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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2/08 19:17:47
Name 나는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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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게으른 완벽주의자에서 벗어나기





1. 게으른 완벽주의자


1-1. 이미지

당신이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느껴지시나요?
ADHD와 만성 피로를 동시에 가지고, 때때로의 공황 상태를 제외하곤 편안히 지내는 편이고, 친구들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싫어하시나요?
모든 것에 대해 관심가지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너무 신경쓰고 있나요?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에 초조해하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고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 “게으른 완벽주의자”에 속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이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음을 아주 잘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빠져나가는 정답 또한 알고 있습니다.
완벽주의자가 되지 않고 일단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무작정 하는 거죠.
그러면 지금보다 마음이 나아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1-2. 생각해보기

하지만, 그들이 이것을 하지 않는 이유는 꽤 타당합니다.

일단 그들의 목표는 사실 생각해보면 일단 하기만 하면 달성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진 B지만, A+을 받고 싶고, 진짜 노력하면 A+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A+을 목표로 둔 것입니다.
글을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해 관련된 책을 더 읽겠다는 것처럼, 목표가 그렇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그것을 진행하기엔 너무 불안하고 피곤한 것이죠.

또한, 이 문제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완벽주의가 아닌 다른 문제로 파악합니다.
내가 좀 더 잘 일하고, 내가 좀 더 공부하고, 내가 좀 더 계획적으로 살면 되는데, 내가 스스로 노력하면 될 문제를 왜 완벽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냐고 하죠.

무엇보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완벽주의자이길 그만두라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들립니다.
어떤 특정 목표가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라면 B인데,  A+을 받으려는 거죠.
여기서 무작정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는, A+을 분명 받을 수 있음에도 B를 받으라는 뜻이고, 글이 훨씬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책읽기를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안좋게 받아들이죠. 나는 충분히 A+이 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고, 다른 사람을 보니까 A+을 받았는데 난 안 받는다는 거고, 이 기록은 고칠 수 없이 평생 남을텐데 그냥 놔두라는 거죠.

완벽주의자이길 멈추라는 소리는 그저 공허한,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소리처럼 들리게 되죠.
그렇다면, 진짜 완벽주의자이길 멈추기 위해선 뭘 해야 할까요.



2. 죽음


2-1. 죽음에 대한 한 철학자의 생각

진짜 갑분싸로 죽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이 문제는 죽음과 확실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죽음은 인간 사회의 수많은 전문가들조차도 제대로 다루는 개념이 아닙니다.
단지 죽음이 꺼려하는 주제인 것 뿐만 아니라, 그냥, 잘 모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개념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말을 해야 하거나, 그 스스로 잘 모르는 곳에서 말을 시작해야 하는 철학자들만이 이 주제를 많이 다루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해서 많이 다뤘지만,
그 중에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만큼 가장 죽음에 대해서 많이 언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대해서 아시나요?
존재에 대해 탐구한 철학자라고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나오는지 등등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지만,
존재가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선, "왜 이런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지"에 대해서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오직 존재가 "어떤지"만을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에 대해 아는 것은 철학자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 존재의 이유, "왜 이런지"를 신이 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신을 의문시하는 지금 상황에서 다시 인간은 존재의 이유, "왜 이런지"를 다시 의문시한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른 존재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왜 이런지를 문제삼는 존재"이라 다른 존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삼게 된 이유는, 바로 죽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한계상황을 보게 된 뒤에서야, 사람은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나에 대한 그 모든 중요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일상생활은 "어떤지"만을 다루고 있는, 삶의 의미가 없는, 존재의 이유를 의문시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가 전부 무로 돌아가는 죽음이라는 상황을 보면서, 사람은 이 일상생활에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왜 이런지"를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본래성, 삶의 의미를 되찾는 하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에겐, 죽음은 삶의 의미를 되찾는 하나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죽음, 그리고 죽음과 연관지어진 수많은 개념들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능성은 그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그렇게 그의 인간관은 죽음과 끈끈히 이어져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 탐구 방식은 마치 아주 전형적인 옛날 설화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
나는 어느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어.
다른 형제들보다 공부를 월등히 잘해서 나는 판사 자리까지 올랐어.
나는 예의 바르고 깔끔한 성격으로 일처리도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했고, 예쁜 아내를 만나서 결혼도 했어.
실제로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비슷하게 보이려고 사치품도 많이 샀고, 자녀들 교육도 많이 시켰어.

