 여포가 준마를 끌고 왔다.
조조는 재치를 발휘해 칼을 다른 손으로 바꿔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보도 한 자루를 승상께 바치고싶습니다."
동탁은 보도를 여포에게 건넨 후 조조를 데리고 정원으로 내려와 말을 보여주었다.
동탁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후환이 두려워 그 길로 낙양을 탈출해 곧장 남동쪽으로
말을 달려 초현으로 도망쳤다.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민간에 전해져 내려왔다. 또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럼 역사상 이 일은 확실한 것일까?
정사의[위서]<무제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탁은 중평 6년(189)에 영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운다. 또 조조를 효기교위에 임명해 함
께 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결국에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
서 명령에 불응하고 고향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 일은 정사의 <원소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동탁이 실권을 잡았을 때,
조조가 확실히 효기교위에 임명되었다는 것과 조조는 내심 동탁이 언젠가는 실패할 것이라
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조조는 나중에 동탁을 토벌하는 싸움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효기교위를 임명받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취임한 적은 없었다.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조가 동탁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쳐서 도망쳤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칼을 바치고 동탁을 찌르려고 했다는 장면
은 완전히 가공된 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조조가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던 일은 사서에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관중이 이 이야
기를 꾸며낸 목적은 조조를 깎아내리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반 동탁
싸움에서의 조조의 지도적 역할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나타낸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6
진궁은 조조를 붙잡은 적이 없다
진궁(?-198)은 후한말의 동군(지금의 하남성 복양) 사람이며, 자는 공태이다. 처음에는 조
조를 따랐지만 그가 악하고 어질지 못한 것을 보고 조조를 떠났다. 나중에 여포를 따르며
종종 계략을 세웠지만, 그의 계략은 여포에게 채용되지 않았다. 결국 싸움에서 패해 조조에
게 살해되었다.
진궁은 조조와 알기 전에 중모현 현령에 부임했고,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았지만 곧바로
몰래 석방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제 4회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조는 동탁 살해에 실패하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중모 현령인 진궁을
만났다.
"왜 동탁을 배신했는가?"
진궁이 추궁하자 조조는 대답했다.
"국가의 큰 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짓으로 꾸며진 천자의 조
서를 천하에 밝히고 병사를 일으켜 함께 동탁을 주살하기 위함이다."
진궁은 이 말에 깊이 감동하여 몸소 포박을 풀어 석방한다. 또한 조조를 상좌에 모시고
'천하에 충성되고 의로운 무사'라며 칭송했다.
이렇게 해서 진궁은 공을 세워 상을 받을 기회를 놓칠 뿐 아니라, 현령의 직무를 내던지
고 그날 밤에 중모를 떤 조조를 따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널리 전해져서 오늘날에는 경극을 비롯해 사천지방의 연극인
천극, 운남지방의 연극인 전극, 산서지방의 연극인 진극, 호북지방의 연극인 한극 등 많은
지방극에서 '조조를 붙잡다'가 상영되고 있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진궁과 조조는 함께 도망치던 주에 대대로 조조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성고의 여백사에
게 들렀다. 여백사는 두 사람을 환대하지만 조조는 의심에 사로잡혀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
켜 버리는데, 진궁은 조조의 어질지 못한 모습을 보고는 떠난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진궁은 확실하게 조조를 추종했지만, 나중에 조조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여포에게 투신했다. 그리고 여포가 패해 죽자 그도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진궁이 조조를 붙잡았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조조가 붙잡힌 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사 [위서]<무제기>를 보면, 조조가 낙양
을 빠져나와 중모현에 당도했을 때, 확실히 그 마을 숙소의 관리를 맡은 사람인 정장에게
의심받아 붙잡혀서 현의 관청으로 호송되는 처지가 되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 중
에 마침 조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힘을 써준 덕분에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중평6년에 조조가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면 이'정장'또는'알아본 사람'이 바로 진궁일까?
정사를 조사해 보면, 진궁이 조조를 처음으로 따른 것은 초평 2년(191)의 일이다. 따라서
조조가 붙잡힌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진궁이 풀어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평 6년 조
조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궁은 아직 조조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행동을 함께 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는 진궁이 조조를 따른 것에서 헤어지
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단시간의 일로 설명하고 있다.
진궁은 조조가 동군 태수였을 때 처음으로 따랐던 것이고, 흥평원년(494)에 조조가 구강
태수인 변양을 죽인 것에서부터 점차 의심을 가져, 마침내 여포 휘하로 몸을 던졌는데, 그
사이 3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좋았었다.
