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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1/28 13:52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
"88년 13대 국회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대야소 국회가 만들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 여소야대..가 맞지 않나요? ^^;
08/11/28 14:21
지역주의 자체를 dj가 만든것이 아닐진데 지역주의에 과를 dj에게 돌린다는것은 어폐가 있겠죠.
dj가 지역주의로 인해 이득을 얻은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dj가 원해서였다기보단 호남이 그를 선택했다고밖에 생각할수 없네요. 그 억울함을 풀방법이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08/11/28 14:25
제가 아는 일화를 덧붙히자면(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당시 삼선개헌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에게 선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김대중 선거 참모(맞나)가 박정희에게 포섭되서 당시 부산에 전단지가 붙죠..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문구였던거 같은데(뭐더라..전라도인은 김대중 뽑자 뭐 이런식이었나..이런 문구는 역선거 작전이었죠..)이후부터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됬다고 보면 될꺼 같습니다..
08/11/28 14:28
잘 읽었습니다.
지역주의의 시작은 71년 대선부터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안되지만, 김대중 유세당시 대구 부산에서도 수십만의 청중이 모였다고 하죠. 그리고 김대중과 관련해 단순한 지역주의가 잘 통한 것은, 단순히 출신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분단체제, 냉전체제였기에 가능했었습니다. 야당의 정치신인에 불과했던 그가 71년을 전후로는 용공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이 되고 마는데, 이는 통일에 대한 시각과 관련이 있죠. 김대중은 재임하면서 결국 햇볕정책을 실현했지만, 이미 71년 이전부터 남북간 비정치적 교류와 한반도에 대한 주변열강으로부터의 외교적 안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게.. 오늘날에도 통하는 논리지만 이적행위로 간주 되는거죠.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실리는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대화라는 발상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전의 도구가 되었다고나 할까.
08/11/28 14:36
[NC]...TesTER님// 링크를 누르면 사용권한이 없다고 나오는데, 본문에 적어주신 글이 해당글인가요?
내용을 보아하니 두개의 글이 있는거 같은데.. 수정 부탁드릴게요..
08/11/28 14:36
22raptor님//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역비이뽀~님// 맞습니다. 71년 대선을 지역주의 시작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도 DJ에 색깔론을 적용하는 첫 단추가 71년 대선 전 부터 DJ가 주장해 온 남북교류 부분이었을 겁니다. 남북적십자회담 제안했다가 바로 빨갱이로 치부되기도 했었구요. (시대상황을 봤을 때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부분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는 점입니다. 일반 대중은 또한 그 악용에 쉽게 넘어갔구요. 지역주의 문제와 함께 이 부분은 반드시 해결을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08/11/28 14:42
['지역주의'였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수도권과 영남권에는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었고, 박정희는 95만표 차이로 결국 삼선에 성공을 합니다. ] 이 문장의 논리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역주의를 통해 박정희가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는 이야기인가요?
lubmai // 김대중은 철저하게 지역주의를 이용했습니다. 김대중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호남이 자발적으로 지지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08/11/28 15:06
반 MB세력화가 정말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야당들 야당 역할이랄 걸 하고 잇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각 당의 당원도 아니고 일일히 그쪽 홈페이지 찾아다니면서 논평확인할 시간도 없고... 현상적으로만 봤을 때 야당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언론 기사를 퍼와서 언론의 관제화 어용화를 조소하고 비판하는 여론은 많은데,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협상을 유도해야할 야당의 목소리는 거의 전무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들리지 않습니다.
전 진중권의 잡담을 보고 싶지도 않고, DJ 격노 반 MB촉구를 표제로 단 기사, 김민석 블라블라, 노무현 블라블라에 매몰된 야당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 정책적 대안으로 승부를 거는 강한 야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까요. 말 나온 김에 반MB 정치세력화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른 분야는 이견 때문에 힘들다면, 최소한 대북정책에 관한 압박을 넣기 위한 목적으로라도 말이죠. 제발 강력한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08/11/28 15:20
무늬님//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이 지역주의를 이용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철저하게'란 부사는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휘 하나로 지역주의 목 매달고 필사적으로 호남에 호소하는 정치인 김대중이 되버립니다. 오늘날 정치적 지역주의의 기원이랄 걸 모색하는 이 글을 보다시피, (절대적으로 맞는 건 당연히 아니겠습니다만), 정권의 안정을 위해 지역주의를 조성하고 강화하고 이익을 보는 데 잇어서 그 목 매담과 필사적인 정도를 보자면 정권이 주체였다고 보이거든요.
