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에 내용은 역알못의 뻘글입니다. 상소의 내용들은 기록에서 갖고 온게 맞지만 그 외 개인적인 의견들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의견으로 결코 객관적이지 않으며 편협된 시선으로 쓴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현종 13년 조창기가 현종에게 붕당과 관련된 상소를 하나 올립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계해년(인조1) 이후 서쪽(서인)이 득세하여 동쪽(남인, 소북)이 위축되었는데 득세한 쪽은 점점 날카로운 칼의 자루를 쥐게 되었고 위축된 자는 더욱 더 깊은 분노를 품게 되었습니다. 재주가 서로 같아 높고 낮음을 분별하기 어려움에도 서쪽 사람이면 끌어들이지 못할까 서두르고 동쪽 사람이면 머뭇거리며 쓰지 않으려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남의 말을 의식하여 약간의 등용을 하지만 한 자급은 반드시 아끼면서도 작은 벌은 반드시 실행하려듭니다.
근래 성상의 의향을 보건대 매양 한쪽을 곡진히 옹호하시는 데 신은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약 한쪽을 도와 세력이 균등하게 되면 피차간에 알력이 생길 근심이 도리어 지금보다 심해질 것이니 이는 무기를 마련해 서로 공격하도록 도와주는 꼴입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전하께오서 당파를 도외시하고 상벌을 밝게 베푸는 것을 급무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훌륭한 자는 동서에 구애되지 않고 발탁해 쓰시고 어리석으면 형세에 끌리지 말고 물리치소서.
현명하면 당파 가리지 말고 쓰고 얼간이면 당파에 상관없이 쓰지 말자입니다. 글로만 보면 이보다 정론이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서인(산당)은 인조 반정(+효종조 산림의 출사) 이래 권력의 중심에 있는 붕당으로 이조와 병조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서인(산당)에게 옹호적이고 남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남인에게 이조와 병조를 맡겨봤자 삼사에 다수가 포진되어있는 서인계 대간들이 조그만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곧바로 탄핵을 할 게 너무나 뻔했습니다. (걔네가 이상한거 아니냐? 할거 같지만 동서분열 이래 붕당정치는 내내 이래왔고 이 이후로도 그럽니다.)
이러니 현종 입장에선 어떻게든 붕당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왕권을 높이기 위해선 남인 (특히 허적)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현종은 허적에 대한 비판 및 비난에 굉장히 예민해서 허적을 비판하는 대간들을 혼내고 심하면 유배를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허적 본인이 관료로서 능력이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송시열이나 송준길 윤휴, 허목처럼 명망있는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둘에 비해 융통성이 있었으며 현실적이었고 무엇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허적의 경우 현종이 죽기직전에 불러서 숙종을 부탁한 뒤에 눈을 감았고 실제로 숙종도 허적을 굉장히 총애하여 잘써먹었지만 허견의 옥사와 그의 세도가 조금씩 드러나자 가차없이 죽여버립니다.)
1차 예송논쟁이야 현종 본인이 막 즉위했을 때였고 현실적인 이유로 산당의 편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당은 효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하여 북벌을 미끼로 하여 재위기간 내내 양송을 끊임없이 불러들였고 결국 죽기 1년전에 조정으로 불러오는데 성공하여 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였고 북벌을 미끼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산림을 제어하려 했지만 얼마 안가 죽어버리면서 역으로 송시열의 권위만 막강해진 채 현종이 즉위합니다. 아 물론 북벌은 미끼라는데서 보듯이 효종이나 송시열이나 현실성이 없는 걸로 여겼습니다. 효종의 군사정책 역시 방어에 중점을 둔 것들이었고 송시열은 처음부터 북벌이 말이 안된다며 효종의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더 이상 거스르다간 명분에서 밀리기때문에 올라온것이었고요. 실제로 효종에게 건의한 내용들 모두 몸과 마음을 씻고 다 잡아야한다는 소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반면 이미 재위기간 15년에 가까워진 2차 예송논쟁 당시엔 현종 본인의 힘도 이미 어느정도 커진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죠 근데 2차예송논쟁은 단 3일만에 속전속결로 마무리짓습니다. 남인이 채 끼어들기도 전에요. 이걸로 대강 추정할 수 있는 건 현종이 바라던 건 어디까지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거였지 산당을 몰아내고 남인에게 권력을 쥐어주려던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종이 진단한 붕당의 문제는 힘의 균형이 깨져 특정 붕당이 지나치게 강해지는거에 있는거지 붕당간의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2차 예송 당시 자신의 주장을 반대하던 김수흥은 춘천에 유배보내고 김수흥을 옹호한 대간들을 파직했으면서 그의 동생인 김수항은 좌의정으로 승진시킵니다. (김수항은 형인 김수흥의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이때뿐이 아니더라도 현종 본인의 성격이 부왕 효종이나 아들 숙종 이후의 본인 후손들(경종, 영조, 정조)와 비교해서도 굉장히 부드럽고 온화했기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처벌에 있어서도 굉장히 신중했으며 곤장의 크기 형태 재질을 바꿔서 형장의 가혹함을 완화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우유부단한 건 또 아니어서 단호할 땐 굉장히 단호하여 파당적인 신하들은 곧잘 파직과 유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슬슬 현종의 힘이 확실히 올라오고 붕당간의 균형을 얼추 맞춰나가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현종이 병사하고 맙니다. 안그래도 세자시절부터 재위기간 내내 병치레가 잦았는 데 즉위한지 15년만인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맙니다. 2차예송논쟁이 끝난 지 2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예송논쟁으로 서인(이라기보단 사실상 송시열과 산당)과 남인(특히 청남)의 적대감은 그 어느때보다 강해져있는 상황이었고 이걸 평화적으로 중재해줄 임금이었던 현종이 죽고 다혈질의 숙종이 즉위하면서 (창,칼만 들지 않았다뿐) 피를 피로 씻는 그 옛날 선조, 광해군 시절 혹은 그 이상가는 과장좀 보태면 사실상 조선을 세도정치로 이끄는 붕당간 정쟁이 시작됩니다. (는 사실상 숙종 본인이 다 함)
숙종 19년 사간 이동표의 상소를 봅시다 "전하께서는 여러차례 조정의 신하들을 나오게도 하시고 물러나게도 하시며 그들에게 권력을 잡게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듯 하시다가도 배척할적엔 연못에 밀어넣듯 하십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살이 빈번이 행해지니 나라의 명맥이 어찌 병들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숙종 22년 이정직의 상소도 숙종을 까는 내용입니다.(..) "전하께서는 크게 처분 하실때마다 반드시 벌을 베풀고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니 조종 이래로 죽이고 귀양 보내는 것이 지금처럼 많은 적이 있습니까? 벌과 상이 갑자기 바뀌고 선과 악이 갑자기 바뀌며 출척과 탁용에 떳떳함이 없습니다."