나관중은 '조조를 붙잡았다'는 이야기를 창작할 때, 교묘하게 진궁과 조조를 하나로 연결
시켜 이야기를 부풀리고 앞뒤를 바꾸는 등 진궁이 조조를 붙잡는 파란만장한 장면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연출한 것이다.
나관중은 진궁의 비극을 긍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조조의 자기중심주의와 잔
인함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7
조조는 여백사를 죽일 수 없었다.
'조조를 붙잡은' 이야기에서 진궁과 조조는 중로현으로 도망쳐 곧장 성고의 여백사 집으로
가 투숙한다.
여백사는 크게 기뻐하며 환대하지만, 집에 술이 떨어져 밖으로 술을 사러 나간다. 조조는
여백사 아들들의 돼지 도살용 칼소리와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자신이 살해당할까봐 일가 여
덟 명을 모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조조가 마을에서 도망치려 할 때 여백사가 술을 사서 돌아오자 조조는 나중에 있
을 재앙을 없애기 위해 여백사까지 죽여버린다.
"여백사인 줄 알면서 죽이는 것은 단순한 불의"라고 진궁이 비난하자, 조조는 "내가 상대
를 배반하는 일은 있을 수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의 이 대목은 조조의 잔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사를 읽
고 사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관중에게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사의 <무제기> 주에 인용된 왕심의 [위서], 곽반의 [세어] 및 손성의 [잡기]에 의하면,
조조는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분명히 도중에 여백사의 집에 투숙해 여덟 명을 죽이고
떠났다. 그리고 "내가 상대를 배반하는 일은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고 말한 것도 확실하다.
[위서]에서는 '백사가 부재중일 때에 아이들이 식객들과 함께 조조를 덮쳐 말과 짐을 빼앗
으려 했기 때문에 '조조는 방어를 위해서 '수 명을 죽였다'고 씌여 있고, [세어][잡기]에서
는 '틀림없이 자신을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죽였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공통되어 있다. 즉, 당시 '백사는 부재중'으로 '외출'하고 있었던 것이
다. 때문에 조조는 여백사의 가족을 모두 죽이기는 했지만 여백사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거꾸로 읽는 삼국지 8
군량미를 적게 나누어준 사람은 관리인이었다
[삼국지연의] 제17회는 조조가 17만 대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는 이야기이다.
조조는 원술의 군사를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그들의 기세를 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군량
미의 조달이 지체되어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군량관인 왕후가 조조에게 보고
했다.
"병사들이 불만을 가지면 어떻게 합니까?"
왕후가 불안해 하며 묻자 조조가 대답했다.
"그때는 나에게 생각이 있다."
왕후는 들은 대로 시행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병사들의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사기가 꺾여 분위기가 좋이 않았다.
조조는 몰래 왕후를 불러 말했다.
"너의 목을 빌어 병사들의 불만을 진정시키고 싶다."
왕후가 놀라서 외쳤다.
"저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그의 목을 쳐 높은 장대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나서 왕후가 '관의 군량미를 훔쳐 가져갔다'고 발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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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boyz
03/10/22 08:56
수정 아이콘
출처는 지식인입니다.(그분도 퍼오셨을듯 ^^)
03/10/22 10:07
수정 아이콘
"득했다. 하후돈은 당황하"

잘린거에요?
언뜻 유재석
03/10/22 12:03
수정 아이콘
스크롤의 압박..-_-;;
전 뭐 삼국지의 사실 여부 보다는 소설로서의 삼국지를 좋아하기
때문에...이문열 삼국지만 읽어보셨다면...낭패...
나의꿈은백수
03/10/22 12:37
수정 아이콘
이거..책으로 출간된 것을 인터넷에 올린것이네요.
03/10/22 13:39
수정 아이콘
원저자는 중국의 역사학자인 이전원과 이소선입니다.
아르푸
03/10/22 14:49
수정 아이콘
정사도 믿을게 못되지요
김평수
03/10/22 15:49
수정 아이콘
연의가 촉한정통론, 즉 유비를 중심으로 쓴 것이라면, 정사는 위정통론, 즉 조조 중심으로 쓴것이죠. 개인적으로는 두개 다 확실히 믿을게 못된다고 생각하는..-ㅁ-
03/10/22 17:13
수정 아이콘
으음.... 스크롤의 압박이 ㅡㅡ
ChRh열혈팬
03/10/22 17:20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그럼 어떤 걸 읽어야 하나요? (개인적으로 저 책을 사고싶은데..-_-)
03/10/22 19:38
수정 아이콘
2000년 가까이 된 역사인데다가... 그 간 수없이 각색되어왔는데... 진수(233~297)의 삼국지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든 세부적인 묘사가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겠죠. 뭐 진수의 삼국지가 아무래도 시기상 정확하겠지만, 내용이 상당히 간략하고 빈약한 편이었구요(권수는 많지만...)