지역주의에 힘입어 정권은 71년부터 계산해도 27년간 지속되었죠. 그나마도 IMF와 더불어, 김대중이 지지파로부터도 욕을 먹는 DJP연합과 이회창 이인제 분열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습니다. 간신히 됐다는거죠. 김대중 본인은 자신이 한끗차이로 잡은 지역주의적 현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지금도 동지 적 할 것 없이 욕하는 전두환 노태우 사면도 하고 말이죠.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고정 지지층이 있다는 건 엄청난 힘이죠. 김대중은 분명 그걸 이용했고 하나의 자산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락의 문제로 가자면 하등의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08/11/28 15:50
무늬님// 저는 지역주의를 만들었다고 볼수있는 박정희나 지역주의를 공고화시킨 ys와 dj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지역주의를 만든것은 dj가 아닙니다. 지역주의에 공과를 분명히하려면 그 원인부터 찾아봐야 할것이고 그 원인에는 박정희가 있지 dj가 있진 않습니다. 따라서 지역주의에 원인책임에 dj는 들어갈수 없습니다. 둘째 지역주의를 공고화시킨것도 dj가 아닙니다. 아직까지 선거판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명언 '우리가 남이가'처럼 ys는 지역주의를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승리에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영호남을 비교해봐도 호남이 영남에 상대가되질 않습니다. dj가 지역주의를 이용했다고 하지만 dj본인은 평생 지역주의를 달가워하지 않았을겁니다. dj에게있어 지역주의는 불공정한 조건이었기때문입니다. 호남표를 다해봐야 영남에 절반이나 될까마나한 상황에서 지역주의를 택한다는건 선거에서 지겠다는 말과 같은겁니다. 호남이 dj를 선택했다고 표현한것은 호남에 '한'에서 기인합니다. 그들이 겪었던 차별과 고통, 사건들은 '한'이되어 지역주의에 함께 표출됩니다. 그들은 그 '한'을 풀어줄 인물이라면 '지역'에 상관없이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후보에 '지역'에 상관없이 노무현전대통령이 대선당시 호남에서 받았던 지지를 살펴보면 알수있습니다. 따라서 dj가 지역주의 이용을 위해 호남을 선택했다고 보기보단 호남이 그들에 한을 풀기위해서 dj를 선택했고 또 노무현 전대통령을 선택했다고 보는게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무늬님은 왜 dj가 지역주의를 철저히 이용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싶습니다.
08/11/28 16:23
lubmai님 말씀에 동의하고요. 미국같은 민주주의 선진국도 전통적인 공화당 지역, 민주당 지역이 있고, 대선같은때에도 출신 지역이나 지지 지역 같은게 존재합니다. 즉, 미국도 어느정도의 지역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미국에서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전국적인 당이 되려고 노력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지역적인 당이 되려는 노력이 강합니다.
매번 민주당에 몰표를 몰아주는 호남지역이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식에 기반하는 영남지역이나 누가 먼저 잘못했고, 누가 더 잘못했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정치를 하시는 위정자분들이 자신의 정당이 전국구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한나라당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에 출마해서 낙선하신 노무현 전대통령이나, 02년인가요? 민주당의 적자였던 한화갑을 버리고 과감히 부산출신을 선택하여 세대교체를 단행한 광주 전남의 선택을 통해 호남지역과 민주당의 노력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나라당의 중진의원들이 호남에서 출마하여 물먹는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뭐 떨어지더라도 장관이나 공기업장을 맡겨주실텐데 뭐가 걱정인가요.) 국가 부도 상황이 오더라도 변치 않는 신뢰를 받는 한나라당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을 해주셨으면 하네요... 그럴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긴 하지만요.
08/11/28 16:42
lubmai // 김대중 전 대통령을 피해자로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반박하자면 1971년 당시 신문기사를 찾아보니까, 김대중 당시 후보 발언이 '경상도만 발전했으니까, 호남도 뭉쳐서 발전시키자' 라고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사진은 컴퓨터가 포맷되어서 없지만 1971년 4월 즈음에 조선일보 1면에 많은 군중들의 모습과 함께 나온 기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지역감정의 시작은 87년 선거 부터이지, 70년 부터는 아니라고 봅니다.
본문에서는 87년에 '한(恨)을 풀기 위해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지게 됩니다' 라고 했으나, 솔직히 한에 기인했으면 김대중을 대표로 한 평민당이 몰표한 것은 이해 할 수 있으나, 그에 못미치지만 민정당도 20%라는 지지를 받았고, 특히 김영삼의 통민당은 불과 1%도 못미치는 지지를 받은 것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또, 한을 광주민주화 운동이라고 본다면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1년 남짓 지난 11대 총선에서도 상당수 전두환을 필두로한 민정당이 당선했습니다.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의문일 뿐이니까, 현대사에 능통하신 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http://www.nec.go.kr/sinfo/index.html 에서 역대 선거 통계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08/11/28 17:27
Alan_Baxter님// 신문 기사에 관해서는, 오히려 그 신문이 지역주의 조장의 표제로도 볼 수 있는데요.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입증하려면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신문기자가 허구로 기사를 쓰지 않았다고 보장도 못하구요.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였던 만큼 더더욱 신뢰가 어렵네요. (실제로 그런 말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87년 대선에 관해서는, 제가 통계 찾아보니까, 민정당은 광주에서 5% 정도 득표를 했네요. 님이 말하신 20%의 득표율은 아닌 거 같습니다. 481,126(투표자수)/ 22,943(노태우)/ 2,471(김영삼) / 449,554(김대중). 노태우 4.8% / 김영삼 0.5% / 김대중 93.4% 네요. 전남과 전북을 아우른 걸 말씀하셨나 싶어서 찾아보니 민정당 노태우 득표율이 전북 14%/ 전남 8%네요.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 전후 맥락은 모르겠지만 말씀하신대로네요. 실제로 압도보단 적절히 표 나눠먹으면서. 근데 민정당 쪽 후보를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은 가는데, 당선된 한명은 전남매일신문 사장이고, 다른 한명은 비당선이었찌만 광주시장이었네요. 호남 쪽 유력인사들이란 건데... 글쎄 이건 이 이상 제가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거 같네요.