숙종의 환국엔 특별한 원칙도 없었으며 자비도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 기분에 따라 달라졌고 자기 싫은 사람을 조질 때는 자기 아내들(인현왕후, 희빈 장씨, 숙빈 최씨)을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재위초반 허적을 그토록 총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일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차없이 죽여버렸습니다. 물론 그의 서자 허견의 역적모의가 발각되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쳐도 윤휴의 경우 서인들부터가 반 억지로 반역으로 몰고갈 때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죽인 것 역시 숙종이었습니다. (정작 허적은 김수항 민정중을 비롯한 서인강경파들이 구명하려했던게 함정)
이후의 기사환국도 마찬가지고 숙종은 자기 기분과 목적에 따라 신하 죽이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위에 말한대로 자기 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데도 거리낌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자기 아들이자 세자인 경종이 어떻게 되든 알바가 아니었고 되려 노소 갈등에서 노론의 편을 든 병신처분 (병신년의 처분을 말합니다.)과 이이명과의 독대와 그 이후의 대리청정을 통해 경종의 지위를 흔들면서 권위를 개박살을 내놨고 이는 결과적으로 (정황상) 본인이 밀어주려고 했던 연잉군(영조)의 정통성마저 작살내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노론과 소론의 사생결단의 당쟁을 더더욱 부추키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 조금 과장을 섞긴했습니다. 적어도 최소한 희빈 장씨가 죽은 직후까지 숙종은 경종을 보호한답시고 나름의 조치들을 취하긴 했습니다. 희빈을 중전에서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경종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희빈을 죄인으로써 자진하게 하였기때문에 사실 경종은 희빈의 빈소에 들르지도 못하고 곡을 내서도 안되었지만 숙종은 이례적으로 이 모든걸 허용함은 물론이고 상복을 입는 것과 장례에 대한 모든 경우를 중전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딴거 다 필요없고 애초에 희빈을 안죽이면 되는거였지만 이미 이때에 이르러 희빈에 대한 증오심+인현왕후에 대한 죄책감+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것을 부추킨 숙빈 최씨의 무고 삼연타로 희빈이 살 방법이 없었..그리고 이 이후 숙종의 경종에 대한 사랑과 배려따윈 없어지게 됩니다..)
그나마 숙종이 연산이나 광해와 달랐던건 연산과는 달리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백성들에게는 나름 따뜻한(..) 임금이었고 실제로 당대에도 백성들에겐 굉장히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어쨋든 죽어나가는 건 신하들이었지 일반 백성이 아니었으니깐요. 광해와의 차이 역시 큰데 바닥민심이 이반되는 일(궁궐병)은 가급적 만들지 않았을 뿐더러 광해군처럼 옥사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었죠. 광해군은 잦은 옥사로 인하여 결국 이이첨이 권신이 되면서 정작 광해군 본인이 이이첨을 견제할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렀던 반면 숙종은 신하들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듯 하면서도 결단코 자기 권위 위로 올라가게 하는 일이 없었고 광해군과 달리 모든 원한은 상대 붕당에게 떠넘겼지 자기에게 오게하지 않았습니다. 위에 숙종을 냉혈한으로 매도하며 깟지만 최소한 광해군보다는 똑똑하고 정치력은 훨씬 위였습니다. 정작 본인 사후 여러 (붕당에 있어서) 여러 폐단을 낳아버리긴 했지만..
효종으로부터 "이토록 너의 마음이 어질고 깊으니 너의 신하된 자는 복받은 자들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온화한 성격과 그에 걸맞게 가급적 평화적으로 붕당의 당쟁을 해결하고 균형을 맞추려던 현종에 비해 숙종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그 불같은 성격과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정통성과 그에 비례하는 왕권을 통해 신하들(과 자기 아내들에게) 무자비하였는데 만약 현종의 건강이 더 좋아서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역사가 어떤식으로 흘러갔을 지 궁금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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