지금에와서 삼국지연의가 실제니 허구니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역사서든 소설이든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커다란 흐름은 분명한 역사일테고요, 세부적인 묘사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판가름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말이죠.

위에서 문제삼은 도원결의 같은 그런 장면들에 대해서 민간의 설들을 인용하며 도원결의는 허구이고, 나무타기를 하여 서열을 정했다느니 뭐 이런 얘기는 개그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군요.

위촉오의 구체적인 설립시기나 과정, 주요 인물간의 상호간 관계와 행보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들은 거의 밝혀진 마당에, 세부적인 묘사들이야 그리 중요할 것도 없겠죠. 연의에서 각색된 부분은 각색된데로 나름의 운치가 있잖아요. 삼국지연의는 일종의 영웅전으로 수백년간 보는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는데 의미가 있지, 그 세세한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자체는 무의미한 것 이겠죠.
03/10/22 20:04
수정 아이콘
콘솔님에 몰표~
03/10/22 20:59
수정 아이콘
그 밖에 적벽대전에 관한 이야기나 조운이 아두를 구할 때의 허구 등도 실려 있을 듯하군요..^^
체스터
03/10/22 22:14
수정 아이콘
정사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이 정사와 연의의 사실 차이에만 집중할 뿐 정사의 진정한 가치를 보려고 하지 않으시는 군요. 정사를 읽어본 분들도 내용이 재미없고 빈약하다고만 할 뿐이니....정사는 기전체 형식으로 인물 묘사 위주로 쓰여 있습니다. 그 인물묘사의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기술은 오늘날의 서적에 결코 못지 않을 정도입니다. 연의에서 알게 된, 약간 허황된 인물들의 진면목이 정사에 잘 실려 있습니다. 그들의 인품, 지혜, 의지, 도전, 좌절과 아픔, 배신, 우울증 등 많은 것들이,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얘기처럼 세세히 쓰여 있습니다.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사실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술이 보편화된 시기가 아님에도 그렇게 썼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운 책입니다.
나이 좀 드신 분들 중 삼국연의를 어릴 때 읽어 보신 분들은 정사를 한 번 읽어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현실에 대한 지혜가 진정 담겨 있는 책,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자와는 말도 하지 말라"는 격언에 꼭 들어 맞는 책이 삼국지정사이니까요. 아울러, 여러 인재들의 면면과 인격들...결코 삼국연의에 묘사된 것보다 덜한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Naraboyz
03/10/23 04:18
수정 아이콘
66번째 이야기까지있는데-_- 너무 길어서 짤리는군요 =_=
03/10/23 18:06
수정 아이콘
체스터님//
진수의 삼국지를 막무가내로 평가절하 하는 사람은 없을겁니다. 누가 뭐래도 유명한 사서중 하나니까요. 그러나, '위'만을 정통으로 취급하며 촉·오를 열전형식으로 다루는 것(진수가 사마'진'의 관리였으니 상황상 어찌할 수 없었겠지만)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많은 지탄을 받는 부분중 하나지요. 그리고, 삼국지연의의 '연의'란 말은 '소설'이란 의미를 갖고 있기에 삼국지연의에서 등장인물을 초인화하는 것은 문제삼을 수 없는 반면(소설이니 당연한 것), 진수의 '삼국지'는 조조를 초인화하여 기술하는데 역사서가 그런 식으로 쓰였으니 지탄을 피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에... 또...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
뭐, 시중에 이런 말들이 있긴한데요... 전자의 경우, 삼국지의 신의를 모르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할가치가 없다는 예로 많이 쓰이고... 후자의 경우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의 책략은 당해낼 수 없다니 상대하지 말라는 예로 많이 쓰일 것 입니다. 이런 말은 진수의 삼국지보다는, 아무래도 '삼국지연의'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속담 비슷한 말 같은데요. 삼국지연의가 중국의 사대기서중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으며(중국인들의 삼국지연의에 대한 애정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입니다) 수백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다보니, 끝없이 회자되는 것 이겠죠. 사서의 경우는 아무래도 사마천의 '사기'가 먼저 떠오르기에 사서로서의 진수'삼국지'는 일반인들에게 언급될 일이 별로 없겠죠. 물론, 사기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이후의 사서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며... 진수는 사마천보다 약 400년 정도 늦게 출생한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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