08/11/28 17:27
기본적으로 글의 뉘앙스가 DJ에게 편향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DJ가 끝까지 호남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에 기반해서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니고, 그 또한 결국 합당을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은퇴 번복이라는 정치적 무리수를 동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에서의 엄청난 지지와 JP와의 합당을 통한 충청권 표심의 흡수를 통해서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지요.
사실, YS에 비해 DJ가 딱히 정치적 도덕성에서 앞서 있다고 보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본 글에서는 YS가 혼자 힘으로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합당을 선택했다는 등... 다소 편향된 표현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87년의 후보 단일화 실패를 어느 한쪽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굳이 따진다면... DJ의 약속 불이행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87년 대선에서의 득표 자체도 YS가 DJ보다 많았습니다. 92년도 대선은 YS가 합당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도 DJ보다 YS의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입니다만, YS로서는 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합당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정치적 선택이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문제가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를 비난했던 DJ 역시 비슷한 방법을 통해 결국 대통령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일방적인 비난은 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본문이 DJ와의 상대적 비교를 했기에 가능한 부분입니다만..) YS와 DJ라는 양대 정치적 거물이 지역주의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지역주의의 공고화가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그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 봅니다. 만약, DJ나 YS 둘 중의 한 명만 없었어도 이 정도로 지역주의가 고착화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08/11/28 17:28
Alan_Baxter님// '경상도만 발전했으니까, 호남도 뭉쳐서 발전시키자' 이 말로 판단하기에는 사실 DJ의 지역주의 이용에 대한 부분은 명확하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하셨다면 더더욱 말이죠. (동아일보를 같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3대 대선 득표율이 나타내는 것은 말씀하신데로 여러 의문점이 있긴 합니다. 제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 봅니다.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에 대한 실질적인 데이터 부족(전두환 전 사령관에 대해서만 정보 입수) -13대 대선 때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최악에 다다르는데 이 부분 때문에(YS에 대한 강한 반목, 아마도 DJ와 통합이 못 된 것에 대한 부분) 노태우 후보에 대한 어부지리성 표가 몰릴 가능성 호남 민심이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보다 YS에 대한 반목이 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08/11/28 17:33
yoosh6님// 92년도 대선은 YS가 합당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도 DJ보다 YS의 당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입니다만, YS로서는 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합당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 가능성이 높았다면 오히려 합당을 안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합당 자체가 그동안 YS가 쌓아온 이미지에 치명타를 날리는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갈림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YS가 못했냐, DJ가 더 잘못했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DJ를 논할때 빠질 수 없는 것이 YS인건 인정하지만 이 두 사람으로 인한 지역주의 고착화는 분명한 사실임은 맞습니다) 지역주의 시작과 한국 정치사에 전면적으로 부상하게된 동기를 한번 짚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아마도, -71년도 대선(7대) -87년도 대선(13대) 지역주의 시작을 어느때로 보느냐에 따라 그 평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08/11/28 17:44
87년 후보 단일화 당시에 김영삼 후보 중심으로 단일화가 되어 가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의 만남에서도 실제 이런 말까지 있었다고 하지요. 김영삼 후보가 자신이 먼저 하면 다음에는 당신이 대통령 하시오 라구요. (물론 지켜졌을지는 의문입니다만...) 두 사람의 성향을 보아도 김영삼 후보는 인파이터적이고 김대중 후보는 아웃복서 스타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직접 만나서 김영삼 후보 중심으로 단일화하기로 해 놓고 뒤에 뒤통수를 맞은 김영삼 후보 입장에서는 그의 성향상 불같이 화가 났겠지요. 결국, 그 이후로 김영삼 씨의 상도동계와 김대중 씨의 동교동계는 거의 원수처럼 지냅니다. 이에 대한 각 지역별 감정 역시 서로 달랐는데 부산, 경남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어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난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전라도 지역에서도 후보 단일화 실패의 이유로 김영삼 후보에 대한 모든 비난의 화살이 돌려집니다. (민주 세력의 분열이 고착화될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이후의 많은 세월이 지나서 김영삼 씨도 대통령을 했고 김대중 씨도 대통령을 지내게 됐지만 당시 87년도의 정권 교체가 단일화된 민주 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김영삼, 김대중 양 후보가 굳이 보수 세력과 손을 잡지 않고도 대통령에 취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08/11/28 17:56
제리와 톰님//
