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부짖은들 천사의 위계로부터 도대체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껴안는다 해도,
나는 그의 나보다 강력한 존재에 의해 스러지리라.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 낼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기에.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도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조차 태연하게
마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WER, wenn ich schriee, hörte mich denn aus der Engel
Ordnungen? und gesetzt selbst, es nähme
einer mich plötzlich ans Herz: ich verginge von seinem
stärkeren Dasein. Denn das Schöne ist nichts
als des Schrecklichen Anfang, den wir noch grade ertragen,
und wir bewundern es so, weil es gelassen verschmäht,
uns zu zerstören. Ein jeder Engel ist schreck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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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름다움'이란 천사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움'이라고 읽어도 좋다. 그렇게 읽으면 위 구절들은 전통적인 철학적 미론과는 완연히 다른 독특한 미론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이 무서움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얼핏 숭고함을 아름다움으로 재기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칸트의 경우 숭고함의 경험의 다른 요소인 찬탄은 결국 인간의 자기 찬탄인 것으로 드러난다. 반면 릴케가 말하는 찬탄은 천사에 대한 찬탄이다. 정확히는 우리보다 강력한 존재가 우리에게 베푸는 관용에 대한 찬탄이다. 그 관용은 무슨 인정같은 것이 아니다. 굳이 파멸시키는 수고를 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인간을 하찮게 본다는 것이다. 그 태연한 마다함, 인간이 올려다볼 수만 있을 따름인 그 절대적 고귀함/거만함이 멋있다는 것이다(그것은 물론 동시에 무서운 것이다). 릴케의 미론은 역시 숭고함을 아름다움으로 재기술한 아도르노의 미론과도 다르다. 아도르노에게서도 숭고함의 경험의 실체는 인간의 부정적 자기 인식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인식은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가리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릴케와는 달리)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성된 사실로 본다. 역사적으로 생성된 것은 역사적으로 소멸될 수 있다(물론 언젠가 온전한 적이 있었는데 타락했고 이제는 그 온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천사와 같음'이 그 실현이 절실하게 희구되어야 하는 인간의 온전함의 내용인 것도 아니다. 그 점에서 아도르노는 (릴케와는 달리) 유물론자이다. 인간은 끝끝내 천사와 같아질 수는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 '수 있음'은 너무나도 약하게 울린다. 인간은 천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행복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다. 따라서 릴케와 아도르노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별 (현실적)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인간이 아무리 행복해지더라도 그 행복은 죽음을 모르는 안온하게 보호된 유년의 삶에서만 가능한 행복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 (이런 의미의 아름다운 것은 사랑스러운것, 예쁜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앞에서 어떤 위축을, 어떤 무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천사와 같아질 수 없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는 늘 어떤 인간들에게는 불안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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