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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1/06 00:54:55
Name 시라노 번스타인
Subject [일반] 스타트업에서 배운 것 (1) 증거 남기기

어제 PGR에 과거의 일로 글을 쓰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서 몇 가지 경험을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블로그에 써도 되는 글이긴 하지만 커뮤니티에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첫 회사를 시작했고 2년 정도 다녔다.
그 2년 동안 내가 가진 습관 중 하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증거를 남긴다." 였다.


마지막 학기때 보통의 대학생과 같이 취업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인턴부터 정규직까지 전부 탈락했다.


원래 성향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성향이 강하긴 한데
어떤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나는 조금 심하게 나로부터 원인을 찾곤 한다.
시대가 어려워서 라는 위안(혹은 위로) 보다는 나한테서 더 문제를 찾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너무 세상을 모르고 자랐다." 라는 거였다.
아르바이트 하나 꾸준하게 하는 것 없이 지냈고 집에서 하지 말라는 짓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라고 하는 걸...제대로 수행한 적은 없었다.)


경험을 쌓자. 현실을 좀 알자.
자소서를 보니 글을 잘 쓰니 못쓰니 이런 것 보다는,
너무 허황된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뒤덮여 있는 느낌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아닌 어느 회사라도 들어가서 한번 일을 해보자 라는 생각에 스타트업 채용 플랫폼에서
몇몇 회사를 찾게 되었고 이왕이면 얼굴에 철판 깔며 다녀야 하는 로컬 영업 직군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찾았던 회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
내가 겪은 현실은 입사 2주만에 찾아왔다.


스타트업 특징 중 하나는 규모가 작은데 퇴사자도 많고 입사자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1년 이상 다니기만 해도 신입이었던 나는 이미 중간 정도 위치에 와있을 정도였으니...)


즉, 전임자가 간 자리는 내 자리와 책임이 되었고
전임자가 했던 업무는 내가 해야하는 업무였다.


로컬 영업 직군이었기도 했고 누군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지도 않았던 팀이었기 때문에
전임자가 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 계약서도 없었다.
사실 작은 소상공인 업체의 경우는 계약서가 있지 않더라도 방문해서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한 선이 항상 있었다.


하지만 나름 회사의 규모를 갖춘 거래처들이 문제였다.
그들과 했던 미팅 내용, 협의 내용, 계약서와 같은 자료가 일부만 있거나 소실된 것이 꽤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신입도 아닌 경력직으로 들어온 자들이었는데...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물론 이제 들어온 나에게 누구도 책임을 묻진 않았다. 경영진이나 남겨진 상급자의 몫이였다.
당시 상급자는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모든 팀이 터져나가는 와중에 회사 시작부터 내가 나가던 그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남겨진 팀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꽤 좋은 편이었던 거 같다.


나는 그에게 배웠던 것 중 하나가 "증거"를 남기는 거였다. 물론 그는 증거라 표현을 하지 않고 증거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기본을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 미팅 후엔 반드시 오늘 있었던 미팅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 해야할 것들을 회사 전체, 대표, 자신(팀장)을 참조하여
미팅했던 담당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보내기 전에 이메일을 10번 정도 첨삭 받고 보냈다.
맞춤법부터 시작해서 문장 줄이고 필요한 자료 첨부하는 등 한번에 통과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3~4개월 정도 미팅이 끝날 때마다 이메일이든 카톡이든 미팅한 사람에게 미팅 내용을 남기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회사에서는 어떻게 하는 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팀에 있는 동안엔 단 한번도 계약 전후로 업체 담당자와 오해를 할 일도 없었고,
담당자가 변경 되더라도 업무의 연속성이 꽤나 높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주고 받은 이메일 내용을 새로운 상대 업체 담당자에게 전달해주기도 했다.)


제일 중요한 건 업무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점이었다.


전화로 주고 받으면 빠른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지만 전화를 한다는 것은 업무적이든 인간적이든 상대방과 가까워졌다는 의미라고 본다.
첫 만남 이후 미팅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들도 미팅 후 보고를 해야하니 보고 내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고 신경 써준다는 인상을 심어주었을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좋은 인상이 꼭 계약을 이끌어 내진 못했더라도 문자로, 전화로, 카톡으로 하는 경우로 발전해나갔다.


마지막으로, 신입때부터 퇴사하는 그날 까지 팀장은 같이 갔던 미팅에 대한 메일 발신자를 나로 해줬다.
아까 말했지만 수신인에는 회사 전체, 대표, 팀장이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관심 가질 만한 업체 미팅은 회사 직원들은 나에게 미팅 내용을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내가 담당자로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회사에서 내 위치가 자연스럽게 정착해 나가는 효과가 있었다.