말씀하신 부분이 본격적인 지역주의의 시작이라고 보는게 맞겠지요. 사실 시초는 박정희 대통령에서 시작했지만, 지역주의의 공고한 고착화는 87년 대선 당시의 YS와 DJ의 분열에 기반한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부산-경남이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많이 했음에도 강한 반 DJ 정서를 갖게된 것이 87년 당시 DJ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반발에서 기초 했지요. 결과적으로 말씀하신대로 서로 양보했다면 차례대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음에도 각자의 정치적 야심이 그런 민주화의 열망보다 더 컸기에 발생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NC]...TesTER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로 인해서 나뉜 것은 사실이나, 이후 DJ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떤 측면에서 보면, 노무현으로서는 YS의 후광에서 벗어나서 독립하고 싶었던 것 역시도 어느 정도 일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YS의 추천에 의해서 정치를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말이지요. 그리고 87년 대선이후, 3당 합당 이전에도 YS의 지지율이 큰 차이는 아니나 DJ보다 항상 앞섰습니다. YS나 DJ의 합당 선택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정치적 욕심이라는 부분이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DJ야 말로 JP와의 합당이라는 정치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이인제라는 돌출 변수가 없었다면... 대통령 당선이 어려웠지만, YS는 상대적으로 보다 나은 입지에서 선택한 것이지... DJ를 이길 수 없어서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YS를 언급한 이유는 분문이 동일한 행위에 대해 DJ에 비해 YS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잘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08/11/28 18:24
Alan_Baxter님// / 지역감정은 시작은 7대 대통령 선거 그러니깐 당시 박정희 김대중 후보간의 격돌에서 부터 시작된것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학계에서도 인정하는것으로 알고 있고요. 7대 대선전까지의 선거 구도를 보면 농촌지역의 지지세를 얻은 여당 박정희 후보측 vs 대도시지역의 지지를 얻은 야당 후보측의 선거전이였습니다. 전형적인 보수적인 농촌사회와 개혁적인 도시민의 선거구도로 볼 수 있습니다.(지금 미국사회의 대도시카운티에서 앞서는 민주당과 나머지 땅넓은 소도시지역에서 앞서는 공화당의 선거구도로 이해 하시면 됩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경제개발의 완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약속을 뒤엎고 박정희 대통령이 세번째 출마을 하게 됩니다. 당초 박정희 대통령측은 당연히 국민들이 마지막이라는 자신의 말을 이해해줄거라 생각했을겁니다. 그런데 당시 야당에 걸출한 40대 3명이 나오고 치열한 경선끝에 김대중후보가 야당후보로 나오게됩니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이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을 또 뽑게되면 총통제 국가로 갈지 모르다며(실제로 3번째 당선이후 이른바 유신을 단행하면서 영원한 집권을 노렸죠) 이번에 세대교체를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상당히 참신한 공약들을 들고 나오죠.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어서 당시의 김대중은 40대의 햇병아리 였습니다. 그런데 그 햇병아리가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게 된것입니다. 10년 넘는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과 야당측의 신선한 공약 그리고 김대중후보의 논리정연한 말빨들이 국민들에게 먹히면서 여론조사가 당시 활성화 되지 않았음에도 확 느끼기에 선거판을 김대중후보가 거의 쓸고가게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가 대단했던것은 물론이고 당시 집권 공화당을 비롯 정부측인사들은 크게 당황을 했죠. 이때 나오게 된 전략이 바로 지역감정입니다. 영남과 호남의 인구비율이 2배가 넘는것에 착안 당시 국무총리였던 분의 주도하에 선거 당일까지 아예 대놓고 이루어지죠. 부산의 경우 당초 김대중후보가 크게 앞서고 있던 지역이였는데 막상 개표결과에서는 이 지역감정때문에 뒤집어 집니다.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횡행하죠 김대중이 되면 전라도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니게 된다더라 김대중이 전라도에 가서 경상도비하 발언을 했다더라 전라도만 발전하게 만든다더라 등등
말도 안되는것처럼 보이는 문구들이 교통 통신이 발전하지 않았을때라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언론에서 때려주고 조직적으로 입소문을 내다보니 다들 없던 말도 믿게 됩니다. 선거 당일까지 각종 유언비어지가 난무를 하게되고요. 관권선거가 이루어진거는 물론이고요. 그결과 박정희 후보측은 초반의 불리함을 뒤엎고 대선을 승리하게되고 지역감정의 위력을 몸소 경험하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단행안하고 정말 3선만 하고 물러나서 만약 그후에 정상적 선거가 계속 있었다더라도 당시의 집권 공화당에서는 아마 이 지역감정을 계속 이용했을거라 생각됩니다.((야당서 영남지역출신을 내세워도 지금의 노무현 전대통령처럼 영남에서 분명히 무력하게 만들었을겁니다.) 여당= 영남당, 야당= 호남당 이미지 전략 나머지지역 반반의 구도.... 영남 지역의 인구가 타시도에 1.5배만 되도 매력적인데 2배가 넘으니 쉽게 포기할수 없는 전략이지요. 87년 대선에서 만약 양김이 합쳤다면 지역감정의 양상은 다소 달라졌을수도 있고 이때 양김의 욕심으로 합치지 못했다하더라도 최소한 김영삼씨가 그당시 총선이후에 PK지분을 가지고 민정당에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호남 영남의 대립 지역구도는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덜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님이 질문하신것중에서 87년에 호남에서 한에 기인한 평민당몰표는 이해해도 민정당의 20%득표는 이해할수없다고 했는데 이건 당시의 상황과 일반적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인식이면 쉽게 알수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지역감정 못지않게 발휘되는게 자기 지역 발전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 지역개발욕구에 따른 여당인사들의 어드벤티지가 이른바 여당프리미엄이라고 하는데 여당으로 나오게 되면 아무래도 예산집행에 힘을 쓸수있어서 전두환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여당소속이면 일정한 비율의 득표를 할수 있는 당시 상황이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후보가 돌린 수건 시계들도 한몫했을테고요.당시 호남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이라 20% 득표한것이 아니라 여당의 민정당이라서 저렇게 득표할수 있었던겁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현재 보시는 대로이고 현재의 한나라당은 잘돼서 호남을 얻으면 좋은것이고 아니여도 지역감정을 적절히 이용해서 영남만 잡고 있으면 되는겁니다. 민주당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그 지역의 벽을깨야하고요. 민주당의 최상의 상황은 호남 50내주고 영남 50얻어 오는것일텐데 노무현 정권내내 시도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건 아니죠.