​그러다 병이 나서부터 완전히 달라졌어.
내가 죽을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 나를 떠나갔어.
나의 모든 걸 잃어버린 뒤에서야 내 인생은 굉장히 헛된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죽음 직전 마지막 순간에서야 나는 내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어...
]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꼭 이 소설만이 이걸 다뤘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해야만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그 전형적인 말에 그의 철학이 속박되는 듯 합니다.
하이데거는 마치 죽음을 본래성, 즉 삶의 의미를 되찾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치환되는 듯하죠.



2-2. 블랑쇼의 비판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나요?
과연 모든 존재의 이유와 죽음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 하이데거의 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판한 철학자가 한 명 있습니다.
블랑쇼라는 프랑스 철학자인데요, 이 분의 비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블랑쇼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삶으로부터 추방되어, 경계선 바깥으로 내몰려, 추방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확히 말해, "사물들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 대해 설명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바깥"이라고 부릅니다.

블랑쇼가 예시로 드는 사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서 키릴로프라는 인물입니다.
키릴로프는 이 세계에 대한 혁명을 주창합니다. 그는 신이 없다는 것, 그리고 진짜로 신적인 것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주인공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살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 악령은 그의 자살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소설은 마치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진행되며, 점점 그는 잊혀지게 됩니다.

블랑쇼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키릴로프의 죽음은 삶의 의미와 세상의 의미에 있어서 오만함을 부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와 같이,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저 정도에 머물러 있는, 오만한 생각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죽음을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 - 본래성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는가?
사람의 죽음이 정말로 그의 삶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고, 그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자료가 되는가?
애초에, 죽음이 우리의 인생과 그 의미와 그 정도로 연관이 되어 있는가?
애초에, 죽음이라는 것은 진실로 생각해볼 수 있는 대상이 될 수가 있는가?



2-2-1. 은하철도999, 장례의 별

저는 이 블랑쇼의 비판에 대해, 그의 등을 아주 잘 긁어줄 수 있는, 아주 잘 드러내주는 사고실험적 이야기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름아닌 은하철도999에서 나옵니다.
은하철도999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에피소드라고 알려진 "장례의 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할까 합니다.

은하철도999에서의 인간세계는 먼 미래를 다룹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인간들은 아주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 죽지 않습니다.
노화의 문제도 해결되어 늙지도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으며, 그냥 평생 건강하고 충분히 얻을 걸 얻으며 생활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어떤 별에선, 이 죽음의 해결에 전혀 만족하지 않은 채 언제나 전쟁터인 곳이 있습니다.
장례의 별, 이름 그대로 장례식 그 자체인 별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항상 상복을 입고 다니고, 망자를 추모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닙니다.
그 별의 사람들은 마치 광적인 종교인처럼 장례식이란 행위를 깊이 받아들이고, 장례식 뒤에는 장례식을 더 치르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죽인 뒤 다시 그 사람에 대한 장례를 치른다고 합니다.

왜 이런가?
장례의 별은 예전에는 골프나 치면서 정말 천국 같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비행선이 급히 이 별로 우회하여 도착합니다. 애인 관계인 남자와 여자가 있었는데, 여자가 급성으로 위험한 병에 걸려 치료를 필요로 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의 별엔 병원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병에 안 걸리기 때문이죠. 결국 그녀는 죽었습니다.
그는 그 장례의 별에서 정말 낯선 의식, 장례식을 진행하고, 마음속 깊이 오열하며 그녀를 떠나 보냈다 합니다.