사실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러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2년간 있긴 했지만 1년정도는 거의 미팅을 그가 대부분 주도했고 나는 보조하는 역할만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입사하기 전 그의 거래처도 자연스럽게 나도 담당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물론 중요한 이슈는 그가 직접 처리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선에서 해결되는 부분도 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웠던 팀장이었다.
이외에도 그에게 배운 것 중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자산이 많다. 덕분에 꽤 많이 써먹고 있다.


같이 퇴사를 했기 때문에 5년 정도 지났는 데 신기하게도 그 팀장만 아직도 두세달에 한번씩은 꼭 보고 있다.
다음달에 만날 땐 내가 밥 좀 사야겠다. 막상 만나면 항상 그가 먼저 사주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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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셜
23/01/06 01:10
수정 아이콘
성공한 사람들 인터뷰를 보면 공통적으로 꼽은 게 '운칠기삼'인데 여기서 말하는 운(運)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귀인을 만나신 거네요.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01:38
수정 아이콘
일단...매일 만날 때마다 밥 사줍니다. 귀인 맞습니다. 크크
페이몬
23/01/06 01:16
수정 아이콘
미팅 내용을 어떻게 정리하시나요?

전 미팅 하면서도 키워드 정도 적긴 하는데 그마저도 나중에 보면 제대로 기억이 안나네요.. 적는데에 집중하면 정작 미팅에 집중을 못하고..

녹음이라도 해야하나..
아케이드
23/01/06 01:26
수정 아이콘
회의녹음 추천드립니다
중요한 회의라면 회의후 다시 들으면서 회의록 만들수도 있고, 나중에 딴소리할때 증거물로도 가능하구요
23/01/06 01:32
수정 아이콘
내가 나중에 알아본다기 보다는 미팅 참여자나 상급자에게 미팅 내용을 요약 전달한다는 관점으로 메모하며 정리하면 됩니다.
육하원칙을 기본으로 남들이 딱 보기 편하게(시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연상되게, 기승전결에 맞춰) 간결하게 작성해야겠죠.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01:37
수정 아이콘
처음엔 녹음도 하고 키워드 정리도 하고 그러긴 했는데,

가장 좋은 건 미팅이 끝나자 마자
기억나는 대로 쭉 러프한 버전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같이 간 담당자와 같이 기억을 맞춰보구요.

원래는 완벽하게 정리해서 상대방에게 보내주는 게 맞지만,
어느 정도 서로 다르게 이해한 내용이 있다해도
보내고 나면 궁금한 거나 협의할 내용이 있으면 상대방에서 알아서 연락이 옵니다.

대신 조금 애매한 부분들은 우리 회사에 유리하게끔 보내는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때마다 내용을 완성해나가는 방향대로 하고 있습니다.

외부 미팅은 보통 영업직이었기 때문에 판매 상품, 단가, 협의 내용 등이 어느 정도 대동소이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 수록 기억해내야 하는 특이 사항들이 적어지구요.

윗분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결국 미팅 했던 사람들 모두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 혼자 하는 미팅 정리가 아니라 초안을 내가 잡는거고 여러 사람이 계속 수정해 나간다는 생각이 베이스로 깔려 있어요.
Regentag
23/01/06 13:00
수정 아이콘
미국 회사와 하는 사업들을 보면 미국측 PM이 미팅 중에 내용을 계속 기록하고, 미팅 마지막에 내용이 정리된 결과보고서를 화면에 띄워서 참석자들이 돌려본 다음 내용에 이견이 없어야 회의록에 서명하고 끝납니다.
회의의 결과물이 문서로 바로 나오니 서로 오해할 일이 없겠더라구요.
자급률
23/01/06 02:15
수정 아이콘
좋은 사람을 만나는건 언제 어디에서건 복인것 같습니다. 전 군대 맞선임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23/01/06 06:02
수정 아이콘
일을 타고나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죠.

사수 잘 만나면 평생 써 먹을 기술과 그것보다 중요할 수 있는 여러 개념 관념 지침 그리고 인맥까지 얻을 수 있죠.

그런데 많이 배울 기회가 와도 다수의 사람이 못받아 먹습니다.

받아 먹는것도 능력이고 역량입니다. 역시 타고난 천성이거나 누군가에게 배워서 받아먹는 능력이 만들어진 것이죠.