08/11/28 18:37
Liberal님//
DJ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민당을 만들지 않았다면이 지역주의 고착화를 막는 더 적절한 전제이지 않을까요? 실제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92년 대선이 아닌 87년 대선에서의 YS의 호남 득표율과 DJ의 부산-경남의 득표율을 보시면 그 고착화의 원인이 어딘지 알 수 있을겁니다. YS의 3당 합당은 향후의 그런 호남의 지역주의적 투표의 적절한 명분이 되어주었을 뿐이지, 그것이 원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겁니다. ps. 그리고 DJ가 지역주의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이유는, 87년 대선에서도 YS의 반불교적인 발언만 없었다면 YS가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를만큼 영남권의 투표 인구가 훨씬 많지요. 지금 현재도 영남권이 불교 신도의 비율이 가장 높을겁니다.
08/11/28 18:45
yoosh6님// 3당 합당을 한 즈음에 정치상황에 대해 약간 잘못알고 계신거 같아 말씀드립니다. YS로써는 다음대선에서 DJ를 이길 자신이 없어서 자신의 민주화적 가치를 버리면서 까지 3당합당에 나선것이 맞다고 봅니다. 87년 대선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 DJ가 이끄는 평민당이 이른바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이 됩니다. YS로서는 충격이죠 야당의 적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DJ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것입니다. 대선에서 1%정도 차이지만 2등을 했을때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총선에서 제3당으로 몰락한 이후 아마 불안했을겁니다. 1당이 된 당시 여당 민정당도 여소야대 국면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고요. 게다가 야당의 지도자들은 DJ와 YS.
당시 민정당의 노태우대통령은 두 거물정치인에게 둘러쌓인 현실과 여소야대의 국회...두 거물정치인에게 다 입질을 넣지만 결국 응답한건 YS였죠. 그 당시의 상황이 YS를 아마 3당합당을 하게금 만들었을겁니다. 제1야당자리를 내준대따른 모멸감과 DJ에게만큼은 절대 질수없다는 자존심 아마 YS가 당시 제 1야당을 차지했으면 노태우대통령이 JP는 몰라도 DJ 나 YS 를 불러들이기는 힘들었을겁니다.
08/11/28 18:57
Liberal님//
잘못 알고 계신 것은 제가 아니라 liberal님입니다. 혹시 제가 착각했나 싶어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정당별 득표현황 || 제13대국회의원총선거(1988. 04. 26) 정당별 합계 19,642,040 민정당 6,670,494 민주당 4,680,175 평민당 3,783,279 87년 이후의 모든 여론 조사 및 선거에서 평민당이 민주당에 앞선 적은 한번도 없을겁니다. 물론 DJ가 YS보다 득표율이 확실하게 앞섰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물론 그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지역주의의 고착화와 함께 그 차이가 줄어들지는 않았지요.
08/11/28 19:12
Alan_Baxter님// 많은 분들이 답글을 달아주셔서 사족만 늘리는것 같은데.... 전 정치에있어서 오십보 백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정치라는것은 차악을 선택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저번 대선에서 뽑을사람이 없어서 안뽑았다라는 말도 싫어합니다.) 멀리 떨어진 우리들에 눈에는 정치라는 꾸정물속에 몸을 깊이 담그고 행위하는 자들이 다 똑같이 더러워보일 뿐이지만 자세히보면 그 하나하나마다 더러움에 정도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별하는것이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정치를 해야하고 그럼 미세한 차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것이 옳바른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전 박정희보단 ys가 ys보단 dj가 좀더 나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dj를 피해자로만 묘사했다고 하셨는데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제 글에 등장하는 정치인은 박정희, ys, dj 이렇게 3명이었기 때문입니다. dj가 지역주의에 하등에 책임이없었던 정치인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박정희, ys, dj 이렇게 3사람을 놓고보면 가장 책임이 적은 사람이 dj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 답글에 그런 느낌이 날수가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이 저 3사람이기에 그렇게 된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dj를 평가했다면 다른 답글이 달렸을겁니다.