여기서, 그 장례의 별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그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고, 그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 감정에 심취한 나머지 남자마저 죽인 후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위해 장례식을 매일같이 전쟁을 해가며 펼치는 일이 일어났다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사람은 괴이하게도 죽음을 만들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3.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

"그러나 이 '나는 원한다'라는 광기보다 더한 착각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결코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에는 죽음의 신비로서의 미래를 파괴하려는 놀라운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계획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가 아무런 비밀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미래를 명확하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또 미래가 더 이상 해독해낼 수 없는 죽음의 불투명한 창고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자살은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로서의 죽음을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다. [죽음의 본질과도 같은 미래를 떼어버리려는 것이며], 그래서 죽음을 피상적인 것, 깊이 없는 것,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에서 나온 말입니다.

블랑쇼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인생과 존재의 의미에 있어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파악할 때 물리적 죽음, 유기체의 죽음에 관심을 가져선 안됩니다.
죽음 이후의 미래를, 미래에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즉 극단적인 수동성 - 불가능성이라는 또다른 상황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블랑쇼의 말을 따른다면, 우리는 죽음을 둘로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능성의 죽음인 “가능한 죽음”, 그리고 불가능성의 죽음인 “불가능한 죽음”으로 말입니다.

가능한 죽음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육체적인 죽음입니다.
이 가능한 죽음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며, 그의 생각에서는 이 죽음이 바로 존재가 전부 무로 돌아가는 상황이고, 이를 보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 - 본래성을 얻어낸다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욕망"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유일하게 추구할 만한 가능성으로 남습니다.

불가능한 죽음이란, "사물들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나의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 - 본래성 자체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기의 소유라고 여겨진 그 모든 것이 무너져서, 이 세계와 관계하는 나의 힘이 모두 무로 돌아가는 상황을 말합니다.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미래에 있다지만, 그 미래는 언젠가는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나"라고, "내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의미가 텅 빈 시간, 다시 말해, "바깥"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죽음, 불가능성의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죽음보다 더 중요하고, 죽음의 본질과도 같은 것은 미래이기 때문이고, 미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상관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가능성의 원천이 아니라, 이 세상이 나의 의미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 불가능성의 원천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바깥”의 상황이야말로 세상의 의미에 더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정도 명언으로, 드립용으로 이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원피스 히루루크의 대사가 굉장히 비슷한 것을 언급하고 있죠.

원피스 히루루크의 명대사라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라는 말이 현재는 드립용으로 쓰이고 있지만, 적어도 이 분의 죽음관이 저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의 인물의 죽음관보다는 훨씬 더 성숙하고 더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2-4. 죽음이 얼마나 애매한가

이제 여기서 다시 한번 용어를 봐야 합니다.
“가능한 죽음”이란 육체적인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전부 앗아가버리는 상태라는 두 가지 용어가 있는데, 이것이 정말 잘 정의된 용어일까요?

첫째로, 불가능한 죽음은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사물들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이나, “‘내가 있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의미를 잃은 상황”은 정말 엄밀하게 말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 같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이 죽은 뒤에도 영향을 주기만 해도 불가능한 죽음은 실패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불가능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바로 그 죽음은 불가능한 죽음에서 빠져나온다는 정말로 애매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은 정말로 명확히 구분되나요?
자, “불가능한 죽음”에 대해 엄밀한 접근 대신, 세계와의 관계에서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상황 정도만을, 굉장히 큰 수동성에 처해 있는 상황 정도만을 불가능한 죽음이라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은 둘 다 애매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죽음 뒤에 불가능한 죽음이 일어나겠죠.
하지만 누구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면 가능한 죽음은 곧 불가능한 죽음이 될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일어나기 전에 죽을병에 걸려 움직이지를 못하는데, 사람들이 님을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죽음이 가능한 죽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용이 너무나 어려워지고 있으니 각설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볼 것은, 죽음이란 개념이 꽤 애매할 수도 있다, 라는 점입니다.