준다고 다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사수가 사라지고 능력이 후루룩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그건 사수의 능력 뿐이었고 못받아먹은겁니다. 요즘 사람들은 똑똑하단 말하지만 대부분 못받아 먹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주는 만큼 못받아먹으면 그것 역시도 안타까운 일인데요.

잘 습득하셨다니 대단합니다.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08:33
수정 아이콘
저거만 받아먹고 못받아먹은 게 더 많습니다. 크크
23/01/06 08:49
수정 아이콘
말씀에 공감합니다.

더불어서 잘 되는 사람은 반드시 다수의 멘토가 있더라고요. 좋은 제자는 스승이 잔뜩 있는 법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계보나 도제같은건 잘 안 먹히는듯 합니다.
NoGainNoPain
23/01/06 08:55
수정 아이콘
본문과 댓글을 읽어보면 증거 남기기가 아니라 회의록 작성하기 같네요.
회의록을 작성하는 근본 목적은 회의에 참석하는 상대방과 합의된 내용을 공식적인 문서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윗선에 내가 무슨 업무를 하고 있는지 보고하는 목적도 있지만 이건 부차적인 내용이구요.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 부하직원이 뭐하는지에 대해서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냥 어떤 일 하고 있구나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겠죠.

회의록을 적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세부 내용을 일일히 다 적을 필요 없다는 겁니다.
세부 내용 기록한다고 시시콜콜한것까지 일일히 다 받아 적으면 쓸데없이 길어지기만 할 뿐이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놓칠 수도 있습니다.
회의의 핵심 내용, 우리 회사가 그 회의에서 무엇을 얻어내고자 했는지를 파악해서 그 부분에 집중해서 적는 게 제대로 된 회의록 작성법입니다.
물론 회의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 또한 경험이 쌓여야 제대로 할 수 있겠지만요.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10:24
수정 아이콘
처음에는 잘못적으니깐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우선 다 적고 피드백 받고 업무 능숙해지다보니 필요한 내용 위주로, 키워드나 숫자 위주로 많이 적게 되드라구요.
Life's Too Short
23/01/06 09:29
수정 아이콘
저는 기록을 남기는 행위 자체보다
작성자님이 해당 기록에 진심을 가지고 임한 행동이 인상깊네요 하라고 해도 대충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죠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하나 배워갑니다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10:27
수정 아이콘
사실...대충하고 싶었는데...정말 저 팀장은 계속 쪼았습니다. 크크 이메일 쓰는 데 1분마다 "왜 안보내!!!" 크크 물론 몇초 뒤에 "천천히 해. 밥 먹고 하자." 이러는 츤데레 느낌이긴 했지만...
코인언제올라요?
23/01/06 09:50
수정 아이콘
얼마전 저한테 필요한 행동이네요...
분명 전달했는데 ㅠㅠ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10:30
수정 아이콘
저는 되게 티를 많이 냅니다. 크크
이메일 보내고 문자 보내고 카톡은 상황 봐서 보내고 전화로 마무리까지 했어요. 크크 하도...전달했는데 모르쇠하는 분들이 많아서.
아 조금 독하게 해야하는 상대방이면 메일 수신확인하면 확인했냐고도 연락합니다.
살려는드림
23/01/06 15:12
수정 아이콘
좋은 습관을 잘 터득하셨네요 회의록 메일을 비롯해서 증적을 남기는게 일을 할때도 그렇지만 세상 살면서도 도움이 많이 되는것 같습니다
저도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시작하면서 좋은 사수를 만난덕분에 그나마 지금 밥은 벌어먹고 사는게 아닌가 싶네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것에서 운칠기삼중 운칠을 맡고 있단 생각이 새삼 듭니다
리버차일드
23/01/06 16:00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맞아 그래야 덤터기를 안 쓰지 했다가 그 얘기가 아닌 걸 알고 머쓱해졌습니다.
저는 사회 초년생 때 일 잘 못 시켜 놓고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발뺌하고, 자기가 잘 못 해 놓고 화내는 영업 직원한테 리버씨가.. 리버씨한테.. 하면서 떠 넘기고, 안 시킨 일 시켰다고 하는 상사랑 일 한 뒤로는 뭐든 다 적어두는 습관이 생겼거든요.
일기는 개뿔, 간단한 스케쥴러도 안 쓰던 저에게 메모 하는 습관을 길러줬던 상사였죠.
시라노 번스타인
23/01/06 16:23
수정 아이콘
원래 그 내용도 있긴 했는데, 상급자가 알려준 것에 포커스를 맞추다보니 해당 내용은 제외했습니다. 크크
말씀하신 부분으로도 꽤나 써먹긴 했습니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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