08/11/28 19:24
yoosh6님// 평민당이 황색돌풍을 일으키면서 제 1야당자리를 차지했고 이에 불안을 느낀 YS와 당시의 여소야대에 불안을 느낀 노태우대통령이 JP를 합쳐서 생긴게 민자당입니다. 총득표에서 통민당이 앞서는지는 몰라도 총의석수에서 제1야당 자리를 내주면서 3당합당에 나선겁니다. 제1야당 총재와 제2야당총재의 위상을 YS가 몰랐을리가 없죠. 제1야당의 자리를 내주는 그 순간 YS는 모든 스포트라이트에서 DJ에게 밀리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차이로 이겼던 87대선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거죠. 그 깜짝 반전카드가 바로 3당합당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DJ가 87년 대선에서 통민당을 뛰쳐나와 평민당을 창당한건 저도 잘못한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통민당 총재였던 YS는 이제막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고 복귀한 DJ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구합니다. 계속 야당총재생활을 해온 YS도 포기할수 없었겠지만 70년 일본납치부터 교통사고 위장 살해사건 그릭고 80년 광주에서의 사형선고까지 숱하게 죽을고비를 맞이해온 DJ에게도 쉽게 포기할수없는 대선이였습니다. 두사람 모두에게 실로 몇십년만에 찾아온 서울의 봄이였으니깐요. 차기에 대한 약속을 믿지못하더라도 둘중한명이 양보했다면 아니 DJ가 양보했다면 좋았을겁니다. 그러나 서로의 욕심과 서로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자신이 먼저 대통령을 해야한다고 생각을했고 그결과 양김은 분열 했습니다.
71년 전략적으로 이용되어진 지역감정이 80년광주와 87년 양김의 분열로 점점 고착화길로 들어섰다면 그이후 행해진 3당합당은 지역감정구도에 쐐기를 박아버립니다. 양김의 분열도 문제였지만 그 후에 YS가 민정당에 거의 흡수되다시피 합당해버린 처사는 돌이킬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였습니다. YS가 전두환의 심복이였던 허삼수후보를 신군부의 독재상징이라며 합당전에는 맹비난하며 젊은 노무현을 국회로 보내더니 합당이후에는 자신이 발탁했던 노무현을 비난하고 그 비난하던 신군부의 허삼수를 당선시켜달라고 지지유세 다닌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수 없네요.
08/11/28 20:19
Liberal님//
YS의 3당 합당은 말씀하신대로 그의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이겠지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DJ가 갖은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나, YS 역시 그런 DJ를 support했고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서 일했기에 두 사람 모두 대표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음은 틀림 없을겁니다. 어찌되었건 DJ가 후보단일화에 구두로나마 합의 했다가 파기한 것은 그 당시의 엄청난 민주화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태임은 틀림 없을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YS와 DJ 사이의 반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게 해 준 것이 3당 합당이겠지요.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역적 기반의 차이 때문에 YS가 DJ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불안한 확률을 믿기보다는 확실한 승리를 원했기에 YS가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YS가 그렇게 비난하던 군사정권과 손을 잡았듯이 DJ 역시 군사 정권의 황태자라고 볼 수 있는 JP와의 연합을 통해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 역사는 돌고도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이해 앞에 약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겠지요.
08/11/28 21:09
yoosh6님// 댓글이 상당히 늦어졌네요. 밥을 먹고 오느라..
YS에 보다 비판적입장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시더니 제가 보기엔 모든 동일 사안에서 DJ에 더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계신듯보입니다. 87년 후보 단일화와 관련해서는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는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두분의 욕심때문에 결국 대의를 져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님이 표현하신 DJ의 약속파기로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것은 똑같이 YS에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DJ나 YS둘다 상대방으로의 단일화는 서로 절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죠. 오히려 재야등 민주세력은 DJ로의 단일화를 요구하기도 했고 DJ가 87년 직선제 개헌이후 정치일선에 복귀하기전 YS가 야당총재로 있으면서 DJ가 정치적 복귀가 이뤄지면 후보직은 양보하겠다는 약속등 일방적으로 DJ가 신뢰를 저버리고 87년 대선에 나선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87년대선의 결국 두 양김의 과오가 만들어낸 비극의 역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다만 제생각은 DJ로 단일화되어서 또 지역감정으로 공격받느니 YS로 먼저 단일화되도록 DJ가 양보했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 두분의 잘못에는 그 경중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역적 기반차이때문에 YS가 유리하다는 말은 어느정도 맞지만 YS가 가진 PK지역기반은 같은 경상도지역인 TK정권때문에 조금씩 잠식될 위험이 큰반면 DJ의 호남지역기반은 훨씬 공고하죠 그리고 수도권에서도 YS가 약간 밀리기도하고요. 총선에서 제1야당자리를 내주면서 그 불안은 현실로 다가온것처럼 보이고요. YS는 민주화라는 자신이 쌓아온 가치를 져버리면서 까지 민정당 품으로 간것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지역주의에 있어서 3당합당과 DJP연합을 같은 괘로 설명하신것도 제 생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보이지만 그건 이글의 주제와 맞지않는거 같아서 댓글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08/11/28 21:39
Liberal님//