블랑쇼의 글 자체를 보면, 블랑쇼 자신이야말로 이 죽음이란 용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책에서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모순적인 것이라느니,
죽음은 생각의 대상이 애초에 아니라느니,
죽음은 여러 번 이루어진다느니.
그저 얼버무린 것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이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다면, 어느 정도 참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위에 은하철도999에서 말한 장례의 별의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바로 정확히 이 애매함을 겪었습니다.
가능한 죽음 이후에도 나오는 죽음에 대한 애매함이 그들로 하여금 파국을 이끈 것입니다.



2-5. 대체 뭘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바로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죽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는가?



3. 애도하다


3-1. 블랑쇼의 제안

블랑쇼의 제안은, 바로 특정한 형태의 글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바깥"을 탐구하는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의 자세한 이야기는 말해드리지 않겠으나, 글을 쓴다는 점에 주목하길 바랍니다.
글을 쓰고 기억을 남기면서, 불가능한 죽음이란 그 “바깥”에 대해 마치 누군가가 오기를, 누군가가 나의 의미를 잠시 들어올리기를 기다리듯 남겨놓은 뒤 희망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물의 흐름을 살짝 거스르는 물고기와 같이 불가능성의 바다에서 나의 의미의 가능성을 보인 뒤 다시 바다에 묻히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의 접근에서 일어나는 것은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 - 본래성의 실존이 아니라, 그 실존을 누군가가 봐주기를 원하는 타인에게의 내맡김이라고.
그렇게,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이 섞여 있는 상황에서,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3-2. 애도는 얼마나 애매한가

애도란 개념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나오게 됩니다.

블랑쇼의 죽음의 개념을 응용하고자 한 데리다라는 철학자는 애도에 대해서도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이것의 애매함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애도의 성공은 실패이며 애도의 실패는 성공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논의가 진행된 지금 또 이런 말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는 것은 정말 과도한 것 같고, 데리다의 언어유희도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애도라는 것은 그 본질에서부터 정말로 애매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불가능한 죽음이어야 할 사람에게 애도를 하고 있으니 죽음은 다시 그 불가능성을 잠시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의 흐름을 살짝 거스르는 물고기와 같이 말입니다.



3-3. 죽음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제 여기서 또 다른 뇌절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사회가, 최근 사회가 어떻게 죽음을 다르게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정말 20년 내로 급격하게, 전 세계 공통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에서의 예시를 들어보죠.
20여년 전 일어난 911 테러를 생각해봅시다.
지금의 꽤 젊은 사람들도 그 시절의 죽음의 태도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애도의 분위기가 펼쳐졌습니다.
사람들 몇몇은 일상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 몇몇은 추모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은, 사람의 죽음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애매하게라도) 어떻게든 생각해보려던 때였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로부터 한 1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미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학교 총기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계속 총기사건은 일어나고 있는데요,
사람들은 분명 계속 애도하고 추모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는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속되는 재난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도가 제대로 행해지지도 않습니다.
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깊이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깊은 생각 자체가 차단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것은 어설픔, 모든 곳에서 남은 어설픔 뿐입니다.


미국 틱톡에서 정말 논란이 된 영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서 간호사는 환자가 죽어가는 것에 대해 너무 슬프다고 애도하는 영상이었는데,
이상하게 카메라 앵글은 굉장히 좋은 상태로 맞춰져 있었고,
배경음악으로 아주 웅장하고 슬픈 영화BGM 같은 노래가 깔려 있고,
감정을 과다하게 표출하면서 팔을 내던져가며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거 같긴 해 보이죠.
뭔가 아주 어설픕니다. 경박하고요, 오글거립니다.
제가 뭐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제 본능이 말하길 간호사는 절대 일반 사람의 죽음에 대해 오열해선 안된다고, 그게 기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도대체 무슨 부분이 딱 집어서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4. 그래서, 뭔 말 하고 싶은 건데?