전 YS에게 보다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전 IMF로 인해 엄청난 욕을 먹는 YS에게 꽤나 동정적인 편입니다. YS 역시 민주화 운동에게 있어서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IMF 사태로 인해 욕이란 욕은 다 먹는 대통령이니까요. 그리고, 87년 후보 단일화에 대해서 어느 한 쪽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제 첫 댓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YS와 DJ의 정치적 욕심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보다 더 컸기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씀드렸구요. YS가 필요도 없는데 3당 합당을 한 것이란 말이 아니고, 위에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길 수 없기에 3당 합당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정치적 욕심때문에 민주화 운동의 대표라는 명예를 저버리고 3당 합당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3당 합당의 절박함은 YS보다 민정당에게 있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당시에 민정당에서 YS나 DJ에 맞서서 경쟁력을 가질 후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YS나 DJ 양자 중에 한 명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그들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죠. 그런 측면에서 YS가 3당 합당으로 욕 먹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TK의 마땅한 대표주자라고 할 사람이 김윤환이나 박철언 전 장관 정도의 수준 밖에 없었기에 TK의 표심이 DJ와 YS란 양대 선택지 중에서 YS에 기울었을 확률이 PK의 지역 기반이 잠식 되었을 확률보다 훨씬 컸다고 보는게 맞겠지요. 그리고, 이런 측면이 3당 합당의 대상이 DJ가 되기 힘들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DJ가 3당 합당을 근본적으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의 신념때문도 있겠지만, YS만큼 3당 합당으로 인해 얻을 효과 자체가 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가 잃어버릴 호남의 표와 그가 얻을 영남의 표를 비교해 볼 때, 그가 잃어버릴 정치적 명분(민주화)만큼 그가 얻을 효과가 없었기 때문인 것도 한 이유가 될겁니다. 반면에 YS는 같은 영남권의 일원이었기에 TK의 표를 보다 쉽게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가 잃어버릴 정치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을 실행하게 만든 이유일겁니다. 3당 합당이라는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92년 대선에서 PK의 높은 지지율은 이미 87년 대선으로 인해 DJ의 호남 지역과 YS를 비롯한 영남 지역의 지역주의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겠지요. 3당 합당이 지역주의 고착화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3당 합당과 DJP연합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압니다. DJP연합은 이미 3당 합당과 같은 민주화 세력과 반 민주화 세력의 결합과 같은 충격을 가져다 주진 않았으니까요. DJP 연합 역시 정당 이념적 일치나 신념때문이 아닌 정치적 욕심(목적)을 위한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08/11/28 23:22
간단한 제 주관적인 의견을 하나 말하자면 현재도 "호남 고립화"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왜냐? 과거 대통령 선거에서 연달아 미끄러져서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회창씨가 온갖 세간의 논란거리와 뒷담화에도 불구하고 자칭 충청도 핫바지론을 설파한 자민련이 자연 소멸한지 몇년 되지 않아 재탕해 냈다는 것인데 그 인물이 이회창씨와 그와 정치적 스텐스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제2의 호남 고립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한나라당과 별개의 당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실상은 차후 대선이나 그 이후에 벌어지는 다른 총선, 지방선거에 여타의 진보세력의 약진을 철저하게 봉쇄하기 위한 터 막음으로 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의 특수한 투표성향상 아직도 지역연고나 빨갱이 컴플렉스에 적지않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몇번의 선거로 거듭나게 확인 하였던바 충청도를 보수세력의 터전으로 잡고 호남쪽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줄기를 자연스레 차단하고 잘라 버릴수 있게되어 영원히 정치권에서 소외할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수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크게보면 이회창씨가 다시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낮지만 그가 아니라도 과거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는 사람들에게 승리의 축배를 올릴수 있다면 그가(이회창) 이 한몸 다바쳐 좌익들의 준동을 막은 인물로 기억되고 싶어할수도 있겠네요.
08/11/29 00:51
글쎄요 호남이 민주당을 지지 하거나 열린우리당을 지지 하거나 모두 마찬 가지 였습니다 탄핵때는 쉽게 민주당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을 찍었고 열린우리당에 실망하자 다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여수에서는 민노당이 당선되기도 하구요
다만 호남의 표는 매우 소수 이기 때문에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표를 뭉칠 필요가 있습니다 안그러면 매우 맹렬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에 대항 할수가 없기 때문이죠 호남 입장에서 보자면 한나라당은 친일과 독재정권 그리고 매우 부패하고 심지어 IMF 까지 일으킨 나라의 중대 범죄자 집단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찍을 수가 없는 겁니다 상식선에서 정치적인 판단을 그렇게 내리기 때문 입니다
08/11/29 01:43
1988년합당당시 제1야당은 평민당이었습니다. a전국 득표수로는 고르게 2위를 차지한 곳은 민주당이였지만 의석수로는 민정당에 이어 평민당이 두번째를 차지했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1야당의 총재가 되었죠.
일명 전남북싹쓸이와 수도원 쓸이.. 당시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비록 제2 야당이지만 전국적으로 두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다는 것에 만족하겠다는 인터뷰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서 합당을 했었죠. 지역주의 머 말하자면 끝도 없지만 지역주의가 굳어져서 이익볼 세력이 어느쪽인지를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면 답은 보일 겁니다. 아닐거라고 부인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민주당이 지역주의 백번 외쳐서 단합해봐야 전라남북도 득표 다해도 끝나는 상황인걸 뻔히 알면서 지역주의를 몰고 나갈 일은 없죠. 호남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지역주의적 입장에서 몰아준 것이 아니라 민정당이 학살자의 피가 묻은 당이기에 민정당의 반대쪽, 그중에서 가장 대립을 잘 할 거 같은 당을 몰아주는 겁니다.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학살자의 피가 묻은 당이고 그 피는 자신의 가족이자 주변 사람이 흘린 피이기때문이죠.
08/11/29 06:53
yoosh6님// 3당 합당을 민정당의 필요성으로 인해 YS를 선택했다는 식으로 YS의 최대 실책 부분에 약간의 미화할 필요성은 없어 보입니다. 3당 합당은 바로 YS의 민주화 상징에 타격을 가한 부분입니다. 민정당이 필요하다 해서 YS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YS 또한 자신의 이미지에 타격을 받음에도 정치적 이득이 있기에 그 악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국 정치사에 민주화 상징이었던 YS는 스스로 3당 합당을 승인하면서 이미지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꾸 민정당이 필요해서 YS가 선택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을 안 하셨으면 합니다.
자꾸 87년 대선에 대해서만 논의가 되는데, 71년 대선은 제가 생각하는 지역주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살아보지 않아서 각종 자료에 의존하긴 하지만, 누가 먼저 시작을 했든 영호남 지역에 대한 정치적 이용은 그 당시에 시작했다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08/11/29 10:44
[NC]...TesTER님//
그건 YS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민정당이 더 급박했던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3당 합당이 YS의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거듭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당 합당에 있어서 선택의 폭이 가장 컸던 것은 YS이지, 민정당이나... JP 또는 DJ가 아닙니다. YS가 빠진 합당은 실효가치가 없기 때문에 존재하기 힘들었습니다. DJ가 정치적 신념도 밑바탕이 되었겠지만, 기본적으로 3당 합당이라는 선택의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악귀토스님// 토스희망봉사단님// 이 논리는 항상 호남 지역주의를 옹호하는데 종종 쓰이는 논리인데, 87년 당시의 YS는 결별하기는 했으나 민주화의 동료이지 부모 형제를 죽인 인간들에 속하지 않았음에도 처참한 지지율을 보여주지요. 87년 DJ와 YS의 결별로 확고하게 지역주의란게 자리잡았고 그 이후 YS가 3당 합당을 통해 군부계열과 손을 잡자 호남 지역주의를 옹호하고자 나온 논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부추긴 것은 사실이나 호남은 DJ 이외의 인물에 대한 배타성 역시 대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산업화가 진행된 정도때문에 발생되는 주민의 이동 정도와 같은 문제 때문에 동일한 비교가 타당하지는 않으나, PK와 호남에서의 DJ와 YS의 득표를 보시면 호남의 지역주의가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08/11/29 11:24
yoosh6님// 3당 합당의 이익과 신념을 비교하시는군요. 이익이 있더라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3당 합당에 대한 민정당의 급박함이나 YS의 선택 폭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YS 스스로 3당 합당에 승인을 했다는 점은 이익을 위한 신념을 저 버린 경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 입니다. YS의 이익은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겠지만요...
'결과를 가지고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DJ가 이익이 없기에 3당 합당에 선택의 폭이 없다고 보신다면 저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이렇게 말해서 '그러면 DJ가 3당 합당에 이익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물으시면 아니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지역주의 문제에 있어서 영호남에 어느 누구도 깨끗할 순 없습니다. 다만 그 원인과 과정, 결과 등을 보고 냉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너희들도 그러지 않았냐'라는 식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08/11/29 12:10
[NC]...TesTER님//
전 이익을 위해서 신념을 버린 것을 옹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위의 수많은 제 댓글에서도 그런 YS의 선택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충분히 언급했다고 생각됩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의견은 이미 제 댓글에 있음에도 '민정당이 필요해서 YS가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TesTER님입니다. DJ의 경우 이익이 없기 때문에 3당 합당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과 더불어 이익조차 없기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드린 것이고, 이건 보편적인 정치사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안의 수준이 다르나 DJ가 후일 DJP연합을 통해 정치적 신념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선택도 했다는 결과가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라고 생각됩니다. 지역주의에 관한 제 의견 역시 영호남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호남 지역분들 혹은 DJ지지자분들께서 '호남 지역주의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시기에 드린 말씀일뿐입니다.
08/11/29 12:55
yoosh6님// 알겠습니다.
다만, DJP연합과 3당 합당의 의미를 yoosh6님이 생각하는 의미와 제가 생각하는 의미의 차인 것 같습니다.
08/11/29 15:39
전 딱 한가지만 궁금합니다.
정말 87년 대선당시. DJ가 통일민주당 박차고 나와서 평화민주당 창당하면서 소위 4자필승론을 주장한거 맞나요? 이말의 참 여기저기서 나오긴 하는데, 정확히 DJ가 했다는 자료는 본적이 없어서 만약 비슷한 말이라도 했다면 지역주의에 대해서는 DJ도 할말없죠. 지역주의가 71년도에 생겼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지역주의를 만든건 DJ일 수 도 있으니까요.
08/11/30 02:13
창작과도전님//
88년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유제연씨(dj의 인척이고,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에서 중용되었읍니다. 대선 때 dj가 꽤 큰 표 차이로 3위를 한 인천 부평쪽이 지역구라서)가 평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으로 옮기면서 폭로하여 처음으로 세간에 알려졌읍니다. 동교동 지하실에서 지도를 펼치놓고 dj가 4자필승론을 설파했답니다. 아마도 야권분열로 군사독재세력의 재집권가능성에 불안해 하는 간부들을 달래려 한 것이겠지요. 재야(민통련쪽)에서는 이해찬이 4자필승론의 전도사였다고 하는 것은 소광섭씨의 책에서와 naver 검색에서 본 적이 있음니다. dj나 관계자에게 치명적 약점이 될 수도 있기에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났는데도 상세한 내용을 밝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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