다시 예전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타인은 불가능한 죽음을 염두해 두고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기억을 남기려 합니다.
세계와의 관계가 전부 끊어지는 것을 생각에 두었음과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 내맡기려 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한다고 봅시다.
진정한 죽음, 불가능한 죽음에 강조하여 그의 의미를 흘러가게 둔다면, 타인의 삶의 의미를 잃어가므로, 우리는 애도에 실패합니다.
삶의 의미를 낚아채서 타인의 의미를 파악한다면 나는 마치 병에 걸린듯 타인을 보내지 못하고 잡아둡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죽음,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므로, 우리는 애도에 실패합니다.
진정한 죽음, 불가능한 죽음에 강조하여 삶의 의미를 타인에 내맡긴다면, 내맡김을 통해 가능성을 추구하므로,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 추구에 실패합니다.
가능한 죽음에 강조하여 삶의 의미를 가지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불가능한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삶의 의미 추구에 실패합니다.


불가능성을 얻어야 합니까?
가능성을 얻어야 합니까?
우리는 그 어떤 시원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이 문제에 부딪칩니다.



3-4-1. 그러나

그러나, 이것이 이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유입니다.
시원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이 문제에 부딪치는 것이야말로, 애도의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왜 죽음은 중요시되지만 스스로 일으키는 죽음은 오만한 개념인가?
죽음에 부딪힌 사람이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듯이, 즉 죽음에 대해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언급하는 이유가 미래의 문제에 있듯이,
우리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논할 때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을, 자신의 사람다운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알아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만”이란 단어가 참으로 형이상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 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오만함이란, 그저 애매한 것을 확정짓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본능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죽음의 논의도 그렇습니다.
글에서 봐왔듯이 죽음보다 더 중요한 미래에 대한 논지가 있죠.
미래에 대해 우리는 절대 완전하게 생각할 수가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본래성이라고 하는 삶의 의미를 되찾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해 두어야 하고,
그 가능성과 함께 타인의 삶의 의미를 대신 지켜볼 가능성도 계속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애도가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며, 타인의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이며,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입니다.

삶의 의미나 죽음의 의미라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수학과 과학처럼 대답이 분명하지가 않아 보입니다.
왜 이것이 불분명한지는 누구도 알지 못할 것 같으나,
때때로 우리는 이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완벽히 알고 있음에도 이것을 질문하고, 이것을 생각합니다.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같은 질문을 때때로 우리는 머릿속에 두고 있습니다.
설령 거기에서 누가 대답을 건네준다 한들, 우리는 그것이 불완전하고 경박하다고 생각합니다.



3-4-2. 미래가 차단된 장례의 별

위에 은하철도999에서 말한 장례의 별의 사람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의 문제가 해결이 되었고,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미래는 완전히 차단되어버린,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는 대상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장례의 별의 미래라는 상태는 애매함을 모두 확정하는 일입니다.
그들 스스로 깊은 생각 자체를 차단해버렸던 것입니다.
질문의 기회가 차단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블랑쇼가 말하려던 것은 이것입니다 - 깊은 생각의 주제가 되는 그 수많은 질문은, 그대로 남아있고, 그대로 질문해야 합니다.

은하철도999의 장례의 별의 사람들은 정확히 이 애매함을 겪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애매함을 확정지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의미가 그대로 애매하게 남아있었고,
미래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질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 그들은 여기에 대한 질문을 그들조차 의식했지 않았지만 정말 극도로 원하는 것이었음을 그들은 자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파국을 이끈 것입니다.



3-4-3. 지금 우리의 애도

이 세상의 모든 애매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답변이 없이 부딪힐 걸 알면서도 질문하는 것.
이것 전체가 전부 애도라고 하지는 않겠으나, 애도는 이것을 일으키는 가장 흔한 수단일 것입니다.

현재 사회는 애도의 중요한 점이 차단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깊은 생각이 정말 사라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생각을 방해하는 매체들이 많아졌으며, 무엇보다 확정하기 위한 결단을 내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의 정말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러나 확정적일 만큼 날카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그 대답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도저히 못 견디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자기의 삶의 의미를 얻는데 실패하고, 타인의 삶의 의미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시도하십시오.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질문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경박함으로 쉽게 빠지는 이 절벽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이 세상의 정말 중요한 문제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엔 답변을 바랄 수 없이 그저 질문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밖엔 전혀 대안이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휘몰아치는 바다 앞에, 목전에서 막을 수도 없어서, 나 자신의 의미에 대한 태도 자체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애매성과, 중성성과, 유한성 앞에 자기 자신을 그대로 놓으십시오.



4. 결말

완벽주의는 우리가 애도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하게 애도해야 하는 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정확히 말해, 완벽한 나, 미래의 나에 대해 애도하십시오.
그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깥"의 나, 세계의 영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 누구, 불가능한 나인 것입니다.
이 "바깥"의 나는 생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애도의 대상이고, 깊은 생각의 대상입니다.
완벽한 나를 버리고 애도하십시오. 그럴 수록 나는 나와 더 가까워집니다.

한 이상 앞에서 그저 행동이 벽에 부딪힌다면, 그것을 그저 지켜봤으면 합니다.
선택을 확정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까지 선택을 미루지 마십시오. 그것은 애초에 선택의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은 과거의 후회하는 일을 계속 생각하며 일상을 멈춘 사람처럼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일을 계속 생각하여 일을 멈추고 있습니다.
당신이 패배자처럼 느껴진다면, 그 느낌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면서도 한번쯤은 그대로 부딪치십시오.

이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줄 것인지는 누구도 명백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애도로서 어떤 의미를 얻는지는 그 누구에게나 다르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냈습니다.


그렇게 A+만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B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렇게 리포트를 쓰기 전에 계속 책을 읽으려는 행위를 내려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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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08 19:30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완독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애도를 하고 결말만 봐도 될까요 하이데거부터 읽을 엄두가 안나네요 죄송합니다
멍멍이개
22/12/08 19:4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아빠는외계인
22/12/08 20:21
수정 아이콘
어떻게 보면 간단한 주제인것 같으면서도 다양한 관점과 연결되는게 흥미롭네요. 다만 결론을 보고 나면 굳이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글의 목적이 결론을 향하는게 아니라, 본론 부분의 다양한 관점과 연결지어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것에 더 향해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글의 방향을 그렇게 명시하면서 글이 전개됐다면 더욱 납득도 되고 글을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Your Star
22/12/08 21: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22/12/08 21:48
수정 아이콘
이러니 지식소매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작은대바구니만두
22/12/08 22:08
수정 아이콘
민간인 사찰을 멈춰주십시오... 제발...
무한도전의삶
22/12/08 23:34
수정 아이콘
중간에 어려운 내용은 살짝 흘려 읽었습니다...
그래도 마음 속 고집인 완벽한 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애도가 중요하다는 건 잘 읽고 갑니다.
죽자군
22/12/08 23:40
수정 아이콘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또 다른 재미있는 논제가 될수 있겠다고 여겨지네요. 글이 번역체같아 어려웠지만 읽어볼만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고오스
22/12/09 00:11
수정 아이콘
저도 게으른 완벽주의자 기질이 꽤나 있고 이걸 비교적 최근에 알았습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 도쿄대생이 알려준 5분 공부법과

(이유불문하고 책상에 앉아서 5분만 버텨라 그 후 1시간 놀고 다시 5분 앉아라 그러다 보면 알아서 공부가 될 것이다 ex. 헬스장을 일단 가면 달리기라도 하고 온다)

완벽주의자기 되지말고 완료주의자가 되어라 라는 말을 깊이 세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2/12/09 00:4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사하라
22/12/09 08:44
수정 아이콘
예전 같았으면 정독하다가 지쳐서 그만 두었을텐데,어떻게 넘길 건 넘기면 결말까지 봤네요. 잘 읽었습니다.
스핔스핔
22/12/09 09:04
수정 아이콘
제가 이 성향때문에 진짜 심각하게 x된 케이스인데, 저약시 중간부분은 너무 어려워서 결론을 주로 봣는데 정말 좋은 말인거같습니다..ㅠㅠ
22/12/12 00:28
수정 아이콘
좋은글 와드
22/12/14 14:2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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